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 현상: 교회 공동체에 던지는 질문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2024-01-29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지난 10년간 한국 교회에 경각심을 일깨워 준 대표적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교회에 ‘안나가’기 때문에 거꾸로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의 비율은 2012년의 10.5퍼센트에서 2017년의 23.3퍼센트로 훌쩍 뛰었고, 2023년 조사에서는 29.3퍼센트로 더욱 높아졌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02쪽 이하). 이 수치는 코로나로 인해 현장 예배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높아졌을 개연성도 담고 있다. 이들 중 25퍼센트는 코로나 기간 중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최근 조사인 2023년 10월 통계에서는 가나안 성도들이 26.6퍼센트로 약간 낮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증가세가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탈-교회 현상일 수도 있고, 또는 신앙생활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겠다는 새로운 신앙표현의 발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혹시라도 “가나안성도”라는 이름 붙이기가 그동안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했을 우려도 있다. 2012년 이전인 1998년 조사에서는 가나안성도가 11.7퍼센트, 2004년에는 11.6퍼센트였으니 2012년까지의 조사들에서는 가나안 성도 비율은 대체로 일정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그 개념이 널리 알려지면서 비율이 뚜렷하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어느 한 가지 지배적인 원인만을 지목하는 것은 이 현상에 접근하는 정직한 자세가 아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처음 나왔을 때는 소위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의 가능성이 제시됐다. 현대인들이 더 이상 교회라는 집단에 의존하거나 소속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갱신되고 변화되더라도 이러한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심지어 1인 교회라는 단어까지 나오기도 했다. 


과거 조사에서도 30퍼센트 이상의 가나안 성도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했다. 한국 교회의 위계주의나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주체적 자아의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진지하게 추구하기에 탈 교회를 한 것일까? 실제 조사를 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시기는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생 때가 높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다가 스스로 교회 출석 여부를 선택할 즈음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조사에서도 청소년(38%)과 청년(45%)의 연령대에서 가나안 성도의 비율은 전체 평균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앙에 대한 관심이나 구원의 확신 비율은 낮다. 반면, 교회생활 경험과 구원의 확신까지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주로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떠난 경우가 많다. 이들의 탈-교회 원인으로는 주체적인 신앙의 추구라기보다는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상처나 실망이 더 크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수(43%)는 교회가 변화된다면, 혹은 좋은 교회를 찾는다면 여전히 교회로 돌아오길 원한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11). 


나는 ‘소속 없는 신앙’이라는 용어에 대해 그 어떤 신학적 동감도 느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시대와 타협하고 변질되었을 때, 제도권 교회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움직임들은 교회의 참된 본질을 찾으려는 반성적이며, 실험적인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움직임들을 통해서 교회는 갱신되었다. 하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모여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됨의 소명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양보하거나 약해질 수 없는 신앙의 중심이다. 비록 현실 교회가 허물이 많고 신뢰를 잃었다 하더라도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교회됨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교회됨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인간이 자율적이며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한다는 발상은 근대적 자아주의 신화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여러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습관과 신념을 형성한다. 그리고 특정한 공동체와 전통이 바로 그러한 경험과 이야기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성도 현상을 부정적으로 단죄하는 태도는 더더욱 곤란하다. 혹자는 가나안 성도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히 10:25)에 빗대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을 질타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본문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권면은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전통을 버린 자들이라고 질시와 고난을 받을 때 주어졌다. 율법과 제사를 뛰어넘고 완성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더 이상 유대교인들의 공격과 비난으로 인해 위축되지 말고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모임을 늘리라거나 교회당에 더 많이 오라는 차원이 아니다. 히브리서 10:24은 무슨 모임인지를 명료하게 알려준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이는 돌봄과 격려를 위한 모임을 말한다.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서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갖고 일상을 살아내도록 돌아보고, 더 나아가 사랑과 선행의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 열심이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는 탈-교회 현상에 대한 해법이 전혀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교권주의와 율법주의의 위험성까지 지닐 수 있다.


이러한 교회됨의 목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의 신비를 말할 때도 드러난다. 그는 당시 주의 만찬이라는 맥락에서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18절)라는 표현을 쓴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곧 교회로 모이는 것이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절)나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는 표현을 보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교회로 모일 때에 주의 만찬이 중심순서였음을 암시한다. 우리말의 식구(食口)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듯, 함께 먹으러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위해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 함을”(18절)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쟁으로 말미암아 먹으러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그의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만찬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했다. 비록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함께 식사할 때 갈등과 반목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의 몸을 이룬다는 깨달음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며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희생을 배워가야 했다. 그것이 교회로 모여 주의 몸을 이루는 신비였다. 


개인의 취향과 권리가 최고의 덕목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한 공동체에 소속되고 헌신한다는 것은 분명히 유행과는 어긋난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갈망하고 찾아 나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동체적인 존재로 지으셨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삼위일체라는 관계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성하게 한다. 가나안 성도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추구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혹은 교회와 신앙에 대한 실망과 회의 때문에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아니면 애초부터 진정한 신앙을 확립하지 못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그 모든 탈 교회의 원인과 해법은 모두 교회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어떠한 관계와 습관의 공동체로 존재할 것이냐의 과제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통해 더욱 중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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