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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위대한 설교자가 되려는 욕망에 도사린 위험
by Kwazi Buthelezi2023-01-29

단지 설교만으로는 제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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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에즈윈(Zack Eswine)의 글이다. “하나님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위해 또 청중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의 책을 읽었고 또 설교까지 들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기독교 사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즈윈이 하는 이야기는 내게 익숙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에즈윈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내가 사실상 듣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를 나와 비교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도 또 지금도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는 결코 내가 꿈꾸는 위대한 설교자, 미래의 나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사역하는 캠퍼스 사역에서 누구나 손에 꼽는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에서 풍기던 지독한 무지와 오만의 냄새를 맡느냐고, 굳이 당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이런 무지와 오만이야말로 주님의 영광보다 위대한 사역이 우리의 야망이 될 때 따라오는 결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내게 일어났다. 


목사여, 위대한 설교자 이상을 갈망하라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설교하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목회를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을 때, 그 중심에는 설교가 있었다. 나는 성공적인 (다른 말로 신실한) 사역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적지 않은 설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설교만으로는 제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


물론 설교로 교인을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는 관계 유지가 따라오는 헌신의 문제이다. 목회 훈련 첫해에 내가 발견한 게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을 사역에 대한 실질적인 나의 접근 방식으로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설교는 사역의 일면에 불과하다


훈련하는 동안 나는 지도자들에게서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일 년 내내 내게 주어진 설교 기회는 몇 번에 불과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신학교에서는 당연히 설교 기술을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망스럽게도, 신학교 삼 년을 통틀어서 내가 실제로 설교한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나의 주된 관심인 설교, 그러니까 내게서 설교할 시간을 뺏는 다른 모든 사역에서 내가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대학생 사역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원하는 만큼 설교할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설교했으니까. 어떤 달은 두 번에서 네 번 설교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러나 설교를 하면 할수록, 내 속에서 뭔가 점점 커지는 괴로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위대한 설교자의 모범을 조심스럽게 따르라


설교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훌륭한 많은 설교자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스타일과 방법을 관찰했다. 그러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된 특정 설교 스타일이 생겼다. 열린 귀와 배우겠다는 지혜로 어떤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묵살해 버렸다. 그 결과 내가 존경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지금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간절하게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처럼 설교하고 싶어졌을 때, 문제가 생겼다. 


나는 존경하는 설교자들처럼 소리 내고 또 글을 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사역 경험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장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다른 목사의 사역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설교에 대한 열정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랑에 더 집중했더라면, 나는 설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설교의 세 가지 특징


1. 불만족


첫째, 설교가 점점 더 나를 마비시켰다. 모든 목회자가 짊어져야 할 설교의 부담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의 결과로 따라오는 부담이다. 그러나 메시지를 간과하고 강대상 그 자체에만 집중할 때, 설교자를 마비시키는 또 다른 부담이 있다. 내 설교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하나님의 과정(process)에 만족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설교자의 모습이 있는데, 나를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은 너무도 느렸다. 


2.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영적으로 메마른 설교 준비


둘째, 설교가 점점 단순노동으로 전락했다. “단순”(pure)이라는 말이 순수함에 가까운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설교에 접근하는 내 방식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보다는, 이해 능력이 부족한 교인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숨겨진 암호 책, 그래서 힘들게 해독해야만 하는 일종의 전문 서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런 내 해석 능력은 매우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하게 주석을 의존하게 되었다. 


3. 인정 갈구


마침내, 설교는 내가 괜찮은 목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본문 연구를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설교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나를 응원하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의 투자가 헛되지 않았음을 설교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잊지 말자: 우리가 섬기는 대상은 구주이시다 


이 모든 과정 내내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우리의 청중은 오직 한 분이다.’ 바로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고치는 더 좋은 해독제는 없다. 내가 기쁘게 해야 할 유일한 분은 이미 그의 아들 안에서 나를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으로 그분을 섬기기만 하면 된다. 



원제: The Danger in Desiring to be a Great Preache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처럼 설교하고 싶어졌을 때, 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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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wazi Buthelezi

콰지 부셀레지는 줄루족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The Bible Talks라는 대학교 사역을 하고 있다. 또 사진작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