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셨을까?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까?

by Wyatt Graham2024-02-06

마태복음 24:36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하셨다.


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긴다.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했을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이 모른다면,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인가?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시다


성경은 아들이 하나님(요 1:1; 골 2:9)이시요, 동시에 사람(요 1:14; 히 2:14; 빌 2:7; 롬 8:3)이시라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24:36은 이러한 성경의 진리 중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한 성경의 규칙은 이렇다. 보통 성경은 때때로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인성 면에서 아버지보다 낮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함을 확증하셨다. 그러면서 인성에 있어서는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 14:28)이시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


이 기본 해석 규칙은 성경만큼 오래되었다. 이 성경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글을 보려면 여기를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두 가지이다. “아버지는 종의 형체보다 크시지만 아들은 형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빌립보서 2:6-8에서 바울은 아들이 본체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에서는 종의 형체를 지녔기에 하나님보다 작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다. 이 기본 진리를 알면 마태복음 24:36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해석 규칙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무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처럼 사셨다. 이런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마태복음 24:36을 둘러싼 더 큰 성경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24:36의 전후 문맥 


푸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10-367)는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아리우스파가 마태복음 24:36을 어떤 식으로 인용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모르는 예수님이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 구절만을 놓고 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문맥에 맞게 읽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6과 관련해서, 힐러리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내용을 확인할 때 제대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한다(De Trinitate §9.2).


힐러리의 이 말은 마태복음 24:36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본문 자체를 넘어서 마태복음 전체,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힐러리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무려 두 장(9-10장)에 걸쳐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근접 문맥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4:36(마 22:41-46)을 말씀하시기 전에 우선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막 13:32)에서도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12:35-37), 마가는 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님이 주 하나님으로 성전에 오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마가복음 서두가 암시하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막 1:2). 


전체로 볼 때,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요 21:17; 시 44:21). 아들과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다(신 6:4; 요 10:30).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고”(골 2:9).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요 1:16; 골 2:10).


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또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4)고, 그리고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다”(히 2:14)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자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신 게 사실이라면, 마가복음 8:29이나 마태복음 24:36에서도 그분이 자신의 그런 존재를 멈추실 리가 없다. 마태복음 24:36을 정경의 맥락에서 읽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Q: 마태복음 24:36에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있는가? 

A: 그렇다.

Q: 아들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가? 

A: 그렇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점이다. 설혹 어떤 구절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굳이 다 설명할 의도가 없다고 해서, 완전한 그리스도가 완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히 13:8).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누구라는 점을 오로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서만 확증해야 한다. 이 진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는 특정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분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예를 들어, 칼뱅은 마태복음 24:36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2]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으로서 아들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36에서 드러난 예수님이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분의 무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Nazianzus)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무지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귀속시킴으로, 우리는 가장 경건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Or. 30). 그리고 그레고리도 지적했듯이,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내 몸으로 내가 직접 감당하지 않고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Epistle 101 to Cledonius).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부분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처럼, 즉 몸과 영혼과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시험과 슬픔과 고난이 가득한 진정한 인간으로 사셨다.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을 공감하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셨다(히 2:17-18).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5:7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예수님도 인간의 슬픔과 염려가 있으셨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 5:7).


조금 앞서 히브리서 4:15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이 어떤 느낌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1:5-6)고 확증해야 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히 4:15) 참 인간이시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날과 그 시를 모르셨다. 칼뱅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요 21:17)가 인간으로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슬픔과 불안을 겪지 않으셨을 것이고, 결코 우리와 같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히 2:17)”(Harmony, 154).


칼뱅은 슬픔과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러한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공감할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도 시험을 이기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벧전 2:21-22).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


칼뱅은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무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긴 문장으로 설명한다.


“중보자가 되려고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계시는 동안에 한해서, 그래서 최소한 그가 직분을 완수할 때까지는, 정확한 종말 시점에 관한 정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그건 그가 부활하신 이후에 받은 지식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시고 나서야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다(마 28:18절)” (Harmony, 154).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인간처럼 알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날과 그 시간에 관한 지식을 받으셨다는 게 칼뱅의 주장이다. 


칼뱅은 성경 전체를 자신만의 문맥으로 이해해서 읽었기에 이 구절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Harmony, 154).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마태복음 24:36을 읽어야 한다. 즉, 신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성경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칼뱅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에서도 특별한 부분, 즉 그날과 그 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시는 동안에도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때는 쉬는 상태(a state of repose)였다.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이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 즉 인성이 고유한 특성에 따라 별도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은 전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Harmony, 154).


칼뱅이 의미하는 바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서 그분의 신성이 더 드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속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구속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지는 그분의 참된 인성을 보여주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준다. 힐러리는 그 점을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의 무게를 없애셨다” (Matthew §26.4).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굴욕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셨고, 그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참 인간으로 사셨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


아리우스파가 성경을 문맥에 맞게 읽지 않는다는 힐러리의 비판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마태복음 24:36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내서 읽는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 구절을 이해했다. 힐러리의 지적은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도록 성경 전체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마태복음 24장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길게 가르치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배울 수 있다. 성경의 각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 전체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24:36 주위의 몇 구절만 읽는 것은 문맥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이다.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그게 바로 아리우스파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속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자 사람이심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딤전 3:16).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기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가 되셨다. 


마태복음 24:36에서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곧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참된 인성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




1. See The Trinity, trans. Edmund Hill, ed. John E. Rotelle, 2nd ed.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78.

2.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6), 154. 



원제: Why Doesn’t Jesus Know the Day and the Hour in Matthew 24:36?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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