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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샬롬! 아름다운 도시여
by 서나영2024-01-11

나는 매일 아침 도시 안 오래된 아파트숲 속 좁은 공간에서 눈을 뜬다. 이 도시는 한민족이 역사를 지나며 일군 ‘한강의 기적’을 자랑하는 땅이자, 기술 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문화강국의 주역을 이룬 공간이다.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인터넷 속도로 손가락 터치 한 번에 음식과 생필품이 배달되고, 식료품은 신선함을 위해 새벽 배송을 고집하는 편리한 도시다. 


저명한 미국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이 세계가 낳은 가장 중요한 불행과 불의 세 가지 중에 “추한 도시”를 언급했다. 그는 공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세대에 탄식하며 “도시의 미학”에 무관심한 세대를 불행한 세대로 보았다. 물리적 실재, 즉 이 땅과 자연과 우리의 실재 공간 속에 내재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것인데, 온전한 샬롬을 위해서는 “기쁨과 희락”의 요소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감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데, 그 감각은 오늘날 모던한 세련미나 최첨단 기술로부터 느껴지는 편리한 느낌이 아닌, 칼뱅이 말했던 절제된 우아함이 있던 인간 생활 방식과 장소의 아름다움이라고 독자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과연 이 시대는 말과 마차가 다니던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그리워하는 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와 여러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대단했다고,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현대 건축술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 건설로 인해 도시가 한껏 추해졌다고 확신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미학관에 대해 말이다.


현재 몸담고 있는 도시의 추함에 대해 묵상하자면 끝이 없이 써내려갈 수 있다. 홍수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반지하의 가난한 삶들, 배달의 민족이라는 훈장 뒤에 하루가 멀다하고 듣는 배달기사들의 불의한 사고들,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뉴스들, 믿지 못할 청년 실업률 및 자살률, 그로 인한 미혼율과 저출산 문제, 세계 최고를 찍은 노인 불행 지수와 자살률 등등, 이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의 아픈 자식들이다.


고도로 발달된 이 도시에서 이런 추함의 현상을 미학과 연결해 본다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살게 하는 형식과 관련 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형식과 인간의 삶은 직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남긴 말을 재해석하자면, 도시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는 거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넘어, 생활방식을 이끌고 가며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월터스토프가 말한 “도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지각할 수 있는 재료에 심겨진 가치”이며 하나의 예술적 건축물처럼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샬롬을 미학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어떤 기준의 미학관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샬롬을 ‘기쁘고 행복하며 질서정연함 속에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해할 때, 내가 밟고 있는 공간의 미학을 어떻게 기준할 것인가? 그 기준을 탁월한 예술과 일치되는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둘 것인가? 이미 많은 도시가 심미적 즐거움을 위해 설치예술을 통해 환경예술, 대지예술 등등의 새로운 용어가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추함으로 인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계몽주의 이전 시대, 즉 기계화 되기 전의 자연과 친밀하고 자동차가 아닌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좁은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둘 것인가? 성경 속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려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기술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는 말과 나귀가 다니는 자연과 친밀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자 마자 통탄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재가 도시의 불행임을 암시하신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도시가 눈에 들어오자, 예수께서 그 도시를 보고 우셨다. “네게 유익한 모든 것을 오는 네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앞으로 네 원수들이 포병대를 몰고 와서 너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너와 네 아이들을 바닥에 메어칠 것이다. 돌 하나도 그대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가, 너를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을 네가 알아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눅 19:41-44).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도시와 연관된 공간미학의 고민은 정확히 성경적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목적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운명은 에덴동산과 같이 대자연과의 화합과 일치를 고집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꿈꾸게 되는 “새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삶이다(계 3:12, 21:10). 이는 타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새로운 기쁨의 도시에 사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예루살렘 도시는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을” 뿐 아니라 벽옥으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정금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서 새 몸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백성으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요한계시록 21장). 성경은 주의 백성이 마침내 아름다움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진짜 삶을 살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곳이 ‘샬롬의 도시 그 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보석과 정금 때문이 아니다. 인격적 생활방식 때문만도 아니다. 샬롬의 진짜 이유는 보좌에 앉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왕 되시고 그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복할 뿐 아니라 찬양하고 감탄하며 경외하는 삶의 연속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역작 센터처치에서 강조하는 ‘도시 사역’에 관한 설명은, 철저하게 도시의 샬롬을 이루는 사역적 비전을 세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 샬롬의 기준은 ‘복음’이며, 이 ‘복음’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부터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능력의 이름이며, 모든 추함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의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재발견 되어야 하는 이름이며, 끝도 없이 아름답고 정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름이다.


신이 없이도 잘살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인 도시에서, 하나님을 뺀 온갖 인본주의적 선과 정의를 부르짖는 도시에서, 인간을 이용하고 등급을 매겨 비인격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세련됨이라고 착각하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추함을 예언한 학자들의 미학관을 답습하고 다음세대에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도시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회피하고 숨어서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나의 경우에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도무지 칼뱅의 주장대로 평생 시편가만을 부르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시편가는 음악 안의 클라이막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로 인한 감정의 고양을 방지한 밋밋한 선율 위에 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다. 칼뱅이 그렇게 경계하고 금지했던 수많은 신앙고백의 찬송과 아름다운 음악들이 귀에 즐겁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어도 나는 이미 칼뱅의 예배음악관에 동의할 수 있는 정서를 갖기엔 글렀다. 


그렇지만 칼뱅이 삶으로 말했던 미학관 이면의 진지하고 엄격했던 자세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마음을 다해 배우고 싶다. 편리함이라는 우상, 화려함과 인기를 갈망하는 우상, 많음과 큰 것에 최고가치를 두는 온갖 우상으로부터 미혹되고 싶지 않다. 날아가는 새를 포착해 정교하게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말씀 안에 진지했던 그 미학관으로 세상을 포착해 정확하게 분별해서 읽고 싶다. 그것이 팀켈러 목사가 말한 ‘문화적 상황화’의 이상이자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신도시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지인을 만나 나눈 대화 중 중요했던 주제는 다름아닌 “교회의 주차장 크기”였다. 한 대형교회가 그 신도시에 지교회를 세우며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편리한 주차장을 건설했고, 많은 사람들이 단시간에 몰려 수적으로 부흥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흥의 이유가 단지 최고시설의 주차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교회를 정할 때 주차장의 편리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소문이 실재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율법 속 제사를 폐하시고 “영과 진리로”(요 4:23) 예배하라고 새롭게 명하셨지만, 한번도 편리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도시가 주는 형식 안에서 그저 도시가 추구하는 기준대로 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심각성은 크다. 


오늘의 도시가 섬기는 신은 힘과 권력이고, 돈과 개인의 이기적 안위이며, 화려함과 인기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말한, 땅에서 올라온 미혹하게 하는 짐승(계 13:11)과 같이 새끼양처럼 두 뿔을 가져 어린양 그리스도와 비슷한 선한 차림을 한 ‘거짓의 영’일 것이다. 미혹 당하는 자는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잘살아 보자는 도시의 슬로건에서, ‘오직 예수’라고 외치면 무식하고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아름다운 도시에 대한 꿈을 꿔야 한다. 도시에 기쁨과 샬롬이 임하는 비전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연습해야 한다. 절대적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도시 속에서 그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힘들어도 반드시 최우선으로 바꿔야 하며, 매일매일 흐트러져도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정렬해야 한다.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불행이며 빈곤일 수밖에 없다”는 월터스토프의 말은 교회가 꼭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각자 밟고 서 있는 도시 속 한 평이라도 변혁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방향은, 단지 평화와 공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미리 닦고 예비하며 보수하는 일이다. 복음의 길을 닦는 일이다. ‘복음의 도시’를 이룩할 그날까지, 용기 내며 걷는 작은 한 걸음의 2024년이 되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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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나영

서나영 박사는 미국 남침례신학교(SBTS)에서 교회음악(MM)과 신학(M.Div.equi.)을 공부하고, 기독교예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스펄전 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에서 문화예술파트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