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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을 막아준다면 가시도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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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arshall Segal  /  작성일 20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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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ayla Brown on Unsplash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고통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 최악의 시련을 맞더라도 그분의 강력한 사랑의 손길은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거나, 인내하는 중에 믿음이 더 커지도록 하거나,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준비시키거나 하신다. 또 우리의 숨겨진 죄를 드러내게 하거나,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더 깊고 강렬한 기쁨의 샘을 샘솟게 하신다. 결국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선은 종종 뭔가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 뭔가를 피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고통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일들을 깨닫지 못하곤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뿐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피해야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신다. 때때로 어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숨겨진 죄를 바라보게 만든다. 달리 말해서, 어떤 고통은 특정한 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베푸는 사랑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바로 교만이라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는 이 어둡고도 위험한 죄 말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특정한 육체의 고통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그 고통은 다름 아니라 그로 하여금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나로 하여금 자만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이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교만이 가진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우리는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받는 계시가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유혹도 같이 커진다.


교만이 가진 진짜 위험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배움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다면, 사탄조차도 당신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라고 격려할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가시를 주었다. 바울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처럼 교만이 주는 영적인 위험을 알고 있다면, 만성 통증이나 질병, 성취되지 않은 꿈이나 기대, 관계의 끊어짐과 투쟁, 괴로움을 주는 유혹, 또는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가시를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 적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을 할 때도 바울은 교만을 언급했다.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2-4). 앞으로 나타날 끔찍하고 처참할 정도로 파괴적인 그 한 사람은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교만의 씨앗이 실제 사람의 크기로 자란 것이다. 교만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것을 우리에게도 합당하다고 설득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날까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질 때까지, 교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로 입교한 자도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교회가 한 남자를 장로로 성장시키자마자 그 사람은 교만에 빠져서 사탄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 교만의 유혹은 끔찍하고도 파괴적인데, 그것은 특히 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가시


교만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가시를 축복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가시와 관련이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교만이 사람들을 영원히 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또한 우리가 바로 그 유혹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있다면, 가시는 그게 아무리 불쾌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더라도, 사랑스러움이라는 전혀 새롭고 놀라운 차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가시에서 찾아내는 그 어떤 사랑스러움도 고통을 둔하게 하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게다가 사탄은 끊임없이 가시를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고 위협할 것이다(고후 12:7). 그러나 우리는 아주 천천히 하나님이 어떻게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성장시키며 또 새롭게 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저주라고 느껴지던 가시가 이제 생각지도 못하게 소중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또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자라게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더 자주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결코 고통이 주는 고뇌를 최소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함을 빼앗기지 않았다. 괴로움을 당하고 곤욕에 처하고 박해를 당했으며 또 맞고 쓰러졌지만(고후 4:8-9), 그는 그 모든 상황에서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


겉사람이 낡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끝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광의 무게 또한 실제이고, 아니 사실상 그건 바울이 잃거나 겪은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고난은 극심했고 때때로 참기 어려웠지만(고전 1:8), 고통은 아침의 수평선을 정복하는 일출처럼 항상 고통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하나님께 간구하기


바울이 가시를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가시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선을, 결코 일시적인 안식과 바꿀 수 없는 선을 가져다줄지언정 그렇다고 우리가 가시를 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또한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해서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그가 교회에 간구한 것처럼 하나님께도 간구했다(그는 같은 단어를 롬 12:1; 고전 1:10; 엡 4:1; 살전 2:12에서도 썼다). 그는 서신서에서 여러 번 간구했지만 여기서처럼 하나님께 간구한 적은 없었다. 그의 간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가장 먼저, 고통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마 26:39).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믿음으로 그리고 간절히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구할 뿐 아니라, 반복해서 간구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주님에게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간구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를 통해서 입술까지 가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또한 반복해서 간구하기를 원하신다(눅 18:1-8). 따라서 고통이나 상심이 너무 클 때 반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영원히 간구하지 않았다. 그는 간구했고 또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그리고는 그의 가시를 받아들였다. 마치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강점을 들어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함을 더 높이 들어 사용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가시가 사라지는 것이 정말로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고 또한 필요할 때면 가장 적절한 때에 아낌없이 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꼭 세 번까지만 간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울처럼 “가볍고 순간적인” 이 세상의 가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다시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바꿀 것이다. 시련과 약점이 승리와 강점보다 훨씬 더 큰 은혜임을 알게 되고, 모든 지혜로움과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거절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서 가시를 포용할 뿐 아니라 자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까지 우리를 바꿀 것이다.


기꺼이 가시를 짊어지고


가시를 달라고 기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면, 우리는 가시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약함 뿐 아니라 능욕과 곤고함 그리고 박해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앞 장에서 바울은 그가 겪은 능욕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5–27)


그럼에도 만족하다니? 고통 안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고통이 나를 떠나지 않는데도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고후 12:10)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약점, 고난, 핍박, 재난으로 인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 지혜, 은혜, 사랑이 더 풍성하고 더 밝게 드러날 수 있었다. 가시가 주는 현실은 가혹하지만, 바울이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형성해 가는 데에 그의 가시는 큰 역할을 했다.


바울은 그로 하여금 교만을 멀리할 수 있게 했기에 가시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시가 와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다음 구절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교만은 어리석게도 지금 높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 높이기를 좋아한다. 가시를 지니고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능력, 지혜, 타이밍을 더 높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를 영원히 높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가시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날을 기쁜 마음으로 자족하면서 기다린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Welcome Whatever Keeps You from Pride

번역: 무제

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Not Yet Married'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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