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신학을 위한 좋은 출발
by 김선일2023-12-15

세계 3대 전력회사 AES의 최고경영자였던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그 동안 모은 재산으로 겨자씨재단(Mustard Seed Foundation)을 세웠는데,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의 도시선교 지원, 그리스도인 인재 장학 지원, 그리고 일의 신학 프로그램 지원 등에 해마다 이삼백 만 달러를 기부해 왔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신학대학원에서도 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을 정식 교과목으로 개설하고 학생들의 등록금과 도서비를 보조해 주었다. 일주일간 집중 수업으로 개설된 이 과목에는 일의 신학과 리더십 연구로 특화된 미국의 기독교대학원인 바키대학원대학교(Bakke Graduate University)에서 강사를 파견한다. 전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의 신학 프로그램이 개설됐는데, 한국은 주로 신학교들이 지원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인들에게 목회자가 미치는 영향력이 높은 점을 감안할 때, 신학생 때부터 교인들의 주중 일터 생활에 대한 신학적 안목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


일의 신학 수업에서 중요하게 보는 과제 하나가 일터의 그리스도인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업을 조율하던 나는 이 과제를 건전하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기업을 탐방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문의해서 그동안 알려진 그리스도인이 운영하는 기업들 외에 최근에 새롭게 떠오르는 주목할 만한 기업들 몇 곳을 알아 놨다. 주일성수와 정직한 납세 등으로 기독교적 모범을 보인 회사들뿐 아니라, 경영 그 자체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혁신과 창의성을 도모하는 기업들이었다. 학생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해당 기업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게 했다. 그렇게 학생들은 일터 그리스도인 인터뷰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했다. 


미국에서 파견된 교수는 학생들의 모든 발표를 듣고 수고했다며 칭찬한 뒤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멀리 힘들게 탐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과제의 목적은 훌륭한 기독교 기업을 탐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전문인과 인터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학생 여러분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유명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친 그리스도인 전문인을 일부러 찾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에서 경비일 하시는 분이 교회에 다니신다면 그런 분이 좋은 인터뷰 대상자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교회 청년도 적합한 대상자고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과 신앙이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지, 교회와 목회자로부터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가입니다.” 꽤 참신한 그리스도인 기업들을 발굴해서 알게 해줬다며 나름 흡족했던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일의 신학을 구상하면서 모범적이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기업인들부터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인생의 문제와 해법을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습관에 익숙했던 것인가?’ 


이 일을 겪은 뒤 일의 신학에 접근하는 내 관점은 변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찾아서 일터 사역의 실체를 제시하려던 방식을 재고해야 했다. 일의 신학은 우리의 일상과 멀찍이 떨어진, 선망할 만한 기독교적 사례를 찾는 작업이 아니다. 일의 신학은 우리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일’이라는 관점에서 관찰하지도, 성찰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일의 신학은 ‘일’이라고 내놓을 만한 정규직, 전문직, 혹은 기업경영에서 신앙의 모델을 찾는 것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씨름하는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


나 자신 또한 수년 전부터 일의 신학을 신학교 교과목에 도입하고, 일터 사역의 필요성을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강조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통상 알려진 ‘일’의 개념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직업, 또는 일자리와 자연스럽게 연관시킨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은 곧 상대의 직업을 묻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도 급여를 받는 고정된 일자리여야 ‘일’을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은 자칫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 왔던 여성들, 그것도 전업주부이거나 경력 단절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아울러 일의 신학은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성년의 자녀들과도 접점이 약해 보인다. 일은 바깥 어딘가에서(out there)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몇몇 교회에서는 일터 사역을 하면서 일의 개념을 확장하여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상과 가정에서의 모든 일을 포함하였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업주부 여성들이 많은 봉사를 도맡아 왔다. 그러나 일터 사역은 전업주부나 미성년자들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제는 단순히 일터 사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의 신학을 더욱 근원적으로 성찰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 일의 신학을 일상과 가족의 차원에서 근본부터 다시 접근해야 한다. 일과 병행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 자녀 양육, 일상의 관계 등이 일의 신학을 위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급여를 받은 일이든 아니든, 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일과 더불어 살아간다. 살림살이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의 관계, 친구들을 사귀며 공동체를 이루는 일, 사람을 섬기는 각종 봉사활동,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취미로 식물을 재배하는 일 등 모두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향하여 의미 있게 에너지를 활용하는 일이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일이란 정신적, 혹은 육체적 에너지를 방출해서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개인의 성취를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261). 일의 유형이나 범위가 중요하지 않다. 일은 직업이나 기업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 일상에서 누구나 참여하고 경험하는 실체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올리고 일의 신학을 말하려면 전문직이나 기업경영에서 모범을 찾는 습관적 행태는 근대적이고, 엘리트적인 일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미래 사회로 나아갈수록 AI 같은 디지털 문명이 전통적 인간 노동을 급속도로 대치할 텐데, 그때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일을 주로 수익을 창출하는 직업이나 활동으로 국한하던 기존 인식에 변화는 불가피하다. 전통적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을 돌보며 공공선과 관계된 일들은 계속 늘어난다는 점을 주목한다(제러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 사회, 2019). 미래의 일은 재화나 용역을 통한 수익 창출 범위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 돌봄이나 공익적 활동으로 확대될 전망이 높다. 


일의 신학을 모범적인 기독교 전문인이나 선한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기업을 발굴하려는 태도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일의 신학은 고도를 낮춰야 한다. 일의 신학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을 위한 신학이다. 인생 대부분을 교회와 학교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일의 신학은 엄중한 현실적 고민이자 과제다. 교회와 신학교에도 일터의 문화와 위계질서에 대한 고민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아와 살림만 해왔던 주부들에게도 일의 신학은 중요하다. 자녀들이 자기들의 전공을 선택하고 일을 찾아갈 때 일의 신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이웃들도 일을 하며, 일 가운데 살아간다. 일의 신학은  평범한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원래의 의도된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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