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
by 김선일2024-03-12

얼마 전 딸아이가 급히 병원 응급실에 가는 일이 생겼다. 진단 결과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지만 빨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순서가 되는 대로 수술 시간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종합병원이 늘 그렇듯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 큰 딸이지만 병원 측으로부터 아무 기별이 없다고 하니 부모 마음이 초조한지라 ‘따지러’ 갔다. 그냥 보이는 대로 응급실 데스크 앞에 앉은 간호사에게 물었다. 


“우리 애가 아파서 와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만 있는데 수술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응급실에 더 늦게 온 사람들도 먼저 수술받으러 가던데요.” 


“어 그러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따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앳되게 보이는 간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친절을 다해 응대한다. 아이의 이름을 입력해서 확인한 그녀는 자기가 모든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서 알려주겠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순순히 아이 옆으로 돌아가고 얼마 뒤, 그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버님, 제가 지금 담당 선생님에게 여기 환자분 상황이 급하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더 급한 환자들이 있어서 그랬다고 곧 수술 일정을 잡아주시겠다고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간호사의 정성어린 조치에 더는 정색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간 간호사는 약 10분 뒤 다시 와서 묻는다. 


“환자분, 혹시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제가 지금 또 확인해 봤는데 수술을 위한 입원수속을 도울 선생님들이 오신다고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윽고 입원수속을 돕는 스탭들이 와서 병실로 이동하는데, 그 간호사가 나와서 “수술 잘 받으시고 잘 나으세요!” 응원을 한다. 나도 웃으며 고맙다고 화답하는데, 그녀의 자리에 놓인 (나는 식별할 수 있는) 큐티집이 보인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을 뿐 아니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의 하나님이 부르신 보통 사람들이 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이 우리가 위대한 신앙의 선배로 추앙하는 이들은 원래부터 특출한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대하게 쓰신 보통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 젊은 간호사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가 아마도 좋은 신앙인이라는 추정하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근래 일터 사역, 일터 영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신앙의 무게 중심이 교회와 주일에서 이제는 일상과 평일로 이동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 중 가장 많은 관심과 에너지가 쏠리는 일터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런데 종종 일터 사역과 영성을 위한 모델은 평범한 일터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인 기업인이나 선망할 만한 전문직 종사자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모임에서 일터 사역 강좌를 인도하는데, 그날의 주제가 일터에서의 압박이었다. 이미 정해진 교재와 외국 저자의 동영상 강의가 주어진 나는 그 내용을 해설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일터에서의 압박이라는 아주 중요한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사례로 나오는 이들은 모두 변호사들이었다. 기독법률가회 모임이라면 참으로 적절한 모델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더욱 평범한 일터에서 단순한 업무나 육체노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사례가 얼마나 와 닿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사례로 나온 변호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일터의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의 나라를 위해 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일터 영성과 소명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아니, 평범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 신앙의 영웅이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일터 사역의 건강한 방향이자 가능성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집 앞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순댓국 하나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와서 반찬은 셀프라고 웃으며 일러주신다. 반찬 코너로 가니 따라오셔서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신다. “고추절임이 참 맛있어요. 꼭 한번 드셔보세요!” 별로 당기는 반찬은 아니지만 자상함에 몇 개 가져왔다. 식사하는 중간에도 오셔서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며 챙기신다. 사실 혼자 외로이 밥 먹는데 뜻밖의 친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계산을 하며 고요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자세히 들으니 익숙한 멜로디다. “요게벳의 노래!” 


한 가지 예를 더 들겠다. 몇 주 전, 학교 신입생 면접을 한 일이 있었다. 비신학계열 학과에 지원하는 아직 믿음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학교의 어떤 점이 끌렸냐고 물으니, 학교 분위기가 따뜻하고 직원들이 친절했단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부담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한다. 누가 친절했냐고 물으니, 학교 카페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특히 상냥하고 친절했다고 한다. 또 한 번 뿌듯했다. (우리 학교 카페에 한번 와보시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일터에서의 작은 섬김과 친절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터 사역은 바로 나와 내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이 이제 일터사역의 방향과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거창하고 성공적인 일터사역의 사례보다 작고 평범한 영웅들에서 공감과 동기부여를 받아야 한다. 


수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에는 버스 기사로 일하는 린다라는 여성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녀는 자기 버스에 자주 타는 손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늦으면 기다리곤 한다. 한 80대 할머니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힘들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운전석에서 내려 노파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 버스에 실어줬다. 이 노파는 그 뒤로 린다가 모는 버스만 기다리게 되었다. 한번은 추수감사절 즈음에 버스 정류소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는 여성을 보았다. 그 여성은 그 지역에 처음 이사를 와서 모든 게 낯설었다. 린다는 그 여성에게 다가가 이 지역에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지 묻고는 추수감사절에 자기 집에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초대했다.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신문기사는 린다는 자신의 버스를 작은 축복의 공동체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때로 승객들은 린다에게 종종 꽃다발을 비롯한 선물을 주곤 한다. 취재 기자가 묻는다. “짜증내는 승객들을 대하고, 교통 정체에 시달리며, 때로는 좌석에 붙은 껌도 떼어야 하는 고된 버스 운전을 하면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린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새벽에 일어나 주님 앞에서 30분 동안 기도하고 무릎을 꿇는 데서 저의 하루 기분이 결정됩니다.” 린다는 버스 노선 종점에 도착하면 사람들에게 “이제 운행이 끝났습니다. 사랑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말한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느 버스 기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우리는 이 복잡한 도시의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지나가는 린다의 45번 버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 블로그에서 읽었다. 하지만 미국 교회에서만 배울 수 있는 선진 사례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이처럼 일상과 일터에서 발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의 그 평범하고 위대한 이야기를 찾자.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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