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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3월 17일 와플 QT_주말칼럼

2024-03-17
주말칼럼 -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 지는 동백처럼 /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 돌아보라 사람아 /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 두려운가 / 사랑했으므로 / 사랑해버렸으므로 /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 피딱지처럼 엉켜서 /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 낫지 않고 싶어라 /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복효근 <목련후기>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지요. 방금 불붙은 사랑을 누가 말린답니까. 못 말려요. 짱구도 못  말리고, 사랑도 못 말립니다. 말리면 더 불이 붙는 속성이 있거든요. 아 글쎄, 두려움이 없다니까요.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이별뿐일 겁니다. 그런데 죽어도 헤어지지 말자는, 우리 사랑 영원 하자던 약속은 대개 가지 끝에 달린 마른 나뭇잎 같아요. 마르고 시들면 톡, 붙잡고 있던 손을 놓더랍니다. 휘익,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는 사랑은 쓸쓸합니다. 입동 지난 찬 서리처럼 시리고 서럽더라지요. 아프고 괴롭고 눈물 나는 게 이별이에요. 헤어지고 나니 유행가가 다 자기 얘기 같더라는 게 괜한 말이 아니더라니까요. 


이별의 찐한 아픔을 겪고 나면 누구나 조용필이 됩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느냐’고 묻거든요. 누가 시켜서 한 사랑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걸까요. 말은 바로 해야지 ‘사랑’이 무슨 죕니까.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걸요. 이루지못한-이룰 수 없는 사랑이 괴로울 뿐인 겁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처럼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져야 하는 ‘우리’는 ‘진실’을 묻고 ‘변명’을 찾습니다. ‘나이스’한 이별 같은 건 연애학 개론서 한쪽 구석에나 처박혀 있으라 해요. 악뮤(AKMU)가 옳아요.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냐고요. 그냥 “널 사랑하는 거지.”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 그게 다 허튼소립니다. 


목련꽃 지는 모습을 보면 뭐랄까, 처연해 보였어요. 늦가을 낙엽 진 자리에도 쓸쓸함이 있지만, 그건 아름답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목련꽃 떨어진 자리의 쓸쓸함에서 아름다움을 세어보지 못했습니다. 외로움이 추하다는걸, 지저분하게 쓸쓸한 자리가 있다는걸 보고 돌아섰을 뿐. 그래서였을 겁니다.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을 하늘에서 떨어진 음성처럼 들은 까닭이.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단정 짓고 살았을까요. ‘지는 모습까지 아름다워야 하는 거’라고, 왜 그런 지나친 바람으로 꽃과 나무를 바라보았을까요. 그 눈총을 받아 내느라 나무는 얼마나 따갑고 숨이 막혔을까요.


 ‘나아마 사람 소발’이 묻습니다. “말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고,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느냐(욥기 11장 2,3절)”고. 아니, 지는 목련은 말도 못 합니까. 봄 한철 활짝 피었다 질 뿐인데, 뭔 죄를 크게 지었다고 함구령이랍니까. 아파서 아프다 하는데, 죽을 것 같아서 찍소리 한 번 낼 뿐인데, 그게 ‘자랑하는 말’로 들렸던가요.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을 ‘자랑’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나요. 허튼소리 말고 곱게 죽으라고,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요.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습니다.” 구름에 달 가듯, 아름답게 고상하게 질 수가 없네요.


모름지기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칼로 무 베듯 끊어낼 수 있는 거였다면, 그렇게 쉬운 거였다면,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요, 나 같은 게 어떻게 ‘사랑’을 다 알겠어요. “지혜의 오묘함(욥기 11장 6절)”이라던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한 계절 피고 지는 ‘꽃 한 송이’가 다 헤아릴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 ‘오묘함’을 다 살필 재간이 없어서, 그게 미치고 팔짝 뛸 일이어서. 누가 그걸 다 헤아릴 수 있답니까.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함’을 ‘당신’만 다 헤아리고 있다는 듯 단정 지으면 곤란합니다. 혼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쉽게, 함부로 떠들면 못씁니다. 


꽃 지니까 지저분해 보이나요. 보이는 게 그뿐이면 제대로 본 건 아닐 겁니다. 지저분을 몰라서 진 게 아니거든요. 피기만 해서 꽃이 아니랍니다. 지기도 해서 꽃인 거지요. 핀 꽃을 찬양하고 진 꽃을 아쉬워하지만, 지지 않는 꽃은 나무를 죽여요. 지는 자리에서라야 비로소 다시 사는 신비가 있답니다. 그 신비로운 질서에 어김없으려고 ‘지저분한’ 꼴로 누렇게 바닥을 뒹구는 겁니다. ‘당신’이 말하는 ‘희망(욥기 11장 18, 20절)’)과 ‘내가’ 겪고 있는 ‘허망(욥기 11장 11-12절)’ 그 사이 어딘가에서 또 다른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도록” 내버려 두세요.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냐고요. 




작성자 :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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