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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
by Don Carson
2019-09-18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새로운 탄생 혹은 중생을 일컫는 ‘거듭남’에 관해 예수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그야말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거듭남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꺼내셨을 때(요 3:3), 니고데모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흔히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꺼낸 이 질문을 보며, 그가 얼마나 꽉 막혔는지 예수님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그 표현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한 평가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사실만큼은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즉 사람은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하며, 전혀 다른 생명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다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다시 시작하며, 정말로 새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자랑하면서 그 출발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이 그 어려움을 다음처럼 잘 표현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기록한다 기록한 후에도 / 또 계속 움직인다 그대의 모든 경건도 지혜도 / 그 손가락을 되돌려 반 문장도 지우게 할 수 없다 / 그대의 모든 눈물로도 단 한마디도 씻어낼 수 없다.”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잘못과 죄악만이라도 지워 버리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기도 한다.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은 이렇게 기록했다. “오, 내 안에 일어나는 한 사람이 있으니 /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더는 아니기를.” 또 다른 시인인 존 클레어(John Cla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인생에도 개정판이 있다면, 그 원고를 어떻게 수정할꼬.” 니고데모는 사람이 새로운 출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항해길에 오른 지가 한참이니,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기엔 늦지 않았는가(요 3:4,9). 만일 그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면, 소망은 아주 없어 보인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거듭나야 한다는 요점을 다시 강조하신다. 다만 ‘거듭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확장시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관건이 된다.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을까?불충분한 설명들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은 그리 충분치 못한 답변으로 판명이 났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이 표현을 통해 두 가지 출생을 가르키신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사람은 (물로 태어나는) 자연적인 출생뿐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는 데서 더 나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의 표현은 새로운 의미가 결여된 진부한 내용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표현의 첫 번째 부분(즉 ‘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이 다음과 같은 내용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는 존재해야 한다. 너는 자연적으로 출생하여 이곳에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부분(즉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2) 고대 사회에서 자연적인 출생을 가리키기 위한 어구로 ‘물로 나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자연적인 출생에 앞서 자궁에 있는 양수가 터져 나오는 현상을 보고 ‘물로 나다’라는 표현을 생각해 낼 수도 있겠으나,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 문헌이나 헬라 문헌에서 그런 의미로 이 표현이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 볼 때,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또 다른 견해로서 성례적 해석이라고 불리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출생이란 물과 성령 모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데 이때의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맥락에서 니고데모가 ‘물’이라는 표현으로부터 기독교의 세례 의식을 떠올릴 거라고 예상하며 예수님이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푸시지 않고 그 의식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실을 소개한다(요 4:2). 이는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더 나은 설명그렇다면 더 나은 설명이 있을까? 먼저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의 유사성이 잘 드러나도록 아래와 같이 배열해 보도록 하겠다.(요한복음 3장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한복음 3장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여기서 금방 알 수 있듯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5절)은 ‘거듭나다’라는 표현(3절)과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자연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으로 구분되는 두 차례의 출생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표현은, 예수님이 앞서 언급하신 ‘거듭나다’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단회적인 출생’을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사용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그분이 ‘거듭나다’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신 내용을 부연하며 이는 다름 아닌 니고데모의 질문(4절)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설명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답변이 니고데모에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질책하셨다(요 3:9-10). 왜냐하면 당시 니고데모는 성경에 정통한 지식을 갖춘 바리새인으로서 현재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책을 연구하며 그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신학적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학식을 가진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제(곧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부가하신 표현(즉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표현)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내용을 파악해야 했을까?그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를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구약성경 어디에 ‘물’과 ‘성령’이 한 문맥 안에 같이 언급되어 새로운 변화를 약속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는 본문은 에스겔 36장 25-27절이다.“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하나님은 주전 6세기에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가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그 변화는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제거하는 맑은 ‘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도 설명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즉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예언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여기에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에 대한 지금 이 해석은 본문의 이어지는 내용과 요한복음 전체와도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출생이 일어나야 한다는 자신의 선언이 다름 아닌 계시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말씀이라고 주장하신다. 즉 그분 자신이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계시라는 것이다(요 3:11-13; 참고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기록된 계시인 구약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악과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그 권능으로 구원하시는 패턴도 이미 구약에 제시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신다(요 3:14-15; 참고 민 21:4-9).결국 이 모든 진리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요 3:16-21).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진리를 믿게 만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Doe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Mean in John 3:5?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물
성령
요한복음3장5절
오마르카이얌
알프레드로드테니슨
존클레어
목회 현장에서 오래 견디려면
by Michael Osborne
2019-09-17
열왕기상 19장 4절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외침에 익숙한 목회자가 많을 것이다. 엘리야가 이제는 더 이상 못견디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외침 말이다. 엘리야는 왜 그토록 괴로움에 휩싸였을까? 바로 전에 그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하지 않았던가(왕상 18:20-46)? 물론이다. 하지만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라면, 엘리야에게 찾아 온 것과 같은 권태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굉장했던 주일이 얼마나 자주 우울한 월요일이 되고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매달 목회직을 그만두는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은 통념처럼 되었다. 상황이 그 정도로 끔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복음적 목회자들이 간혹 월요일에만 우울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다고 느낀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저임금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하며, 우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욕 상실을 느끼며 사역을 하고 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며, 위기와 갈등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런 목회자들의 몸은 강단에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가슴은 복음의 열정으로 더 이상 뛰지 않는다. 목회를 30년 하는 동안 엘리야와 같이 사역을 떠나고 싶고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은 적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아직 목회직에 남아 있다. 나는 말씀을 가르치고, 성찬 예식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세 가지 핵심적인 결심이 나를 목회직에 계속 남아 있도록 도와주었다. 첫째, 목회 중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어리석게도 이 부분을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복음주의 목회자 알랜 레드패스(Alan Redpath)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당신이 목회자라면, 항상 위기 속에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위기의 한 가운데 처해 있든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든지, 혹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든지 말이다.” 목회자들은 아주 형편없이 망가진 사람들을 마주 대하여야 하고, 대적 마귀 그리고 육적인 것과 매일 대립하며 갈등한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 자신도 깨진 혹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목회 사역에는 난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예견한 목회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노스햄튼의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들과 그들의 목회적 돌봄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차이와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악한 이 세상에서 종종 겪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몇 해 전에, 나는 교단 총회에 참석했다. 그때 나는 잠깐 대회장을 둘러 보고 “여기 모인 목회자들은 모두 정서적으로 어떨까?” 궁금해졌다. 즉흥적으로 나는 그 생각을 트윗으로 바꾸고 컨퍼런스를 해시태그해서 내보냈다. 그 트윗의 내용은 이랬다. “천 명의 목회자들이 이번 주 총회에 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마음이 상하고, 외로움을 느낄 거 같습니까?” 금방 수많은 트윗 팔로워들이 생겼다. 컨퍼런스 장소에서 내 트윗을 본 여러 목회자들이 다가와서 내게 감사를 표현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군가가 자기들의 마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둘째,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기초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역자들이 자신을 편하게 느끼고 (감히 말하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몇 해 전 멘토가 내게 말해준 것처럼,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 목회를 해야 한다. 우리가 되기 원하는 모습으로 목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은 1732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에 ‘롯 안의 사기꾼, 혹은 남자의 고뇌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The Crook in the Lot: Or, the Sovereignty and Wisdom of God Displayed in the Afflictions of Men)라는 소책자를 저술했다. 거기에서 보스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설계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약함과 투쟁과 실패 조차도 말이다.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믿음으로 무장하면, 우리는 목회를 느긋이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강점에 집중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도 있다.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시편 기자처럼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게 된다. 세속 문화는 크고, 근사하며, 매끈한 사람을 좋아하고, 작고 평범하며 신실한 사람을 폄하한다.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세속 문화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다. 셋째, 목회 사역을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목회는 홀로 할 수 없다. 도우미가 필요하고 친구들이 필요하다.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크게 외쳐도, 목회자 대부분은 메시아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쨋든지 신학교 학위와 올바른 신학, 은사와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의 도움과 성도들이 협조만 하면 우리가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가장 외로운 사람들 중의 한 부류라는 것은 사실이다. 연구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들의 약 70퍼센트가 가까운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2009년 릴리 기금(Lilly Endowment)의 지원으로 진행된 세 개의 기독교 교단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다른 목회자들과의 친구 관계가 부족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친밀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참석하지 않으려고 핑계거리를 찾는다. 목회자들이 이런 점을 주의하지 않는 한, 목회는 그들에게 고립을 주는 과제가 될 뿐이다. 나는 전형적으로 내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알고, 좋아하며, 수긍하며, 웃게 만들고 건강하게 지켜주는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친구가 되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어떤 소그룹에 속해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점과 실패까지도 알고 있는 다섯 명의 남성들과 매주 수요일에 만난다. 신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한 목회자와 한 달에 한번씩 점심 식사를 한다. 나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친교를 나누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일은 다른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이지 사역을 나 스스로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의 문제 중의 하나는 자초한 고립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왕상 19:10,14)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신실한 사람들 칠천 명이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았다고 소식을 전했다(18절).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결심으로, 나는 목회가 도전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기쁨을 공급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과 영, 말씀과 약속,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목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과 더불어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우리가 목회 현장에서 오래 사역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Ministry for the Long Haul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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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Wilson
2019-09-16
영어 단어의 수가 20만개를 넘어서지만, 나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단어는 은혜(charis)와 기쁨(chara)이라는 아름다운 헬라어가 감사(eucharistia)와 선물(charismatia)의 개념들과 합성되어 만들어졌다. 이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을 요약하는 단어로,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귀하게 여기며 축하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이 성례전적(성찬과 예전)이든지 혹은 은사적(예언과 치유)이든지, 교회의 전통이라는 창고에서 옛 보물과 새 보물을 꺼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감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축하하며 성찬을 드릴 수 있도록 초대한다는 뜻이다.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유카리스마틱’(Eucharismatic)이다.예배가 어지럽혀지다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예배가 어지럽혀진다는 말은 최악의 상태인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나는 이에 공감하며, 12세 소년이 기독교 성례전에 처음 참여하게 된 경험을 떠올려 본다. 그때, 그는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사제 모자를 쓴 남성이, 성상들에 둘러 쌓여,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내 마음이 벅차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낭독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또한 기독교 TV에 나와서 아주 기본적인 번영 설교를 하며 성경을 들고 흔드는 설교자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생각해 본다.교회의 예배 의식들을 생각해 보면, 새롭게 도입된 많은 예배 의식은 죄와 고통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전통적으로 오래 지켜온 예배 의식 역시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예배 시간이 극도로 지루했던 기억이 있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목석같은 사람들에게 매주 같은 말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는 설교를 들으며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은 어린 내게 큰 고역이었다. 그리고 어린 십대 아이로서, 지극히 창피했던 기억도 있다. 예배 시간에 중년의 여성들이 치마를 빙빙 돌리며, 발을 구르고, 탬버린을 흔들면서,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로 유대교의 멜로디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합창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혹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성례전을 중시하는 교회들이 목석같고, 은사를 중시하는 교회가 우스꽝스럽다면,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Eucharismatic) 모습은 목석같고 우스꽝스러움, 둘 다에 해당될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은 없다. 한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셰익스피어, 성(sex), 모짜르트, 좋은 포도주, 성부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지루하고 창피함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사로잡을 만한 진리조차도 그들에게는 너무 감성적이거나 영혼 파괴적인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매주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에게 당혹감이나 불만을 느끼게 하지 않는 예배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배 의식에 불만이 있다고 그것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예배 의식이 꼭 그런 식으로 행해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교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예배 의식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난 경우를 무수히 많이 보며 실망했다. 하지만 나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를 연구하고 소망을 되찾았다.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의 아름다움그 다음 나는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상황이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물론 목석이나 허수아비 같은 사람도 있다. 형식주의란 목욕물과 함께 성례전이라는 아기를 버려버린 현대 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도 똑같이 뻔하며 형식주의의 목욕물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 되었는데도 계속 그 방식을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혹은 반대편의 전통주의자들의 예배에서는, 어느 누구도 전혀 놀라지 않고,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누구도 미소를 짓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가지보다 훨씬 더 흔한 모습은 역사와 관습 그리고 이 두 극단에 대한 회피가 어우러져, 인간성이 배재된 채 성경-교회라는 패러다임 안에 갇혀 있는 교회들의 예배 의식이다. 오래된 것은 케케묵은 일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고, 새로운 것은 문화적 유행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여, 그들은 20대와 50대의 어디쯤에서, 안전하지만 무기력하고, 뻔하지만 우아한 예배를 선택한다. 그들은 성례전이나 감정에는 더없이 자유로우나,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면도 결핍되고 영적인 면도 결핍된 예배를 드린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 중 어떤 면은 당신에게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구체화된 예배의 기쁨을 맞이하는 교회를 상상해보라고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물, 떡과 잔, 기름과 같은 상징의 힘을 재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도들이 그동안 놓치고 있던 성경적 요소들을 예배에 포함시키고, 거의 잊고 있던 복음의 깊이를 찾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수도사들의 기도문과 순교자들의 노래를 사용할 때 그 효과가 증폭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도들은 수백 년 전에 죽은 이들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을 읽을 때보다 더 큰 활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모든 성도들은 성례전에 기쁨으로 참여한다. 그 다음, 교회가 성령에 깊이 감화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즉흥적으로 찬양이 터져 나오고 기쁨이 얼굴에 퍼지는 모습을 말이다. 치유 은사가 있는 이들은 병든 자를 고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편 150편을 읽으며 치유를 실행한다. 필요할 때는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임에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한다. 때로는 소리치고 때로는 춤을 춘다. 어린 아이들처럼 웃는다. 그리고 마치 유다의 사자가 그들의 자리 끝에서 깃털을 세우고 튀어나올 것처럼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이 집에서나 사무실에서 그들에게 이야기하시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예배는 영국 사람들의 장례식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의 결혼식처럼 보인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을 함께 놓아 보자. 치유의 간증과 고백의 기도, 시편, 찬송과 영적 노래들, 물세례와 성령세례, 영혼을 움직이는 교리와 몸을 움직이는 리듬을 포함하는 예배를 상상해 보라.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꾸며, 아들과 딸이 예언하고, 모두가 같은 성찬에 참여하며 각각의 방식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을 볼 수 있는가?그 모습은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t Means to Be Eucharismatic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성례전
은사
기쁨
감사
선물
유카리스마틱
시편
형벌적 대속론을 정립해준 세가지 사실
by Daniel Hames
2019-09-14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자랐다. 여름 수련회, 휴일 특별 성경공부, 그리고 주일학교 토론회 등의 모든 모임에서 핵심 메시지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죄와 내가 받아야 할 형벌까지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 결과 이제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신학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또 내 믿음을 점검하면서,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믿음에 대해서 나는 점점 더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여태 알고 이해하던 기존의 십자가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지한 질문을 던진 몇 분의 저자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이 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인’(A New Kind of Christian)과 스티브 초크(Steve Chalke)와 알란 맨(Alan Mann)이 쓴, 이제는 꽤나 유명해진 ‘잃어버린 예수의 메시지’(The Lost Message of Jesus) 중 다음 부분도 읽었다. “십자가는 우주적으로 저질러진 아동 학대 범죄가 아니다. 십자가는 복수하는 아버지, 아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아들을 벌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략] 만약에 십자가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저질러진 인류를 향한 폭력의 행사라면, 단지 아들이 대신 그 폭력을 당하도록 한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된다. [중략] 하나님은 화가 난 신이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의 모습에 더 가깝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모습일 수는 없다.”나는 안셈(Anselm)의 만족설(theory of satisfaction)에 관한 비판을 읽었다. 비록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론이지만, 그것도 결국 고작해야 중세 서구의 법의학 수준에 그친다는 비판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진노한 신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에게나 어울리는 생각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초기 기독교 작가들은 이런 이교도 신들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거기서 한 걸음 벗어나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대가, 그리고 대속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형태로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는 브래들리 저색(Bradley Jersak)이 이야기했듯이, 단지 “칼뱅의 상상이 만들어낸 법정 드라마” 정도로만 부각될지 모른다. 결국 이런 시각은 다 하나님을 화난 존재로, 아들을 희생자로 그리고 나는 감사해야 하는 존재로, 무엇보다 십가가형이 주는 폭력적인 공포의 수익자로 만든다.어릴 때부터 들어서 익숙해진 속죄에 대한 이런 그림은 끔찍할 정도로 왜곡되고, 단순하고 또 역사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좀 앞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거기로 다시 돌아가서그러나 몇 년에 걸쳐서 신학적인 혁명을 가져온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들의 결론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이해한 십자가가 정말로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던 걸까? 물론, 난 아이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일학교 이야기를 비판한 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과 함께 내 과거를 코웃음 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중고등부 시절 붙잡았던 믿음을 해체하고, 내가 좋아하게 된 새로운 작가들의 생각에 근거해서 당당하게 그 믿음을 던져버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심각한 수준의 속죄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진정한 신학적인 혁명일까? 나는 칼뱅, 이레니우스(Irenaeus), 안셈 또는 아나스타시스(Athanasius)의 글을 읽은 적은 없다. 솔직히 성경을 진지하게 읽은 적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사실은 내게 심각하게 경고하는 듯 보였다. 기존의 신학을 제대로 모르면서 새로운 신학에 파고드는 것은 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어처구니없는 길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한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복수심에 불타는 이방신의 이미지를 닮은 하나님, 사랑없는 하나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믿고 있던 진짜 하나님과 조금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새롭게 인지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도대체 얼마나 믿을만했던 걸까?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정립시켜 주었다. 이제 나는 신앙이 처음 뿌리내린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1. 진짜 성경을 제대로 읽기누구든지 이사야서 53장 5절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과 같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결정적인’(clobber) 구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얼마든지 이런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고, 또 다른 구절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전혀 다른 십자가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깊이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성경의 위대한 주제와 유형에 비추어 이 본문들을 보게 되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동물 가죽,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숫양, 유월절 양과 맏아들, 출애굽할 때 닥친 심판의 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온 세상을 뒤덮은 어둠, 이 모든 사건을 대속과 우리를 대신해서 흘린 피라는 의미를 빼고 나는 도저히 다른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실제로 전체 주제를 고려해 통합적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또 구약을 복음의 예시라는 관점에서 읽음으로, 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졌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메시지이지 결코 곁다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결코 의도적으로 조작된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삼위일체어린 시절에 들었던 십자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는 삼위일체에 근거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죄를 너무 싫어하기에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이었고,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일종의 제3자였다. 이런 설명도 일부는 맞다. 그러나 너무도 단순한 이런 설명은 복음과 삼위일체를 왜곡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를 가르친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서 그 누구도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나는 고작해야 열 살이었다. 그런 우리였기에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성경에 따르면,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 모두가 다 죄로 인해서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 모두가 다 이 죄를 함께 진멸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세상을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아들이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영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 보면,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체를 입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종이 되어 죽기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순종했다. 진노의 잔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에서 드리는 그의 기도를 보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6:42).‘복수하는 하나님’과 ‘죄 없는 예수님’을 굳이 서로 대척점에 놓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 바로 죄를 싫어하고, 또 죄인을 구하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저주하는 바로 그 사건에 스스로 참여한 아들의 공모(complicity)는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 중 하나이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됨으로 우리는 믿음을 더 굳건히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까지 더 잘 보게 된다.3. 역사 속에 드러난 교회의 증거예수님이 마지못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벌적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속죄 이론 중에서도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비난을 여전히 되풀이하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형벌적 대속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건, 왜곡과 혀가 꼬이는 이상한 소리(lisping) 뿐일 것이라는 비판도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초창기 변증에 관한 글을 하나 보도록 하자. 2세기에 쓰인 마테데스(Mathetes)가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교환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혜택! 많은 사람의 사악함이 한 명의 의로운 이로 인해 숨겨지고, 그 한 의로운 이가 수많은 범죄자를 다 의롭게 만들다니!시편 51편 주해를 하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썼다.“주님조차도 죽음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건 죄로 인한 게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아들였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없앴다. [중략]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다름 아닌 원죄 때문에 말이다. [중략] 그렇기에 화해를 위한 중보자가 필요했다. 한 번의 희생을 바침으로써 율법과 선지자가 행한 모든 희생이 예시하던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졌다. [중략] 이제 하나님이 화가 났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분노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왜곡된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감정을 기초로 해서 비유로 전달된 단어, ‘분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지 죄에 대한 그의 불만이라고 부른다.”심지어 고대의 노래조차 진노를 대신 받아서 짊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한다. 1500년 전에 쓰인 베난시오 포르투나토(Venantius Fortunatus, AD 530–607)의 아름다운 찬양,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See the Destined Day Arise)는 이렇게 시작한다.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 기꺼이 희생제물이 된 이를 보아라. 예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저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 그가 아니면 다른 그 누가 하나님의 위대하고 공의로운 진노를 감히 대신 질 수 있을까? 모든 고통, 모든 가시, 저주받은 너의 삶을 회복한다.”나는 또 현대 복음주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와 제임스 패커의 ‘십자가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What Did the Cross Achieve?)를 읽고 그들의 관점 또한 내가 과거 신학 고전 속에서 발견한 것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인가!아마도 어렸을 때 내가 이해한 십자가는 얕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통해서 또 교회 역사를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응시했고 또 동시에 나의 위치와 내 죄를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대한 각종 사례는 잘못된 것들이 적지 않기에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표성, 머리됨과 하나됨, 악한 세력이 전복, 십자가를 통한 전 우주적 승리 등의 가장 중요한 개념만은 달라질 수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모든 진리는 다 어릴 때 배운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저장되었던 ‘좋은 기초’(good deposit)가 있었기 때문에 더 강화되고 풍성하게 될 수 있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I Changed My Mind About Penal Substitution번역: 무제
복음
십자가
희생
이방신
심판
삼위일체
진노
형벌적대속
어거스틴
학대와 복종 사이 명확한 성경적 가르침
by John Piper
2019-09-13
여러 해 전에 나는 온라인 질의응답 코너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학대하는 남편에게도 아내는 복종해야 할까요?”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아내가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비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7 가지로 정리해 보려 한다. 1. 복종해야 하는 관계들이 상충될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권위에 복종하고 또한 서로에게 복종하도록 부름 받았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녀는 부모에게(엡 6:1), 시민은 정부에게(롬 13:1), 아내는 남편에게(엡 5:22), 고용인은 고용자에게(살후 3:10), 교인은 장로에게(히 13:1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엡 5:21),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께(눅 6:46) 복종하라고 한다.이 본문들은 부부 관계 안에서의 복종을 그리스도, 행정 권위자, 서로, 그리고 교회 등 좀 더 넓은 범주로 확대시켜 놓는다. 이는 복종의 행위가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려면 이 모든 관계들이 적절한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두 우선적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할 책임이 있다. 그 다음, 그 밑의 다양한 다른 사람들과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이 복종의 관계들이 상충될 때는 사랑과 순종의 방향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며, 성경 중심적인 겸손과 영적인 지혜가 요구된다. 2. 학대하는 남편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것이다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는 명령을 받았다. 성경은 남편에게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엡 5:28–29)라고 말한다.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처럼 하라는 말씀의 초점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는 데 있다.하지만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유한하며 죄에 빠지기 쉬운, 죄 사함을 받은 죄인들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그들의 아내들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똑같이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같은 지혜와 능력 및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들이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인도하는 모습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그녀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중략] 보살피며 소중히 여기고 [중략]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말로 제한된다. 그러므로 아내를 학대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또한 아내는 교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크리스천 여성이 경찰에게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회가 성경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도울 수 있음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3. 여성들은 정부기관이 제공하는 도움을 신실하게 요청할 수 있다교회가 도울 수 있지만, 또한 학대받은 아내가 정부기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바른 일이다. 배우자나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위협이나 고의로 신체상의 위해를 가하는 일은 범죄이다. 가해자는 벌금을 물을 수도 있고, 감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둘 다에 해당될 수도 있다. 이는 아내를 위협하거나 고의로 상해를 입힌 남편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민법도 어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남편이 자신이 행한 위협과 상해를 아내가 조용히 수긍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덕법과 국가의 민법 둘 다를 어기는 데 그녀도 동조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법 집행관들을 세워 두셨다.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 이 말씀은 남편에게 상해를 입은 아내가 민법의 권위를 추구하고 이에 복종할 때, 이를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라는 부부 관계의 정신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이 합법적인 시민 보호 수단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의 회개와 돌봄의 리더십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무겁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수단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한 가지 이상의 자비를 베풀도록 부름받았다교회는 학대하는 남성이나 여성을 교회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당국이 알고 처벌하려고 할 때, 그들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우리는 자비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공의로 행해야 할 때도 있다. 범법 행위의 경우가 종종 그러하다. 또한 벌금을 내야 하거나 감옥에 가야 하는 범법자에게 자비를 보여 주는 길에는 여러 접근과 형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대부분의 상황은 자비를 선택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고민처럼 단순하지 않다.5.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학대를 홀로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많은 여성들은 남편이 감옥에 가고 직장을 잃으며,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관의 도움을 얻어야 할 만큼 절실해지기 전에는 남편의 많은 죄악된 행위를 종종 그냥 견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절실한 상황 혹은 상해를 입는 상황에 이르기 훨씬 전에, 교회는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모든 교회에 그런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영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비로운 남성과 여성이 항상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교회에 그런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성숙한 형제자매들은 교회 내의 학대받는 결혼 관계에 개입하여 남편을 회개와 화해로 이끌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남편들이 법을 어겼음을 알게 되면 민간기관에 알릴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교회는 여성 혹은 남성 그 누구라도 학대를 홀로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6. 성경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탈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라고 명하실 때, 그분은 일방적인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나는 복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하지만 이것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다. 성경은 도망하는 것도 정당한 행위로 보고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씨름했다. 도망하는 사람은 그리하도록 보장된다. 견딜 사람은 그리하도록 보장된다. 참으로, 한 사람이 도망할 수도 있고 견딜 수도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도망하기도 했고(출 2:15), 참기도 했다(히 11:27). 다윗도 도망하기도 했고(삼상 19:12), 참기도 했다(삼상 24:8). 예레미야도 도망했고(렘 37:11-12), 참았다(렘 38:17). 그리스도는 스스로 물러섰고(눅 9:10), 참으셨다(요 18:108). 바울도 도망했고(고후 11:33), 참았다(행 20:22-23). 노예처럼 두려움을 피해 도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도망하라. 하나님의 섭리로 문이 열리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도피할 문을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하라는 말이다(마 10:23). 7. 성경은 공급과 보호를 촉구한다성경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연약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수단과 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도적으로 그것을 감당하라는 의미이다. 이 본문은 도움을 주기 위해 연약한 자들을 방문하며, 또한 그들에게 공급과 보호를 제공하라고 촉구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른 편 뺨도 돌려 대며”(마 5:39)라고 하신 말씀의 초점은 ‘내가 참을 수 있다면, 그것도 참아 내라고 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부당함의 순환을 깨뜨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취해야 할 모습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과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상호보완적 결혼 관계의 아름다운 비전을 알려라. 남성들은 자신의 용기와 온유함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의 온유함에도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았다. 성경적인 남성다움을 보여 주는 것의 일환으로, 교회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행하는 학대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원제: Clarifying Words on Wife Abuse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학대
남편
불순종
존번연
온유함
복종
열방을 품게 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by David Strain
2019-09-12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성경의 위대한 진리에 관해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더 나아가 영성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내용을 몇 차례 확인했던 것이다(참고로 이에 관한 저자의 아티클은 신학 섹션과 영성 섹션에 각각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참된 기독교 영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그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큰 주제 속에 묶여 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이때 부여된 정체성이 우리 각자를 새로운 공동체 안에 두어 또다시 새로운 영성을 따라 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내용에 이어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 자신이나 교회 안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 각자를 넘어 타인에게로 마음이 향하도록 만들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사람들을 이끄는 선교 사역을 통해, 세상 끝까지 그 마음이 확장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땅끝에서부터 예배자를 불러 모으시는 삼위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이 세상 속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예배를 지향한다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선교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연합에서 비롯되는 예배의 목적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진리이다. 이 사실은 그 어떤 본문보다도 에베소서 1장 3-1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의 찬송은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정점에 이른 구속의 역사를 거쳐, 마침내는 우리 각자가 복음을 믿게 되는 경험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체 전망을 펼쳐 보인다. 이때 구원의 각 단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드러내는 국면으로 설명된다. 즉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속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같은 죄인을 성령의 사역으로 그 아들과 연합시키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며(6, 14절),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영광에 대한 찬송이 되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성경은 밝힌다(12절).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아들과 연합하게 하신 목적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찬송, 곧 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진리이다. 이는 영원히 찬송 받으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진리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강조한 이 진리를 로마서 11장 33-36절에서도 설명한다. 곧 1장에서 10장에 걸쳐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값없이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놀라운 복음을 전한 바울은 11장에 들어서며 하나님의 선택에 감추어진 큰 신비와 또한 말씀 전파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광대한 계획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 끝에, 억제치 못한 그의 마음이 찬송으로 터져 나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우리는 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 안에서 새로운 몸을 이루고 진정한 영성을 회복하여 마침내는 영광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가? 이를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분명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창조 세계 전체에 자신의 탁월한 지혜와 자비 그리고 은혜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신다.선교에 관해 생각할 때, 바로 이 목적을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선교에 대한 우리의 실리적인 생각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 사역이 얼마나 대중적인지,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지, 아니면 어떤 성과를 가져올지 하는 문제를 넘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과연 이 사역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그렇다면 이 사역을 수행하는 방식은 인간 중심적인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각 개인과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높이는 데 그 연합의 목적이 있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선교를 요구한다이처럼 죄인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돌이켜 거룩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그분을 찬송하게 하는 데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요구하는 선교의 사명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만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향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에 있다면, 그 목적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물어야 한다. 즉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가? 나는 앞서 다른 아티클에서 영성에 관해 논의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 적이 있다(영성 섹션에 게재된 ‘참된 기독교 영성에 관하여’를 참고하라). 거기서 우리는 예배의 주제를 다루며 은혜의 방편을 통해 개인과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내용이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이다. 이제는 거기서 다루지 못한 또 다른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내용은 바로 선교와 관련되어 있다.존 파이퍼가 선교에 관해 저술한 탁월한 책으로 인해 유명하게 된 문구가 있다. 바로 ‘열방을 향해 가라’(Let the Nations Be Glad)이다. 그 책에서 파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가 아닌 예배이다.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할 것이다. 그러나 전도를 영원히 하진 않을 것이다. 또 영광스러운 주님을 마주 대할 때 찬송을 멈출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때 이미 멈춰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날에는 누구도 그리스도에게 새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면,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은 서로를 알 듯 그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선교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아직 그분을 알지 못하여 예배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향하는 목적이 예배에 있고 선교의 목적도 예배에 있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선교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4절부터 6장 1절에 이르는 본문을 통해 그의 선교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교리를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우선 그는 5장 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18-19절에서는 바로 그 연합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러한 사실이 바울 자신의 사역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했는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5:20-6:1).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을 대신하여 일한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그분을 대신하여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며, 바로 그분이 우리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알리신다는 것이다. 이는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주일 예배의 설교 시간에든, 차와 머핀을 즐기며 커피숍에 있는 시간에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비신자를 향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 비신자에게 알리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선교 또는 전도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보이는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사용하여 우리 각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분을 대신한다.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세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에게는 담대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지혜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또한 모든 말씀을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일이 혹 두렵고 떨리더라도 말이다. 죽은 자를 일으키고, 못 듣는 자로 듣게 하며, 맹인이 눈을 열어 보게끔 만드는 구원의 능력은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대사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두려움과 맞서 싸우자. 그분이 우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둘째,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다. 전도는 예배를 위한 활동이며, 예배는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분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분과 분리된 인생은 얼마나 엉성하기 그지없는지, 또 그분과 연합된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부요한지를 드러낸다.셋째, 우리에게는 비전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제자들의 공동체이므로 건강한 교회라면 선교 사역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교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사람들을 이끌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그들을 끌어안지도 않는다면, 더 이상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선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 선교를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우리 곁에만 두려 한다면,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지역과 세계 곳곳에 나아가 제자를 삼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자들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을 모르는 이웃과 친구 또는 동료들을 위한 공동체로 우리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고립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면, 그분의 제자를 삼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Union with Christ and Mission번역: 장성우
선교지침
존파이퍼
연합
예배
비전
전도
담대함
기쁨
그리스도
갈등을 다루는 삶의 기술
by Josh Squires
2019-09-11
내게 갈등을 다루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바랐다. 나는 갈등을 정말로 싫어했고, 이를 회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성격과 상황, 죄 등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나는 상대방과 갈등 속에 있는 것 보다는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 그냥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약 30년 전에 내가 상담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내게 갈등이 항상 관계에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그 사람은 우리가 누군가와 갈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그와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은 내게 혁명적인 생각이었지만 갈등을 잘 다루는 기술은 쉽게 습득되지 않았다. 그것은 헌신과 지속성, 그리고 잘못했을 때 용서할 수 있는 의지가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갈등을 다루는 기법은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때 필요한 삶의 기술에 속한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2절은 이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이 구절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면서 양육해야 할 품성들을 언급하면서, 그것들을 외적으로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내적으로는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에게 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다룰 때 도움이 되는 지침들을 살펴보자. 1. 긍휼긍휼이 첫 번째 자질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긍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감정이다(마 20:34; 막 1:41; 눅 7:13; 마 9:38; 14:14; 15:32; 막 6:34; 8:2).긍휼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사정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깊이 움직여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누군가의 상황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지기 위해서는 그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즉 말하기보다는 먼저 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잠 18:13).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이 당신이더라도, 어떻게 그의 마음이 상했는지를 이해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양쪽 모두 상대방이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느낄 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듣는 일은 특히나 어렵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듣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먼저 내려놓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영적 성숙의 표지이다. 2. 자비자비는 행동으로 표현된 긍휼이다. 갈등 중에도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며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주려는 의지를 가져라. 눈을 위아래로 굴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거나, 혹은 한숨을 내쉬는 것보다 갈등을 더 빨리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없다. 몸의 언어와 목소리의 톤을 조절하는 것은 긴장되는 순간에 의사소통의 효과를 높이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자비로운 태도는 또한 생각과 말에 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적인 의사소통은 각자 상하고 화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천천히 다루게 되면 대부분 미리 무산되고 만다. 상하고 화난 생각들을 대면하라. 당신도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떠올려 보라(롬 3:23).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심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그리고 당신과 갈등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용서와 감사를 적용할 수 있기를 주님께 간구하라(골 3:13).3. 겸손겸손은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게임이론’에 근거한 사고방식 때문에 갈등에 휘말린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덕을 세워주기(엡 4:15–16; 롬 14:19; 살전 5:11)보다는 상대의 잘못을 탓하는 비난을 주고받게 된다. 갈등을 통해 개인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욕망을 버려라. 그 대신, 그 기회를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로 여겨보라. 4. 온유온유는 상대의 말을 비난으로만 여기기보다 도움으로도 생각해보는 행동이다. 이 말은 갈등의 정도를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갈등으로 인한 억압된 감정은 대체로 전략적으로 방출되기보다는 화산의 폭발처럼 분출된다.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언제 어떻게 그것에 대해 소통할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상처에 대해 다 논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 1부터 10까지의 척도로 측정해 볼 때, 당신의 상처가 5 이하이면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잊기 위해 노력해 보라(골 3:13). 그렇게 할 수 없거나 그 수치가 5 이상이면, 그 상처에 대해 언제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지혜롭게 생각해 보라.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활동하는 행동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밤 시간까지 대화를 이어 간다면, 그 사람에게 늦은 밤까지 깊이 집중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녁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에게 아침 일찍부터 대화에 집중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당신은 또한 상처가 되지 않는 말이나 비난이 섞이지 않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다(잠 16:24). 당신이 얼마나 화가 나고 불만이 있든지 상관없이, 상대방을 방어적인 모드가 되게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이는 8%에도 미치지 못하는 효과를 거둔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5. 인내인내는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계속 도움을 제공하게 한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인내하신 것처럼 당신도 그 사람에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당신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여기에 넣어 보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엄청난 번개를 내리치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게, 과거에 행한 것처럼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는 경향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거나 저버리시지 않는다. 그 대신 그분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사람들은 일생 동안 같은 부류의 것들과 투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도움을 잘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는가? 당신의 배우자가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가? 세부 사항을 다루기 어려워하는 형제자매 때문에 짜증나는 경우가 많은가? 아마도 그러한 성향이 갑자기 극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명백한 상처를 초래하므로, 그냥 괜찮은 척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바뀔 것이라는 너무 높은 기대를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관되게 사랑스런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은 때로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며, 훨씬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효과가 있다. 갈등에 처해 있을 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인내하는 것은 정말로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조언은 명확하다. 무엇을 하든지 항상 이러한 자질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골 3:17).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의 반대편에서 서로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복음이 가장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Christian Conflict: Five Ways to Fight It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갈등
기술
긍휼
자비
온유
인내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넜다!
by Tim Keller
2019-09-10
신약성경의 안내에 따라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 구약의 한 본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패러다임을 보여 주는 출애굽 기사의 본문이다.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위치한 R. C. 스프로울(Sproul) 박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 그 집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그 집에는 영국의 구약학자 알렉 모티어(Alec Motyer)가 머물고 있었고, 나 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프로울이 모티어에게 청했다. “어떻게 구약이 신약과 연결되는지 우리에게 좀 이야기해 주실래요?” 이에 모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말을 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중 한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물었다면, 그는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타국에서 종살이를 하며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양의 피를 집에 바르고 도망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지도자를 따라 도망쳐 나온 후로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죠. 갈 길이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이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고 또 성막을 주셔서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시죠.’라고 말이지요.”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거의 똑같이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나는 그 말에 놀라며 생각했다. ‘과연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사실을 말해 왔다. 지금도 다른 종교들이 어떠한지를 수시로 확인한다. 혹 누군가가 “그렇다면 여기 이 종교는 어떻습니까?”라고 지적하며 나한테 마치 속았다는 듯 비난할 때, “그 종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라고 반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는 다리를 놓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먼저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더 이상 다리를 놓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단된 다리를 가끔씩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 생활이 그와 같다. 이러한 종교 생활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 건넜다는 느낌을 가질 순 없으며, 그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를 통해 그처럼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노력을 계속한다.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방금 전까지 거듭나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조금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그분의 자녀가 된다. 여기에는 과정이 없다. ‘흑암의 권세’에 속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속했든지 둘 중 하나다(골 1:13). 기독교의 유일성을 드러내는 이 진리, 즉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구절이나 이미지를 한번 떠올려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이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즉각적으로 옮겨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가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할 때 참고하던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자 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에 겸손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글쎄요,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로이드존스는 설명하기를, 그런 대답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조금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래와 같이 단번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 이전에는 ‘저’ 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나라에 속해 있다.2. 이전에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외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3. 이전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4.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칭의’를 얻은 상태에 있다.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당신은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권능에 대해 알고 있는가?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2002년에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헤븐’(Heaven)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비록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거기서 블란쳇은 여배우로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는 어느 도시의 특정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약 거래상이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삶을 망쳐 놓는 상황을 소개하며 바로 그 상황에 분개한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경찰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는 스스로 마약 거래상의 사무실을 폭파시켜 그 거래상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야간 경비원이 쓰레기통에서 폭발물을 발견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두는 바람에 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다른 네 사람이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사망자 안에는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된다. 결국 아이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일을 계획했던 블란쳇은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아이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이 대목에서 블란쳇이 보여 준 탁월한 연기 덕택에, 우리는 육신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한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삶은 타다 남은 잔해와 같이 황폐해져 죄책감과 수치심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이런 종류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똑같이 느꼈던 사람이 성경에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이다. 그런데 그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 왔다.” 율법에 갇히게 된 인간의 마음은 그런 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거짓된 겸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내면의 변화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되었다.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도덕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은혜로만 구원받죠. 하지만 믿는 것만큼은 우리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전심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구원받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가 있을까?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1-22).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바다를 건넜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건너갔다고 할 순 없다.누군가는 바닷물로 세워진 벽을 따라 걸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와, 이 광경을 좀 봐!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잖아! 애굽인들아, 이제 너희는 상대가 안 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하지만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이러다 물이 덮치면 어떡해! 죽을지 몰라. 죽을지도 모른다고!”어찌 되었든 그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구원을 받았다. 모두 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의 ‘대상’으로 인해 받는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이에 대해 성경은 바다를 건너는 일이 오직 은혜로만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중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라고 외친 모세의 말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거기서 스펄전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순간, 구원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확신하건대, 여러분은 ‘가만히 서 있기’가 매우 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기는, 주님의 군사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수년의 가르침을 통해서야 겨우 배울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전사에게는 가만히 있기보다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일이 훨씬 쉽기 마련입니다. 가만히 서 있기란, 사람이 세운 일반 군대에서는 처음에 배우는 기초 훈련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대장의 지휘 아래서는 가장 배우기 힘든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그 어려움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세는 노련한 정신과 오랜 경험, 그리고 엄청난 은혜가 아니면 보여 줄 수 없습니다.”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죄와 사망을 하나님이 다 처리하셨기에, 지금 붙들고 있는 그 문제들은 사소한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앞에서 큰 난관을 만난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똑똑히 보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et Out! Tim Keller on the Exodus Stor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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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모티어
마틴로이드존스
찰스스펄전
출애굽
금식 초보자들을 위한 조언
by David Mathis
2019-09-09
금식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한번도 해보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수없이 많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았거나, 신실한 설교를 들어 보지 못했거나, 금식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며, 혹은 금식을 진정으로 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실제로 절대 수저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금식을 못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음식이 너무 흔하여 먹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고,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식을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보통 좋은 이유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혹은 때로 그냥 기분 전환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금식으로 인한 불편함이 안락함에 대한 갈망과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식의 목적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음식(혹은 정기적으로 즐기는 다른 것이나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자원해서 먹지 않는(혹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결혼할 때까지 성적 행위를 금하는 것처럼, 소비 중심적인 사회에서는 현저하게 반문화적인 것이다.잃어버린 금식의 기술을 배우고 그 효과를 즐기려면, 소비 중심적인 사회가 아니라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금식할 것이며, 심지어 그 때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신다. 예수님은 ‘만일 금식을 하면’이 아니라 “금식할 때”(마 6:16)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금식할 수도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셨다(마 9:15).우리는 다가올 삶을 믿기 때문에 이생에서 금식한다. 우리는 다가올 시대에 모든 것을 가질 것이라는 약속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볼 수 없고 한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 맛보았으며 또한 그분을 더 절실히 갈망하기 때문에,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철저한, 일시적인 방침금식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다. 주변의 고통과 문제를 넘어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의 죄와 약점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악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더 갈망하는 것이다.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금식은 끝날 것이다. 금식은 이생과 이 시대를 위한 일시적인 방침이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그분을 대면할 다음 생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는 금식을 거두고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때에 모든 거룩한 금욕은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룰 것이며 또한 모든 놀라운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그때까지, 우리는 금식할 것이다.금식을 시작하는 방법금식은 어렵다. 개념으로 아는 것보다 실제로 행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우리가 한 끼의 식사를 먹지 못했을 때,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금식을 시작하기로 처음으로 다짐한 이들은 한 끼 식사를 먹지 않기로 결정하고 나서 다음 식사 시간이 오기도 전에 바로 허기를 느끼게 된다. 금식은 간단한 것 같지만, 우리의 육적인 세계와 대적은 금식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다양한 음모를 꾸민다. 나는 여기서 금식을 잘하기 위해 느린 행로를 시작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6가지 간단한 조언을 주고자 한다. 이 제안들은 너무 구체적인듯 보이지만, 그러한 기초적인 조언은 금식을 처음 해 보는 사람이나 진지하게 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1. 작게 시작하라처음부터 일주일 간 금식하기를 시도하지 말라. 한 끼니로 시작하라. 여러 주 동안 매주에 한 끼를 금식할 수도 있다. 그 다음 두 끼니를 시도해 보라. 그러고 나서 하루 종일 금식하기를 해 보라. 아마도 이틀 동안 주스만 먹는 금식을 해 볼 수도 있다. 주스 금식은 주스와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과 음료를 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스를 마시는 금식은 몸이 계속 작동하도록 영양소와 당분을 제공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먹지 않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금식을 짧게 하든지 길게 하든지, 물을 금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2. 먹는 데 사용하는 시간에 대신 무엇을 할지 계획하라금식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 제어의 행위가 아니다. 이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더 경험하기 위해 추구하는 영적 훈련이다. 그 의미는, 보통 먹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쓸 것인지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음식 앞에서 보낸다. 금식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어떤 행위를 하도록 그 시간을 새롭게 고안하는 것이다. 금식으로 돌진하기 전에 간단한 계획을 세우라. 그것을 금식의 목적과 연결시키라. 금식의 목적을 인식하여, 당신이 먹는 데 들이는 시간을 어떻게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할 것인지 설계하라. 목적과 계획이 없으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금식이 아니라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의 배를 굶주리게 하는 '굶식'일 뿐이다. 3.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라금식한다고 해서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받는 것은 아니다. 금식이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높이는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행위로 인해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결핍된다면, 이는 의미 없고 슬픈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간다. 좋은 금식은 수직적 관심과 수평적 관심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금식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사랑과 돌봄을 더 많이 받는다고 느껴야 한다. 따라서 금식을 계획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해야 한다. 당신이 보통 직장 동료와 점심 식사를 하거나 또는 가족이나 같이 사는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한다면, 당신의 금식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라. 식사 시간에 그냥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음식을 먹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당신의 결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당신이 금식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도록 하라. 또한 수동적 동기에 의한 금식일 수 있지만, 이것도 고려해 보라. 당신이 특정한 친구들이나 가족과 매일 혹은 매주 식사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여행이나 휴가를 떠나거나 혹 그들에게 이례적인 상황이 생겨서 식사 계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러면, 혼자 식사를 하기보다는 그것을 금식하는 기회로 고려해 보라. 4. 다른 종류의 금식 방법을 시도해 보라금식의 전형적인 형태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부분적인 금식이지만, 성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금식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금식과 공동체적인 금식, 사적인 금식과 공적인 금식, 회중적인 금식과 국가적인 금식, 정기적인 금식과 간헐적인 금식, 절대 금식과 부분 금식 등이다.특별히 가족과 함께 하는 금식, 소그룹이나 교회와 함께 하는 금식을 고려해 보라. 특히 하나님의 지혜와 지도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는가? 교회나 사회에 이례적인 어려움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특별히 다른 신자들과 함께 금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해 보라. 5. 음식이 아닌 다른 것을 금해 보라음식을 금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금식 방식에 따르면, 가장 경건한 사람조차 그의 건강 상태에 따라 금식을 실천한다. 또한 성장기 아이들, 출산한 산모, 수술 후 회복 중인 사람들 혹은 여러 건강 상의 이유로 금식을 권하지 않는 상황들을 인정한다. 한편, 금식은 음식을 금하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말했듯이, “금식은 특별한 영적 목적에 합당하다면 어느 것이든지 금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건강 상태 때문에 음식을 금할 수 없는 경우에는 TV, 컴퓨터, 소셜 미디어를 금하든지, 혹은 그 밖에 그리스도를 더 즐기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이나, 당신이 정기적으로 즐기는 것을 금해 보라. 바울도 결혼한 부부가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성관계를 금하는 것에 관하여 언급한다(고전 7:5).6. 불필요한 것에 집중하지 말라빈속이 꼬르륵거리기 시작하고 뇌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해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면,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을 집중하지 않도록 하라. 위장의 신호에 저항하려고 강한 의지를 발휘하더라도 마음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음식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하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께 돌리거나 세상과 관련된 중요한 이유에 돌리는 행위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굶주림의 고통을 택하여 이를 영원한 찬가를 부르게 할 열쇠로 바꾸려는 숭고한 신앙 행위이다. 그것이 어떤 죄와 씨름하는 것이든지, 누군가의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든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탄원하는 것이든지, 혹은 예수님을 더 깊이 경험하기를 열망하는 것이든지 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Fasting for Beginners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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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하는방법
새로운영감
로마서 1장으로 회의론자 살려내기
by Nancy Pearcey
2019-09-07
고등학교 때부터 딜런은 타고난 리더십을 보였다. 풋볼 팀에서 MVP로 뽑히기도 한 그는 모두로부터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 딜런이 갖고 있던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신은 말 그대로 들어가는 수업에서마다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학 수업에서 배운 다윈의 자연주의 철학은 가정(assumption)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어 수업에서 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관한 여러 주장들에 대해 가면을 쓴 채 이뤄지는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각종 심리학의 이론들은, 프로이드의 심리분석에서 스키너의 행동주의까지, 하나같이 기독교를 하나의 정신 병리학적 증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딜런이 다녔던 교회는 지극히 기본적인 복음을 가르쳤을 뿐이지,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만나는 각종 도전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어떤 준비도 시키지 않았다. 근본에서부터 흔들린 딜런은 결국 대학을 중퇴했고, 기독교가 과연 진리인지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프랜시스 쉐퍼가 스위스에서 운영하는 라브리에 가게 된 딜런은 그 곳에서 그의 눈을 뜨게 한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라는 말이 진리임을 딜런에게 확인시켜 주었다.그럼 교회가 어떻게 해야 떠나간 젊은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게 할까?왜 젊은이가 신앙을 거부할까딜런 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평생 믿던 신앙에서 왜 떠났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변을 한 것이, 사라지지 않는 의심과 질문을 교회가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해당 연구를 수행한 사람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았거나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내어놓은 첫 번째 대답은 그들이 가진 질문에 교회가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 도전하는 세상의 온갖 세계관들을 다 알고 대응하려면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하다. 모든 ‘주의(ism)’를 다 암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대답은 성경이 모든 사고 체계에 다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타당한 전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로마서 1장이다. 로마서 1장을 바울이 주는 ‘변증 훈련 매뉴얼’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말이다.바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믿음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역사의 위대한 줄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줄다리기이다. 한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대용품을 창조함으로써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억누른다.바로 이런 로마서 1장의 서사는 모든 변증에 필요한 신학적 바탕이 된다. 진리에 관한 모든 논쟁은 예외없이 다음 두 가지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철학을 테스트함으로 철학의 주장이 과연 실제 세계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또 동시에 철학의 논리적 일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도 테스트한다. 로마서 1장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왜 이런 테스트가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이런 테스트에 필요한 전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진짜 세상 테스트로마서 1장은 초월적인 창조자를 거부하는 자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라고 말한다(롬 1:23,25). 그들은 우상을 창조했다. 궁극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우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학문 세계에서의 지배적인 철학은 유물론이며, 유물론은 물질을 신의 위치에 놓는다. 물질은 영원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대용품이다. 딜런이 교실에서 공부한 세속적 사상가(다윈, 프로이트, 푸코)는 하나같이 모두 유물론자였다.이런 유물론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적이지 않은 실재는 모두 부정해야 한다. 결국 인간은 복잡한 생화학 기계 또는 의지, 정신, 영 또는 혼이 없는 로봇으로 축소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인간을 유전자에 의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 또는 로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관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로봇처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을 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자유 의지를 부정한다면 그건 식당에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철학자는 농담처럼 말했다. “자연의 법칙이 내가 오늘 먹기로 이미 결정한 그 음식을 갖다 주세요.”물질주의가 우리가 아는 인간 본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꼭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피조물 중의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영광과 뒤바꾸는 철학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로 바꾸는 꼴이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낮은 무언가로 시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항상 인간에 대한 낮은 시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이런 시각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른다. 즉, 인간을 온전히 인간보다 더 낮은 그 무엇인가로 낮추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 본성과 유물론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 테스트비 성경적인 모든 세계관은 이 두 번째 테스트도 통과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인간에 대한 환원주의적 견해도 정신 또는 인지 능력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원주의는 이성을 이성보다 낮은 그 무엇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어떻게 환원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환원주의도 이성을, 그러니까 논리적 논증을 사용해야 가능한 게 아닌가? 따라서 환원주의가 이성을 왜곡하는 순간, 환원주의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고 만다. 바로 자기모순(self-refutation)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유물론은 생각에 대해 뇌에서 일어나는 뉴런 작용으로 이해한다. 유물론자들에게 인간이 진리를 믿는 것은 진리가 가진 논리적인 주장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뉴런의 특정 패턴 때문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이런 주장이 물질주의자들이 가진 견해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똑같은 추론을 적용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물론도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단지 두뇌에서 일어나는 뉴런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뉴런 활동의 산물에 불과한 이런 유물론의 주장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 어차피 논리적인 결론이 아닌데 말이다. 변증가 그렉 쿠클(Greg Koukl)이 말했듯이, 이것은 유물론과 같은 세계관이 스스로 ‘자살하는 방식’이다. 진리를 향한 세계관의 정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순간, 지금까지 논리를 근거로 한 그들의 모든 주장은 말이 안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참조적인 부조리(self-referential absurdity)’라고 불리며, 로마서 1장이 취하는 접근법은 왜 그것이 효과가 있고, 어떤 세계관에 적용 가능한지를 알려준다. 환원주의를 잘 살펴보라. 환원하는 바로 그 지점이 바로 환원주의가 스스로 모순이 되는, 자살하는 지점이다.로마서 1장의 서사는 모든 변증론 주장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딜런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소식은 성경적 전략이 보편적으로 다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더 이상 이런 저런 ‘주의’를 다 암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로마서 1장 하나로 모든 세상 주장에 다 맞서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One Strategy to Rule Them All: How to Answer Skeptics from Romans 1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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