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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스트레스 부부의 친밀감 회복 작전
by Gavin Ortlund
2019-10-11
우리 부부는 교회 옆에 있는 작은 사택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 이사야도 살고 나오미도 같이 산다. 성경 인물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이사야와 나오미와 한집에 산다는 일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막 세 살이 된 이사야는 꽤 까다롭고 짜증을 잘 내며, 이제 겨우 한 살이 된 나오미는 집 전체가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나는 부모 역할을 좋아하고, 우리에게는 대단한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게 매우 큰 기쁨을 준다. 하지만 양육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결혼 생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부부가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항상 방해를 받고, 함께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은 세우지만 완전히 지쳐서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하려고 해 보지만 아이를 봐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비싼 값을 주어야 하는지를 깨닫고는 그냥 접어 버리고 만다. 어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지 알 것 같은가?최근에 나는 어머니가 언젠가 내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부모가 되는 것은 결혼 생활에 중압감을 줄 수 있지만, 또한 결혼 관계를 더 깊어지고 풍부해지게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와 싸우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 함께 진흙탕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도전을 주는 이 시기를 그냥 견뎌 내야만 하는 시기가 아니라 우리의 결혼 생활을 위한 좋은 기회로 여기며 배워 가려 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시작한 후부터, 내 삶 속에 아내와 친밀감을 유지하며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아빠가 되는 것조차도 말이다. 사실, 결혼 생활이 굳건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나를 아빠로 부르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되돌아본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젊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10가지 전략을 나누고자 한다. 1. 의도적으로 배우자에게 키스/껴안기/듣기 좋은 말 등을 하라매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에 이것들을 하라. 현관문에 들어서면 나는 나와 씨름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습격을 받는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싶지만, 그들에게도 나에게는 아내가 우선이며 그 무엇도 그녀를 대치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한다. 부부가 서로 매일 잠깐씩이라도 신체적 접촉을 하고 지지와 관심을 표현하면 그 효력은 오래 간다. 2. 아이 돌보는 사람과 데이트를 위해 돈을 투자하라 부부가 데이트를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할 때, 나는 종종 “우리 형편에 괜찮을까?”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일단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항상, “하기를 정말 잘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였어”라고 생각한다. 배우자와 함께 웃고 여가 활동을 하며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함께 즐기는 가족은 함께 잘 산다”는 옛말이 판에 박힌 말 같지만 사실이다. 3. 함께 산책하라우리 아이들은 유모차 안에서는 조용하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일은 우리의 관계를 한층 더 좋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산책을 하면서 운동도 하고 대화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바쁠 때는 운동과 대화가 늘 뒷전으로 밀리기 쉬웠는데 말이다. 산책이 잘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상황에 맞으면서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취미를 찾아보라. 예를 들면, 헬스 센터가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당신이 이를 편하게 느낀다면,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해 보라. 4. 밤 데이트를 창조적으로 해 보라우리는 집에서 하는 ‘밤 데이트’를 개발하여 매주 해 오고 있다. 보통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나의 할머니가 결혼을 주제로 쓰신 책을 한 장 읽으며,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드게임을 한다. ‘집에서 하는 밤 데이트’로 돈을 절약하고,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계속되는 TV의 횡포를 줄일 수 있다.5. 문자 대화를 활용하라나는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내와 나누는 문자 대화만은 즐기기를 원한다. 문자로 재미와 농담을 주고받는 일은 작은 것 같지만, 우리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편이 된다. 또한 우는 아이로 인해 의사 소통이 방해받을 일도 없다. 6. 친밀한 시간을 계획하라아이들을 둔 젊은 부모들은 때로 서로 친밀해질 시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간 일정을 세울 때 이 시간을 꼭 따로 정해 놓으라. 계획된 성관계는 이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낫고, 이는 부부가 여러 일로 바쁠 때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법이 된다.7. 함께 경건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틈을 만들라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중요한 기회를 잃게 된다. 배우자는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을 영적으로 깨어 있게 도울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사람일 것이다. 8. 배우자의 일상 생활에 관심을 가지라배우자가 하루 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관계가 멀어지기 쉽다. 배우자가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문하고, 그(녀)를 가장 옹호하는 지지자가 되라. 배우자가 가정에 머물고 있다면, 당신이 그(녀)가 집에서 하는 가정일을 도와줌으로 그 일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고 감사를 표현하라.9. 배우자의 가장 약한 점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기르라 부모 역할은 배우자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죄 및 실패를 표면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다. 배우자의 부족한 점은 특히 당신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는 어느 정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경시될 수 있다. 배우자를 판단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슬퍼하라.주님께 유연함과 긍휼을 구하라. 빈정거림으로 배우자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 친구들에게 배우자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로 말하고, 불평하지 말라.배우자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꼭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인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라.10. 배우자를 알려고 노력하라배우자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배우자의 페이스북에 무엇이 올려져 있는가?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배우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우자가 최근에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가? 배우자를 연구하라. 부부만 아는 농담을 개발하라. 결혼 생활로 만들어진 친밀한 비밀은 부부가 함께 간직하고, 상대 배우자에게 숨기는 비밀은 따로 간직하지 말라. 결혼 생활의 각 시기에 알맞게, 연애할 때처럼, 평생 서로에게 낭만을 유지하려는 목표를 세우라.사탄과 세속 문화는 부부 간의 정절보다 불륜이 더 짜릿하다는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참 진리를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 참 기쁨을 얻는 길임을 보여주는 길이다. 낭만적 관계에서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갈망하는 친밀감이 어떤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장점을 보여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결혼 생활의 목표는 평생 한 명에게 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며, 가장 만족을 주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삶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의 결혼 생활을 일구어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Ways to Grow Your Marriage While Having Young Kids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육아
친밀감
관심
긍휼
회복
부부생활
수동적 목회자들이 가진 교만에 관하여
by Kyle Gregory
2019-10-10
겸손해 보이는 목회자 안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는 교만의 형태가 하나 있다. 겸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동적인 목회자의 모습이다. 겸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목회자는 보통 가장 먼저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가장 먼저 자신의 성급함을 사과하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가장 나중에 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젊고 경험이 적은 사람에게도 기쁘게 사역의 책임을 나눌 기회를 주며, 자신이 개인적으로 죄와 씨름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양떼들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는 사람들이 다가가기 쉽도록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모든 질문을 경청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다고 시인하기도 한다.하지만 겸손해 보이는 이 모든 형태들이 실제로 교만한 목회자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들이 겸손해 보이는 이유는 거짓으로 소통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화시켜 놓은 목회자의 모습을 스스로 구현해 내야 한다고 여기는 수동성이다.나는 아직 젊지만 이미 내 안에서 이러한 교만의 형태를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목회자의 수동성은 공동체 전체를 심각하게 기만하는 죄가 될 수 있다.수동적 목회자수동적 목회자들이 모두 교만하지는 않다. 그들은 진정으로 권위가 회중에게 있기를 원할 수도 있고, 스스로 권위적인 모습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목회자는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탈진 상태에 빠져 회중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교만에 의해서든지 태만에 의해서든지, 수동적인 목회자의 문제는 때로 양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며 또한 모두를 기만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지도자가 양떼를 치는 대신(벧전 5:2), 양떼들이 좋아하는 초장으로 힘없이 따라가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잘 배울 수는 있지만, 바른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 있다(딤전 3:2). 건전한 교리를 촉구한다고 하지만(딤전 6:2), 그저 좋은 생각을 제안하는 식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계속 지키도록 감독(히 13:17)하는 일과 가르치는(딤전 4:16) 일을 할 때, 양떼들이 듣기 원하는 것만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만일 우리가 베드로 사도를 만났다면, 그가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해 얼마나 유혹을 받았는지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담대한 면이 있었지만 성급했고, 동료의 칭찬을 듣는 것도 좋아했다. 당신이나 나만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다. 의심이 든다면, 그가 빌라도의 여종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를(막 14:66-72) 살펴보라. 혹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방에 들어오자 그가 방에서 빠져 나감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사건(갈 2:11-14)을 점검해 보라. 그랬던 사람이, 성령의 감화를 받았을 때는, 장로들에게 얼마나 담대하게 권면하고 촉구했는지를 들어 보라.“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이 구절에서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는 말을 주목해 보자. 이는 그림 언어로서,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하면 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양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보통 멀리 보지 못하고, 급하며, 분별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이리저리 헤매기를 잘하고, 변덕스러우며, 위험이 있으면 잘못된 길로 달아나기를 잘한다. 하지만 목자들은 양에게 이러한 취약한 모습이 있다고 경멸하지 않는다. 목자들은 양떼를 능동적으로 돌본다. 그들은 주변의 위험을 고려하고, 새로운 초장으로 가는 길을 생각하며, 약한 양을 돕고, 해코지하는 양들을 따로 떼어 놓으며, 새끼 양을 돌보고, 천적이 나타나는지를 경계하며 지켜본다. 하지만 숫양이 순순히 잘 따르도록 인도할 뿐만 아니라, 암양을 위하여 하프를 연주하고, 새끼 양을 도닥거려 주며 수동적으로 양떼들이 원하는 일을 해 주었다고 하여 자신의 모든 책임을 완성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양이 필요한 양식을 얻도록, 그리고 안전하고 건강하도록 감독한다. 혹시라도, 양을 잃고 목자장에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 앞에서 “그런데 양떼들이 절벽 근처의 초장을 정말로 좋아했습니다!”라고 변명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감독한다.특별한 감독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명한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이는 감독자가 되려면 여느 감독처럼 하지 말고, 의지와 열심 및 특히 모범을 보이는 바른 감독자의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다. 목회자가 특별한 감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보면, 목회자를 목자로, 성도들을 양떼로 비유하는 그림 언어는 우리의 이해를 돕는 데 많은 유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를 보면서 “나는 그의 모범을 따르기 원한다. 나도 위험이 있는지 지켜보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목자처럼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위임받았지만 자신이 양떼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본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목회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양떼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희생적 사랑을 통해 권위를 실천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조금 다른 비유인 합창단 지휘자의 모습을 통해 지도자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그리고 특별한 감독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를 고민해 보자. 어떤 지휘자는 누군가가 틀린 음정을 내고 있는데도 연습을 중단시키고 그것을 지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지휘자는 음악을 작곡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는 단지 음악을 읽을 수 있고, 자신감과 명료함으로 지도하기만 하면 된다. 베이스의 음이 잘못되었는데도 그것을 교정하지 못하는 수줍은 지휘자는, 작곡자가 작곡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며 끊임없이 거만을 떠는 지휘자와 똑같이, 지휘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은 너무 수동적이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합창단 전체가 당하는 고통은 별반 다름없다.이와 같이 너무 수줍고 수동적이어서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못하는 지도자는, 경건하지 않은 지배력으로 독재하는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권위주의자는 초기에 눈에 띄게 공동체에 손상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조용히 따르기만 하는 꼭두각시 지도자는 공동체에 장기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위로부터 오는 칭송을 구하라요약하면, 지도자의 권위는 자신감과 겸허함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감독과 모범의 역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깊이 필요로 해야 한다.하지만 인간으로서 이것을 완벽하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대장 목자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마음을 채우고 그가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변화되도록 돕기 위해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은 같은 말씀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도 수동적 목회자는 그가 갈망하는 칭찬을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며 칭송을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가 원하는 칭송은 종말에 대장 목자가 주실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며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여, 언젠가는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영광의 왕에 의해 입증되고 판결받으며 보상받을 것을 고대하며 살고, 가르치며, 인도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Passivity is Prideful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수동적목회자
특별한감독
칭송
지도자의권위
자신감과겸허함
겸손의모습
보상
불안정감은 죄인가?
by Jeremy Pierre
2019-10-09
미국의 유명한 어린이 TV 프로그램 쎄사미스트리트(Sesame Street) 속의 인물 바니는 최근에 점차로 시청자가 줄어들어 힘이 빠진 커다란 보라색 머리를 힘들게 들어 올린다. 한때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던 그는 이제 조용히 옆에 서 있는 친구 엘모를 힘없이 붙잡는다. 바니는 친구의 목을 겨우 끌어 잡고 가까이 가서 그에게 말했다. “한 아이라도 ‘자신이 특별한 아이다’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게 해야 해.” 가성을 내는 괴물 엘모는 털로 덮인 손으로 바니의 손을 꼭 잡고 다른 이들에게 향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알게 된다. ‘너는 특별한 아이다’라는 메시지는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전달하는 여러 도덕적 교훈들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어린이 프로그램이 유치한 재미나 상황적 문제 해결에서 도덕적인 권고로 넘어갈 때마다, 보통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긍정적 자아상과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신감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교육 TV는 우리의 머리카락 색깔부터 우리의 특정한 관심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지도해 준다. 하지만 언론이 대중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단순히 불안정감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낮은 자존감은 불안정을 양산하고 개인의 삶을 건강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불안정의 문제를 심각한 죄의 측면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나는 하나님도 불안정을 죄로 여기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왜일까?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자들은 우리의 불안정이 개인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안정이 그분의 아들의 가치를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여기신다. 하나님이 불안정을 문제로 여기신다는 점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불안정과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성경에 따르면, 불안정은 바울이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불안정과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어떤 의미이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특성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없는 데서 오는 불안정은 우리 삶에서 그냥 위험 그 자체로 여겨진다. 따라서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데 문제가 있다. 당시의 종교 및 문화적 배경에 따르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모든 위대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적으로 자신이 바리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했고,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받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이처럼 신뢰한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 문화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특별히 인정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우리 문화 속에서 인정받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더 면밀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절박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 이에 고정되어 모든 면에서 절박하기 그지없다. 어린이 TV 프로그램의 여러 인형 친구들이 강조하듯이, 우리 문화가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정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형 친구들의 말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내가 앞서 지적했듯이, 불안정은 그리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안정은 적어도 4가지 영역에서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자기 자신과의 혼란불안정은 하나님이 그분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했거나 누군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지만, 당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똑똑한지를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질척거리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라. 자의식이 강한 것은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관하여 몰입하고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우리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빌 2:3). 2. 하나님에 대한 불만불안정은 현재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만나를 원하며 불평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양은 좋으나 맛이 없는 음식에 싫증을 내고 별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돈과 지위, 외모와 성격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며 불평한다. 그러한 불만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딤전 6:9).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불만은 종종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연결되어 있다. 불안정은 우리의 (우리가 그리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는 죄가 아닐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모독이다. 3.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함불안정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당신의 허리 사이즈가 28인치인지 34인치인지, 혹은 당신이 남의 집에 사는지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우리도 여전히 신경 쓰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 의(righteousness)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평판을 가지려 한다. 우리의 생각이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거나 우리의 가치를 치켜올려 줄 더 나은 직업에 꽂혀 있다면, 실제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저버리는 것이다(롬 1:16-17). 4. 업적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함불안정은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인정받는다고 믿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면서, 적어도 더 큰 교회나 더 인상적인 자녀들 혹은 또 하나의 학위를 갖기를 소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신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과 완전히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불안정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별의 메시지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7-8). 우리의 끝없는 불안정에 대해서, 바울은 “당신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별함이 해결책이라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구직 활동과 속성 다이어트와 같은 것들로 점철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식된 동전의 한쪽 면으로 치우치고 있는 우리의 애처로운 시도일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여전히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외에 다른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자기 비난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불안정의 싸이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경건한 만족은 지속적인 불만으로부터 오는 곤고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준다. 전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인정은 사람들의 변덕스런 감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하고 영원한 안정감과 자존감을 심어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은 우리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흔들거리는 확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가치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작별 메시지를 보낸다면, 분명히 당신이 특별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의롭게 되며, 이에 대한 증거로 결승선에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으니, 믿음으로 계속 달려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딤후 4:6-8). 스스로 특별해지는 것에는 너무 관심을 두지 말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 가치를 발견하는 데 부족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in of Insecurity번역: 정은심
생활
감정
불안정감
혼란
불만
인정
갈망
면류관
자존감
그리스도
신비주의 속으로
by Peter A. Lillback
2019-10-08
14세기에 꽃을 피운 신비주의는 지금까지도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영혼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개인적으로 또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는 무엇보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 수준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신비주의가 기독교에만 있는 건 아니다. 세계 도처에 흩어진 각종 종교와 철학 속에서도 신비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기반을 성경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디오니소스 위서(Pseudo-Dionysius)를 쓴 저자와 8세기에 디오니소스 위서를 번역한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n Scotus Erigena)와 같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c philosophy)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신비주의의 전성기였던 14세기는 도미니크회 소속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그리고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와 같은 신비주의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 나온 신비주의 저서, ‘독일 신학’(Theologica Germanica)이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신비주의자인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t Groote)는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을 세웠는데, 그 단체가 종교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신비주의자 중에는 여성인 노리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있다. 그녀와의 동시대 여성 신비주의자로는 또 시에나의 캐더린(Catherline of Siena)과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등이 있다.원인들교회사의 이면에는 “마술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현실적인 특징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매우 의심스럽고 비정통적인 전통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가 출현했다. 금욕주의, 성례적 미신주의,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이 바로 여기에 포함된다.기독교 신비주의의 시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는 물리적 세계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사상인데, 다른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두 번째로, 미신주의는 그레코-로만(Greco-Roman)에 뿌리를 둔 신비 종교의 영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미트라(Mithras)와 이시스(Isis)를 섬기는 사교(Cult)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사교들은 특별한 의식(rituals)을 통해서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 사실상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믿음은 결국 성례, 순교자의 성물, 교회의 영웅들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까지 그 손길을 뻗쳤다. 세 번째로,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은 성경을 4중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적인 관점 대신, 성경에는 비밀스러운 의미가 숨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은 형이상학적이며, 또 종말론적인 지식이라는 주장이다.그럼 특별한 체험을 통해 의식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욕망을 부추긴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글의 전체 맥락에서 벗어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얼마든지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변화산에서의 변화 사건(마 17:1-13), 바울의 삼층천 경험에 대한 묘사(고후 12:2), 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비기독교 신앙, 이교의 신비적 체험 및 철학 등과 혼합하는 위험에 빠진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맥락은, 기독교 신비주의가 출현한 시대가 중세라는 사실이다. 당시에 만연하던 페스트와 그에 따른 높은 사망률, 이단 박해, 십자군 전쟁과 부유한 교회 등은 신비주의를 더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기독교 신비주의는 위압적이고, 적대적이며, 또 무엇보다 혼란스런 세상에서 한발 벗어나도록 하는 “도피처”(retreat)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함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아예 벗어나게 하거나 또는 외부 세계를 아예 무시하도록 만들었다.훈련과 기법세속을 떠나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도원 운동은 14세기까지도 그 영향력이 줄지 않았다. 이런 수도원 운동이 확산되면서 수도원은 수행자들에게 명상과 같은 엄격한 경건 생활을 강조함으로 신비적인 체험을 더 증진시킬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금식과 순례를 행했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급진적인 형태로 극단적 금식, 수면 금지, 자기 태형 등을 시행했다. 종교적 황홀경을 추구했던 신비주의자들은 정상적인 정신 활동(primacy of the mind)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기도를 통해 정신을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신비주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기 위해 종종 다음의 두 가지 방식을 취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니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그러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두 방식 모두 다 본질적으로 사색, 명상을 통한 방식이었고, 그 어떤 것도 성경 말씀에 기초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내적이고 비이성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했기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알려는 행위는 종종 가설에 그쳤고, 더욱이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았기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신학자들14세기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동방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하나님을 찾는 방법으로 기도를 통한 내적 잠잠함(withdrawal)을 주장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말한 금언을 참고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이 금언 속에는 범신론(pantheism)과는 다른, 인간 신성화의 형태가 담겨있다고 팔라마스는 주장했다. 한마디로, 팔라마스의 주장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그대로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신적 에너지에 동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특별한 자세를 취하고 신비한 문장을 암송하는 등, 여러 신비주의적 수행 형태를 발전시켰다.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생각한 하나님에 대한 즉각적인 지식관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신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의 불꽃”(spark of the soul)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다. 그 불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얼마든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게 함으로 그 결과, 인간의 “영혼 속 하나님의 탄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자아와 이 세상을 포기할 때에만 이런 신성을 소유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생명과 그 신적 본성이 주는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그 연합을 통해서 영혼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여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오로지 신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는 주장했다. “황홀한 체험”(beatific vision)은 언제나 아주 짧았고, 영원한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는 주장했다. 교황은 나중에 이런 에크하르트의 범신론적 주장을 정죄하였다.중세 신비주의의 유산신비주의 신학은 중세기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후에도 교회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다시 나타났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오시그의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 von Ossig), 그리고 일부 영국 청교도들도 신비주의적 주장에 동참했다.신비주의는 다양한 개신교 전통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신교는 종종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 개방적인 모습을 취하기까지 했다. 경건주의, 퀘이커,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종교적 체험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등이 주도하는 20세기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위험에 대비한 안전장치기독교인이라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신비적인 체험에 자리를 내어 주도록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만이 우리에게 계시된 유일한 진리이며, 누군가가, 설혹 그가 14세기 사람이든지 아니면 오늘날의 사람이든지, 어떤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예배를 받으시는 존재이다. 과도함, 범신론, 인신 공양적 미신주의, 범신론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성령과 말씀 간의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연결성, 말씀과 성례의 성경적 결합, 그리고 겸손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길 외에는 없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의 타락한 품성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거짓 가르침이기에, 성경은 영을 시험하라고 경고한다. 구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 선택, 사상과 환상은 결코 구원으로 이어질 수 없다. 모든 진리와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오로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초를 두어야 한다.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 특별히 종교 개혁적 의미에 근거해서 신앙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절제한 신비적인 체험을 거부하고,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경적 계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내적 충동을 영적 안내자로 삼는 대신, 오로지 말씀과 성령님을 겸손하게 의지하는 훈련에 매진해야 한다. 묵상은 오로지 성경만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찾고자 한다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시고 또 말씀으로 기록된 특별한 이적들을 참고하면 된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 주는 성경을 알아야 하고(요 5:46),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예배와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눅 10:27), 예수님이 주신 큰 계명을 마음에 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인해 “내적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Into the Mystic번역: 무제
역사
중세교회
신비주의
수도원
원인
위험성
신학자
유산
영적 성장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by Jon Bloom
2019-10-07
우리 집에는 작은 정원이 하나 있다. 여름이면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은 작은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최근 그 아름답던 정원을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되었는데, 다년생과 일년생 식물들 사이에 엄청난 양의 잡초가 자라 버렸기 때문이다. 왜? 지난 몇 주간 정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다른 집안일로 바빠 정원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어쩌면 정원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나의 의도적인 포기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원 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정원 방치는 더 중요한 임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정원사가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집 정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중요하다정원에서 꽃이나 관목, 풀이나 나무를 키우고 싶은 정원사라면 땅을 재배하고 씨를 심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가뭄, 잡초, 전염병, 성가신 동물들(땅에 구멍 파는 걸 좋아하는 우리 집 개처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고 가꾸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심지어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정원사에게도 적용된다. 만약에 정원사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그분이 지으신 정원을 알아서 관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라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교회를 개척하는 자신의 역할뿐 아니라, 물을 주는 아볼로의 역할도 하나님이 주신 교회 성장에 꼭 필요한 수단이었음을 믿고 있었다(고전 3:6). 바울은 자신이 '씨'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씨는 단지 그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아볼로도 자신이 “물”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도 아볼로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식물'의 성장에 꼭 필요한 '태양,' '토양' 또는 기타 환경 요인을 직접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맡은 일이 '식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역할은 실제로 필수적이었다.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식물은 자라지 않는다.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은 죽는다. 하나님의 정원에서 우리가 '식물'의 발아와 성장에 필요한 '정원 가꾸는' 일을 하는 것은 결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관할권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또 우리는 정원을 가꾸는 역할을 맡는 것, 이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진정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엄성을 선물하셨다. 즉, 우리가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선택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행여 우리가 책임을 제대로 지지 못해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짓눌려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우리가 식물처럼 사는 방법을 배운다면, 정원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정원사는 식물을 좋아한다왕국에서는 모든 기독교인이 다 양이고(요 10:27) 또 그중 일부가 목자의 사명을 받는 것처럼(벧전 5:2), 모든 기독교인은 다 식물이고 그중 일부는 정원사의 사명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편에 나오는 식물처럼 살기를 바라신다. "복 있는 사람은 [중략]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자,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 주목해 보자. 나무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믿음이 점점 더 자라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나무는 결코 시냇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고, 때가 되어도 과실을 맺지 못하며 또 건강하고 푸른 잎사귀를 자랑하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가지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주목하자. 가지는 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어야만 한다. 만약에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 것이다(요 15:6).이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하나님이 우리도 식물(나무 또는 가지)과 같이 설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또 무엇을 하지 않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책임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든지, 포도나무에 가지를 붙이고 있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원을 돌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정원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우리 모두는 식물이지만 또 정원사이기도 하다. 정원을 돌보는 일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주신 임무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가꿔야 할 정원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정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잘 가꾸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는 정원의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정원은 무엇인가? 유명한 동요 ‘고집센 메리’(Mary, Mary, Quite Contrary)에 나오는 가사, “당신의 정원은 어떻게 자랍니까?”처럼 당신은 무엇을 심었는가? 씨앗을 심어야만 식물이 자랄 수 있다. 심은 씨앗을 당신은 지금 어떻게 가꾸고 있는가? 정원일은 무엇보다 지속적이고 부지런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당신에게 주어진 주된 정원과 보조 정원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주된 정원이 주된 관심을 받고 있는가? 관심이 가는 모든 정원을 다 돌볼 수는 없다. 주된 정원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 한 시즌 동안 보조 정원을 소홀히 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른 보조 정원을 아예 무시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면 정원일에 필요한 충분한 은혜를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후 9:8).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모든 정원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는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하는 정원도 아니다. 부엌 창 바깥에 있는 작은 정원은 주된 정원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보조 정원이다. 조만간 그 정원에도 관심을 갖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부엌 창밖에 보이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은 정원사로서 무엇을 하고, 또 하지 않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piritual Growth Is Not an Accident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존엄성
정원사
임무
보조정원
삶으로 드러낸 부활의 산 소망
by Elliot Clark
2019-10-05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을까? 이 질문은 답이 자명한 기본적인 질문인 것처럼 보인다. 부활 주일에 아이들에게나 하는 뻔한 질문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부활을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게 하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읽다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예상치 못한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고통과 수치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를 도우려는 것이었다.베드로전서는 현재의 고통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베드로 서신의 독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벧전 1:6). 그들은 신앙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그들의 도덕성에 대해 비방을 받았다(벧전 4:4). 거절과 사회적 소외를 경험했다. 그들은 순전함과 선으로 행했지만, 그들을 비방하는 이들은 그것을 악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부당하게 고난당하고 끝없이 슬픔을 견뎌야 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일시적이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보다, 불같은 시련을 망명 생활로 인식하도록 그의 독자들을 독려했다. 그들이 겪은 고난은 일종의 ‘가벼운’ 박해로, 현대 세속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과 유사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을 받는 이들에게 소망의 언어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망은 우리에게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소망이 아니다. 불같은 시련과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제안한다(벧전 4:12). 수치와 사회적 배척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세주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 반전된 이야기베드로가 말하듯이,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한 망명자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었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벧전 2:4-5). 아버지에게 소중했던 그분은 예언된 아들이었지만, 수치와 배척을 당하셨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권세 있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외면당했다. 살아 있을 동안 치욕을 당하셨고 머리 둘 곳도 없었다. 죽음에 이를 때는 구타를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비방을 받고 욕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다. 자신의 제자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만 거부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3일 후에 그 대본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의 무죄를 입증하셨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었다(벧전 1:3). 지금 우리가 힘들고 고독을 경험하더라도 소망이 되도록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기독교 신앙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적절하고 성경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1장 21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는지를 강조한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계속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그분에게 두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영화롭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 부분은 우리가 보통 예상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아버지를 믿고 그분에게 소망을 둘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베드로의 서신에 나타난 논리를 내가 이해한 바는 이것이다. 나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반영하는 것을 보면, 나의 고난과 그분의 고난이 어떻게 만나는지 알게 되면, 예수님이 신실하신 아버지에게 자신을 맡기심으로 고난을 견디신 바를 내가 깨달으면, 그리고 선택받은 귀하신 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사실을 내가 인지하면, 내가 그와 유사한 고난이나 거절을 당하더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리신 나의 왕 예수님을 알게 되면, 나의 삶이 많은 원수들 앞에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내게 여전히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유를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예를 회복시키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렇게 하셨으니 나 자신의 삶이 어두워질 때도, 내가 거절과 비웃음을 당하고 신체적 고통을 대면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된다.하나님이 그분의 섬기는 자를 어떻게 다루실 줄 내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분의 아들을 어떻게 다루신 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계속 영광을 향하여 이러한 대답은 우리가 보통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이유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가 그분을 신뢰함으로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받으면, 그를 따라 영광을 받으리라는 소망이다. 세상의 비웃음과 수치는 끝이 나고 우리는 높이 들려 하나님으로부터 영예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 말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말하듯이,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다. 그의 부활과 영광 받으심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추수의 시작일 뿐이다. 그분은 믿음으로 그를 따르게 될 이들, 그리고 같은 고통을 받은 후에 오는 영광의 길을 가게 될 여러 다른 이들의 선구자이며 원형이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끔찍한 죽음과 그의 견줄 수 없는 영광 둘 다를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았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은 오늘날 우리가 끝없이 당하는 배척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수치와 배척으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시고 명예를 회복하게 하셨음을 알았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부인함으로 무거운 짐 아래 허물어졌지만, 영광에 대한 소망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대담하게 증인된 삶을 살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이러한 소망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정화시키고 이 땅에서 망명의 삶을 사는 동안 영예롭게 살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이러한 확증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조차도 우리가 존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한 미래의 소망은 또한 우리의 입을 열어 복음을 담대히 선언하게 하며, 사회적 수치를 견디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확증을 얻으려는 우리의 갈망을 극복하게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듯이, 이러한 자신감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복음에 마음을 열도록 본이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산 소망을 보고 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urprising Purpose in Christ’s Resurrection번역: 정은심
복음
부활
베드로
시련
고통
소망
영광
개척교회 목사들의 인내심 배우기
by Jim Essian
2019-10-04
누군가 낙심은 목회 사역의 ‘직업 재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월요일이 특히 그렇다. 재미있게도 “삼위일체(Trinity)”라고 이름 지어진 공원에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윗이 했던 식으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으며 낙심의 기도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포트워스(Forth Worth) 시내에 교회를 개척한 지 3년째 되던 때였다. 가까운 친구들이었던 핵심 멤버들이 교회를 떠나 버렸고,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를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사역을 과연 계속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신장 결석, 대상 포진이 올 것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몇몇 어려운 교회 권징을 다루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미 모든 것이 안정된 교회로 옮겨 가서 사역을 좀 더 “쉽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낙심 속에서 나를 만나 주셨다. 그날 내가 적었던 일기의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이 내게 이 교회를 개척하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내가 그저 멋있게 성공한 목회자가 되도록, 전혀 실패하지 않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좀 더 필요로 하도록 하기 위해 나를 부르신 것이다. 고통과 낙심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자. 나를 당신 안으로 계속 밀어 넣으시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자.” 그날 이후로 나는 한곳에 정주하며 인내하고 오래 참는, 장기간의 목회에 내 자신을 드렸다. 인내를 위한 힘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상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중략]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중략]”(골 1:11).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가 참을 수 있기 위해서 정말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바울은 ‘그렇다’고 답한다. 경건한 인내에는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 교회 개척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흔히, 젊은 사역자들은 단기적으로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일을 과대평가하고 장기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사역에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주시는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며 나아간다(갈 5:22). 우리에게 인내가 없어 계속 회개해야 한다고 해도, 교회 개척자로서 우리들은 성령께서 오래 참음을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교회를 개척하라고 주셨던 그 큰 확신을 기억한다. 하지만 ‘내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음성만큼이나 분명했던 내 아내의 경고도 잊지 않고 있다. 정말이지, ‘인내’가 필요했다. 핵심 멤버가 채워지길, 출석 인원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길, 그리하여 우리의 첫 교회가 당당한 모습으로 시작될 수 있도록 기다리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다윗은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라고 말한다. 오래 참음은 강력한 덕이다. 당신이 하든 하지 않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당신이 사역하고 있는 그 도시를 덮을 것이다(합 2:14).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 당신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걱정이라는 단어를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쓰는 것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가장 큰 걱정은 당신이 더욱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롬 8:29). 인내는 그 과정에서 반드시 자라야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어쨌든,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으나 오직 하나님만 자라게 하실 수 있다면, 당신 역시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은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인내를 배워야 한다. 1. 당신이 섬기는 성도들성도들이 죄로부터, 소비주의에 찌든 삶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모습으로 자라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든다. ‘내 자신’도 성장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도들은 곧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양 무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벧전 5:2) 사람들에 대해 실망해 버리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목회자는 오래 참음으로써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 역시 그들에게 향해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리더들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인내가 필요하다. 돕는 손길이 너무나 아쉬운 때이므로 어떻게든 빨리 리더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내하라. 경솔하게 리더를 세운 후 뒷수습을 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사역 초기에 이것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배움을 가지고 라이언(Ryan)이라는 이름의 성도와 함께 아주 천천히 나아갔다. 자원봉사자로 시작한 라이언은 리더가 되었고, 그 후 스탭, 동료 장로가 되더니, 결국에는 교회 개척자가 되었다. 이 모든 일에 6년이 걸렸고, 라이언은 우리 교회로부터 10마일 떨어진 곳에 건강한 교회를 개척했다. 이제 나도 사역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당신은 리더들의 성장이 느리면 힘들어하고 항상 모든 것을 빨리 진행시키려 하는 사역자인가? 오래 참으라.2. 당신의 비전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구축하려는 교회 개척자들을 봤다. 그렇게 하지 말라. 나는 내가 개척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예전에 운동 꽤나 했던 그리 똑똑치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해 나 같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개척한 교회에 대학생들과 예술가들을 많이 보내 주셨다. 성령께서는 은사로 힘을 얻고, 복음의 열정으로 불이 지펴졌으며, 각자의 경험으로 단단해진 사람들을 심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당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의 교회를 이루어 간다. 우리 같은 목회자들은 사람을 상대하므로, 우리의 모든 소망과 교회를 위한 모든 계획은 오래 참음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개척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좌절했던 적이 있다. 에드 스텟처(Ed Stetzer)는 우리의 교회 개척이 계속 재생산하는 개척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재생산은 커녕 짝짓기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고 비전을 가꾸어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국 지금의 자리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게 해주셨다. 내 안에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를 6년에 걸쳐 기르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3. 당신 자신골프를 칠 때면 ‘난 골프 잘 못쳐. 그러니 좌절할 필요도 없지’라는 생각을 꼭 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교회 개척에 재능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말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을 통해, 때로는 복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을 진흙으로 만든 그분의 그릇으로 빚어 가신다. 예수님은 목사인 ‘당신’을 오래 참으신다(딤전 1:16).인내하는 가운데 힘을 다해 당신의 설교를 준비하라. 자신의 리더십을 위해서도 인내하고 끊임없이 배우라. 또한 당신의 성품을 위해서도 인내하며 죄와의 전투를 멈추지 말라.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인내하게 하고 힘을 다해 일하게 한다. 복음의 은혜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였다(고전 15:10). 만일 백 명쯤 되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물어본다면 “오래 참음”이라는 말이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것은, 오래 참음의 훈련이 주는 가장 달콤하고도 멋진 열매는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것이다. 목회자여, 이 모든 일 가운데 주를 바라고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라.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시 25: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Church Planting Will Test Your Patience번역: 이정훈
교회개척
인내심
오래참음
성도
비전
코람데오
목사
과연 포스트모던 시대에 무엇을 알고 있는가
by Don Carson
2019-10-03
한 15년 내지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많이들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35년 전에 서구권에서 영어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셰익스피어(Shakespeare)나 키츠(Keats) 또는 프로스트(Frost)보다도 리오타르(Lyotard)라든가 데리다(Derrida) 혹은 푸코(Foucault)의 글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당시에 성숙한 독서란, 역사나 문화라는 고정된 틀에서 본문을 해석하기보다 독창적인 해체주의의 관점으로 그 본문을 비평하는 활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영어 본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된 내용은 포스트모던 이론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을 독서 과제로 읽는 학생은 과거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그와 같은 포스트모던 인식론의 창시자들이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한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참고로 인식론이란, 지식의 습득 가능성 내지 그 방법이나 범위 등을 논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그러나 이런 변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거의 사라졌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대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이와 같다.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들이 마치 기정된 문화적 현상처럼 수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떤 의문을 가진다거나 그 현상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왜 문화의 대세가 이미 명백한 사실로 수용하고 있는 입장을 굳이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겠는가? 따라서 그 결과, 스스로가 포스트모던 세대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한 세대 전만 해도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은 문학이나 논쟁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수많은 포스트모던 세대의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포스트모던 이론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그 사상의 수많은 부분을 그냥 전제하며 살아간다.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예를 한번 들어 보겠다. 최근 웨스트코스트대학교(West Coast University)의 일부 학생들이 어떤 설문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대학교의 다른 학우들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제작된 그 설문은 해당 학생들이 일반 종교에 대해, 특히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테스트였다. 그리고 그 질문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이 사후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장차 당신이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적지 않은 학생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떤 것을 안다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요한복음 14장 6절이나 사도행전 4장 12절과 같이) 기독교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답변했다. (1) “기독교인은 상당히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방법으로 영성을 추구합니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들의 주장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깊이 파고들면 모든 종교는 결국 동일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들이 유별난 차이를 지닌 것처럼 열등하다고 판단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물론 이런 입장을 나타내는 분위기가 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앙’의 의미에 관한 이 시대의 견해, 변질되고 있는 ‘관용’의 개념, 또 누군가 그럴듯하게 표현했듯 “겉으로 드러나는 맹렬한 적개심 뒤로 거대한 바다처럼 냉담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 더 넓은 문화적 흐름이 또 다른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인식론에 미친 영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도 명백히 주어진 진리를 회피하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을 것이다(즉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웨스트코스트대학교 학생들은 친절하게도 그 설문 결과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그때 나는 그 학교에서 열리게 될 전도 행사에 참여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전달된 설문 결과를 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금방 발견하게 되었다. 곧 설문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자기 자신을 무신론자나 세속주의자로 지칭한다든가 혹은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지닌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용기 있게 나누고자 해도 그런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모르는 수많은 크리스천 학생들 역시 그와 같은 반응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두 부류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설명을 여기에 제시하도록 하겠다.1.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들은 사실상 잘못된 기준에 근거하여 이뤄질 때가 많다. 그런 논의들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않는 한, 그 대상에 대해 무엇도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는 소위 ‘신해석학’(New Hermeneutic)이라고 불리는 다소 오래된 관점에 근거한 논리이다.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일은 불가능한 기준이다. 그런 주장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omniscience)의 상태에 있어야만 비로소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보여 준다. 또는 오직 그 전지성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라는 논리를 드러낸다. 물론 절대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며, 그때 우리는 그런 전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지적 조건에 적합한 여러 형태의 지식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인간에게 적용하는 원리일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우리는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 내일 아침에는 해가 떠오른다는 사실을 ‘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 한 시간 후면 내가 탑승할 유나이티드 항공편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이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이에 대한 나의 ‘지식’은 유나이티드 항공편 스케줄을 게시하는 전광판과 스마트폰 앱을 통해 확인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탑승을 기다리다가 다른 항공편 스케줄이 변경되었다는 방송을 듣게 되면, 약간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용할 항공편 스케줄도 변경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혹 내가 전지성을 지녔다면, 처음부터 그런 혼란을 겪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전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나는 지구가 자전하고 있으며 유나이티드 항공편은 다른 통지 사항이 없는 한 오후 6시에 이륙하게 된다는 전제에 따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는 마치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든가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알기’ 때문에 계획 가능한 것이다. 이 앎은 하나님만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조건에 적합한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전지성이라는 기준을 수용하여 지식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일반적인 개념에 상반되는 접근이다.2. 위의 설명을 통해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 및 오류 가능성은 인간의 지식이 결코 전지성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의 학습이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어라든가 셰익스피어의 시 또는 미생물학 등을 배우는 새로운 학습 과정에 착수하게 되면,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배우며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처음에 우리를 기겁하게 만든 그 내용들이 이미 자연스럽게 습득된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뤼오(λύω) 동사의 현재 직설법 변화를 생각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 변화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다 알지 못하는 그리스어 문법 사항이 많이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원리는 성경이나 신학 공부만이 아니라 모든 학습 과정에 적용된다. 다시 말해 학문의 영역이든 사업의 현장이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학습할 때 경험하는 일반적인 과정은, 인간의 지식이 부분적일지라도 그 자체로 획득될 수 있는 지식임을 말해 준다.3. 흔히 성경 해석이 다양한 입장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들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이런 결론은 다음의 두 가지 입장 중 하나가 사실일 때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1) 성경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을 뿐 일관된 메시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란 불가피하다. (2) 성경은 이론상으로 오직 하나의 메시지를 지니지만, 교회 역사는 우리가 그 단일한 메시지에 아무 이견 없이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느 입장을 취하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해 정당한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우선 (1)은 성경이 무엇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상세히 다룰 수가 없다. 다만 (2)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또 이는 흔히들 하는 경험이기도 한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수많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자주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성경이 최종 권위이며 이 권위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기꺼이 수정할 수 있다는 원칙에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이 동의를 한 상태여야 한다. 한때 나는 세계복음주의협회(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라고 불린 모임에 참석하며 10여 년 간 즐거운 세월을 보냈던 적이 있다. 그 협회는 매우 다양한 학파에서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거기서 나는 고된 연구, 끈기 있는 토론, 상호 비평, 겸손한 자세, 자신의 생각보다 성경 본문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았고, 이에 끊임없이 놀라워하며 기뻐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4. 지금까지의 인식론적 논의들은 지식의 습득에 대한 도전을 본질상 중립적인 문제로 여기고 다뤄 왔다. 그렇기에 해석학 전문가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시도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해악이라든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취지에서 빠질 수 있는 우상 숭배의 위험이나 장애에 대해서는 지면을 거의 할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와 토론하며 성경이 그런 문제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이런 토론은 신앙을 보수하는 학자들이 반사적으로 상대를 얕보며 다가가려는 성급한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광범위하게 드러내셨는지 또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그런 계시를 가볍게 여기는지를 진지하게 평가하는 접근으로 이뤄져야 한다. 나의 요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식론에 대한 성경적 반응이 어떤 논의에서든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Postmodernism That Refuses to Die번역: 장성우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던
성경해석
인식론적논의
신해석학
무신론자
세속주의자
성경 전체를 보여주는 요셉 스토리
by Samuel Emadi
2019-10-02
모세는 다른 캐릭터보다 요셉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창세기를 기록했다. 이는 아담이나 노아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족장들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에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창세기 이후로 성경 전체에서 요셉이 그리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그렇다면 요셉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왜 그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그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많은 크리스천들은 요셉 이야기가 어떻게 창세기의 서사라든가 전체 구속사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흔히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예증하기 위해 요셉 이야기를 활용하곤 한다. 주로 창세기 50장 20절 본문에 집중해서 말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요셉의 인생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긴 본문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요셉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5:1-9).하지만 요셉 이야기를 예컨대 양립주의(compatibilism)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스토리로만 축소시켜 읽는다면, 그의 인생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 얼마나 풍성하게 기여하는지를 놓치게 된다(참고로 양립주의란,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이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언약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섭리를 독자한테 보여 주기 원하셔서 자신의 주권이 요셉 이야기 전반에 나타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떻게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인물인 셈이다.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요셉이 어떻게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갈등의 해결을 드러내는 이야기창세기는 언약 백성의 생존과 순결을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계속해서 소개한다. 곧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내용을 읽어 보면, 야곱과 그 자녀에게 온갖 종류의 시련이 들이닥치며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1.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가족 간의 분열과 다툼이 다시금 언약 백성의 생존을 위협한다(창 37장; 참고 4장).2. 이방 민족과 통혼하여 드러나게 된 불의가 언약 백성의 순결을 위협한다(창 38장; 참고 12:10-20).3. 세계적인 기근이 발생하여 언약 백성이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창 42:1-2; 참고 3:17-19; 12:10; 26:1).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가문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갈등을 해결하신다.1. 요셉은 형제들에게 받은 대로 복수하기보다 관대한 용서를 베풂으로써 그들과 화해하고 가족 간의 연합을 이룬다(창 45:1-15).2. 요셉은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켜 이방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애굽인의 미움을 받지 않게 된 가족은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않고 그 땅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창 46:33-34).3.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가족의 생명을 지킨다(창 41:25-35; 47:13-26).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언약 백성을 위협하는 문제를 역전시키신다. 곧 용서를 통해 다툼을, 의를 통해 불의를, 그리고 지혜를 통해 기근을 해결하신다.약속의 성취를 나타내는 이야기더 나아가 창세기 37-50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준다(창 12:1-3).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열방에 은혜를 베푸신다.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집을 그에게 다 맡긴다. 이에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다(창 39:4-5). 그리고 요셉은 또다시 바로의 집에서도 총리가 된다(창 41:40). 그 결과 열방에 복이 미친다. 요셉이 심각한 기근 중에도 애굽인과 각국 백성에게 양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창 41:56-57).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요셉을 통해 성취하신다. 일단 요셉이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키고 나자, 아브라함 자손은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창 47:27). 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전체에 걸쳐 등장하지만, 지금 이 경우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그 백성에게 명령하거나(창 1:28; 9:1, 7; 35:11) 그와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지만(창 16:10; 17:2, 6; 22:17; 26:4, 24), 이번에는 처음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동일한 표현이 여기서는 직설법으로 서술되었다. 요셉의 리더십 하에 아브라함 자손이 실제로 번성하게 된 것이다.심지어 왕에 대한 약속도 요셉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다. 창세기 37장에 소개된 요셉의 꿈은 장차 그가 수행할 통치자의 직분을 예견한다. 곧 애굽의 궁정에서 요셉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암시한다. 더군다나 그가 입었던 ‘채색옷’은 왕가의 의복을 상징한다(삼하 13:18). 따라서 이 장에 앞서 예언되고 모형론적으로 제시되었을 뿐 아니라 언약의 약속으로 언급된 통치자(창 17:6, 16; 35:11), 즉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나타나리라고 기록된 왕의 도래를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는 창세기 37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장에서부터 소개되는 요셉이 그 예견을 더욱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요셉을 보며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이후 왕궁에서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된 요셉 이야기는 단지 하나님이 그의 결백을 입증해 주셨다는 내용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인간의 통치가 회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그분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한 나라를 이루고 그로부터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요셉은 바로 그 통치자를 보여 주는 첫 번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열방에 전해 주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드러낸다. 곧 사랑받는 아들이자, 섬기는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섭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비록 모세는 창세기 37-50장 이야기의 중심 무대에 요셉을 세웠지만, 사실상 그 무대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요셉이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버림받은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지키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약의 성취 여부는 인간의 악한 행동마저도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주권자의 손에 달려 있다(창 50:20).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모든 위협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이와 같은 요셉 이야기는 단지 창세기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보다도 창세기의 전체 스토리가 안고 있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는 형제를 미워하는 사건으로부터 형제에 대한 용서로, 그리고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근으로부터 가족이 재회하여 잔치를 벌이는 축제로 독자들의 걸음을 인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야기이러한 관찰은 요셉이 과연 장차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모형’(type)인지, 즉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시적인 인물이 맞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교회사에서 수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 맞다고 설명해 왔다. 요셉과 그리스도 간에 존재하는 명백한 유사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셉도 사랑받는 아들로서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과정을 통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요셉과 예수님의 상관성을 드러내는 유사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고 죄인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무효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흥미롭게도 창세기는 야곱이 유다를 위해 축복한 내용이 이미 요셉의 삶에서 모형론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이 축복에서 야곱은 유다의 후손으로 장차 오실 왕을 묘사하는데, 그 이미지가 요셉의 인생에 펼쳐진 장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여기서 유다의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게 된다고 언급되는데, 이처럼 절을 한다는 표현은 요셉의 꿈에서 형제들이 그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이미 세 번 사용되었고(창 37:7, 9, 10), 또한 그들이 애굽의 궁정에서 실제로 요셉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기술하기 위해서도 세 번 사용되었다(창 42:4; 43:26, 28). 이처럼 창세기 49장 8절에서 열한 명의 형제들이 한 사람 앞에 절을 하는 이미지는 지금까지 들려준 요셉 이야기를 요약하는 한 편의 그림과 같다. 이런 유사점은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은 바로 이 야곱의 축복에서 힌트를 얻게 된다. 곧 메시아가 요셉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게 되리라는 답변을 얻는 것이다.이처럼 요셉과 유다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이 구절만이 아니다. 사실 모세는 요셉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 인물을 자주 병행시켜 놓았다. 예를 들어 가장 결정적인 세 차례의 대목을 살펴보면 그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곧 서론 부분에서(창 38-39장), 절정 부분에서(창 44-45장), 그리고 야곱의 예언 부분에서(창 49장) 그렇게 등장하는데, 이 단락들은 요셉 이야기만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 스토리의 백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요셉과 유다는 서로 엮여 있다. 따라서 야곱의 예언에서도 두 사람은 장차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함께 예시한다.이처럼 모세는 요셉이라는 모형론적 인물을 통해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미래의 왕을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될 이스라엘 역사의 거시적인 스토리 안에 요셉 이야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그의 이야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는 모세가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왕적 인물로서 요셉을 바라보도록 뚜렷한 장치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셉 이야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미래의 소망을 제시하는 이야기창세기 37-50장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여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모든 게 불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자기 가족에 의해 노예로 팔려 나간 한 사람을 들어 자신의 권능을 펼쳐 보이신다.아마도 모세는 자기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보잘것없는 한 인생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자 요셉 이야기에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죄인에게 임할 저주를 완전히 역전시키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미래의 진짜 요셉(a coming Joseph)을 기대하도록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이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성경의 전체 스토리를 보여 준다. 즉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비하를 통해 승리로 나아가는 스토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the Joseph Story Is Really About번역: 장성우
신학
구약성경
갈등
약속
성취
소망
그리스도
축복
섭리
복음과 그 결과를 분리하지 말라
by 고상섭
2019-10-01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오늘날 설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한 가지는 ‘복음과 그 결과를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마르틴 루터도 동일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믿음만으로(by faith alone) 구원받지만, 단지 믿음만 남는 믿음으로(by a faith that remains alone)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참된 믿음은 필연적으로 선행을 낳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설교는 복음과 그 결과를 혼동하고 분리시킨다. 팀 켈러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복음이 무엇인지’와 ‘복음이 무엇을 일으키는지’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 리차드 러브레이스가 지적하기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하나님의 받아주심)가 성화(실제의 도덕적 삶)의 기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자신의 성화에 근거하여 칭의를 이루려고 한다.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셨어. 그러므로 나도 바른 삶을 살아야지”라는 생각의 흐름은 복음과 그 결과가 바르게 연결될 때에 일어난다. 그러나 복음과 그 결과가 분리되면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 나타난다. “나는 바른 삶을 살고 있어.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 주실 거야” 이와 관련하여,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혜택을 분리하지 말라”라고 언급하며 존 오웬의 책을 인용한다.존 오웬의 저서 중에서 미국 신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죄 죽임의 교리>이다. 다른 저작인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과 교제>도 있지만, 유독 <죄 죽임의 교리>를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실용적인 마차를 신학의 말 앞에 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오웬도 청중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죄 죽임에 관해서만 아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중략]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사역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퍼거슨의 이야기는 복음과 그 혜택, 즉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혜택을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신 그 은혜의 칭의가 감사를 낳고, 그 감사로 인한 자연스러운 순종이 성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심)의 선행에 대한 이해 없이 죄를 죽이는 행위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성화에 근거하여 칭의를 추구하려는 역방향적인 오류를 낳는다.만약 설교자가 칭의에 대한 선포 없이 “여러분, 죄를 죽여야 합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둘째, 말씀을 읽으십시오. 셋째, 순종하십시오!”라는 식의 선포를 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혜택을 복음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또한 성도를 은혜 없는 율법주의로 인도할 것이다. 퍼거슨은 죄를 죽이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팀 켈러도 <탕부 하나님>에서 한 경영학 교수의 강의를 예로 든다. 그 교수는 윤리 경영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불법이 아닌 건강한 방법으로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고, 또한 회사의 도덕적 행보에 대한 자부심이 직원들의 업무 능률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팀 켈러는 만약 복음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심각한 오해에 이른다고 조언한다. 결국 해당 기업의 목적은 윤리 경영 그 자체가 아니라 더 높은 이윤 창출이다. 혜택을 바라보고 윤리적으로 경영하는 것, 이는 결코 복음의 삶이 아니다. 팀 켈러는 그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 복음 안에서의 삶이라고 설명한다.복음을 설교하라 싱클레어 퍼거슨도 설교자의 최대 관심사는 복음의 혜택이 아닌 복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할 때 또는 들을 때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인가? 아니면 다른 것, 이를테면 죄를 극복하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법 혹은 복음을 통해 받는 혜택인가?” 그분 안에서의 영적인 복은 그분 자체를 소유할 때 따라오는 결과물이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2-4절을 설교하는 방식을 살펴보자.“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만약 이 구절로 설교할 때 “여러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라고 선포한다면, 그리고 듣는 성도가 “오늘부터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지”라고 결심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 인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지 못하는 실패에 좌절할 수 있다. 둘째, 만약 인간적인 노력으로 남을 낫게 여기는 일에 성공한다면, 자기 자신을 썩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교만이 싹틀 수 있다. 모두 복음의 혜택(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을 복음보다 앞세울 때 생기는 오류이다.바울은 이렇게 선포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분이 하나님의 권위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나를 구원하신 분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될 때 그 혜택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종교는 “나는 선한 삶을 살았어.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받아 주실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받아 주셨어.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 선하게 살아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어떤 행위를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하신 그 복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복음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된다. 우리의 설교는 어떠한가? 복음과 그 혜택을 분리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설교자여, 복음의 혜택이 아닌 복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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