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by 권성찬2022-05-17

상대방이 주인공이라는 이 인식의 전환이 없이 누군가를 대상으로만, 목적어로만 놓고 소위 우리가 정의한 사랑을 퍼붓는 것, 그것을 바울은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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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주제: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6-37.



성급한 감동은 오독에서 온다


앞의 글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에스겔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속성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다보면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우리가 실천하기도 하는데, 그런 삶이 선교적 삶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자세와 실천을 보여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물론 우리가 그런 속성을 가지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자연스레 선교가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우리가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적극적인 선교도 동일하게 중요하며 또한 필요하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 세상과 교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우리끼리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거나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다 하는 정도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세상과의 만남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한다. 누가복음의 짧은 본문은 대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는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된다. 먼저 이 본문의 배경 또는 전제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5-37).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피해야 할 사안들을 생각해 보겠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 묵상에서 자주 범하게 되는 오류는 미리부터 너무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하고 본문을 읽는 것이다. 그보다는 먼저 냉철한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철저히 파악한 후에 감동과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다짜고짜 은혜 받을 준비를 하고 읽으니 본문의 이야기를 파악하기도 전에 소위 은혜부터 받아 버린다. 그런 마음의 자세는 유지하되 본문을 좀 냉철하게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이 과연 누구인지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본문의 청중은 예수님의 대화 상대인 율법교사 및 그와 같이 있던 유대인들이다.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이야기의 청중이 여러분이 아니니까 여러분에게 직접 하는 이야기로 들으면 오해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가장 큰 오해가가 “그러니까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자!”라고 읽는 오독이다. 결과적으로 “사랑하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게 직접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의 청중은 유대인이고, 우리가 아는 대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을 안 한다. 유대인에게 이방인보다 못한 것이 사마리아인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대인이 우리처럼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그 감동받지 않는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이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포인트다. 아무튼 지금은 “유대인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을까? 기분이 나빴겠네!” “엄마가 자꾸 내가 제일 재수 없다고 여기는 아이처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시니, 그나마 하던 공부도 하기 싫어지네.” 이런 느낌을 가지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


두 번째, 율법학자의 질문과 예수님께서 답으로 하신 질문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율법학자는 이렇게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하면 될까요?” 말하자면 그는 목적어를 물었다. 사실 우리는 늘 목적어를 묻는다. “어디를 가면 될까요?” “무엇을 사면 될까요?” “어느 나라로 선교를 가면 좋을까요?” 우리의 모든 질문은 목적어를 묻는 질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고 나서 이렇게 반문하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누가 사랑했느냐?” “누가 도움을 주었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주어에 대한 것이다. 율법사는 우리처럼 목적어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주어를 물으셨다.

 

여기서 두 가지, 예수님이 이야기를 통해 청중의 짜증을 유발하고 목적어가 아닌 주어를 물었다는 중요한 포인트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해를 위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역할을 이야기 안에서 바꾸어 가면서 차근차근 해석해 보도록 하겠다.  


시나리오 1: 사랑의 대상을 넓혀라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시려고 했다면, 사랑의 대상 즉 목적어를 말해 주려고 하셨다면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좀 바꾸었어야 한다. 사실 유대인은 자기와 같은 클래스에 있는 사람들만 관심 있지 자기들이 볼 때 죄인이나 이방인, 게다가 사마리아인은 사랑의 대상에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누가 제 이웃입니까?” 바꿔 말해 “누구를 사랑하면 될까요?”라고 율법사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 잘 걸렸다!” 하시면서 사마리아인을 도움을 준 사람이 아니라 강도 만난 희생자로 등장을 시켰어야 한다. “사마리아인이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더라면 유대인 청중은 훨씬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것을 아주 고소해 하면서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그곳을 네가, 바로 너희 유대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네 자신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쓰러진 사마리아 사람을 보게 되었다. 거의 죽어가는 사마리아 사람, 너희가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 사마리아 사람이 쓰러져 있다. 어떻게 하겠니? 도와 줄 수 있겠니? 너의 사랑의 범주를 사마리아 인까지 확장할 수 있겠니?” 이렇게 물으셨더라면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자니 그렇게 대답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서 무슨 영생을 얻으려고 하느냐?”고 질책하실 것 같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함께 있는 유대인이 “이런, 사마리아주의자!”라고 딱지를 붙일 것이기에 두렵다. 그 율법학자가 머뭇머뭇 할 때 예수님께서 소리를 지르신다. “그 쓰러진 사마리아 사람 하나도 도와주지 못하면서 무슨 이웃을 묻고 있고 무슨 사랑을 말하고 영생을 구하고 있느냐! 이 이기적인 사람아!” 만일 그랬다면 유대인을 향한 아주 묵직한 말씀이 될 수 있었다.


시나리오 2: 누가 주어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을 선한 역할의 주인공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유대인  청중은 불편하다. 게다가 자신들 편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약간 부정적인 느낌을 주면서 한 줄로 정리했는데, 이 불편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질질 늘여가면서 이야기한다. 본문을 잘 보면, 제사장이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간다. 공정하려면 사마리아인은 보고 도와줬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만 해도 불편할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아주 길게 끌고 가신다. 사마리아인이 좋은 역할로 등장하는 순간 유대인 청중은 이미 불편한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신다. 그 이야기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첨가하시기까지 한다. 기름, 포도주, 주막 등은 꼭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하루 더 끌고 가셔서 ‘다음 날’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마 청중 사이에서 “에이, 정말!”이라는 신경질적 반응이 나왔을 것 같다. 정말 짜증났을 게 분명하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누가 도와줬지?”라고 물으셨다.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비유로 한번 말해 보겠다. 서울에 있는 어느 대형 교회에 설교 초청을 받아 갔다. 주일 대예배다. 그 교회는 담임목사를 거의 신과 같이 생각한다. 교회에 2개의 규칙이 있다. 1번은 “담임목사님은 항상 옳다!”이고, 2번은 “만일 담임목사님이 틀렸거든 1번을 보라!”다. 담임목사에 대해 누가 의문을 표시하면 주변에서 확 눌러 버린다. 그런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설교 속의 설교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이 교회 주차장 근처에서 뺑소니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인으로 보이는 분이 바로 교회 앞에서 오토바이에 치였는데, 오토바이는 그대로 달아났습니다. 사고를 당하신 분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교통은 막히고 저는 저 뒤쪽에서 그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교회 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마침 요 앞에 앉아 계신 담임 목사님이 그때 아침 예배를 오다가 그 피 흘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목사님 차의 창문이 열려 있어서 목사님이 그 광경을 보았다는 것을 제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이걸 말해야 할지…. 뭐 다음에 또 초대 안하셔도 할 수 없죠. 그냥 말씀드릴게요. 목사님이 마치 못 본 것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리시더라구요. 저는 목사님이 예배 준비를 하러 가나보다 생각했어요. 지금 보니 부목사님이 사회를 보고 목사님은 아무것도 안하시는데 왜 그러셨나 모르겠네요. 뭐 이유가 있으셨겠죠?


그럼 그 교회 교인들이 반응이 어떨까? 감히 우리 담임 목사님을…, 하면서 방송실을 막 쳐다보며 마이크를 끄라고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도 태연히 설교를 이어간다. 


그런데 그 뒤에 어떤 나이 지긋한 분이 오시다가 역시 그 피 흘리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이 분이 수석 장로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 목사님에 그 장로님이더군요.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고개를 어찌나 빨리 홱 돌리던지. 제가 장로님의 목 디스크를 다 걱정했다니까요. 어쩌나…. 제가 가기엔 좀 먼 거리였는데 그래도 가 봐야겠다 싶어 택시비를 내고 내리려는데 저 보다 앞서 어떤 교인 분이 그 사고 현장으로 막 달려가시더니 흰 옷을 입으셨는데 옷에 피 묻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막 그 분을 도와주시더군요. 성경을 가지고 계셨으니 이 교회 교인이라고 틀림없다고 생각했지요. 예배 시간에 이 분 선행을 좀 소개해야겠다 싶어 쳐다보는데 마침 흰 옷에 노란 띠를 가슴에 두르셨더군요. 무슨 여전도회인가 보다 하고 써 있는 글씨를 읽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신. 천. 지.


그러고 나서 제가 그 신천지 교인이 어떻게 그 사고 당한 분에게 가서 상처에 손수건을 매었는지 그 때 어떤 매듭 방법을 사용했는지, 병원은 어디를 갔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짜증 제대로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묻는다. “성도 여러분, 누구처럼 해야죠? 담임 목사님일까요? 아니면 수석 장로님처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신천지일까요?” 그러면 사람들이 “신천지! 신천지!” 그러면서 신천지를 닮자고 할까? 전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청중인 유대인 설득용이나 감동용이 아니라 짜증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 상황으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실 때 “사마리아인이요!”라고는 결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천지요!”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의 답은 “자비를 베푼 자요.”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처럼 해라!”고 하실 때, “뭐?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고, 신천지처럼 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반응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천지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야기에 대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생각한다면 사실 신천지 정도의 비유도 약하다.


지금 예수님은 이 율법학자, 그리고 이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유대인의 무엇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들에게는 목적어를 넓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너희들, 더 사랑해야 해, 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부지런히 찾아가서 지역사회를 위해 더 봉사하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더, 더 열심히 해야 해. 비슷한 사람들만 찾아다니는 거, 그것만 가지고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는 안 돼.” 그런 메시지를 주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이방인을, 원수를 사랑하는 그 정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아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정도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까지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혀버렸다. 유대인에게 정해진 주어는 이스라엘이다. 주어를 묻지 않는 백성이다. 디폴트라서.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선택된 백성이니까. 이스라엘의 혈통이어야만 하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 견고한 주어벽, 주어성에 충격을 주신다. “사마리아 사람도 주어가 될 수 있어!” 단지 사마리아 사람까지 사랑하라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만큼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아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그들도, 너희들이 말하는 그 개들도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예수님은 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대상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주인공이라는 이 인식의 전환이 없이 누군가를 대상으로만, 목적어로만 놓고 소위 우리가 정의한 사랑을 퍼붓는 것, 그것을 바울은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다. 가진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그들을 구제 대상으로만 여기는 천박한 인식 속에서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며,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하여도 자신이 주어이고 상대방은 목적어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주기로 했다고 하자. 그 분이 가족이든지 가족이 아니든지, 만일 여러분이 전 재산을 팔아서 줄 결심을 했다면 그 분을 사랑하지 않고 가능할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사랑해도 전 재산은 못 준다. 누군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신 죽으려고 한다면, 사랑이 없이 가능할까? 사랑해도 어렵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없이 주는 것이 의미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전 재산을 주고 목숨을 주면서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선교로 바꾸어서 말하면, 오늘 우리가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몸을 내어 하는 엄청난 헌신의 선교가 성경이 말하는 선교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을 이해하려면 고린도전서 12장의 설명을 기초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몇 구절만 읽겠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4).


중요한 말씀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 즉 모두가 주어가 되었다. 물론 참 주어는 그리스도시다. 그 주어 아래에서 각 지체가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 12:15-16).


그러니까 누구든지 “나는 별 쓸모가 없어!”라고 자책하거나 열등한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현지 교회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는 못해, 미국 교회나 한국 교회가 와서 해주어야 해!” 그런 의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선교는 일어나지 않는다.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 12:16).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1-22).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과 또한 각 지체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지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기초다. 그런 인식의 전환 없이, 즉 자신을 항상 주인공에 넣고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만 놓는다면, 다른 사람을 항상 목적어로만 인식하는 상태에서 베푸는 그런 일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굉장한 헌신처럼 보일지라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록 내 소유를 다 팔아 주는 엄청난 희생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사랑은 결코 아니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인사해 보자. “몰라 뵈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주인공이셨군요.”


우리는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나도 귀하지만 남도 동일하게 귀한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 영역에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의 한 단원을 써 내려 갈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주인공이 되도록 내가 섬기되, 나 자신은 상대와 같은 눈높이가 아니라 가장 아래인 발까지 내려가서 그 발을 씻겨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적 삶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행동을 보여주셨다. 그 전까지 예수님은 여러 표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은 하나의 표적을 보여주고 그것을 설명(강화)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실제 행적도 마찬가지셨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표적을 행하신 후에 설명하신 것은 제자들을 선교적 공동체로 세워 가시는 일종의 교육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만 모아 놓고 가장 아껴 두었던 표적을 행하신다. 이 표적이야말로 표적 중의 표적이요 가장 핵심적인 표적이다. “너희가 이전에 여러 다른 표적들을 보았지? 허나 그것들은 이 표적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 표적이야말로 너희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보여주는 표적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듯이 마지막 표적을 보이신다. 얼마나 엄청난 표적이었을까? 하나님 나라의 핵심을, 이제 세상에 남겨질 제자 공동체가 해야 할 핵심을 드러내는 표적이다. 그것이 바로 세족식이었다. 아직도 한참 모자라 보이는 그 제자들을 이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써 갈 주인공으로 여기시며 발을 씻기셨다. 그 제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런 방식으로 선교적 삶을 살라고 요청하신다.


끝으로, 이야기 하나를 더 소개하고 마무리하겠다. 국내의 유명한 장편 소설가가 인터뷰를 했다. 사회자가 물었다. “요즘은 장편 소설이 잘 안 나옵니다. 왜 그런가요?” 그러자 그 소설가는 요즘 젊은 작가들이 단편에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단편과 장편의 차이가 뭐냐고 사회자가 물었다. 그 답이 아주 명쾌했다. 단편과 장편의 차이는 사실 두께의 차이가 아니라는 거였다. 단편은 한 사람의 시각, 주로 1인칭의 시각으로 써 내려가는 소실을 단편이라고 한다. 반면 장편이란 물론 주인공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많은 3인칭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한 장에서 어떤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무대도 어느 장소 혹은 어느 나라가 배경이다. 그런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장소도 완전히 달라서 다른 소설을 하나 새로 보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인내하고 읽으면 좋은 장편일수록 나중에 가서 어마 어마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1인칭의 시각으로 써 내려가는 단편 소설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처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장편 소설이다. 아니 그 모든 민족이 다 열심히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써도 너무나 방대하신 하나님 이야기의 아주 일부분밖에 쓸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기에 내가 만나는 사람의 발을 기꺼이 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인식의 전환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저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그리고 나아가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전의 시각으로 보면 개만도 못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새로운 주인공임을 통찰하고 발을 씻겨 주자. 섬기자.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놀라운 공동체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1인칭의 시각으로 써 내려가는 단편 소설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처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장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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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성찬

한국해외선교회(GMF) 대표로 섬기고 있다. 성경번역선교회(GBT) 선교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역하고, 그 후 GBT 대표와 위클리프 아시아-태평양 대표로 사역했다. 영국 OCMS에서 ‘요한복음 선교적 읽기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