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ARTICLES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박삼영 /  작성일 2022-05-09

본문

Photo by Church of the King on Unsplash

인간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5월의 주제: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생명 공동체의 회복: 교회가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


하나님을 닮은 인간


성경에서 사람을 말할 때 하나님을 예로 들고, 하나님을 말할 때는 사람을 예로 든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형상(chellem)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다. 물론 겉모습보다는 속사람, 인간의 인격과 성품의 정체성과 수준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다. 라틴어 이마고(imago)가 이 형상을 번역한 말인데, 그렇다고 이미지를 닮았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굳이 돌려 말하자면 ‘이데아’라는 말이 더 가까울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수준처럼 매우 높여 주셔서 마치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듯이 말씀하셨다. 사실 사람이 그 정도는 아닌 줄 우리가 다 알지만, 성경은 사람을 높여도 너무 높여 하나님을 닮았다고 한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사람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의 모습을 하신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살 때 찾아온 방문자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대표적인 모습이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서에 나오는 ‘인자’라는 표현은 결정적이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말씀하신 그 인자는 곧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종래에는 이 인자를 가리켜 예수님의 인성을 말한다고 가르치는 해프닝이 있었다. 소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데 신성을 나타낼 때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 하고, 인성을 나타낼 때는 인자(Son of Man)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틀렸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는 것은 구약 전체를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특히 다니엘 7:13을 인용하신 말씀이다. 거기에 인자라는 말이 나온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니엘의 인자는 부정관사(a)를 써서 “한 사람의 아들(A Son of Man) 같은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온다는 예언적 표현이었다. 물론 다니엘이 예언할 때만 해도 인자(키바르 에노쉬)가 정확히 누군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누군가 앞으로 나타날 “어떤(a)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그 말씀이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은 자명하다.[1]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 하신 것은 바로 다니엘의 인자에 대한 예언을 이어받아 인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 말씀이다. “다니엘이 말한 인자가 바로 나다!”라는 뜻으로 정관사(the)를 붙여 그 인자(The Son of Man)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스스로를 인자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신 하나님이라 말한 셈이다. 인자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냥 대충 아무나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한 예는 성경에 없고, 오직 예수님만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이런 점에서 인자는 매우 특별한 용어로 성경이 말하는 인자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말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것을 소위 ‘인자 기독론’이라고 한다.


비슷한 말이 또 있다. “주의 종”이란 말인데, 한국에서 목사들이 대충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사용할 때가 많다. 자기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보면, ‘주의 종’은 메시아요 구원자를 뜻한다. 이런 용어의 맥락을 모르고 자기 스스로나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이 말을 사용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엄청 높인 것이다.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누가 자기를 메시아라고 높이려고 이 말을 사용하겠는가. 그냥 무슨 말인 줄도 모르고 사용하다 굳어버린 언어습관일 것이다. 특히 목사들에게 이런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나란히 간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높여 주셨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교회와 신학을 주도한 장 칼뱅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제1장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가진 것의 모든 지혜, 곧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Dei cognitione et nostri)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 지식(Duplex Cognitio)은 서로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쪽이 먼저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만들어내는지 구별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다는 것인데, 피조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더더욱 우리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스스로 자기 충족적인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삶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악을 생각할 때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고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그런 이유로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알 수 없다”고 했다.


고대의 헬라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저마다 신의 형상을 문화상대성으로 묘사한다고 말한 점은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인은 신을 들창코에 검은 피부로 그릴 터이고, 트라키아인은 신을 푸른 눈에 빨강머리로 표현할 것이다. 어느 문화든지 신의 형상을 묘사할 때 자기네 모습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 손이 있어 그 손으로 인간이 하듯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말의 형상으로 소는 소의 형상으로 사자는 사자의 형상으로 각자 신들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해서 그릴 것이라고 했다. 신을 확대된 인간의 기능과 능력을 부여해서 묘사하는 헬라의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비판한 것 치고는 제법 맹랑한 주장이 아닐 수 없지만, 매우 음미해 볼 만하다.


그러면 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사람을 하나님으로 나란히 표현했을까? 한마디로, 둘 사이의 인격적 소통을 위해 우리 인간을 높여 주신 것이다. 우리 피조물을 창조주와 비슷하게, 아니 나란히 고양된 위치로 높여 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으로 여기진 않으셨다. 인격적 동질성은 있지만 인간의 피조물성은 여전히 두셨다. 인간은 하나님은 분명 아니지만, 혹시 하나님과 같은? 하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카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과 맘먹을 수 있는 동등한 수준도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고, 인격적인 피조물로 특별한 대우를 받은 증거가 분명하다.


인간은 에이전트인가 왕인가?


그런데 최초의 인간을 비롯해서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 인간을 높여 주신 걸 모르고 살아간다.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엇비슷한 줄 알고 스스로를 과대포장한다. 인간은 수준과 지위에서 하나님과 맞먹으려 하고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든다. 그러다 종종 하나님과 맞장을 뜨려고 애쓰는 실정이다. 아담이 그랬고 이후의 모든 인간이 계속 그랬다. 빌립보서 2장의 본문을 “그리스도 찬송시”라고 하는데, 이건 단순한 예수의 칭송만이 아니라 아담의 빗나간 자기인식의 심연을 전제하고 쓰였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단순히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으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담 이래로 구약의 모든 인간이 보여준 삶을 전제로 예수의 차별성을 드높이는 말씀이다.


첫 사람 아담부터 모든 세대의 인간은 자신을 불러 높여 주신 하나님을 넘어서려는 반역을 저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등한 수준의 지위와 높이를 부여하셨는데, 그래도 그는 여전히 피조물의 신분을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똑같아지길 원해서 손을 내뻗고 하나님의 소유에 해당하는 지위와 신분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고 말았는데, 바로 자기 인식의 그릇된 파행이 빚은 참사였다.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에 걸맞은 임무를 행하도록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셨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동등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인간 피조물이 창조의 주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처럼 행세해 버렸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아담의 타락을 암시하고 그 전제로 글을 썼다.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비슷하게 높여주신 그 동등됨을 취해 버린 아담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반역이 아니라 순종을,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셨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란 말은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는 ‘붉은 것’(adamah)이란 말로 땅의 흙을 가리켰으나 사람이 그 흙에서 창조했기 때문에 아담이라 했다. 원래 지구나 땅은 에레츠(eretz)라 하지만, 표피의 흙은 아다마라고 불렀다. 라틴어 사람의 기원도 흙이라는 휴무스(humus)에서 왔다. 거기서 영어 휴먼(human)이 나왔다. 다 흙을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흙은 또 있다. 이쉬(ishi)라는 말인데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남성형 흙 이쉬와 또 거기에 여성형 어미가 붙은 이쉬-하(ishi-ha)가 나온다. 여자는 남자 이쉬에 여성형 어미 하(ha)를 붙여 이솨라 했다.


그런데 히브리어 하(ha)는 여성형 어미뿐 아니라 방향격조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남자와 여자의 어원은 그 의미를 더 분명히 밝혀 주는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에서 방향격조사가 붙으면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이 되고, 그 방형의 의미로 여겨지는 남자로부터 또는 남자를 지향한다(intention)고 해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남자와 여자의 어원적 형태는 고대 독일어를 거쳐 오늘날까지 독일어나 영어에 남아 있다. 고대 독일어에서 방향을 뜻하는 ‘보’(wo, 영어로는 where)가 남자(Man)에 붙어 여자(Woman, 이 경우는 접두어다)로 쓰였고, 이는 영어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하여튼 사람과 관련된 모든 단어가 흙에서 나왔다는 걸 보여주는 이런 어원적 관련성은 매우 흥미롭고도 주목할 만하다. 흙이란 인간의 재질적인 기원을 보여주는데, 지구의 땅이나 우주의 별을 비롯해서 실바람에도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는 먼지까지 다양하다. 시편은 이런 흙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티끌’이라는 고상한 시적 언어로 번역했지만, 인간이 먼지와 같이 하찮은 존재라는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먼지와 같은 피조물 사람을 하나님은 속절없이 높여 주셨다. 인간 스스로조차 정말 자기가 높은 줄 알고 살아갈 만큼 높여 주셨다. 그는 그 영광스런 고양된 위치를 감사하며 자기소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빗나가고 말았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와 신분, 권한과 영광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 양 손에 움켜쥐며 살아갈 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탐욕을 발휘하여 확장하고 증대하려고 무슨 일이든 벌이느라 여념이 없다. 거창하게 역사나 문화속의 인류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으로서 인간 개인과 가정의 관계 속에서 양보나 배려가 아닌 갈등과 투쟁에 휘말리는 우리 모습을 말한다.


빌립보서 2장은 이런 아담적 인간됨의 기원을 전제로 그 아담과는 정반대로 다른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스스로를 낮추고 내주며 겸손하게 메시아로서 임무를 수행했는가를 칭송하는 시를 소개한다. 일명 “그리스도 찬송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인데 (이 말은 그냥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여 군주처럼 군림하지 않고 종으로 성육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종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비천함까지 내려가셨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다 실패했던 아담과 다르게 예수는 자신을 다 비우시고 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셨다. 우리는 남보다 더 낮은 자리로 스스로 자청해서 내려가기가 힘들어서 못하고, 그래서 십자가를 보기는 보아도 짊어지기가 그토록 힘든데 이런 십자가를 겸손하게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품어 보라고 바울은 자신의 통찰을 나눈다.


자, 보라. 예수께서 순종하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분은 주(kyrios)로 높임 받고 모든 피조세계의 모든 존재가 무릎 꿇어 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왕 중의 왕의 보좌를 회복했다. 낮아짐으로 다스리는 권위를 회복하였다. 여기 낮아짐의 비밀이 있다. 우리는 낮아지고 싶어도 낮아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그걸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부요하시기 때문에 뭘 더 채울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셔서 쉽게 낮아질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부족하고 제한적이고 결핍의 존재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법칙적인 걸 말하기보다 바로 예수의 기독론적인 특성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꾸만 뭔가를 더 채워야 배가 부르고 만족하며 안도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인간은 물질이 더 많아져야 하고, 권세가 더 높아져야 하며, 명예가 더 커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막상 그것들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의 만족은 아주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라 계속해서 더 가지고 채우려고 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방식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스스로를 내주며 비우실 수 있다면,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채우려고 안달을 한다. 이렇게 아담(인간)의 움켜쥠에 비교해서 비움(케노시스)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접근하는 신학을 ‘아담-기독론’이라고 한다.


인간은 왜 이기적인가? 심지어 루터의 표현대로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성도의 모임 교회조차도 때때로 이기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피조물의 존재방식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나 교회의 이기성을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쭉 이렇게 살아 왔다. 그가 왕이나 제사장이나 장군이든지, 학자나 농부나 엔지니어든지, 누구나 이렇게 살아 왔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동기로 살아 왔다. 그가 나이가 많은 노인이든지, 청년이든지 어린애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 왔다. 나를 내세우고, 나를 주장하고, 나를 채우며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는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문화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인간 이기성의 해독제로 5절을 제시한다. “너희는 먼저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인간이 개인이나 공동체적으로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을 해독하려면 스스로를 비우고 내주고 희생하신 예수를 품을 때, 길이 열린다.


모든 문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교육학이나 신화나 신학이 이와 관련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모두가 ‘나!’라고 하는 자기중심성에서 시작되는데, 성경의 기원을 모르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 흉내를 내는 유일한 존재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하나님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고, 자연과 세상을 맡기셨다. 온 세상과 그 안의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까 인간도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처럼 왕이다. 왕 노릇한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타락한 왕은 원래 있어야 할 인간의 자리가 아니다. 이제 내려와야 한다. 바울은 그만 멈추라고 말하며, 비우라고 한다. 그냥 안 되니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다.


빗나간 왕의 소명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을 왕으로 부르셨다. 인간은 모두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 맞다. 아담은 왕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권세를 주셨다. 물론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원래는 왕이라 해서 무턱대고 군림하면서 다스리는 존재가 아닌데, 아담 이래로 인간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인간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구약에서 왕이라는 말은 멜레크(melek)인데, 보냄을 받은 메신저 말레크(malek)와도 비슷하다. 왕을 뜻하는 또 다른 말 쇼페타(shopeta)는 복수 쇼페팀(shopetim)으로 구약 사사기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재판관들이란 뜻이다. 사사들은 왕처럼 재판을 하거나 재판해서 판결을 내리는 일로 백성들을 이끄는 왕이다. 그런데 재판관이나 왕은 어떻게 재판을 하냐면, 백성에게 귀 기울여 잘 듣는다. 피해자가 억울한 일이 없는지, 공평한지, 정의로운지, 이런 기준으로 판단해야 했다. 왕은 백성이나 지배하는 대상이 억울하지 않도록 문제를 풀어 주거나 해결해 주어야 했다. 그런 왕을 올바른 왕 또는 재판관이라 했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왕의 기준은 다른 말로 의롭다거나 정의롭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째다카(tzedaqa), 미슈파트(mishpat)이다. 재판은 정의롭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 왕은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으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 세상의 다른 피조물의 이름도 지어 주고 보호하고 섬기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를 본받아서 의롭게 다스리라는 말이다. 세상을 보호하고 가꾸며 이끌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다. 다른 말로 왕의 소명이다. 그런데 아담 이래 어떻게 되었는가? 왕으로서 인간은 다른 인간과 세상에 대해 완력을 사용하고 유린하며 정복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실제로 모든 왕을 보면, 저마다 무력을 키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제국을 만들겠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는가?


성경이나 세상의 역사가 다 똑같다. 처음부터 빗나간 세상이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담처럼 에덴에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꾸로 세상에서 부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세계-내-존재로 살다가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는다. 낙원이라는 에덴 정원에도 뱀이 있었지만, 우리의 세상이라는 정원에도 뱀은 있다. 우리도 아담처럼 왕으로 부름을 받지만 의로운 왕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교만이라는 자기중심성의 뱀이 우리를 노리고 있기에 이 세상은 아름답지만 소명을 순종하기엔 위험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경험을 내세우는 고집이 강하다. 자기주장이 센 편이다. 특히 이런 성향은 한국 남자들이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을 따르지 않는 걸로 나타난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따른다. “내 생각에는 이 길이 맞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가도 된다.” 때로는 교통규칙 위반도 서슴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각보다 죄의식은 가지지 않는다. 그 대신 “내 판단이 신호등만 못하랴.” 적반하장에 뻔뻔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문제를 삼는 쪽이 깐깐하 것이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비록 교통법규 준수율이 OECD 국가에서 특히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들은 결코 법을 어기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의식이 강해서 스스로 판단할 뿐이다. 그렇다고 중앙선을 가로질러 가거나 인도로 차를 몰고 가면서 내 찻길이라고 우기는 서쪽 이웃나라에 비하면 선진 교통문화라 여기지만, 여전히 “내 생각에는 괜찮지!” 싶은 곳은 어디든지 유턴이나 파킹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 생각에는”(In my opinion)이란 말은 토론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의견 개진의 관용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논리적인 겸손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걸 교회에서 회의할 때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테면, 목사나 장로가 당회나 제직회에서 이런 말투를 사용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성경이 중심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안건은 없어지고 인간중심의 모임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 말할 때는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기보다 “성경을 보니까”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이 새로운 전통은 데카르트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전통에 따르면” “교회에 의하면” 하는 말을 했지만, 데카르트는 새로운 삼단논법을 제시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가 인간의 자기 생각이 자기 존재를 결정한다는 의심의 방법론에 대한 명제다. 무엇이든지 회의를 하고 모든 것을 의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가령 2+3=5라는 수학은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맞는 답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런 수학에서도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악마가 있을지 모르니 의심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만큼은 그대로 있다는 걸 확인한다. 결국 생각하는 자기 자신만 남더라는 이 말은, 잘 살펴보면 자기중심성을 강화시킨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주관적인 인간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문화가 더 뿌리 깊게 정착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인간은 주객 대립의 도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 이원론이 여기서 도식화하고, 하나님이 사고의 전제에서 사라졌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주체 곧 주인이 된다고 여긴다. 주관이냐 객관이냐를 따지는 것이 전부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갈수록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제일 잘나간다는 주체성만 강화되었다.


우리끼리 누구의 생각이 맞느냐고 시비하는 대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는 것은 이제 인간의 안중에서 멀어졌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매사의 중심을 좌우하는 위치에서 사라지는 대신 “내 생각에는”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 할 수 있을까? 자꾸만 자기중심성만 강조하고, 이기성만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말뿐이다. 이제 여기서 멈춰야 한다. 판단을 멈추고,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원래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 그걸 인정해야 한다. 나만 바꾸면 된다. 내 생각을 리셋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바로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코기토’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나의 존재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담과 같은 존재인 우리는 “내 생각”을 주장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생각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나 명예나 권위를 취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취하고 하나님과 겨루어 왕 노릇까지도 주장하는 삶에 익숙하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으로 소개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비우시고 내려오시고 낮아지셨다.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끄러움의 자리까지 나아가셨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죄인이 되셔서 죄인이 치러야 할 죄의 값을 치르는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바울은 여기서 매우 특이한 동사를 사용한다. 바로 둘째 아담 예수를 첫째 아담에 비하여 그의 성육신을 소개하면서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문장에 사용된 ‘취한다’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취한다는 동사, 하르파그모스(harpagmos)는 신약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용어로 훔친다(plunder) 또는 강탈한다(robbery)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것을 훔쳐 세상에 죄가 들어왔지만, 예수께선 아담과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를 탐내고 취하고 훔친다는 점이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때로는 어리석은 이중적 신분을 가장해서 하나님의 소유인 세상을 스스로 재단하고 잘라내고 훔친다.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걷어가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세상을 훔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특히 한국 교회는 아담의 전형적인 후예로 자신들을 부르시고 높여준 진정한 영광의 주인에게 순종하기는커녕 창조의 주인이며 구원의 왕을 대신해서 왕 노릇하고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거나 구원의 결정권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세상의 왕처럼 군림하는 모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의 이기심과 탐욕을 감추기 위해 세상을 정죄하므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세상을 훔치지만, 이제 예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회개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회복하라


이제 멈추고 돌이켜야 한다. 훔치는 행위를 멈추고 돌이켜야 한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회개다. 회개라는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문자 그대로라면, 아는 것을 넘어간다 또는 바꾼다는 뜻입니다. 명사 노에오(noeo)는 철학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는데, 정보를 안다기보다 깊이 의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어 슈브(shoov)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회개와 관련해서 출애굽이라는 말 엑소더스(Exodus)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 말도 엑스(ex)와 호도스(hodos)가 붙은 합성어로 길을 나온다(out of way)는 뜻이다. 노예로 이집트에서 살던 중에 그 삶의 길을 나온다는 뜻이다. 이게 구원 아닌가? 살아가던 옛길을 벗어나서 돌이키는 회개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회개 한번으로 우리의 삶이 다 바뀌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해야 하고, 매일같이 해야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우리를 돌이켜야 한다. 예수와 하나가 된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했다. 그렇게 자기의 길로부터 벗어났다. 이는 예수와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을 통해 가능했다. 그걸 가능하게 도우시는 성령님은 비밀의 덤이다.


보통 삼위일체 교리가 모든 교리 중에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동방 교부 다메섹의 요한이 찾아낸 헬라어 신학 용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순환(rotation)이란 말로 페리(peri, 둥근, around)와 코레인(chorein, 여지를 만드는, to make room)의 합성어다. 다메섹의 요한은 페리콜레시스를 삼위 하나님의 상호순환, 상호내재, 상호침투의 관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했다. 삼위일체의 공동체성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야말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이후 삼위일체를 숫자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 좋은 접근 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설명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마치 입체를 평면에서 다루는 것과 같다. 3과 1을 평면에서 3이 1이 되고, 1이 3이 된다는 모순을 반복할 뿐이다. 모순과 비합리성은 1(하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은 숫자 하나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서로 분리되지 않고 내재된 연합이며, 서로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상호순환성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공동체적 의미를 간과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할 당시부터 공동체적 연합의 사역을 펼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적 형상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 “우리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존재 속에서 이런 본성과 속성을 봐야 한다. 마치 앙리 마티스의 ‘윤무’에서 무희들이 손을 잡고 하나의 춤을 추는 모습처럼, 우리 사람에게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들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이란 그런 뜻이다.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교회나 세상도 다 공동체적 연합의 본질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이를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적인 삶을 통해 보여주셨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를 품으면 된다. 우리는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계획을 완성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그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한다. 연합되어야 한다. 예수를 우리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 “커무니오 쿰 크리스도”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한다. 세례 때도, 성찬 때도, 예배 때마다…, 아니 우리 가정에서 공동체적 연합을 시도할 때마다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은 예수와 연합된 삶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억하고 확인하라는 말이다.


성경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도전한다. 그런데 이 편지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겠다고 하는 말씀이다. 이 편지를 같이 쓴 디모데(이름은 바울과 디모데로 나오지만, 디모데가 썼을 것이다)나 또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를 본받으라고 도전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일어나야 한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다. 바울은 회당이 없어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빨래터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 있던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교회가 생겼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원형이지만, 한 개인의 가정이 곧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가정이고 가정의 확대다. 바울은 이런 가정교회를 경험하면서 또한 가정교회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전하는데, 빌립보 교회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그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한다. 바로 환대(hospitality)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가이오에게 감사를 전하는데, 그 이유가 온 교회를 잘 돌봐줬기 때문이라 했다. 자기도 로마를 방문할 계획인데, 잠시 들러 기쁨을 나누고 후원을 얻어서 스페인에 갈 계획이니 재정적으로 후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염치없는 행동이 아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과 가정교회 사이의 상호의무요 거룩한 계약이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이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를 전제로 기록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디모데를 보냈고, 로마에 뵈뵈를 보냈고, 교회는 그들을 환대했다. 예수님은 아예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이 마을 저 마을로 보내시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이것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져서 이집 저집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복음을 가르치도록 했다(행 5:42).


신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수송성, 환대다. 사도행전 16장의 간수가 바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접대했다. 우리도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와 공동체적 연합을 경험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이 교회와 연결된 것을 기억하고 연합을 적극적으로 경험할 때,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 생각이 교회로 열려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예수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예수와의 연합이 시작이다. 한 개인이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세워 가며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이루길 소망한다.


[주]

1. 김세윤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Eerdmans 1985)는 이 내용을 신학적으로 잘 정리했다.

우리의 삶은 예수와 연합된 삶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억하고 확인하라는 말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작가 박삼영

총신대학(BA)과 총신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위클리프 홀(Wycliffe Hall, Oxford)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의 지도로 “존 캘빈 신학에서의 교회론의 위치”(M.Phil)를 연구했다. 남포교회 교육목사를 거쳐 초대교회와 새길교회, 새물결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저서로 ‘동서양의 철학적 우주론 반성’과 ‘기철학을 넘어서: 김용옥의 기철학적 세계관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 등이 있다. 

CTCK
공동체 성경읽기
Bible Project
Bible Project
Bible Project
right now media
Mytwelve
CTS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