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과 인공지능, 그리고 십자가
by 전재훈2024-02-01

저는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닙니다. 17년만 해도 고급차였던 제 차가 이제는 여기저기 부식되고 힘도 딸려 고장 나면 폐차시켜야 할 수준이지요. 하지만 살살 달래가며 잘 타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통풍 시트가 안 돼서 여름이면 엉땀, 등땀으로 촉촉해지는 것 정도입니다.


최근 나오는 차량들 보면 부러운 기능들이 있습니다. 후측방 경고 시스템, 어라운드 뷰 모니터, 하이패스내장형 룸미러, 추돌 방지 시스템,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 스탑 앤 고 기능, 스마트 하이빔, 자동 라이트, 스마트 트렁크, 차선 유지 시스템, 전동조절의자,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 전자식 사륜구동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요. 이런 기능들이 달린 차를 구매하기에는 제가 가진 재정의 심히 연약함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기능들입니다.


제가 고급 승용차를 사지는 못해도 다양한 방법으로 그런 기능들을 제 차에 붙일 수는 있습니다. 통풍 시트를 대신해 주는 쿨링 시트가 오픈 마켓에 있고, 후방 카메라나 센서도 붙일 수 있습니다. 신호 대기 중일 때 인위적으로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면서 스탑 앤 고 흉내도 낼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자율주행은 오픈 마켓을 통해서 시도해 볼 수가 없습니다.


자율주행의 기본은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과 차선 유지 기능, 그리고 추돌 방지 시스템입니다.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은 차가 설정된 속도로 일정하게 앞 차를 따라서 스스로 주행하는 기능입니다. 멈추기도 하고 다시 출발하기도 하지요. 차가 밀리는 정체구간에서 브레이크와 악셀레이터에 발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고속도로에서도 자기가 알아서 속도를 내기 때문에 운전하기가 정말 편합니다. 수동미션이 달린 차를 몰 때 오토미션 달린 차를 보면서 왼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어뎁티브 스마트 컨트롤 달린 차를 보면서 오른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차선 유지 기능은 차 앞에 달린 센서가 차선을 인식해서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운전대를 조정해 주는 기능입니다. 두 손 놓고 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돌 방지 시스템은 말 그대로 추돌 위험이 있을 때 급제동을 걸어 주는 시스템입니다. 이 기능을 달고 외제차 한번 박을 일 막아주면 충분히 제값을 하는 기능입니다.


차선 유지 기능이 가능하려면 운전대가 유압식 운전대가 아닌 전자식 운전대여야 합니다. 그래야 컴퓨터가 전자신호로 운전대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 차는 유압식 운전대라서 이게 오픈마켓을 이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꿈의 기능인 셈입니다.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운전자의 조작없이 스스로 운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 법이 마련되지 않았고, 대중화를 이루지 못해서 완벽한 형태의 자율주행이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기술들은 이미 자율주행을 할 수 있는 시점까지 와 있습니다. 스스로 주차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목적지만 입력하면 알아서 데려다줍니다. 문도 열어 주고, 실내 온도도 맞춰 주고, 운전자의 기분에 따라 음악도 틀어 줍니다.


이런 자율주행이 가능해진 것은 인공지능의 발달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는 딥 러닝 기술이 개발된 지 수년이 흘렀기 때문에 컴퓨터는 이미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중 한 예가 이세돌 9단과 겨룬 알파고이지요. 앞으로의 시대는 이런 인공지능이 인간 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원해 줌으로 삶의 편의성을 극대화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다 되어 있는 기술들이라고 해도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의 경우 운전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운전이 되면 이건 생명을 위협하는 폭탄이 되고 말지요. 차가 스스로 판단하고 운전한다고 해도 그 기능을 부여해 주는 인간의 명령을 벗어나 버리면 그 차는 쓸모없는 차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만약 통제를 벗어나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그것을 어떻게 제지할 것인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인공지능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선한 통제 아래서 운영될 때만 유익한 기술입니다. 악한 사람이 인공지능을 개발해서 나쁜 의도로 이용하게 되면 인공지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지요. 더 나아가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움직인다면 인간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과연 인공지능을 선하게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하는 차량이 갑자기 앞에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탑승자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주인인 탑승자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지요. 설문조사에 의하면 탑승자를 희생시켜서라도 보행자를 지켜야 한다고 답하지만, 그런 기능이 달린 차를 자신이 타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수준 높은 인공지능보다 훨씬 뛰어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배신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지요. 우리가 가진 지능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원칙 아래서 그분의 통제를 받으며 사용될 때 가장 바람직하게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와 지능을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하므로 죄와 죽음의 굴레를 덮어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타락한 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렸고,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부딪치는 문제가 스스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제재할 것인지의 문제이고, 이것은 아직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지능을 부여하실 때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같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지능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라는 큰 벽에 부딪히게 해 두셨고, 그 능력의 한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심으로 다시금 하나님의 통제 아래로 들어오게 하셨지요.


인간의 한계 덕분에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가 바로 그 인간 능력의 한계를 과학의 발전으로 점점 없애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더 오래 살 수 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며,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신이 점점 필요 없어지고, 더 나아가 신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 너머의 세계이고, 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살아갈 때 겪는 죄의 문제는 긍정심리학이나 철학 같은 학문이 일정 부분 죄책감을 해결해 주지만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대답이 되었지요.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겪는 감사한 불행은 죽음이 시간의 흐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사고의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0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시대임이 분명하지만, 오늘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시대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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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