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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오늘의 교회가 갖춰야 할 새로운 앞마당

포치에서 나누는 레모네이드 한 잔: 탈 기독교 사회에서 복음 전하기 1-3

by Tim Keller2023-04-30

이 글은 문화로서의 기독교(cultural Christianity)마저 퇴색하는 서구 세계에서 복음을 계속해서 나눌 방법을 모색하는 2부작의 첫 번째입니다. 


1-1. 교회 앞마당이 사라졌다

• 포치의 중요성

• 앞마당의 종말

1-2. 앞마당의 상실: 미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 미국이라는 “예외”

• 미국 교회의 실패

1-3. 오늘의 교회가 갖춰야 할 새로운 포치

• 포치를 만드는 교회들

• 포치와 “전복적 성취” 

• 일반 은총의 기초 위에서 


포치(porch): 건물의 입구나 현관에 지붕을 갖추어 잠시 차를 대거나 사람들이 비바람을 피하도록 만든 곳. 출처_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포치를 만드는 교회들  


해결책은 단 하나다. 미국 교회는 교회의 포치를 만들기 위해서 더 이상 문화에 의존할 수 없다. 교인들은 이제 아직 “집” 안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수 있는 포치를 그들의 교회에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외부인을 준비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교회의 포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포치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인 교회 예배와 교육 외에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기독교에 노출되는 장소를 설명한다. 내가 “장소”라고 말할 때, 그것은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일련의 관계이다. 이 공간에서 불신자는 자신이 침입자나 용인된 방관자, “보호관찰자”가 아니라, 사랑받고 완전히 받아들여진 “인정받은 참여자”라고 느낀다.


포치에서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꾸준히 기독교에 노출된다. (1) 그들이 기독교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별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범이 될 때도 그렇게 될 것이고, 또한 지역 사회에서의 봉사(가난한 사람을 돌봄), 예술(문학, 음악, 극장), 교육(기독교 학교)을 통해 기독교가 가시적으로 드러날 때도 가능하다. (2)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질문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공간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의 의심과 질문에 대해 진심으로, 참을성 있게 경청하고, 또 겸손한 마음과 사려 깊은 태도로 응답해야 한다. 물론 질문은 양방향으로 진행된다. 포치에서,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하고 문화적 내러티브—우리는 비관용에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와 “항상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를 끈기 있게 검증하게 된다. (3)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기독교가 (그리스도인의 내부 전문 용어 대신에) 그들의 언어와 어휘로 제시되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그들에게 제시하는 답이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을 충족시킬 때,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직관과 믿음보다 더 잘 그들의 가장 큰 포부와 희망을 채워줄 때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을 모두 공유하는 교회의 포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공된다. 오늘은 네 가지만 소개하겠다. (다음 글에서 더 많은 사례와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겠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스위스에 있던 최초의 라브리 센터는 유럽의 젊은 비신자들이 와서 신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깊은 환대를 경험하고 믿음과 의심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 근처에 있는 “기독교 연구 센터”가 이러한 기능을 한다.


학문적 우수성으로 지역 사회에서 큰 평판을 얻고 특정 교회에 공식으로 또는 비공식으로 소속된 기독교 학교는 자녀를 그곳에 보내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믿지 않는 많은 부모를 위한 교회의 포치가 될 수 있다.


저렴한 주택을 짓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다른 필요를 채워주는 봉사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이, 특히 특정 교회가 주관할 때, 꾸준히 자원봉사를 하는 비신자에게는 교회의 포치가 될 수 있다.


소그룹 독서 클럽, 성경 공부, 또는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비신자인 여타 학습 과정이 교회의 포치 역할을 할 수 있다.


원래 교회의 포치는 (신약에서 볼 수 있듯이) 순전한 마음으로 환대하는 기독교 가정이었다. 그곳에서는 믿지 않는 이웃과 동료가 끊임없이 초대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알게 모르게 모범이 되고 또 토론되었다. 


포치와 “전복적 성취”  


유능한 교회 포치의 주요 표시의 하나는 “전복적 성취”(subversive fulfillment)라는 개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신자가 가진 좋은 가치, 헌신, 열망에 대한 깊은 존경 및 인정(“성취”)과 더불어 그들이 가진 비판과 불신앙과 관련해서는 명확한 대결(“전복”)의 균형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문화는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가족에 대한 복종, 국가권력에 대한 사회주의적 믿음, 시장에 대한 자본주의적 믿음, 또는 국가, 혈통,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인기영합주의의 믿음 등, 선하지만 본질적으로 타락한 피조물로부터 절대자(가짜 신 또는 가짜 구주)를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가 기본적인 인간의 갈망과 염원을 채워준다는 사실을 다른 종교와 세계관의 구성원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갈망의 충족을 추구하는 모든 문화 속에 있는 거짓 우상을 비판해야 한다. “전복적 성취”는 혼합주의와 부적실성(irrelevance)이라는 쌍둥이 오류를 피한다. 일반적인 죄뿐 아니라 문화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우상 숭배의 형태도 반드시 고발되어야만 한다. 구원은 단지 선포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문화가 만들어낸 우상이 채워줄 것이라고 잘못 전해진 바로 그 희망을 성취하는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 


댄 스트레인지는 전복적 성취를 기술적인 용어이자 복음 소통의 전략으로 대중화하고 장려했다.[9] 즉, 바르게 전파된 복음은 대항할 뿐 아니라 끌어당긴다. 단지 호소하고 강조할 뿐만 아니라, 기분을 상하게도 한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삶의 줄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피엔딩에 이를 것입니다.” 전복적 성취는 긍정적인 동시에 모순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도전하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용어를 쓴다. 그리고 복음적 조건에서 그들에게 모든 인간의 마음이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다. 즉 고통이 없앨 수 없는 삶의 의미, 상황에 근거하지 않은 만족, 사랑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는 자유, 당신의 자아를 회피하고, 짓밟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도록 하는 진정한 정체성, 당신을 새로운 압제자로 만들지 않는 정의의 근거, 상대주의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리고 당신이 어떤 어려움에도 침착하게 직면할 수 있도록 소망, 심지어 죽음까지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교회의 포치에서 우리가 불신자의 존경을 얻고 그들의 믿음 중 일부를 확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10] 우리는 단순히 “우리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믿음에 옳은 부분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과 이와 같은 질문으로 논쟁한다. “당신이 정말로 그 사실을 믿는 게 맞는다면, 왜 그 믿음에 일관성이 없습니까?” 그런 다음 우리는 그들이 찾는 것을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끌어들인다. 


공공 영역에서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라, 진실을 더 크고 분명하게 선포하라, 설득하려고 하지도 말고, 기독교의 타당성 또는 매력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말라. 이런 요구를 하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교도들과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남겨 두셨다고 사도행전 14:15-17에서 말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 17:23-31에서는 이교도 철학자들의 저술이 주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상 숭배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긍정하지만 비판하며, 또 존중하지만 맞선다. 


일반 은총의 기초 위에서  


이 모든 것은 “일반 은총”의 교리, 즉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모든 문화에 진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주심으로써 세상의 악과 어둠을 억제하신다는 교리를 전제한다.[11] 


어떤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 탈 기독교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초가 되는 믿음, 예를 들어 하나님과 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맞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특정 교리에 대한 명백한 동의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롬 1:18). 아무도 그 지식을 완전하게 억제할 수는 없다. 어떤 진실은 언제나 비집고 들어간다. 


그래서 오래된 문화의 앞마당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도 종교적 의식을 가졌다. 그들은 하나님과 천국, 십계명을 도덕적 절대 신앙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인은 하나님이나 내세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과학적이고 물질적인 설명이 가능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가 믿는 진리에 기초하여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도덕은 단지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들은 여전히 일종의 종교적 무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대부분 세속적인 사람이 경험하는 이런 현상을 ‘교차 압력’(cross pressures)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특정 수준에서는 자신의 세계관을 믿는다. 그러나 그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수준이 있다는 직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또한 이 세상을 뛰어넘는 어떤 아름다움, 말하자면 “초월”에 대한 덧없는 감각이 있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험도 단지 생존과 DNA 전달을 위해 우리 뇌에서 개발된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에 근거한 설명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런 설명을 진리로 믿고 살 수는 없다. 그들은 모든 도덕이 상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정의에 대한 도덕적 이상은 결코 상대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도덕적 출처가 부족하다. 그들은 또한 자신과 자신의 이익보다 더 큰 무언가에 뿌리를 둔 의미와 정체성의 필요성도 느낀다. 


많이 교육받고 지식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앞선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 나열된 불일치로 하나의 변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에게는 “하나님이 영혼에 만든 구멍”에 해당하는 의미, 아름다움, 사랑, 진실,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는 단지 논쟁거리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다. 교회의 포치에서 그들은 기독교가 어떻게 이 모든 문제에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원을 제공하는지 보게 된다. 


그러나 포치에서 우리는 단지 긍정하고 성취할 뿐만 아니라, 불신자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믿음에 도전하고 반박한다. 포치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제안과 혜택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특정 문화가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믿음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이뤄지기에 값비싼 비용과 희생하는 삶을 수반한다. 


우리가 (문화를 고려할 때 따라오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우, 얼마든지 불신자를 믿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진리라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그들이 보기에 개인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 지역과 같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박해받는 교회는 어떤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적어도 사회적 배척을 가져오고 최악의 경우 투옥과 죽음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가? 기독교가 현세적 삶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가? 전혀 아니다. 아니, 그럼 그들은 왜 고통을 초래하는 기독교 믿음을 버리지 않는 걸까? 진리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잠깐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삶에 유익을 주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따라서 교회의 포치에서 우리가 전파하는 게 단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기독교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과 그 진리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그들을 도전해야 한다. 


결론 


탈 기독교 문화 시대를 사는 교회는 포치가 필요하다. 어떤 교회에서 포치는 크고 형식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작고 비공식적일 수도 있다. 적용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포치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내용과 다양한 사례를 원할 것이다. 바로 그 정보를 주기 위해서 나는 한 번 더 글을 쓸 것이다. 




9. Daniel Strange, “For Their Rock Is Not as Our Rock: The Gospel as the ‘Subversive Fulfillment’ of the Religious Other.”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56/2 (2013) 379-95. See also Dan Strange, Plugged In: Connecting Your Faith With What You Watch, Read, and Play (Good Book, 2019). 댄 스트레인지는 이 용어를 The Authority of Faith: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Meeting at Tambaram, Madras(ed. G. Pato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5에 실린 헨드릭 크레머(Hendrik Kraemer)의 글, “Continuity or Discontinuity”서 가져온다. 


10. 존중(Respect)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또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다음 글에서 이 개념을 설명할 것이다.  


11. 피터 라이하트(Peter Leithart)는 서구 문화에는 ‘일반 은총’뿐만 아니라 그가 ‘중간 은총’(middle grace)—서구 문화에 남아 있는 기독교 가치의 잔재—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고 현명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가치들—모든 사람에게 있는 동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필연성 등등—은 세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다들 받아들인다. 그 세속적 세계관이 이런 가치들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원제: Lemonade on the Porch: The Gospel in a Post-Christendom Society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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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