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2024-02-2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반대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문제 제기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는 의견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부분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문에서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성경 본문의 주제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구약의 특정 본문에서만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저자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좁고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다 설교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의에 대한 혼동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본문을 갈보리와 십자가상의 속죄와 연결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단순히 속죄만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레이다누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두를 하나님의 옛 언약 약속들의 성취로 선포했으며, 또한 성령님을 통한 이 예수님의 오늘날의 임재와 그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했다. 간단히 말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전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2]

즉, 그리스도를 설교함이란 단순히 모든 본문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연결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사 전 영역을 포함한 설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정의하게 되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는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변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저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이 아니다.[3]

클라우니는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바라보는 더 큰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 상황(FCF: The Fallen condition Focus)이 드러나면,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초청할 수도 있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를 싱클레어 퍼거슨의 표현을 빌린다면,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며 그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순종이라는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다면 복음이 아닌 종교적 설교, 윤리적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의 선행은 선행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 공로주의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선행이기에 모든 순종과 선행은 칭의라는 은혜가 동기로 작용한다.


결국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쉬운 적용은 “칭의가 성화로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설교하지 않겠지만, 굳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하라고 하면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열심은 은혜의 만족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그것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우리의 열심의 동기는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은혜와 만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격이 열심의 동력이 되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게으름은 인간의 열심과 결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우리의 열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동기가 아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개미도 저렇게 열심히 일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서 늘 시작한 일을 끝마치지 못하십니까? 요한복음 13:1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게으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열심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잠언 6:6이 포함된 본문을 이렇게 설교했다. 


지혜로운 자는 누가 위험하지 않아도 내면의 동기만으로 스스로 알아서 일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온갖 구실로 작아 보이는 일탈을 삼다가 빈궁이 닥쳐오면 깜짝 놀란다. … 이런 삶은 예수님의 삶과 크게 대비가 된다.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삶에 당신이 일하지 않아 사라져버린 부분은 없는가? 우리는 일할 때도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4]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은 성경의 본문에서 무조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 본문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조망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찰스 스펄전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런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스펄전이 한 웨일즈의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설교)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다”고 하자, 그 설교자는 “글쎄요. 성경 본문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에 있는 것을 설교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그러자 스펄전은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사랑하는 형제여, 자네의 직무는 본문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로 통하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말하고 곧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거대한 대도시, 즉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달리면서 설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5]

스펄전은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 자체에서 그리스도를 무조건 연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팀 켈러도 이렇게 조언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희미하게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대로 무조건 덤벼서는 안 된다. 라합이 창문에 걸어 둔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연상될 수는 있지만(수 2:18)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그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 설교가 끝나기 전에, 바로 그 길을 가리키고, 바로 그 길을 여행하라”[6]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는 팀 켈러의 표현처럼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1.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p.29.

2. 같은 책, p.32. 

3. 에드먼드 클라우니,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30.

4.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p.28.

5.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95. 

6. 같은 책,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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