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by 양혜원2024-03-11

항암치료 중이신 어머니가 입맛이 뚝 떨어지시고 그나마 찾으시는 게 햄버거이다. 남들은 몸에 안 좋다고 뭐라 하지만, 아무것도 못 드시는 거보다는 낫지 싶어서 그날 저녁도 퇴근길에 버거 사냥을 나섰다. 어머니가 잘 드시는 브랜드의 가게는 너무 멀리 있어서 어디서 사가나 고민하는데 예전에 버스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들렀던 버거 가게가 생각났다. 큰 기대 없이 시켜서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었던 기억이 나서 그 버거집으로 갔다.


하지만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넘었고,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식당이라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그래도 주방 안쪽에 사람이 있어서, 아직 영업하시냐고 물었더니, 연세가 좀 있어 보이시는 아주머니가 지금 마지막 버거가 딱 두 개가 남았다고 하신다. 사이드로 감자튀김이랑 치킨 너겟은 튀겨줄 수 있다고 해서 간병하시는 아버지 생각해서 함께 주문하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 


주방의 아주머니는 그 버거집의 주인이셨는데, 몸의 움직임이나 얼굴로 보아서는 연세가 좀 있어 보이셨지만, 머리카락이 검어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손님은 나 혼자라 너무 조용한 게 오히려 어색해서 소소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었더니, ‘58년 개띠에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만으로 올해 예순여섯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색은 까만데 두피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숱이 적고 가는 머리카락이 그 나이를 말해주는 듯했다. 


지난번에 여기 우연히 와서 먹었는데 버거가 맛있어서 또 왔다고 했더니, 자신이 미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오래 했었다 하신다. 미국에서 38년을 살았다는데, 그곳에서 자리를 잘 잡으신 분이 어쩌다가 늦은 나이에 다시 한국에 와서 버거 가게를 시작했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탈북자 선교하러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셨던지, 나더러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셨다. 다닌다고 하자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부름으로 한국에 다시 나와서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길게 풀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의 눈길은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분의 검은 머리에 머물렀다. 흰머리 한 가닥 보이지 않게 새까맣게 물들인 그 머리는 마치 ‘뒤로 물러나 숨기’[隱退]를 거부하는 강한 의지처럼 읽혔다. 내일도 햄버거 백 개를 주문받았다며, 감자와 치킨 너겟을 튀기는 틈틈이 재료 준비를 하는 손이 분주했다. 어쩌면 그는 한국으로 다시 나올 때, 텐트메이커로서 제2의 인생을 산다는 생각에 제법 들떴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들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파커 팔머는 곧 벼랑을 넘어갈 인생의 끄트머리(brink)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일을 어떻게 맞이할지에 대해서는 선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지만, 해 뜸과 해 짐 사이를 어떻게 걸어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묻는다. 해가 진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갈 것인가, 거기에 저항하며 갈 것인가, 아니면 협력하며 갈 것인가.


여기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애매하게 마음에 머문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근대 이래로 우리 문화가 선택은 마치 운명이나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처럼 말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선택은 치고 나가는 능동성만큼이나 받아들이는 수용성도 필요로 한다. 버거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근 40년을 살던 미국을 떠나, 한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며 선교사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치고 나가는 능동성이었지만, 한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며 선교사 생활을 하는 데에 따라오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상황은 수용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머리는 까맣게 물들여도, 약해지는 관절과 체력은 수용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용감한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해가 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기대 수명이 길어지면서 인생 2막이 아닌 3막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온지도 제법 되었다. 심지어 배우자도 두 번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미덕일 수 있었던 것도 다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이 반복될 때는, 엄마도 진작에 한 번 갈아타실 걸 그랬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완전 흰소리는 아니었다. 나의 박사 과정 지도 교수는 40대에 이혼을 하고 홀로 십대 입양아를 키우며 종교여성학 과정을 신설했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종교여성학자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러다가 일흔이 다 되어갈 무렵 열 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여지껏 싱글인 제자들에게 부러움과 함께 ‘나도 어쩌면’ 하는 희망도 품게 한 결혼이었다.) 


결혼 얼마 후 지도 교수는 은퇴하고 남편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 엔지오 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블로그도 시작했다. 학술적인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대중 독자를 위해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거스르며 살아온 것 같은 지도 교수도, 아프리카에서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죽다 살았고, 열 살 어린 남편은 원인 모르는 장 질환으로 영양 섭취가 안 되어 한동안 고생을 했다. 능동적인 선택 뒤에 따라오는 불가피한 상황들이다. 2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흔 후반에 들어선 시점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많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눈빛은 마치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는 길의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것 같아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너무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것 같다는 내게 딱 좋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었다. 그때 나는 마흔 초반에 집을 박차고 나가 박사 공부를 시작했다는 서사에 제법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딱 1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박사 학위 하나로 팔자를 고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학 사회의 온갖 모순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다. 능동적 선택 뒤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불가피한 상황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차이는 사십 대의 계단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과 오십 대의 계단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좀 식상하지만 산의 비유를 쓴다면, 산 밑, 산 중턱, 산 정상의 풍경이 다르듯이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지는 해를 향해 가는 이 길에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애초에 이 여정을 시작하게 한 동기이다. 팔머는 자신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혼란스러운 것이 많아서라고 하는데, 나도 비슷하다. 이건 도대체 왜 이런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글로 이끌었다. 흔히들 자신이 아는 것을 글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글을 쓰면서 알아간다. 어떤 때는 내가 뭐가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던 나의 글은 학부 졸업 논문이었는데, 이 글도 이해하기 어려운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그때 나의 의문은 왜 현실은 이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었다. 그 논문으로 졸업생 우수 논문상을 받았는데, 이 질문은 그 이후로도 몇 년간 내 글쓰기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여성학 석사 과정에 지원할 때 나의 의문은, 왜 나는 똑같은 나인데 평신도일 때랑 사역자 부인일 때랑 교회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다른가였다. 이 주제로 쓴 나의 연구 계획서로 석사 과정에 합격했고, 이 질문은 훗날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 나의 의문은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문화적 문제인가 종교적 문제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여성주의 의식을 가지고도 보수적 신앙관을 수용한 여성 작가들을 연구하고 그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다. 


연구교수 생활을 거쳐 특임교수 타이틀을 달고 영문 학술지 편집 일을 하는 지금도 나는 궁금한 것들이 많다. 왜 여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공격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사회가 여성을 억압한다고만 할까? 왜 한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한때 여성주의에 그렇게 열광했을까? 이런 궁금증들을 풀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하나의 궁금증을 풀다 보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기고, 세상은 이해 못 할 일을 쉼 없이 던져주기에, 연구 논문도 쓰고, 이렇게 짧은 에세이도 쓰고, 책도 쓴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의 자세를 더 잘 갖추기 위해서 더 열심히 듣고 관찰하려 한다. 내가 선택한 것도 그 선택이 나를 데려간 곳도 모두 이런 관찰을 통해 글이 된다. 


이런 선택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을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소명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가 선택을 마치 운명이나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는 일에만 해당하는 것 같은 착각을 심어주었다면, 소명을 마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꾹 참고 위에서 부르는 대로 질질 끌려가는 일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은 교회의 실수다. 소명도 선택과 마찬가지로 치고 나가는 능동성과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있다. 그리고 사실 선택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가 내 선택이었는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소명 또한 어디까지가 주어진 것인지 선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다만, 삶이 던져주는 것들에 응답하며 가다 보니 그 길에 나와 함께 자라나는 무엇이 생겼다면, 그런 게 소명 아닐까. 그리고 그 자라난 무엇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내 옷같이 느껴진다면 그 옷을 입고 지는 해를 향해서 가도 좋을 것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양혜원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 수료 후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세월 번역가로 일하면서 유진 피터슨, N. T. 라이트, 알리스터 맥스래스, C. S. 루이스, 헨리 나우웬, 미로슬라브 볼프, 일레인 스토키의 저서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하였고,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 교회 언니,여성을 말하다,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