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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복음은 환대로부터 온다

서평: 로자리아 버터필드의〈복음과 집 열쇠〉

by 이춘성2022-10-06

신앙의 신비는 만남에서 온다. 그리고 환대는 만남을 만든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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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를 주제로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난 지난 5~6년 동안 환대에 대한 고대 사회에서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문화인류학과 사회학, 철학과 윤리학, 신학 등 다양한 논의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20대 후반부터 10년 넘게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집 식탁에 초대하여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환대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였다. 내가 사역했던 단체는 1950년대 스위스의 한 가정집에서 자녀들의 친구들을 위해 가정집을 개방한 선교사 부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 가정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젊은 구도자들로 넘쳐났고, 가정은 공동체가 되어 프랑스어로 피난처라는 뜻의 라브리(L’Abri)라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었다. 이 공동체를 세운 선교사 부부가 20세기 기독교 지성이라 불리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와 그의 아내 이디스 쉐퍼(Edith R. M. Schaeffer)다.


환대의 추억


영국 라브리에서 일할 때, 그곳에는 쉐퍼 목사 부부와 그의 자녀들과 함께 환대의 사역을 함께해 왔던 간사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외부인들이 라브리 사역을 지성적 사역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라브리 사역은 환대 사역이라고, 나 같은 신세대 간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당시 라브리를 쉐퍼의 책을 통해 접하고, 이러한 지적인 접근에 매료되어 라브리를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날카로운 지성을 배우고자 했다. 당시 나와 같은 학생들이 라브리 식탁을 가득 채웠고, 식탁에서는 대학 강단보다 더 심도 있는 질문들이 오갔다. 그러나 후에 내가 간사로 지원하여 라브리 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라브리에서는 나의 지성적인 능력을 평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내가 치러야 하는 시험은 라브리 간사와 가족들을 위해서 내 손으로 직접 요리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떨림은 머리가 아닌 식칼을 잡은 내 손끝으로 기억한다. 난 인터넷을 검색하여 몇 개의 레시피를 얻었고, 마른반찬과 메인 요리로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준비했다. 이 음식을 기쁘게 받아먹은 공동체의 가족들은 나를 가족으로 맞이하였다. 이후에 난 일을 준비하기 위해 서점에 가서 요리책들을 샀고, 마트에 가서 요리 도구와 앞치마를 샀다. 지금도 내 서재에는 10년 넘게 사용하여 각종 양념이 듬성듬성 묻어 있는 레시피 북들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으며, 주방에는 결혼 전부터 손님 대접을 위해 사 모았던 요리 도구와 코렐 접시들이 가족과 손님을 위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최근 받아 든 한 책은 나의 젊음의 한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환대의 일을 떠올리게 하였다. 지금은 이론과 강의로 환대를 설명하고 있지만, 환대는 이론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숨어 있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 내려간 이 책은 그 신비의 강력함을 다시 한번 증언하였다. 이 책은 한때 레즈비언 영어학 교수였고 미국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 된 뜻밖의 회심의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가 쓴 복음과 집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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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눈가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너무나 펑펑 울어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기도 했다. 이미 중년이 되어 버린 난, 이 시기의 남자가 그렇듯 호르몬의 영향으로 이런 과도한 반응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로자리아 가정에서 일어난 환대의 식탁은 내 집에서 일어났던 일과 너무나도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데칼코마니를 하듯,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다른 대륙의 이름 모를 그리스도인의 환대의 식탁에서 일어난 기쁨과 공포, 회복과 회개, 분노와 용서, 다양한 세계관들의 대결 등은 환대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물며 로자리아가 식사 대접을 위해서 잘 깨지지 않고 실용적이며,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코렐 접시를 사용하고 있는 것까지도 말이다(53쪽). 20년 전, 총각으로 환대 사역을 시작할 때 구입한 코렐 접시는 여전히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상부 장의 한편을 채우고 있다. 매일 실천해야 하는 일상의 환대를 위해서 20년을 견딜 만한 접시로 이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


로자리아는 예수님의 환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손 대접) 행위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또한 예수님의 환대는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중앙으로 옮겨주는 은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은혜, 예수님이 주님인 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고 주장한다(43쪽). 로자리아는 예수님의 환대를 ‘급진적인 환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급진적인 환대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자리아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환대란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에 기초한 것이다(51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곧 위대하고 더 큰 급진적인 환대를 경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급진적인 환대를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환대는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경험한 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거 하는 대표적 표징이다.


로자리아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당신이 하는 말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이다”(55쪽), “둘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56쪽), “셋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우리가 입어야 할 영적 갑옷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심령이 상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게 할 수 있다”(57쪽), “넷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하늘에 있는 수많은 증인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57쪽) 로자리아는 그녀의 환대에 대한 네 가지 이해를 바탕으로 환대가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 크리스천 세상에서 이웃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로자리아는 환대를 세상을 향해 벽을 쌓고 세상의 이웃을 악의 하수인으로 여기면서 증오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며, 이와 달리 세상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고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교만의 죄의 함정에서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주장한다. 로자리아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의 강력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적 환대(손 대접)”는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표현이지만 이것을 통해 신비가 드러나고, 공동체가 형성되며, 진실을 말하는 태도가 널리 확대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환대(손 대접)는 바로 그것을 요구한다. 환대(손 대접)는 매우 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이는 매우 강한 힘을 지녔다. 진실로 당신이 음식을 대접하고, 붙들어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천국의 문을 뒤흔들 만큼 강력하다(66쪽). 


환대와 그리스도인의 소명 


로자리아는 전직 영어학 교수이자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이며 레즈비언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과거는 ‘환대’란 용어가 현대에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환대’를 ‘혐오’의 반대 표현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혐오’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인식되는 집단이 성소수자들이다. 그리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단을 모두 혐오 집단으로 낙인찍는 것이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같은 성 정치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환대란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성정치, 동성애 운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용어로 변질되어 있다. 그러기에 로자리아는 ‘기독교적 환대’가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로자리아는 환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요소라는 사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복음과 집 열쇠”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의 영어 제목은 “The Gospel Comes with a House Key”이다. 직역하면 “복음은 집 열쇠에서 온다”이다. 한글 제목은 복음, 집, 열쇠가 각각 환대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책 내용 안에 이 제목의 사연이 있다.


로자리아가 레즈비언으로서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할 당시, 미국과 유럽 사회에는 에이즈로 인한 공포가 극에 달하였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사회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동성애자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만약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서로의 집으로 피신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비상 연락망을 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의 집 열쇠를 공유했다고 한다. 위험할 때, 언제든지 자기 집을 동료 동성애자들이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로자리아는 당시 이러한 동성애자들의 연대와 환대가 현재 ‘급진적 환대’라는 용어를 이들이 점유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리아는 자신이 과거 동성애자였을 때를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동성애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환대’라는 용어와 가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고 이 제목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자리아가 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통해서 동성애자들의 왜곡된 환대가 아닌 더 크고 바르며 급진적인 기독교적 환대를 경험하였을 때, 비로소 동성애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로자리아는 거짓과 가짜 환대가 아닌 진정한 환대를 세상의 이웃들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의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급진적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아니라 소명이자 의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기 집에서 환대(손 대접)를 베풀도록 부름 받고 있다. 독신자 가정도 기혼자 가정과 마찬가지로 환대(손 대접)를 필요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녀들이 있는 가정이나 자녀들이 없는 가정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하는 통로이기는 마찬가지다. 구원받은 부자들이나 구원받은 빈자들이나 그 중간에 속한 사람들도 가정과 기숙사와 버스 정류장과 공원에서 기독교적 환대(손 대접)를 베풀도록 부름 받고 있다(315쪽).


환대로의 초대 


과거 내가 환대 사역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밥을 하고, 오전에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며, 점심이나 저녁을 준비해서 손님들을 대접할 때, 내 한쪽에서는 이 사역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멋지게 설교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며, 인사이트 넘치는 강의를 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온종일 노동하고도 밤늦게 홀로 책을 읽고 공부하였다. 읽고 가르치는 것이 더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고, 언젠가는 이 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때로는 찾아온 손님들이 자기가 다니는 서울 대형교회의 부목사들을 자랑하면서 시골에 사는 내 기를 죽이는 일도 있었다. 환대는 나에게도 환대받는 상대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도 나를 찾는 사람들은 내게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 설교와 가르침이 내 요리 솜씨보다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과거와 달리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시대는 탁월한 설교자와 강의, 책이 없어서 복음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옆집의 우리 이웃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우리 식탁에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환대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설교자와 강의, 신학과 변증, 책이 있다고 한들, 만나지 못한다면 들려 줄 수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신앙의 신비는 만남에서 온다. 그리고 환대는 만남을 만든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 말이다. 마지막으로 환대는 겸손한 초대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소박함과 겸손함은 환대의 가장 큰 미덕이며, 누구나 환대를 베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열린 손이다. 


환대(손 대접)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환대(손 대접)는 잔치가 아니다. 환대(손 대접)는 잔치가 될 필요가 없다(325쪽).

 

환대(손 대접)는 매우 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이는 매우 강한 힘을 지녔다. 진실로 당신이 음식을 대접하고, 붙들어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천국의 문을 뒤흔들 만큼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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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