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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용서의 세 지평
by 최창국2022-12-28

용서는 단순한 분노 관리 그 이상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당한 분노, 즉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 분노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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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하지 않다. 성경에서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피상적으로 보면 용서를 다루는 많은 본문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항상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는 서로 다른 지평의 용서가 묘사되어 있다. 바로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와 관계적 용어이다(스티븐 트레이시, 영혼을 만지다, 301-12). 용서의 이러한 세 가지 지평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구조와 특징을 지닌다.


용서의 사법적 지평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는 하나님에 의한 죄의 용서와 관련된다. 사법적 용서는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며(시 51:1-9), 가해자와 다른 모든 범주의 죄인에게 해당한다(시 32:1-5; 고전 6:10-11). 하나님에 의한 사법적 죄의 용서는 구원 경험과 관련된 용서이다. 사법적 용서는 죄에 대한 고백(시 32:5; 요일 1:9)과 죄의 인정과 회개(눅 24:47: 행 2:38, 5:31)를 조건으로 한다. 죄에 대한 사법적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를 베풀 권한이 없다. 인간은 사법적 용서를 베풀 수 없지만 가해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사법적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역할이 모두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도록 충고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내용이 있다(마 9:1-8; 막 2:1-12; 눅 5:17-26).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군중 속에 있는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기 위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아래로 내려보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죄 사함 또는 죄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가 아니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피해자의 용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용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보다 사실상 ‘신의 용서’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물의 핵심 의미는 내세적인 신앙이나 “의례적 종교 행위의 일환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맞춰가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2).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선명한 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광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 21:1-19). 예수님은 음식을 준비하신 후에 불과 며칠 전에 사람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 부인하였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한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두 가지로 총 세 번 하신다(요 21:15-19). 처음 두 번의 질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묻는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주님의 친구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말을 바꿔 이렇게 묻는다. “너는 나의 친구이냐?” 세 번째 질문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그대로 옮겨 다시 묻자, 베드로는 슬퍼하며 이렇게 답한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의 친구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답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용서를 넘어선 위임의 말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책임을 부여한다. “내 양들에게 먹이를 주어라.”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보살펴라.”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제자의 소명을 암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이는 베드로에게 전환의 순간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명의 메시지만 아니라 용서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만남에는 용서의 두 가지 의미, 즉 베풀다(카라조마이, carizomai)와 풀어주다(아피에미, aphiemi)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87-88).


결국 주님의 용서는 용서와 소명으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뜻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이웃을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이웃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이웃이란 교회 안과 밖의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라 분노와 심지어 증오의 대상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용서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뉘우침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소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베풂(for giving)과 남을 위함(for others)이라는 신의 부름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3). 결국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위한 기초이자 소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심리적 지평


심리적 용서 또는 정서적 용서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용서로서 두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부정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차원이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은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 등과 관계되고,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가해자가 저지른 악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인 분노와 같은 반응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분노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분노가 무조건 나쁘거나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건강하고 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해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였다(마 21:12-17; 막 3:5). 시편에도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5편, 10편, 69편).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분노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통해 분노는 신성한 적대감이 아니라 악을 향한 거룩함의 변치 않는 반대라고 해석했다(리로이 아덴·데이비드 베너, 용서와 상담, 259). 성경에서 금하는 분노는 개인적으로 복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마음속에 품는 분노다. 바울은 인간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죄가 되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엡 4:26). 


한편 분노와 유사하지만 다른 형태로 표출되는 감정인 분개도 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누그러지지만, 간혹 그 분노가 마음속에 오래 머물거나 때로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정착된 분노가 소위 분개이다. 특히 가해자의 악의와 부정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가 분개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버틀러(Butler)는 분개를 일종의 자기보호 기재로서 불의를 목격하거나 경험할 때 나오는 정당한 감정적 대응이라고 이해하고 이렇게 강조하였다. “악의와 부정에 대항하는 분개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유대감이자 동료애라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S. Lamb·Jeffrie G. Murphy, eds., Before Forgiving, 44). 그가 분개의 긍정적 차원을 피력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하다. 소위 용서에 관한 기독교적 가르침은 안타깝게도 피해자의 분개와 같은 감정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용서에 관한 가르침에서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중요치 않다는 관점을 견지하며 용서야말로 악행이나 상처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버틀러의 이해는 기독교의 이러한 가르침처럼 단순하고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용서의 실천을 단지 손쉬운 아량으로 혼동하는 오류는 심한 상처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더욱 큰 심적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불의나 악에 대해 단순히 침묵하거나 잊거나 무시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는 정의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피해자가 용서하려고 할 때 무엇을 용서하려고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용서가 자신과 가해자 그리고 세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만들지 아니면 더 못한 곳으로 만들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용서는 윤리적 차원을 피하기 어려운 심리적 영적 여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분개는 악행에 항거하는 일종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아존중의 행위의 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분노나 분개의 위험한 측면도 있다.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가 자기 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가해자에게 집착하는 상태가 된다면, 분노와 분개는 역으로 지나친 자기 몰입에 빠지는 위험성을 초래할 수 있다. 파멜라 쿠퍼-화이트(Pamela Cooper-White)는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섣부른 용서를 할 때의 위험성을 잘 설명하였다. 


섣부른 용서는 일시적으로 모든 일을 무마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게다가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기독교의 주요 덕목이라고 믿으며 성장해 온 우리에게 섣부른 용서는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는 분노와 아픔을 내면 깊숙이 집어넣는 결과를 일으킨다. 그 때문에 이 분노와 아픔은 독을 품는 증기가 되어 우리 집과 교회와 공동체 밑바닥을 서서히 썩게 만든다. 그리고 섣부른 용서 때문에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책임도 진심으로 감당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변화와 재활을 막기 때문에, 그것은 실은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아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과도 같다(Pamela Cooper-White, The Cry of Tamar: Violence Against Women and the Church's Response, 256).


광의의 맥락에서 용서는 정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감성을 무시하고 진정한 용서에 이를 수 없다. 피해자의 부정적인 감정은 용서에 필요한 예비 단계이자 여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로 인해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게 하거나 그러한 감정이 자기 비하와 같은 내적 분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용서는 단순한 분노 관리 그 이상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당한 분노, 즉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 분노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의 기억을 바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분노와 같은 내적 상태나 행동을 부인하거나 왜곡시켜도 안 되지만, 가해자로부터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기보다는 가해자의 곤고한 상태도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의 긍휼의 마음이 용서로 이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골 3:12-13). 피해자의 이러한 마음은 분노를 극복하도록 도와 심리적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심리적 용서의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가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가 가해자에게 다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피해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초하여 가해자가 스스로 회개하고 치유될 것을 기대하면서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이다(마 5:43-47).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도우심으로 분노와 증오를 극복하고 가해자에게 적절한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울 때 심화된다.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부이다. 특히 분노나 분개는 자아존중이라는 측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이러한 감정들에 익숙해질 경우 도리어 그 감정들이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분노와 분개는 용서와 모순되는 감정이 아니다. 용서의 행위는 정당한 분노와 분개를 무시하거나 잊는 데 있기보다는 그러한 감정들을 품고서 무언가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분노나 분개의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분노나 분개가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조용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내적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용서의 시작일 뿐이다. 인간의 용서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도 관계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용서의 관계적 지평


관계적 용서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변화와 관계되어 일어나는 용서이다. 즉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회개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메타노니아’는 ‘마음’과 ‘변화’를 뜻하는 두 헬라어를 합성한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방향이나 행동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행 26:20; 롬 12:2; 고후 12:21계 2:5). 


가해자의 회개와 사과(apology)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과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확실한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는 자신을 ‘재구성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의 사과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가능하다. 관계적 용서는 특히 가해자가 범한 죄와 그 죄가 지닌 악하고 파괴적인 성질에 대해 충분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가해자의 행동이나 삶의 변화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회개할 때까지는 용서를 시작하거나 어떠한 용서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용서의 역동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관계적 용서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기보다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 관계된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의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과 관계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분노와 같은 내적 장벽을 정화하는 여정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라 하더라도 심리적 용서를 해야 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에게는 치유의 희망을 제공하고, 가해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여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가해자를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에서와 야곱의 심리적, 관계적 용서


인간 사이의 심리적 용서의 여정과 관계적 용서가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의 교활함과 속임수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와 야곱의 회개와 함께 관계적 용서의 과정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에서는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자권을 빼앗긴 후에 극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발생한 에서의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에서의 분노 감정은 격분으로 이어진다. 그의 격분은 야곱에 대한 복수감정으로 이어지고 야곱을 죽이고자 한다(창 27:41). 리브가의 도움으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한다. 이때 리브가는 야곱에게 “네 형의 분노가 풀리거든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창 27:45)고 말한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야곱에게 집을 떠나 기다리라고 권한다. 분노의 감정은 순식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야곱은 에서에게로 돌아온다. 세월이 지난 후에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워졌을 때 야곱은 에서에게 용서를 구한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 감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화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에서의 분노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완화되었으며, 야곱의 회개를 통해 용서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에서 앞에서 야곱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힌 후에 에서와 야곱은 화해를 하게 된다(창 33:4).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 피해자인 에서의 심리적 용서와 에서와 야곱 사이의 관계적 용서는 야곱의 회개와 함께 순차적으로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에서의 심리적 용서의 여정에서 발생한 분노가 시간이 필요했음을 암시해 준다. 즉 리브가가 야곱에게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게 한 것은, 야곱으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 감정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에서의 심리적 용서는 용서의 예비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에서의 심리적 용서의 과정이 있은 후에, 야곱의 회개와 함께 관계적 용서가 일어난다. 이는 야곱이 에서 앞에서 몸을 일곱 번 굽힌 후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는 모습(창 33:3-4)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물로서 용서 


용서는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방법이자 여정이다. 용서는 상처나 악행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을 무시하거나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넘어서는 일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와 악행을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상처의 황무지에서 공감의 강물을 건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다. 용서는 공감의 프락시스다. 그것은 가해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비통함과 죄책감 등을 피해자가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승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피해자로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도리이다. 용서의 결과,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나 부당한 상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거듭난다.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의미로서 승리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는 반전의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치유와 자유의 기회를 주는 선물이다. 진정한 용서는 악에 대한 자비의 승리이며 비정에 대한 공감의 승리이다.

용서는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방법이자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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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