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가 남긴 마지막 글: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by Trevin Wax2023-12-16

이전에 쓴 칼럼 둘(아메리칸드림은 저절로 불이 켜졌을까?자유와 한계, 행복에 대한 ‘권리’)에서 나는 아메리칸드림, 행복 추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자유를 살펴보았다. 


C. S. 루이스는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Saturday Evening Post에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라는 논평을 기고함으로써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영원한 법칙에 대한 순종과 ‘행복’의 분리라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성적인 행복’이라는 권리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행복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뿐 아니라, 결국에는 인류 문명의 본질까지 필연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 준다. 다음은 루이스의 글 전문이다. 


C. S. 루이스: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중요한 건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라고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A는 B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고 이혼했고, B도 A와 결혼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이혼했다. A와 B가 서로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또 건강이나 수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앞으로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 두 사람이 과거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했다. B의 경우에, 그녀는 한 때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전쟁에서 몸이 망가졌고, 그 결과 남자로서 능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직장까지 잃고 말았다.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삶은 애초에 B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불쌍한 건 A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외모가 망가졌다. 더불어서 한때 밝게 빛나던 활력도 없어졌다. 여러 번의 출산과 또 오랫동안 A를 간병하는 중에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A가 마치 단물 다 짜 먹은 마른 오렌지를 내다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녀의 자살은 그에게도 끔찍한 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젠가 직접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가 말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딱 한 번 오는 기회인데, 나는 그걸 놓칠 수 없었어.” 


‘행복할 권리’라는 건 도대체 뭘까? 


나는 그날 ‘행복할 권리’라는 말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그와 헤어졌다.


얼핏 보면, 이 말은 마치 행운을 누릴 권리만큼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저런 도덕주의 학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관계없이, 행복이나 불행이란 건 인간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 행복할 권리라는 말은 내 키가 180이 넘는 권리, 백만장자를 아버지로 갖는 권리, 소풍 가는 날에는 항상 날씨가 좋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나는 사회의 법으로 보장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이 사회가 자유를 주기에, 나는 공공 도로를 사용해서 여행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로에 “공공”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이다. 나는 또한 권리(right)를 법이 보장하는 요구이자 그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지워지는 의무로도 이해한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백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 내게 백 달러를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A가 아내를 버리고 이웃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을 법이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밀히 말해서 A에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뿐이지, 거기에 무슨 행복이니 하는 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행복과 자연법


물론 지금까지 말한 게 클레어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는 법적 권리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있다는 게 클레어의 말이었다. 즉, 클레어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로티우스, 후커, 로크의 스타일을 따르는 고전적 도덕주의자이다. 물론 그건 그녀가 자기 말을 곱씹었을 때 그렇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국가가 보장하는 법 뒤에 자연법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모든 문명의 기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없다면, 국가의 실정법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된다. 판단할 기준이 없기에 비판도 할 수 없게 된다. 


클레어의 격언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의 유래는 8월 선언(the august declaration)이다. 모든 문명인, 이건 특히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말로, 인간의 권리 중 하나가 아예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요점에 도달했다.


8월 선언을 만든 사람들은 그럼 무슨 의미로 쓴 것일까? 


자연법의 의미


그들이 의미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고 싶더라도 살인, 강간, 강도, 반역, 사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아예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의미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법이 궁극적으로 승인하고 나아가서 국가의 법까지 승인하는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권리를 가지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식의, 격언의 원래 의미를 축소하는 동어반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역사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동어반복이 항상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은 아니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정치 원칙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 도전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 개혁 법안 이전의 영국, 그리고 부르봉 프랑스에 던져졌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수단이 누구에게나 합법적이어야 하며 특정 계층, 계급, 지위 또는 종교의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또 어느 당에서도 이 사실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세기였던 만큼, 이것을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러나 어떤 수단이 “합법적”인지, 즉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연법에 의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또는 특정 국가의 입법부에 의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나는 클레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제한의 “행복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적인’ 행복


우선 나는 클레어가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건 아주 단순한 ‘성적인 행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클레어와 같은 여성들이 결코 다른 의미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클레어가 다른 종류의 “권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에 있어 다소 좌파적인 그녀이기에 만약에 누군가가 오로지 돈을 버는 데에서만 행복을 찾는 무자비한 살인마 재벌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크게 분개했을 것이다. 그녀는 또한 광적인 금주론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술에 취하면 행복하기에 알코올 중독자로 산다는 사람을 변명하는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클레어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 특히 여자 친구들은 말 옮기기 좋아하는 클레어의 귀를 틀어막으면 자신들의 행복이 눈에 띄게 커질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자, 클레어가 과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이론에 친구들의 이런 바람까지도 적용할까?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거다. 


사실 클레어는 지난 40여년 동안 서구 세계 전체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진보 진영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거야? 다른 모든 충동을 다루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다루자고”라며 말하곤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들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들이 사실상 정반대의 의미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문명이 다루는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충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섹스 충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충동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인정한다. 자기 보호 본능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비겁함이라고 부른다. 다 가지고 싶은 충동은 탐욕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경계를 서는 보초라면 자고 싶은 충동도 참아야 한다. 그러나 목표가 오로지 “침대 위 벌거벗은 네 개의 발”로 바뀌는 순간, 모든 불친절과 믿음의 배신까지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것 같다. 


이건 마치 과일을 훔치는 게 잘못된 일이지만, 그게 복숭아인 경우에는 괜찮다는 식의 이상한 도덕성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런 견해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의 정당성과 아름다움, 신성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성을 나쁜 무언가 또는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청교도의 편견을 품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혐의를 부인한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 황금의 아프로디테… 키프로스의 성모…. 나는 당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복숭아를 훔치는 소년을 반대한다고, 내가 복숭아 전부를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소년들 전부를 다? 내가 반대하는 건 단지 도둑질일 수도 있다.


성적 충동과 터무니없는 특권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A에게 아내를 버릴 ‘권리’가 있는가를 일종의 ‘성도덕’에 관한 문제 중 하나로 간주함으로 실제 상황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과수원 강탈이 ‘과일 도덕’이라는 특별한 도덕에 대한 위반이 아니다. 이는 정직성에 대한 위반이다. A의 행동은 (엄숙한 약속에 대한) 선의, (깊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공통되는 인간성에 대한 위반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적 충동은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성적 동기가 포함되는 순간, 다른 경우에서라면 무자비하고 비열한 배신이며 불의하다고 비난받았을 모든 종류의 행동까지도 다 용인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섹스에 이런 식의 특권을 부여할 타당한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


성 충동은 강하고 에로틱한 열정이라는 본질을 가진다. 이것은 일시적인 식욕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감정과는 달리 더 큰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욕망은 무슨 약속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게 대단한 건 아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또한 빈번한 황홀경 뿐만 아니라 안정되고 결실을 맺으며 뿌리 깊은 평생의 행복까지 얻을 것이라는 거의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이 경우에 모든 것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남은 인생을 헛되게 살 거 같은 위기감마저 느낀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랑의 약속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어른이 되면 성적인 열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친구들이 떠버리는 사랑에 대한 끝없는 허세 정도는 아주 쉽게 무시한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건 제외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이 지속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꼭 시작할 때 했던 약속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두 사람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은 건 그들이 꼭 훌륭한 연인이어서가 아니라, 좀 거칠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 통제하고, 신실하고, 공정하고, 상호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동의 모든 일반적인 규칙을 대체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적인) 행복에 대한 권리”를 확립한다면, 그건 평소의 경험이 그 사실을 증언해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 열정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것을 한 없이 소중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행동은 실제로 비참함과 타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행복이라는 대상은 여전히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A와 B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 년 정도 지나면 A가 옛 아내를 버렸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B를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또 인생의 전부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진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A가 자신을 향해서 느끼는 동정심은 그로 인해서 불행해질 여자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없기에 가능하다. 


성적인 행복 위에 세워진 사회


살펴볼 게 두 가지 더 남았다. 


하나는 이것이다. 부부간 불륜이 용인되는 사회는 결국 여성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몇몇 남자들의 노래와 풍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보다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요가 만든 결과이다. 따라서 난잡한 행위가 만연한 곳에서 여자는 주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또한 가정의 행복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를 쉽게 사로잡았던 바로 그 특성, 여자의 아름다움은 성숙함을 지나면서 매년 감소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도록 만든 내적인 특성에 있어서는 그 어떤 감소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할 건, 남자의 외모에 관해서 여자는 단 십 원어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자비하고 난잡한 전쟁에서 여자는 이중의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아무리 더 높은 지분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여자는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점점 더 야박해지는 여자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는 도덕주의자를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두 번째로, ‘행복에 대한 권리’가 주로 성적 충동에 대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치명적인 원리라고 해도 일단 특정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건 조만간 우리 삶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 개인 뿐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모든 충동에까지도 백지 위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그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라는 부사를 덧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원제: C. S. Lewis’s Last Written Word: We Have No Right to Happines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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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revin Wax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