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 그리스도인 시민의 삶은?
by 이춘성2022-11-07

코로나19는 이전까지 사람들이 외면했던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들추어서 현실을 깨닫게 하는 각성의 효과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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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 동안 전 지구와 대한민국을 강타한 코로나19의 영향력은 일상의 지형을 이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누었다. 철학자 한병철은 코로나19 이전의 세계는 긍정만을 이야기하는 시대였다면 코로나19는 인류가 억지로라도 고통의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단적인 예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현상은 사회의 고통의 측면을 은폐하고 긍정만을 극대화하는 왜곡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가 만든 이러한 현대 사회는 고통의 실재(實在)를 무시하고, 병자가 극도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진통제에 취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고 진단하였다. 그의 용어로 하면 현대 사회는 ‘진통사회’라는 것이다. “나아가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 좋아요(Like)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좋아요는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인스타그램에 적합해야 한다. … 그 결과 우리는 만족 문화의 표면 아래쪽에 쌓이는 긍정의 찌꺼기에 에워싸여 질식한다”(고통 없는 사회, 13).


고통의 재발견


한병철에 따르면 코로나19는 고통과 악의 현실을 무시하고 ‘좋아요’의 진통제에 취해 있는 현대인에게 현실을 자각하도록 만든 각성제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각성이란 이전보다 더 큰 고통과 충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코로나19는 각성의 효과만큼이나 그에 따르는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19 초기에 전 세계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당시 매일 죽어 나오는 시신을 화장할 시설의 부족으로, 세계 대도시들의 광장에는 구급차와 간이 시체 보관소가 휴식을 즐기던 가족과 연인들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또한 감염된 가족 간의 생이별과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같은 시간에 죽은 부부의 이야기가 가슴 저리게 하였다. 더하여 사람들은 서로를 향하여 저승사자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경계하였고, 생명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이제 많은 부분 일상을 되찾았지만, 오랜 격리의 생활은 여전히 이웃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사람들은 코로나 이전보다 더욱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속에서 위로와 안정감을 얻고 있다.


인간의 이중성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너무나도 많다. 긍정적인 부분은 인간이 그동안 외면하였던 고통의 현실과 마주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후와 환경문제에 대한 각성이다. 코로나19가 한참이던 2021년 영국의 BBC는 코로나19가 윤리적인 소비를 촉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사람들은 코로나19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인재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소비자들이 환경과 기후변화, 동물복지, 인권 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친환경 제품에 대한 소비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코로나19는 플라스틱 포장, 마스크와 같은 일회용품의 소비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지금도 매달 약 1,290억 개의 마스크가 소비되며, 이는 1년이면 스위스 전 국토를 덮을 정도의 쓰레기이다. 또한 2명이 일주일간 자가격리를 할 경우, 일회용품의 발생과 이를 생산하고 소각하면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3.67 kg)을 계산하면, 그 양은 20년생 소나무 한 그루가 1년 내내 흡수하는 탄소량과 맞먹는다.


이렇듯 코로나19는 이전까지 사람들이 외면했던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들추어서 현실을 깨닫게 하는 각성의 효과를 주었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환경을 파괴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중성이 보여주는 현실은 사회구조를 개혁하여 개인과 국가의 윤리적인 선택을 돕겠다는 사회윤리의 이상의 약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회로 숨는 개인


일반의 사회윤리란 윤리적 문제를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고, 그 구조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둔다. 예를 들어 사회의 구조와 환경이 어떤 개인을 계속해서 가난과 불행한 상태에 처하게 한다면, 그 개인은 비윤리적인 선택에 손쉽게 노출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어떤 사람은 계속하여 부유하고 좋은 환경 속에서 비윤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한, 누군가 비윤리적인 선택에 상대적으로 쉽게 노출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바꿀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같은 환경에서 윤리적인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 사회윤리의 역할이다.


하지만 사회윤리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개인의 모든 비윤리적인 선택을 사회와 환경의 탓이나 어떤 특정 계층의 문제로 돌릴 수 있다. 이럴 경우, 과거 공산당 혁명이 그러했듯, 부르주아와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특정 계층을, 의사가 수술실에서 암 수술하듯, 사회적 암 덩이로 규정하고 제거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윤리 안에서 인격을 제거하고, 단지 더 큰 이상과 사회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의 폭력이다. 그러면 성경은 사회윤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기독교 사회윤리의 비전


먼저 성경은 사회의 구조가 인간을 비윤리적인 선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예수님을 대조하면서 아담을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인류의 대표자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 5:12). 이것은 아담 이후에 만들어진 죄의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뒤따라 나오는 말씀은 아담의 죄는 단지 사회구조의 문제만이 아닌 개인의 인격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윤리 문제는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선택이란 유기적 연합의 결과물이다. 성경은 사회윤리가 제기하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인정하면서, 개인의 책임 또한 결코 사소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 리프(Philip Rieff)는 현대 사회를 ‘심리치료의 세계’라고 하였다. 개인은 억압적인 사회구조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는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피해자들의 비정상적이며 비윤리적인 행동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심리적 트라우마이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심리치료의 세계’는 죄, 죄책, 회개란 말을 상처와 치유라는 용어로 바꾸었으며, 현대는 윤리가 아닌 치료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세계는 일종의 거대한 정신 병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피해자성과 심리치료를 더 가속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피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또한 코로나19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도 드물다. 우울증과 강박증, 불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는 사람들을 소셜네트워크와 인터넷 앞에서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직접적인 관계성을 상실한 현대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피상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대조적으로 가해자성이 약해진 현대인들은 27인치 컴퓨터 모니터 앞이라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 자신의 피해자성을 눈덩이처럼 키우고 있다. 가해자는 없는 피해자만 남는 구조가 코로나19가 만든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네트워크와 가상현실의 세계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고통과 문제는 여전히 계속된다. 진통제의 효과는 유효 기간이 있듯, 새롭고 강한 진통제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고대의 공동체와 개인이 폭력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희생양 제의를 통해 진통제를 투여했듯, 우리도 희생양을 찾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탈윤리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윤리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희생 제사의 양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정확하게 보았듯,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무책임함과 폭력을 세상 앞에 고발하였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인간의 잔인함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담의 대표성은 새로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바뀐다(로마서 5장). 아담은 죄인을 대표하지만, 예수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책임 있는 의인을 대표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펼친 기독교 사회윤리이다.


기독교 사회윤리는 세상의 죄와 고통에 책임지는 책임 윤리이다. 누군가를 대신 희생시키고 자신은 심리치료라는 거짓 속에 피해자인 척하거나 가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마주하고 현실 속에서 책임지는, 더 나아가 약자의 책임을 대신 져주는 것이 기독교 사회윤리이다. 포스트-코로나19 시기에 책임지는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곳이 공공의 영역이든 사적인 영역이든 관계없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 깊은 파장이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책임지는 삶을 살 것인가?

기독교 사회윤리는 세상의 죄와 고통에 책임지는 책임 윤리이다. 누군가를 대신 희생시키고 자신은 심리치료라는 거짓 속에 피해자인 척하거나 가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마주하고 현실 속에서 책임지는, 더 나아가 약자의 책임을 대신 져주는 것이 기독교 사회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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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