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초청의 예배, 그리고 음악
by 서나영2024-02-05

우리는 각자 다른 음악에 감동한다. 그래서 ‘어떤 음악으로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예배를 준비하는 수뇌부가 거쳐야 하는 유격 훈련과도 같다. 예배학 저서에서 볼 수 있는 ‘예배 전쟁’(Worship War)이라는 용어는 현장에 나와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때로 예배음악 수업 전에 임하는 나의 태도는 전장에 나가는 채비를 갖추곤 한다. 교회마다의 사정도 비슷하다. 담임목사와 음악목사의 갈등, 찬양팀과 장로님의 갈등, 지휘자와 예배팀의 갈등 등, 그들의 뒷 여담은 꽤나 흥미롭다. 이 전쟁은 예배를 준비하는 최전방 리더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휴전과 침공이 끝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는 1544년 개신교 예배를 위해 최초로 지어진 교회의 봉헌 예배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우리는 응답하는 시간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조지 플로로브스키도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했다. 후에 수많은 예배신학자들의 매혹적인 정의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정의를 어렵지 않게 읊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자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할렐루야로 ‘송축’하는 자세, 즉,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예배라는 사실에 대해 말이다.


문제는 ‘참여’라는 단어는 그 본래 의미를 한없이 축소가능한 단어라는 것이다. 나는 강의 현장에서 실제로 수업 내용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출석을 놓치지 않는 학생들을 줄곧 봐왔다. 수업에 관심이 없지만 출석으로 학점을 따고 졸업에 문제가 없게 하겠다는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참여한 것이 아니다. 수업을 주도하는 교수자는 이런 종류의 인격모독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일 예배시간에 참여는 하지만, 몸만 와서 앉아 자신의 죄를 가리는 은신처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 도피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배 장소를 “도적의 굴혈”로 만든 파렴치한 삶의 유다 백성의 예배(렘 7:22)는 하나님을 비인격적 존재로 치부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그들은 평일에는 강탈을 일삼다가 일말의 양심을 털어낼 때와 장소로 안식일과 성전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범행을 피해 은신의 방법이 더 세밀해지고 다양해진 듯하다. 개신교에서 알맞다고 정해 놓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맞춰 예배를 선포하고, 대표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축도까지의 시간을 마치면 복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는 믿음과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다. 마치 출석의 의무를 끝내 안도하는 학생들처럼, 어딘가에서 보고 계실 하나님 앞에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익한 말씀, 개인의 입맛에 맞는 음악, 눈을 즐겁게 하고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적당한 조명이면 좋은 예배였다고 말한다. 설교자의 신박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몰랐던 것을 깨닫거나 삶과 일에 적용할 유용한 통찰력을 얻으면 은혜로운 설교였다고 고백한다. 긴장한 마음이 풀어지고 위로를 얻었으면 성령충만한 예배였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인지 여부는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체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될 때 일어나는 일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해야 한다. 이 일은 너무도 교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깨어 있지 않으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체가 된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자리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좌에 앉는 것이 자신이 될 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찬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묘한 뒤바뀜의 결과는 끔찍하다. 아무리 하나님을 의식하는 점유율이 높아도 보좌의 주인이 자신인 이상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함이 아니다. 이것은 냉철한 진실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이 가장 중요해진 오늘, 사회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문인들을 고용한다. 세상에서 원하는 인재는 자신의 전문분야 안에서 일어나는 예외사항과 오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슬픈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통제권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내 감정을 위로하는 찬양에는 은혜 받았다고 매일 듣지만, 내 행동을 교정하려는 오래된 신앙교육적 찬송가 가사에는 음악과 가사가 촌스럽다며 부르질 않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를 부르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인이 부르던 찬송 문헌으로 남겨지기 직전이다.


예배의 임무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예배의 음악에 있어 통제권을 갖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예배음악을 논하고 싶은 자들은 평생에 단 한 번의 예배도 느슨한 선택을 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으로 임해야 한다. 예배에 사용되어야 하는 음악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들어왔다. (대개 질문자들은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시험하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배학  책을 수십 권을 읽어도 음악 스타일에 대한 구체적 기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 지문만큼 각기 다 다른 미학을 지닌 곡들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단언컨데, 성경에 나온 찬양 용어와 내용을 다 파악하고 외운다 해서 좋은 예배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와 좋은 교회음악 대학원을 졸업한다 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성경 전체를 밤낮으로 즐겨 읽으며 묵상하고, 매일 기도하며, 예수님의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주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평생에 걸친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온전한 예배자로 서겠다는 갈망함이다.


온전한 예배자는 두 단어를 목에 걸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첫 번째는 ‘초청’이라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최근 한 젊은 과학도가 주일 회중예배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에 대해 말했다.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에 다 같이 모여 회중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서든 명확하게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예배신학의 인용과 설명은 모두 회중예배의 필요성과 유익성을 설명해 주시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당위성을 찾을 수 없다고 말이다. 회중예배 순서 속에 만들어진 형식의 강요가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도 뒤따랐다.


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교회예배의 모든 것이 설명 불분명하다고 교회와 예배를 떠나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 방구석 온라인 예배를 맛본 사람들은, ‘사실은 예배의식이 그저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발적인 참여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심정,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초청에 응하여 참여하는 인격적인 관계에 행복해하시는, 그 파격적인 선물에 관해서 말이다. 예배에 관해서도, 예술에 관해서도,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진리들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의 신비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청하는 자유로운 초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과 참여를 뼈저리게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를 로보트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식을 만날 날만 기다리지만 자식을 사랑해서 강제로 앉혀다 놓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 때문이다. 


나는 열두살 난 딸에게 때때로 시를 쓰도록 지도하지만, 한번도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유로운 상상력에 방해를 받으면 진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로의 초청과도 같다. 구약의 까다로운 제사법이 종료되고 예수님이 명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로 바뀌며, 긴 시간동안 선조들은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의 방법이 맞지 않으면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나라가 갈라지기도 했다. 우리는 신약에 듬성듬성 나오는 성찬과 기도와 찬송, 말씀, 구제(헌금) 등의 예전적 요소를 추적할 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확한 예배의 설명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침묵하신 것일 수도 있다. 예배는 강제로 행해지는 의식이 아니라 초청에 참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온전한 예배자가 품어야 할 단어는 “참여”다. 초청자에게 화답할 때 예배자가 된다. 찬양은 주님을 경외하고 감사하고 감탄한다는 참여의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성찬이 절기 의식으로 남은 오늘날, 예배 속에서 찬양 외에 우리의 감탄과 감사와 경외함을 소리칠 수 있는 예배 순서가 또 있는가? 그러므로 예배음악이 어떠해야 한다는 안전한 기준은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할 것이다. 밴드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어떤 발성법으로 인도하든, 음악은 온 회중을 태워 움직일 수 있는 대형 에스칼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회중이 응답할 마땅한 내용으로, 회중이 부를 수 있는 음역대와 박자와 소리로 울려야 할 것이다. 감각의 폭발을 유도하는 행위가 주된 목적이었던 바알의 제사(왕상 18:26-29)가 되지 않게 늘 주의하고, 음악의 기쁨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응답하며 그 관계 속에 참여할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세계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 흘러 넘치게 받은 힘과 능력과 기쁨의 잔으로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적시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일터과 가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 가운데 사소한 언어 한마디까지도 그 거룩함 속에 잠기는 것이 예배다. 예배는 우리의 종착지인 새 땅과 새 하늘과 새 도시의 건물에서 새 삶을 살며 부를 희락의 노래를 연습을 하는 시간이다(계 21:1-4).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주인의 보좌에 앉지 말자.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 초청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누리고,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참여하자.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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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나영

서나영 박사는 미국 남침례신학교(SBTS)에서 교회음악(MM)과 신학(M.Div.equi.)을 공부하고, 기독교예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스펄전 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에서 문화예술파트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