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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정의와 그리스도의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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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이승구  /  작성일 202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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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th ecumenical council of chalcedon(Vasily Surikov, 1876년작)

영원하신 성자의 인격이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여 들이신 일이니, 그 결과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신성의 한 인격 안에서 “나뉘어질 수 없게 연합된”(inseparably united and joined together)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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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육신을 믿는다. 그런데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성육신 되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와 그 성육신의 함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면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異端)이 되는 것이고, 지나치지는 않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아 비성경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들은 이런 점에 주의해서 이단이 되지도 말고, 이단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성육신에서 일어난 일과 그 함의


영원하신 성자의 인격이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여 들이신 일이니, 그 결과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신성의 한 인격 안에서 “나뉘어질 수 없게 연합된”(inseparably united and joined together)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성과 인성이라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양성(兩性, two natures)이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united in a single person)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결과이다.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이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난 일이다. 이와 꼭 같은 것이나 비슷한 것이 다른 존재나 사람에게서 나타난 일도 없고, 또 다시 반복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고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오직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성질(divinity)도 가지시고, 참된 인간성(humanity)도 가지신 것이다.


둘째로, 오직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이 일로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변화됨 없이, 혼합됨 없이, 그리고 완전히 나뉘어짐 없이, 분리 불가능하게 한 인격 안에 연합되었다.


셋째로, 그러므로 성육신 이전과 이후에 성자의 신성의 변화가 조금도 없고, 역시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이 신성이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육신 이해와 관련된 이단들과 그 극복


성육신에 대한 요점들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이단[기독론에 관한 이단]이 되기 쉽다. 먼저 이렇게 지나치게 성경 밖으로 나가서 이단적 주장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겠다.


첫째로, 예수님의 신성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은 그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 전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고, 계몽주의 이후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런 문제에 집착했다.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이후에 살면서, 또 계몽주의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분명하게 주장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것은 이단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보다는 조금 못 하시다고 하든지, 그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 한다든지, 본래는 하나님이 아니었다가 하나님이 되신 분이라든지 등의 생각은 다 이단적인 생각들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1세기 신약 성경이 기록될 때에도 이런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라고 말한바 있다. 이 말의 문맥 전체를 보면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앞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와 같이 고귀하고 거룩하신 분은 인간성을 실제로 취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던 초기 영지주의자들과 궤를 같이 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셨고 성경이 잘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의 인간성, 즉 인간의 영혼과 몸을 가지신 분이셨으나 죄는 없는 분이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히 2:14)고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잘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의 말을 유념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있기에 두 분의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신성의 인격과 인성의 인격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의 한계 때문에 이점을 이해하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다. 잘 생각해서 언어의 한계에 감금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언어의 한계 속에 있는 분들 중에는 인성을 취하셨으면 당연히 인간의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신성의 인격으로부터 생각해 왔다. 그래서 신성이, 더 정확하게는 신성의 인격이 성육신할 때에 인간성을 “취하셨다”(assumed)로 표현하고, “취하심”(assumptio, assumption)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이 있어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 “두 인격”(two persons)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셨던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잘 표현하고자 조금 어려운 말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그 자체로 인격을 지닌 것은 아니다, 즉 비인격적(anhypostasis)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성이 비인격적인 것은 아니니, 그 인성은 영원하신 신성의 인격, 즉 로고스의 인격 안에, 즉 내인격적(enhypostasis)으로 취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조금 어려운 말이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성경적 가르침을 잘 유지하려는 분들이 이런 용어를 사용해서 성경적 진리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정리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유익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용어들을 불편해 하지 말고,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하여 이단적 가르침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계신 그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섬겨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로,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에 있으나 성육신 이후에도 그 신성이 인성에 영향을 미쳐서 인성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거나, 역으로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 신성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고, 성육신 상황에서도 각 성은 그 자체의 독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each nature retaining its own distinct properties)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 유티케스(Εὐτυχής, c. 380–c. 456)가 생각한 것처럼 성육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적인 인성(the divine human nature)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점에 대해서 이단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며,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대로 그분 자신과 그의 뜻을 잘 배워 나가야 한다. 과거 교회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공의회를 열어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바른 가르침을 따르도록 촉구하였다. 이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공의회 중의 하나가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의 한 구역인 오늘날 카디쾨이[Kadıköy]라고 불리는) 칼케돈(Χαλκηδών, Chalcedon)에서 열린 칼케돈 공의회(451)이다. 여기서 520명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5세기 기독교의 최선의 노력이 집중되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 없이(ἀσυγχύτως, inconfuse, inconfusedly), 변화됨 없이(ἀτρέπτως, immutabiliter, unchangeably), 분리됨 없이(ἀδιαιρέτως, indivise, indivisibly), 나뉘어질 수 없게(ἀχωρίστως, inseparabiliter, inseparably)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을 칼케돈 정의(the Chalcedonian Definition)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따라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고, 이렇게 하여 기독교의 정통적 교의가 선언되고, 모든 교회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는 이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정통파 사람들은 항상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자신들이 믿는 바를 표현하여 왔다.


성경적으로 좀 더 철저하게 생각하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혁자들 역시 그리스도에게는 양성이 혼합 없이, 변화됨 없이, 분리됨 없이, 그리고 나누어질 수 없게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선언한 칼케돈 정의를 충실하게 믿었고 그렇게 표현했다. 루터파도 개혁파도 정통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양성이 한 인격 안에 있으며, 그 때 신성과 인성은 그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공의회 이후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달리 생각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 모든 논의는 이미 칼케돈 정의를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의 의견의 교환이므로 어떤 쪽으로 생각해도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좀 더 성경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복잡한 논쟁점들은 생략하고, 필자가 생각하기에 좀 더 성경적으라고 생각하는 개혁파적인 견해들을 요약해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신성과 인성이 변화됨 없이, 혼합 없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인성의 특성들(its properties)을 상실하지 않고 인성인 한 피조물의 특성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시작이 있고, 유한성을 지니며,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몸에 속하는 성질을 가진다. 인성을 취하셨기에 그는 실제로 죽으실 수 있었고 그가 죽을 때 몸을 떠난 자신의 영혼(a real human spirit which left his body)을 성부에게 부탁하실 수 있었다(눅 24:46). 또한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인성이 불멸성을 얻은 후에라도 그의 인성의 성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신성은 항상 창조되지 않는 신성으로 있고(his divine nature has always remained uncreated),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항상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filling heaven and earth). 심지어 그가 죽어 무덤에 계실 때조차도 그의 신성은 그 안에 함께 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셨으므로(벨직 신앙고백서 19항, “even when he was lying in the grave; and his deity never ceased to be in him”) 죽음에 의해서도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아니하였다(they are not even separated by his death)고 표현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 신성은 하늘과 또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며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점에 잘 유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성육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신성이 인성 안에만 있고 그 안에서만 작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인성 밖에서도”(extra humaum) 작용하시는 신성에 대한 주장, “인성은 인성이고 신성은 신성이다”는 주장, 그리고 “유한은 무한을 가둘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신성이 불변함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주장이다. 다만 우리들의 제한된 사고가 이를 잘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문제점을 드러낼 뿐이다. 성경을 잘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제대로 추론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성경에 좀 더 충실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성 안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 밖에서도 작용하였다고 말해야 한다.


성경에 충실 하려던 칼케돈 정의에 좀 더 집중했던 개혁파의 강조들을 이해하고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능한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참 하나님이셨으며(true God in order to conquer death by his power), 몸의 연약성을 갖고 우리들을 위해 죽으실 수 있기 위해서 참 사람(truly human that he might die for us in the weakness of his flesh)이 되신 것임을 확신하며, 그 신성과 그 인성의 독특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혁자들 역시 그리스도에게는 양성이 혼합 없이, 변화됨 없이, 분리됨 없이, 그리고 나누어질 수 없게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선언한 칼케돈 정의를 충실하게 믿었고 그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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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