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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벌레 함부로 부르지 마라.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by 필립 정2023-06-26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은 대하기 어렵다. 마치 교회에 처음 간 사람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비난조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 변신(The Metamorphosis)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변한 자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출근을 미루다 어쩔 수 없는 책임감 (그는 생계 부양자이다)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선다. 그러나 자기의 외침은 제대로 들리지 않고 가족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를 죽이려 든다. 결국 아버지가 던진 사과의 한 조각이 몸에 꽂혀 벌레의 모습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이 이야기는 당연히 픽션이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후반 그는 어느 사회에도 소속감을 느끼기 힘든 유대인 태생으로 비교적 세속적으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성공을 강요받으며 불안한 소년기를 보낸다. 심약하고 예민한 한 소년이 그 밑에서 느꼈을 불안감, 소외감, 죄책감까지 그 글에 잘 녹아 있다. 그런데 그의 글 ‘변신’이 요즘 한국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자기들이 혐오하고 불쾌한 대상을 일컬어 각종 ‘충’이라 버젓이 부르고들 있다. 예전의 식충이, 좀 벌레, 돈벌레 따위보다 훨씬 모욕적인 표현이라 지면에 담기에도 불편한 정도다. 교회 안에서는 어떨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나도 엄격한 장로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결코 유쾌하지 못한 설교가 있다. 이 설교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을 인용하여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요지였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그리고 없어야 할 사람’이다. 난 이후에도 같은 설교를 브라질에서 선교사로 있는 분에게 들었고, 계속해서 몇몇 목회자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 얼마 전에도 잘 알려진 목회자 한 분이 설교 첫머리에 이 말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듣고 과연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분류해도 될까 싶었다. 이런 설교에 대해 오래 고민해 오다 이제 아니다 싶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이 설교를 듣는 심정으로 글로 반박하려 한다.


우선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유, 세 부류의 사람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첫째, 없어야 할 사람은 “거미같이 줄만 쳐 놓고 덫을 놓아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은 “개미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쌓아 놓는 사람”이라고 했다. 셋째 꼭 있어야 할 사람은 “꿀벌같이 자기를 위해서도 일하지만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벌레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베이컨이 어떤 오류에 빠졌는지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태계 속에서 필요 없는 무익한 벌레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서도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거미는 덫을 쳐 인간에게 해로운 모기 파리 같은 온갖 벌레를 잡아먹고 자기도 참새의 먹이가 된다. 거미가 있어야 새가 살기 때문에 없어야 할 동물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한다. 개미는 생태계 최고의 공헌자다. 땅을 갈아 영양 성분을 증진하고 씨앗을 옮겨놓는 과정에서 식물 종자를 널리 퍼뜨린다. 그들이 일군 땅이 얼마나 미네랄이 풍부한 비옥한 땅인지 알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란 생각이 달라진다. 꿀벌도 겨우살이를 위해 꿀을 모으지만 곰과 사람이 와서 빼앗아 먹어 다른 동물을 이롭게 한다. 그런데 사람 눈에 당장은 꿀이 가장 큰 소득이라 꼭 있어야 할 동물이라고 정의해 버린다. 아무리 해석자가 인간이라고 해도 너무 찰나적이고 근시안적이지 않은가!


베이컨은 자연의 개체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미치며 하나가 되어가는 하나님이 주신 생태계 전체의 큰 그림 안에서 한 벌레의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비유를 인용해 설교하면 꿀이 탐나는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설교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런 베이컨의 비유는 자승자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말한 ‘종족의 우상’(인간이라는 종족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음), 동굴의 우상(개인의 좁은 소견에 갇혀 비롯된 착각들) 에서 자신조차도 못 벗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비유를 인간 사회나 교회에 적용할 때 더 큰 피해가 그 공동체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기식(寄食)의 삶을 살아가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인간 공동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상호작용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 사회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안전한 망을 구축해 나간다. 이 기식의 삶이 프랜시스 베이컨 이후 삶과 문화를 얼마나 기름지고 풍성하게 했는가! 평생 그림 몇 장 못 팔며 동생의 생계비에 기대어 살던 광인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결혼해 가족 부양을 하지 못하고 근근이 살면서 작곡만 하다가 결국 아내와 딸을 잃고 비참하게 살다 죽은 스테판 포스터(Stephen C. Foster, 1826-1864), 그들 역시도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집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나라 잃고 방황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해 평생을 자기 시가 부끄럽다고 자기반성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윤동주(1917-1945), 19세기의 그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 소설가, 인상주의 화가들도 거의 당대에는 사회에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들은 주위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빚을 져가며 겨우 살아야 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철학자, 사상가, 목회자도 결코 있어야 할 사람의 범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현대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J. K. Rowling, 1965-)도 자신도 한때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최고의 실패자였다고 하버드 졸업생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


물론 설교자들이 자본주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려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신앙적 관점에서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는 시도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설교가 결코 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의 인간 분류를 보자. 의인과 악인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 분류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설교자의 현재 시점에서 용서받은 의인과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있다는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의인은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악인은 없어야 할 사람이라고 설교할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의 분류도 마찬가지다.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죄의 성향을 따르는 사람이다. 여기서도 현재 사람들의 영적 성향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를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으로 등치시켜버리는 잔인한 설교를 하고 싶은 목회자가 있을까 싶다.


설교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이런 죄인이나 육에 속한 사람은 사실 없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으로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눅 15:1-17)에 나오는 그 양은 줄곧 목자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목자는 자기의 뜻을 잘 따르는 이미 구원받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제 갈 길로 간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찾은 후에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그 기쁨을 같이 나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죄인은 없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꼭 찾아야만 하는 있어야 할 양인 것이다. 이런 목자의 심정에서 설교가 출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에서 설교자의 말로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할 사람’이 선포되는 순간 엄청난 역효과를 불러온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 속에 있다. 교회도 그렇다. 형식은 비영리 단체지만 영리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헌금을 걷어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보조해야 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더 큰 교회로 이전을 하기 위해 헌금과 토지를 동산, 부동산 자본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남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게 못하면 어느 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런 사회와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라 세상에 속한 교인들도 설교를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해서 듣는다. 그래서 설교자들의 언어는 쉽게 오해된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언어들은 교회라는 조직에 필요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으로 들려 버린다. 그 설교를 하는 순간 소통의 불능 상태가 와 버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시장의 우상(단어의 정의와 대상의 불일치의 오류)을 교인들은 경험하고 만다. “여기 누군가 교회 필요 없는 사람이네. 성경에 그런 얘기 없는데….” 당연히 설교자와 듣는 자의 관계가 깨져 버리고 반박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떤 흉악한 죄인을 향해서도 “참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입니다. 주의 은혜의 손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라는 설교가 아니면 끊어진 인간의 소통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and To Be),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은 내 젊은 시절의 베스트셀러였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의 생존 양식에 있어서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이 있다고 하였다. 사랑은 그 인격과 삶, 존재에 대한 사랑이지 소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흔한 말로 “난 네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필요가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란 뜻이다. 반대급부가 없는 무조건의 사랑이 교회가 들려줘야 할 메시지다. 조건을 붙이면 반대급부가 없을 때 사람을 벌레라 부르게 되어 있다. 


벌레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르고 혐오의 표현으로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벌레라 부르는 열등감의 군상들…. 혹시 설교자들도 그런 자괴감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벌레의 비유를 가져다 쓰지 않았으면 한다. 벌레!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이야 오죽하랴.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그런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람을 함부로 벌레라고 부르지 말자.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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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필립 정

필립 정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BA),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MDiv), 미국 Talbot School of Theology(MA, 목회 상담)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청소년 영어 담당 사역자와 이민 1세대 교회의 목회자로 섬겼다. 현재 Go Eco Pest Control 회사 대표이며,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야생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여 달라스 DKNET 방송국 고정 게스트와 달라스 부동산 라이프 기고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과 벌레의 교감을 다룬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