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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⑥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2022-11-06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에 면류관을 씌우실 때는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 만들어진 면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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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코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결론적으로 말하지 않는다.[28]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를 논한 게 법적인 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덕과 더불어 그에 따른 변화에 대해 썼다고 하더라도, 그의 “표현 방식”에 따른 칭의, 특히 칭의를 의롭게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근거를 모호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칭의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지니고 있는 이런 지속적인 모호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따르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한다. 펠라기우스 논쟁을 요약한 중요한 편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우신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사람이 은혜 앞에서 무슨 공로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사람이 과연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 …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에 면류관을 씌우실 때는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 만들어진 면류관이다. 우리가 믿음의 시작에서부터 긍휼하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원래 믿는 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믿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마지막 날 영생의 선물과 함께 하나님은 말씀에 적힌 대로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의 관을 씌우실 것이다(시 103:4). … 심지어 영생 자체도 … 선행 공로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지만, 상급으로 주어진 공로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어떤 이유도 없이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해 주어진 게 아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그 자체조차도 오로지 은혜로 인한 것이다.[29]


믿음의 시작과 함께 행하는 선행을 포함하여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채무자로서 빚을 갚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은사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우신다. 따라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 앞에서 선언되는 칭의의 유일한 근거라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사람이 구원을 이뤄내야(earn)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이면에서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을 더 명료하게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그가 겪었던 교리적 논쟁이 그에게서 더 많은 신학적 성찰을 이끌어내지 않았기에,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을 위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론 읽기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를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그의 성경적 주석과 신학적 추론을 아퀴나스, 칼뱅, 에드워즈 및 우리 동시대인과 같은 후대의 해석자들과 비교하기 이전에 그가 살았던 시대의 입장과 방식에 맞춰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건 여전히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신학적 논쟁과 실천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코 예상하거나 또는 다룬 적 없는 특정 질문이나 문제에 관해서 그에게 억지로 답하도록 강요하는 시도를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개혁자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무런 선행의 공로 없이 오로지 은혜로만 죄인을 용서한다는 진리를 옹호했다는 사실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과 사랑의 불가분성을 강조하고 옹호한 방식, 또는 칼뱅이 그리스도의 칭의와 성화의 두 은혜 사이의 불가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와 의견을 같이한다는 데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의미를 표현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식이 비록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라면 누구든지(빌 3:9)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를 부정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그 점을 모호하게 표현한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28. 라이트(Wright)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 논리가 법의학적 정당화(“Justification in Augustine”)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 조(Cho)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르쳤다고 보다 자신있게 주장한다. (“Divine Acceptance of Sinners: Augustine’s Doctrine of Justification,” Perichoresis 12, no. 2 [October 2014]: 163?8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거론하지 않는다는 데 라이트와 조 둘 다 동의한다.


29. Letter 194.5.19 (WSA 2.3:296). Cum Deus coronat merita nostra, nihil aliud coronat quam munera sua. Cf. Cho, “Divine Acceptance of Sinners,” 178.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우리는 개혁자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무런 선행의 공로 없이 오로지 은혜로만 죄인을 용서한다는 진리를 옹호했다는 사실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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