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⑤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2022-10-30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라야 함을, 바울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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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2.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평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 기간 내내 “믿음이 없이는 영생에 이를 수 없지만, 행함이 없어도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응했다.[25]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안일한 신앙(easy-believism), 더 엄밀히 말하면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라고 부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믿음은 바울을, 특히 바울의 고린도전서 3:11-15을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정죄했다. 그리고 그는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라야 함을, 바울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믿음이 존재한다고 가르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바울이 영생을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롬 4:5) 사도 바울이 말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면 의를 행함(the works of justice)이 멸시되어도 관계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는 전혀 율법의 공로를 쌓지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의 공로(the works of the law)는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 오는 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따라온다.[26]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칭의의 사건(신앙의 시작)과 뒤따르는 결과(신앙의 진보)를 분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후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가르친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도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라고까지 기록하게끔 했던, 어떤 비성경적 생각에서 나오는 “오직 믿음”을 거부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야고보와 함께 그런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 그러니까 “귀신의 믿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야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27]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진리를 자신의 시대에 선포하면서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바울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가? 우리의 구원에 기여하는, 믿음에 따라오는 행위는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며, 어떤 식으로든 그런 행위가 우리의 구원에 기초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25. Augustine, Revisions 2.38 (WSA 1.2:145). 


26. Augustine, Faith and Works 14.21 (WSA 1.8:241). 


27. Augustine, Faith and Works 14.21 (WSA 1.8:241). 이 구절들에 더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여러 곳에서 “오직 믿음”에 대한 이 잘못된 생각을 수정했다: Enchiridion on Faith, Hope, and Charity 18.67; The City of God 11.17?22; Eight Questions of Dulcitius 1.10-13.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우리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야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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