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림의 시간
by 이춘성2023-12-08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이 말은 홈쇼핑 채널이 새로운 쇼핑 트렌드를 만들었던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유행어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문장을 충동구매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에서 물건을 홍보하는 쇼호스트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옷이나 음식을 선전하는 모델의 그럴듯한 외모를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 마치 신들림 현상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신들림’ 표현은 다양한 영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의 영역에서 ‘신들림’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의미 전환에 성공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분이 오셨다”와 같은 신들림의 표현은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수식하는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마니아라는 표현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신들림의 세속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세속화란 과거 신성시하였던 표현과 현상, 공간을 인간의 언어와 현상, 공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작년에 유행했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추앙’ ‘은혜’ ‘구원’ 등의 종교적인 용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낯선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풍기면서 히트 친 이유는 배우들의 좋은 연기도 있었겠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이상한 언어들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인물들이 일상어가 아닌 종교적인 신성한 언어들을 일상어로 세속화하면서 일상의 영역을 일종의 신성한 영역으로 만드는 묘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은 일상의 지루함, 익숙함을 신선함, 새로움, 설렘 등의 신선한 감정으로 탈바꿈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신성화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모든 것이 신성하면, 결국 모든 것이 세속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정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Human Future에서 범신론이 대중적인 인도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이지요. 그러나 인도에서 가뭄과 기근이 들면 제일 먼저 잡아먹는 동물이 바로 ‘소’라는 것입니다. 후쿠야마는 이것이 모든 것의 신성화는 결국 모든 것의 세속화라는 증거라고 주장하지요. 그런 세상은 인간이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마지노선의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속화는 신성한 공간과 언어, 현상만이 아닌 신성한 규범을 상대화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림’의 언어의 대중화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세속화 현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한 ‘신들림’의 세속화와 대중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 현상의 시작점을 보면, 탁월한 쇼호스트들과 유명인들이 인터넷과 홈쇼핑 등을 통해 전국 단위로 물건을 팔게 된 2000년대 초반 이후에 극대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그보다 약 20년 정도 앞서 이러한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현상을 상품에 인격이 거주하는 현상, 달리 표현하자면 상품에 판매자나 생산자의 인격을 담아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 현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상품들이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시장에 가기 위해 걸어가지는 않으므로, 그들의 “보호자들”과 “소유자들”이 이러한 사물들에 거주하는 척한다. 그들의 “의지”가 상품들에 “거주하기”(hausen) 시작한다. 여기서 ‘거주하다’와 ‘신들려 있다’ 사이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파악 불가능하다. 인격은 자신이 사물에 거주함으로써 생산한 객관적인 신들림의 효과 자체에 의해, 말하자면 그 자신이 신들리게 함으로써 인격화된다. 인격(사물의 보호자나 소유자)은 그가 자신의 말과 의지를 마치 거주자들처럼 사물 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생산하는 신들림에 의해, 역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신들리게 된다. … 이러한 환영 산출적인 또는 몽환적인 과정에 대한 기술은 “종교적 세계”와의 유비 속에서 물신숭배에 대한 담론의 전제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306쪽)


신들림이란 사실 서로 존재하는 영역이 다른, 전혀 다른 타자들이 하나로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합니다. 귀신, 혹은 신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면, 이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괴기스럽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현상일 것입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나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영매나 무당을 찾아다니며 점을 치고 안정을 찾기도 하지요.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공포가 공존하는 현상이 신들림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신들림이 일상화된 것이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 활동이라는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물건과 파는 사람의 인격을 동일시하고, 생산자와 물건을 동일시하는 신들림 표현을 통해 인간과 물건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물건화, 물건의 인격화 그것이 현대 신들림의 중심에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여 누군가의 탁월한 능력을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며, 추앙하고 신앙처럼 떠받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앙받는 존재의 능력이 바닥나면 동시에 그의 인격도 바닥으로 내팽개쳐집니다. 신의 몰락인 것입니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신들림의 표현은 인간을 측정 가능한 물질로 환원시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이것이 앞에서 후쿠야마가 인도과 동양 종교의 범신론을 통해서 분석한 ‘소를 잡아 먹는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의 세속화는 모든 것의 신성화이며, 달리 말해 모든 것의 신성화는 모든 것의 상대화를 의미합니다. 


끝으로 인격과 물건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에 자기의 인격을 담는 것이 아니라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벧후 1:4),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신성함을 세속화하여 모든 것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성함을 더 신성하게하고 세속을 세속에 걸맞게 대접하는 것, 또한 인격이 물건이 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진할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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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