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CITY CATECHISM뉴시티 교리 문답

Question 26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 무엇을 구속합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타락한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이 회복되고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광과 창조 세계의 선함을 위해 만물을 능력으로 다스리십니다.

타락한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입니다.

성경

골로새서 1장 19-20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해설

존 번연 예수는 구속자시다. 그것이 그분의 이름이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모든 불법, 즉 지금의 악한 이 세상에서, 우리의 헛된 행실에서 그 백성을 속량하시기 위해(딛 2:14), 바로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우리를 사시기 위해 자신의 값진 보혈을 흘리셨으며, 우리는 값으로 할 것이 되었다(고전 6:20), 우리 자신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보혈로 산 바 된 그분의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몹시 사랑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결코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실 수 없다(갈 2:20), 바로 그것이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분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계 1:5), 그분은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속하실 것이다.

묵상

버몬 피에르 그랜드 캐니언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는다 해도, 그 사진들 가운데 어느 것도 캐니언의 장관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 그랜드 캐니언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체험이다. 난간으로 다가가 처음으로 캐니언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에서 당신은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곧 그랜드 캐니언의 어마어마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이 그들을 덮쳐 버린다. 정말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장엄한 광경이다.

그러나 그 난간에 서서 캐니언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충분한 경험을 얻지 못한다. 실제로 캐니언을 따라 내려가야 처음에 본 것보다 훨씬 크고 깊으며 더 장엄한 실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서 바라본 그랜드 캐니언의 모습은 당신이 캐니언을 여행하면서 경험하게 될 더 장엄한 모습의 시작일뿐이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처음 복음에 다가설 때, 우리는 매우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본다. 바로 죄인의 구원이다. 더 분명하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범죄한 사람들을 독자적으로 구원하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죄에서 구속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영원히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우며 믿을 수 없는 메시지인가!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속량하시고 구원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 풍성하고 장엄한 광경이 드러난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창조 세계를 아우르는 더 깊고 넓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은 일종의 수원(水源)이다. 이 수원에서 힘 있는 강물이 흘러나온다. 이 강물은 온 우주 구석구석을 구속하고 치료하는 능력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십자가의 피”(골 1:20)를 통해서다. 창조 세계는 인간의 타락으로 속박당한 상태이며, 음부의 문 뒤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용하여 그 문들을 박살 내버리셨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수고를 통해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해방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제 완전히 구속되고, 새로워진 곳인 아들의 나라에 속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행한다.

첫째, 우리에게 미래에 관한 소망을 준다. 우리는 불공정한 사회 체계, 도덕적인 문화의 쇠퇴, 끔찍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주변 모습에서 타락의 증거를 본다. 가장 완전한 형태의 복음 메시지는 우리에게 절망이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한 소망을 이야기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쓸려 나가고 평화와 조화로 대체되어 “만국이 치료될”(계 22:2) 것이다.

그러나 이 소망에는 한 가지 경고가 섞여 있다. 타락한 창조 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 계속해서 그분의 통치와 그 통치를 위해 보내신 유일한 분, 즉 예수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구족 사역은 모든 것, 즉 주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결국 굴복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사람이 직면한 문제는 구속 사역을 즐거운 경외심으로 경험할 것이냐, 아니면 이를 가는 고통으로 경험할 것이냐다.

둘째,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동기를 준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버린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예수를 통해 되찾으시고 결국에는 새로 시작하실 것이다. 그 창조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과 관련하여 올바른 조화와 평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새로운 창조 세계를 위한 초기 전초기지이자, 새로운 창조 세계를 불러올 중요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해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라앉아 버린 창조 세계가 구조될 때만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선객이 아닌 것이다. 구속하고 새롭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고 구현하는 한,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신실하게 수고하는, 거룩하게 임명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기도

창조 세계를 구속하시는 주님, 주님의 나라가 충만히 임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처럼 타락한 채 신음하지 않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주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 주님의 구속이 확장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