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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보시기에 아름다워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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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Eric Watkins  /  작성일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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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on Petit Chou Photography on Unsplash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23).


만일 당신이라면 자식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자식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게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우리는, 한 아이의 부모가 가진 보호 본능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력한 손으로 그 아이를 지키시는 놀라운 섭리를 묵상하게 된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1장과 2장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출애굽기는 멍에와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큰 권능을 펼쳐 보이며 시작된다. 앞서 창세기는 족장 야곱의 가족이 왕의 보호를 받으며 애굽에서 생활하는 장면으로 마쳐졌다. 하나님의 섭리로, 요셉과 다른 모든 형제들이 바로에게 호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야곱의 가족은 애굽 땅의 복락을 누리며 행복한 재결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그 시작부터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이스라엘 역사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4백 년이나 흐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바다의 모래같이 큰 수효를 이루게 되었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정권을 잡고 말았다(출 1:8). 그러자 요셉의 시대에 주어지던 호의는 더 이상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게 된다. 오히려 애굽인들에게 이스라엘이란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재앙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새로 등극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괴롭히며 탈진시켰다. 그런데 그 백성은 이상하게도 압제를 받을수록 수효가 늘어났다.


그 결과 바로는 매우 악독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즉 커져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지하기 위해 히브리 산파들을 불러 이스라엘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아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출 1:16, 22). 당시 나일강은 악어들이 들끓기로 유명했다. 아마도 이렇게 악의적인 법령은 성경뿐 아니라 세속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실로 마음이 흑암처럼 어둡지 않고서야 그런 명령을 내릴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의 심령은 그토록 캄캄했기에, 그렇게 모든 아들을 죽이라는 생각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죄로 물든 세상에서 모세가 태어난다. 바로가 아이를 다 죽이라고 외치던 밤하늘 위로 한줄기 서광이 비치듯, 그 어둔 세상 속에 한 아이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축하해 주지 않는다. 아니, 누구도 웃거나 즐거워하지 못한다. 아이가 살해될 거라는 무서운 예감이 감돌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다. 곧 아이를 숨겨 그 생명을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부모로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네 명의 아이를 둔 부모로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중 막내는 고작 한 달배기다. 부모라면 다 안다.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 치밀면 불길 속에라도 달려들게 된다는 것을. 아이를 낳으면, 그처럼 생명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주어진다. 그래서 모세의 부모도 바로의 명령을 거절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가능한 한 그 아이를 조용히 숨겨 놓고자 했지만,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결국, 성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장면은 출애굽기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 된다. 바로 모세가 갈대를 엮어 만든 상자에 담겨 강물을 타고 떠내려가는 장면이다. 흥미롭게도,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사용된 ‘상자’라는 히브리 단어는 과거 노아 이야기에서 언급된 ‘방주’와 동일한 단어이다. 마치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 목숨을 건 노아와 운명을 같이했듯, 이스라엘의 미래는 상자에 실린 모세와 함께 펼쳐지기로 예정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가 아직 어렸지만, 그는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서 그 백성의 소망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 당시 고대 근동에서 유행한 사상에 따르면, 물은 심판을 상징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애굽인들에게 나일강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동물은 신령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유일하신 참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분만이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이 세상 신들과 죽음까지도 정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남자 아이를 다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나 그 아이를 잡아먹는 나일강조차도 어린 모세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한다. 그 아이의 생명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행 7:20). 흔히 ‘아름다운’이라고 번역되는 성경의 단어는 매우 풍성한 의미를 갖고 사용된다. 일단 그 단어는, 모세가 부모의 눈에 아름다웠다는 표현과 같이 단순히 외양적인 모습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20절은 모세가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외관의 아름다움 그 이상을 의미하기 위해 단어가 사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이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질지를 아셨을 테고, 그 계획에 다름 아닌 모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것이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의 이어지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놀라운 섭리를 잘 설명해 준다. 곧 갈대 상자에 담긴 모세가 그 누이의 손을 떠나 나일강을 타고 흘러가다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의해 바로의 딸 앞으로 이르게 된 것이다. 이때 바로의 딸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게 된다. 그러자 모세의 누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달려와서 아이를 위한 유모를 찾아와도 될지를 물어보고, 결국에는 모세의 친어머니가 다시 그에게 젖을 물리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이런 드라마틱한 역사를 연출하실 수 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지켜보시던 그분은 이제 놀라운 아티스트이자 작가로서 그 기색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너무도 세심한 방법으로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시는데, 곧 몸소 그를 낳고 목숨 걸어 그를 지킨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도록 하신 것이다.


여기서 그분이 만들어 가시는 큰 그림, 바로 구속의 경륜을 보지 못하고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신 그 손길에만 놀란다면, 뭔가 아쉬을 것이다. 이러한 모세의 탄생 이야기는 장차 전개될 이스라엘 역사를 보여 주는 예고편과 같았다. 곧 모세가 성장했을 때, 우리는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고자 하는 바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가 숭배한 우상을 포함해서 애굽의 신들을 파괴하신다. 또 어린 모세가 죽지 않고 건짐 받은 그 강물처럼, 하나님은 또 다시 자기 백성을 건져내기 위해 홍해라는 장치를 사용하신다. 여기서 그분의 백성은 바닷물을 안전하게 통과하지만, 애굽인들은 심판을 받아 거기 빠져 죽고 만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은 모세의 생명과 함께 오버랩되어 그려진다.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이 그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와 매우 유사한 패턴이 긴 세월이 흘러 재현된다. 즉 한 아기가 태어나고, 바로와 같이 아이를 죽이라는 또 다른 왕의 명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또 다시 하나님 자신이 그 백성을 위해 생명을 보존하여 지키시는 한 아이와 운명을 같이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모세의 탄생 이야기 사이에 간과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곧 모세와 같이 예수님도 백성의 구원자로서 자신의 생명에 그 백성의 생명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가져올 구원은 모세를 통해서 보았던 구원을 훨씬 능가한다. 그분의 사역은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이 사실이 히브리서가 결국 강조하려는 포인트다. 예수님은 모세가 시작한 이야기의 저자이자 완성자시다. 결국 그분만이 죽음에 직면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단지 아름다운 아이라고 불리기엔 심히 위대하신 분이다. 왜냐하면 옛 찬송가의 고백처럼, 그분은 우리와 연합되어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 우리가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아름다운 구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로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살리고자 하신 일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다. 그 이야기는 가장 위대한 서사시이며, 가장 놀라운 러브 스토리로, 우리는 이를 ‘복음’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이 보시기에 당신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Life Is Beautiful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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