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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매일 큐티

말씀 QT_갈등의 이유
2020-10-26

사무엘하 14장 21-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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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관계의 실타래


잘못된 자기인식은 관계를 일그러뜨린다. 우리는 종종 자신과 타인에게 실망한다. 관계의 어려움은 풀면 풀수록 엉켜버리는 실타래와 같다.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 혹은 상대방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가 아닐까?


다윗은 요압에게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한다(21절). 하지만 돌아온 압살롬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지위는 회복되지 않는다. 다윗은 아들의 활동 범위를 사저 안에 한정함으로써 그를 통제한다(21-24절). 압살롬은 새장 속의 새가 되었다(24, 32절). 그는 2년 동안 갇혀 지내며 분노했다(28절). 몇 번이나 다윗 왕을 만나고 싶었지만 만남이 거절되었다(29절). 급기야 사람을 보내 요압 장군의 밭에 불을 지른다(30절). 이렇게 살 바엔 죽는 것이 더 나으니 왕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다(32절).


자신에 대한 실망, 타인에 대한 분노 이 두 가지 감정이 다윗과 압살롬 모두에게 있었다. 압살롬의 머리카락 일화는 자신에게 실망했던 자가 타인을 향해 분노하기 시작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25-26절은 왜 다윗이 압살롬의 대외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잘생겼고 남자다운 면모가 많았다. 그가 해마다 머리털을 한 번씩 잘라내면, 그 무게가 2.3kg이었다(26절). 머리털이 굵고 힘 있게 자란다는 것은 남자다운 힘이 대단하다는 표시다(Delitzsch). 이것은 그가 대중에게 인기 있었던 비결이었다. 다윗은 아직 그의 흉악한 범죄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온 그를 대중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편, 유대인 학자들은 그가 머리카락을 기르고 무게를 재었던 행위는 나르시즘적 모습이었다고 보았다(TJSB). 그런 의미에서 25-26절은 압살롬의 나르시즘적 독백이라 봐도 무방해 보인다. 상상해보라. 자유를 만끽하는 꿈속에서 깨고 난 죄수의 모습을. 28절부터 이어지는 그의 분노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 일은 나에게 부당해!”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를 완전히 잊어 버렸다.


관계의 실마리


마틴 로이드 존스는 아담의 ‘원죄’가 후손에게 유전된 결과 ‘원오염’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첫째 ‘전적타락’이며, 둘째 ‘전적무능’이다. 전자는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후자는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죄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무한한 공급이 끊겼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그래서 이웃과의 갈등을 낳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은 우리가 자랑하는 선이 겨우 “더러운 헌옷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사 64:6). 그러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의인이 하나도 없다(롬 3:10).”


기독교인의 자기인식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28-33절 까지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가서 화해의 키스를 얻는 모습을 그린다. 주목할 점은 압살롬이 ‘다윗’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한 번도 ‘아버지’라는 호칭이 사용되지 않는다. ‘왕’이라는 표현만 반복된다. 이것은 두 사람의 화해가 순전히 형식적이 될 것을 암시한다. 이번의 화해로 두 사람은 모두 잠시 평화를 얻지만, 곧 재앙을 맞게 된다. 문제 앞에서 발견된 나의 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은 자의 결말은 자기 의와 복수심으로 타인과 자신을 모두 불태운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죄인은 의의 전가를 통해서 의로워진다.”고 말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가되는 의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혹시 최근 억울함이 있는가? 누군가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가? 애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사 53:6).” 감옥 안에 있는 죄수의 신분이 다르지 않다.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안에 나와 우리의 실체적 진실이 있다. 이제 헌 옷 조각에 불과한 더러운 의로 다투지 말자.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전가하시는 새로운 의의 옷을 입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내 안에 누구를 용서할 힘이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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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8시 말씀 QT가 현대인들이 성경을 쉽고 감동적으로 읽도록 제작한 오디오 성경 '드라마 바이블'과 함께 합니다.

    해당 본문 듣기를 클릭하면 본문 말씀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성자:김병완 목사(우리가꿈꾸는교회)
출처 : Next세대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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