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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허물어야 할 때도 있다

신앙 재건: 새 시대에 걸맞은 기독교 만들기④

by Tim Keller2022-11-03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와 재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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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재건: 새 시대에 걸맞은 기독교 만들기


1. ‘신앙 해체’ 현상

2. 걸어 다니는 나무 같은 사람

3. 해체: 무너뜨림

4. 해체: 세움

5. 신앙의 재건이 일어나는 때

6. 신앙의 재건, 그리고 오늘의 문화

7. 두 번째 만지심

5. 신앙의 재건이 일어나는 때 


쉐퍼가 보여준 신앙의 해체와 재건은 가장 포괄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기독교가 전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신앙 재건의 과정은 쉐퍼보다 훨씬 더 안전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더불어서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rethinking)와 재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환경이나 경우가 있다. 


1.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


첫 번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이다. 젊은이의 영적 경험에 관해서 몇 안 되는 광범위한 치료법 중 하나는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가 1844년에 쓴 ‘종교적 경험에 관한 고찰’(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의 2장에서 찾을 수 있다.[16] 알렉산더는 믿음 좋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경우, 수년에 걸쳐 ‘영적 감동’이라는 체험을 많이 한다고 관찰한다. 1-2년에 한 번 정도 신앙의 성장에서 이런저런 굴곡을 경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제대로 믿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는 시기를 만난다. 


알렉산더는 부모들에게 그들이 겪는 다양한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회심인지, 어떤 것이 준비이고, 어느 것이 재헌신인지 알아내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것들은 아예 분별이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열두 살 아이가 여덟 살 아이보다는 세상과 자신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기초로 돌아가고’ 또 끊임없이 자신의 믿음을 ‘재고’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그들이 믿음에서 다 강해지기를 소망한다. 


2. 고통과 불의를 경험할 때


두 번째 경우는 그리스도인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고통이나 불공정에 직면했을 때이다. 시편은 신자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나 박해가 주는 학대를 겪을 때 만나는 투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시편은 그런 시간에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싸움인지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다. 시편 39편과 88편은 그 어떤 신앙적인 다짐도 없이, 단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라는 시편 기자의 말로 끝난다(시 39:13). 그러나 시편 119편은 고난이 주는 혼란과 질문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깊이 헌신하게 된 것에 대해 반복해서 고백한다(시 119:67, 71, 92).


신앙 재건의 여정과 관련한 보다 완전한 사례 중 하나를 우리는 시편 73편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시편 시인은 삶의 불의, 사람들을 압제하는(8절) “악인의 번영”(3절),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악인이 더 유명해지고 강력해진(10, 12절) 현실 때문에 절망한다. 이 시편 시인은 거의 믿음을 잃어버리고(2절),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믿음도 같이 나락으로 떨어진다(15절). 


이 시편 시인이 그토록 절망한 이유는 돌이켜서 보면, 그가 욥의 비참한 위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순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앙은 단순하다. 그는 선하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좋은 삶을 주고, 나쁜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은 비참한 삶을 주실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13절). 이런 착각에 빠진 믿음은 결코 현실 세계를 제대로 견딜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번성하는 행악자들을 보며 그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6절). 그는 “마음이 근심”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거친 짐승”과도 같았다. 비록 시편은 그의 ‘심각한 고난’의 기간이 짧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꼭 그렇게 단정할 이유가 없다. 그는 아예 믿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가 가진 믿음의 일부(잘못된 부분)는 재건에 필요한 길을 만들기 위해서 해체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고백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b절). 결국 그는 자신의 시간 개념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의가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심지어 다음 세상에 가서야 최종적인 결론이 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분깃”(26절)이며, 궁극적인 부요 최고의 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세상의 어떤 지위나 위안도 하나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3. 기독교 지도자와 자신에 대한 환멸


많은 사람이 존경하던 그리스도인이 위선자로 판명되는 경우에 흔들리는 믿음을 경험한다. 어떤 지도자는 자신이 공식 석상에서 비난하는 행동을 몰래 자행하고 살았던, 말 그대로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또 어떤 지도자는 폭압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교묘하고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해서 오로지 돈과 물질만 탐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지도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에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어느 정도의 환멸은 피할 수도 없고,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설교자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이 “내가 우상으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지적했듯이, 신자가 목사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목사들을 우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바울을 경배했던 사람들(행 14:12-13)이 정작 나중에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자로 내버려 둔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행 14:19). 나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이슬 아래서 오로지 그리스도께로만 더욱 가까이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더 이상 사람 속에서 영광을 찾지 않고 사람을 자랑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17]


맥체인은 사도행전 14장에서 군중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바로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죽이려고 했던 사건을 인용한다. 맥체인은 여기서 지적하는 포인트는 중요하다. 타락한 지도자에 대한 깊은 슬픔과 실망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서 믿음마저 완전히 증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믿음이 예수 자신보다 지도자에게 더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도 어쩌면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미성숙한 믿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신자들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환멸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영적 실재’에 대해서 (프랜시스 쉐퍼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4. 근본적인 믿음과 부수적인 믿음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을 때


일부 사람들이 해체에 얽매이고 결코 재건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에서의 속죄, 죽은 자 가운데서의 육체적 부활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을, 이차적이고 심지어 ‘암묵적인’ 무언의 배경이 되는 각종 믿음과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수적인 믿음을 더 중요하게 부각하기 때문이다. 


이차적 믿음이란 예를 들어서, 창조, 지구의 나이, 진화를 둘러싼 문제를 의미한다. 또는 종말 예언과 같은 문제도 포함된다. 1차 교리와 2차 교리의 구별이 전혀 없는 교회에서 양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경우라면, 그래서 교회에서 배운 모든 가르침이 다 똑같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승격된다면,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2차 교리가 의심스럽고 근거가 약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아가서 교회에서 배운 모든 것에 다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을 접할 때, 기억해야 할 점은 실제 교리 뒤에는 다른 믿음과 태도, 그리고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참된 신자의 삶은 언제나 잘 풀리기 마련이라는 등등, 더불어서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한 암묵적인 잘못된 생각이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식의 배경이 되는 믿음이 실제로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의 일부일까? 전혀 아니다. 그렇다 보니까 젊은 신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얼마든지 잘 되는 불신자를 만나고 오히려 열심히 믿을수록 끔찍한 일을 만나는 신자를 보게 된다. 또한 신자들이 짓는 죄가 더 크게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암묵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믿음에 관한 의문이나 상실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 전체를 향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5. ‘거품’ 속에서 사는 신앙


뉴욕으로 이사한 사람들이 ‘신앙을 잃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안전한 장소, 즉, ‘거품’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보수적일 뿐 아니라,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동네에서 자란 경우에 더 그렇다. 그런 동네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아예 의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소한 공공연하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다 믿으니까 그냥 다 당연히 믿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울프(Michael Wolff)가 아예 다른 ‘국가’라고 부르는 곳으로 이사한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 


미국의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 생활에는 근본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활기차고 … 도덕적 상대주의적이고, 도시 지향적이고, 문화적으로 모험심이 많으며, 성적으로 다형성이고, 인종적으로도 다양한 국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마을, 핵가족, 종교 지향, 백인 중심의 또 다른 미국이 있습니다. … 문화 및 경제력으로 약화하는 곳 … 두 개의 국가….[18]


울프가 ‘다른 미국’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한번 제대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신앙을 지적이고 체험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단지 문화적 환경의 부산물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 환경이 변할 때 신앙까지 허점을 보이는 상황을 초래한다. 따라서 리디머 교회에서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란 많은 사람이 비기독교 문화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신앙이 자라고 깊어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16] A. Alexander, 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 Banner of Truth, 1967, 10-20.


[17] Andrew Bonar, Memoir and Remains of Robert Murray M’Cheyne, Banner of Truth, 1966.


[18] Michael Wolff, “How Rupert Murdoch’s Fox News Channel Created a Media Nation Unto Itself” in New York, Feb 26 2001, 19.



원제: Reconstructing Faith: Christianity in a New World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

번역: 무제

시편 119편은 고난이 주는 혼란과 질문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깊이 헌신하게 된 것에 대해 반복해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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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