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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작고 외진 교회, 복음과 계몽의 첨병 되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무지내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5-17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257. 무지내교회의 현주소다. 하지만 이 교회를 아는 사람은 특별한 관심이나 관련된 이들 외에는 거의 없다. 크지도, 특별히 소문이 난 교회도 아니다.


지금도 시골에 있고 작은 공동체이지만, 무지내교회는 한강 이남 지역과 충남(공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계몽하는 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선구자들이 있었던 뜻깊은 역사를 간직한 교회이다. 가깝게는 안양, 수원, 안산, 화성, 멀리는 충남 공주에까지, 경기 남부와 충남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운 복음의 선구자들이 이 교회 출신이다. 무지내교회는 이 일대에서 최초의 교회이자 모교회로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지금은 그 존재감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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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는 1899년 김동현(金東賢, 1869-1928)의 집에서 처음 예배를 드린 것을 그 공식적인 시작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900년에 보고된 기록에 “이미 입교인 1인에 학습인이 14인이었는데, 올해는 입교인 5명과 학습인 41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1895년경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교회의 초기 성장세는 놀랍다. 1901년 스웨어러(Wilbur C. Swearer/서원보) 선교사의 보고를 보면, 입교인 16명에 학습 92명의 큰 교회가 되었고, 1901년에 이미 예배당을 지었으며, 120여 명의 신자와 방청인 40여 명이 모여 봉헌 예배를 드렸을 정도였다.


또 1902년 6월 예배당이 작아 증축해야만 했는데, 이 봉헌식에 참석하려고 무지내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아펜젤러와 무어 감독 일행이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현장의 일본인 노무자들에게서 봉변당하는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인들은 아펜젤러 일행을 러시아 장군 일행인 줄 알고 행패를 부렸다. 이 사건에서 상처를 치료받아야 했던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게 되어 있는 성경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여정이 늦어졌고, 그 목포행 여정에서 그는 순직하게 된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그러한 사건이 없었다면 사고가 난 그 배를 타지 않았을 터이다….


수도권이기는 하지만, 무지내교회가 있는 마을은 지금도 많이 외진 곳이다. 농사를 주로 하는 농가들에다가 작은 공장들까지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다. 이러한 곳에 인천을 제외한 한강 이남 감리교 선교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당시에도 선교사들이 이런 외진 곳을 찾아오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는 주요 길목도 아니고,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지역도 아닌데도, 어떻게 이곳에 일찍 복음이 들어왔고, 또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을까?


얼마 전에 무지내교회는 경내에 기념비를 세워 이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던 김동현과, 그즈음 태어나 이 교회에서 자라고 훗날 이 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교회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장명덕 전도사를 기리고 있다. 특별히 이들은 무지내교회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의 주인공들이다. 생전에 발품을 아끼지 않고 수원과 멀리는 충남의 공주지방까지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쏟은 김동현의 행적은 그가 초기 한국감리교회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당연히 무지내교회도 그를 통해서, 그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에 관해서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김동현과 그의 사촌 동생인 김동일, 그리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이 교회가 설립된 이후에 주일학교를 통해서 성장한 장명덕은 이 교회는 물론이고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기억해야 할 믿음의 선구자들이며, 그들이 남긴 섬김의 여정은 한국 교회가 이어가야 할 사명이다. 


김동현은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를 졸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학당장이었던 아펜젤러와 여러 선교사에게서 감화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깨닫게 된 복음을 들고 고향인 이곳 무지내로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지내교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사실상 한국감리교회가 서울 이남 지역의 선교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무지내교회가 설립되는 중심에는 김동현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금도 외진 곳인데 어떻게 다른 어떤 곳보다 일찍 이곳에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풀릴 수 있는 것은 김동현이라는 인물을 알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곳 무지내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의 결정이나 주도가 아니라, 이 마을의 김동현이 서울 배재학당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그 학교에서 만난 복음을 믿음으로 고백했고, 그 복음을 이 마을에 가지고 왔고,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써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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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내교회가 1898년 12월 1일에 설립된 이래로 김동현은 자연스럽게 이 교회는 물론이고 감리교회 선교부에서도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선교부로서는 초기 선교 현장에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전진기지를 얻은 셈이었고, 그래서 스웨어러 선교사가 수원과 공주를 선교지로 확정하고 개척하는 사역에 김동현을 그 첨병으로 세웠다. 우선 선교부는 1901년 수원성 화령전(華寧殿) 옆에 있는 땅을 김동현의 이름으로 매입하여 선교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계획대로 스웨어러 선교사의 지원으로 땅을 사들였지만, 수원 유수(留守)가 김동현을 옥에 가두고 토지를 원주민에서 돌려주라고 강요했다. 정조(正祖)의 영정이 있는 화령전 옆에서 외래 종교가 떠들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김동현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외래 종교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죄였다. 따라서 감리교회 선교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결국 석방되었지만, 옥에서 당한 고통은 사역을 이어가는 데 장애가 될 만큼 후유증이 컸다. 실제로, 출옥한 뒤에 김동현은 전도사로서 사역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다시 공주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 새로운 신자들을 살피면서 사실상 공주제일교회(현재)의 초대 목회자로 활동했지만, 그 성과는 크지 못했다. 결국 그는 다시 무지내교회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1928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현 서울 아현동)에서 59세의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그는 복음을 전하기에 발이 닳도록 이 고을 저 고을을 찾아 다녔다. 그의 만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지만, 수원, 공주, 안산 일대 교회들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김동일(金東一, 1884-1954)은 김동현의 사촌 동생이다. 그리고 민선 인천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는 이 마을 김정열의 아버지이다. 그는 무지내교회가 설립된 이후인 1902년에 신앙에 입문했고, 버딕(M. Burdick)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졸업 여부는 모름). 그러나 1912년 안산구역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19년에 목회를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목회를 그만둔 그는 1920년부터는 농사에 전념하면서 이 마을에서 살았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9년 삼일운동과 관련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수감당하거나 목회를 그만두어야만 할 정도로 정신적인 고초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을 전제했을 때, 그가 갑자기 목회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농사하는 일로 생애를 마감했다는 것은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서 사촌 형 김동현의 아들 김영렬이 안산구역을 맡아 목회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안산지역의 교회는 두 형제와 대를 이은 김영렬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어떤 면에서 안산지역의 교회들은 대부분 그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가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열정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일을 하게 했다. 1920년 이후로 보아야 하겠지만, 바로 그즈음에 흥업강습소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초등과정(1-3학년)을 가르쳤다. 그것도 여의찮아서, 일제 말기(?)에는 문을 닫아야 했고, 해방 후 다시 문을 열어 소성고등공민학교(邵城高等公民學校)로 개명하여 미취학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한편 무지내교회가 설립된 후,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의 여성 교육의 대모가 된 스크랜턴 선교사는 이화학당만이 아니라 그의 영향이 미치는 한 여성 교육을 위한 장을 만들어가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무지내교회가 세워지자 이곳에도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찾아와서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메리 스크랜턴의 후원으로 무지내교회는 1901년에 특별히 여자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무지리여학교’를 지어서 교육을 시작했다. 무지리여학교는 지역의 아이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비롯한 일상에 필요한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던 장명덕은 자연스럽게 이 무지리여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신교육을 접하게 되었다.


무지리여학교는 지역의 어린이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외진 시골에, 그것도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다. 1905년에는 남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시작했다. 남학생 10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컸다. 이렇게 무지내교회에서 남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지역은 물론 몰락하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귀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끔 찾아오는 선교사들은 무지리 지역민들에게는 특별한 것이었고, 선교사들에게서 자극을 받아 배움의 꿈과 소망을 가지게 했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도 이 교회와 학교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할 수 있고, 비례해서 지역의 아이들은 배움을 위해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곳에 제대로 된 학교가 세워져야 한다는 요청을 선교본부에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초등학문을 익힌 장명덕은 이후 인천의 영화학교를 거쳐서 이화학당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공부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정상적인 공부는 할 수 없었지만, 감리교회 협성여자신학교에 은혜로 입학하여 전도사로서 복음전도와 계몽 사업에 일생을 바친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여기서 열거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적자면, 심훈 작가의 상록수라는 소설의 현장이 된 안산의 샘골(泉谷)교회에서 운영했던 상록학원을 설립한 인물이 바로 장명덕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록학원과 주인공인 채영신(본명 최용신)만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 덕일 것이다. 하지만 샘골의 상록학원은 장명덕이 세워서 운영하다가 최용신이 파송되면서 그가 이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최용신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과정에서 그의 마지막 별세의 길까지 동거하면서 뒷바라지를 한 이도 장명덕 전도사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일반인은 잘 모른다는 것이 현실이다.[1]


이렇게 무지내교회는 지금도 수도권에서 개발되지 않은 외진 지역에 있지만, 지나온 과정에서 지역민을 깨우는 것은 물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교두보 역할과 귀한 인물들을 통해서 첨병 역할을 감당한 교회이다.



1. 장명덕 전도사에 관해서는 이 책을 참고: 기억하고 싶은 목회자들 1, 이종전 편(인천: 아벨서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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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