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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나님. 그는 선한 일을 하신다, 우리가 아플 때...
by Garrett Kell
2024-04-26
조지 뮬러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장 큰 영감을 준, 교회 역사가 자랑하는 성도의 한 사람이다. 고아들을 섬긴 사역과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한 그의 기도는 특히 유명하다. 그의 자서전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기도문과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는 무려 5만 번이 넘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에 관한 많은 전기가 나왔고 그건 당연하다. 뮬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깊은 신뢰로 특징지어진다. 많은 사람이 어리석고 추정에 불과하다며 평가절하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었던 뮬러는 결코 자신의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에게 선하셨다. 그렇다고 뮬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를 가슴 아픈 시련에서까지 면제시킨 건 아니다. 그는 자녀 세 명을 잃었고, 끊임없는 육체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으며, 불신자로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두 명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 모든 고통에 대한 뮬러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 속에 담긴 소망을 만난다. 고통은 신앙을 단련한다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질병이나 불화, 배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일상적인 위안은 그 빛을 잃는다. 편안한 소파와 잔고가 넘치는 은행 계좌만으로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질병과도 같은 어려움을 보상받을 수 없다. 어두운 시간에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홀로 서 있을 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과연 내가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지 씨름한다. 뮬러가 믿었던 것처럼, 정말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주권적이라면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을 허락하실까?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어날 때 온 세상은 그의 자비로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의 재난이 불어닥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라진 것만 같다. 어두운 구름은 온통 회색으로 바꾼다. 고통의 찬 바람이 우리를 물고 또 찌른다. 우리의 영혼은 하염없이 무감각해져서 하나님도, 모든 사람도 포기하고 싶어진다. 아예 모두로부터 멀리 물러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의심으로 가득한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굳게 붙드신다는 사실이다.누구도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다. 내가 견뎌야만 했던 어려운 시기 내내, 뮬러의 삶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가 내 믿음의 부표가 되어 나를 붙잡아 주었다. 메리 뮬러의 죽음결혼한 지 39년이 되던 해에 뮬러의 첫 부인 메리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알려진 류마티스열에 걸렸다. 아내의 마지막 순간에 뮬러는 그녀에게 시편 84:11을 읽어주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뮬러는 마지막 구절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나는 나 자신이 불쌍하고 쓸모없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나에게 정말 좋은 일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아프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좋지 않은 일입니다.1870년 2월 6일, 메리는 뮬러의 고백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아내가 죽은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뮬러는 살렘 채플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렸다. 뮬러의 말에 충격을 받은 참석자 한 사람이 그의 말을 기록했다.그리스도 안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던 사랑하는 아내를 당신의 품 안으로 데리고 가신 주님의 자비에 진심 어린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감사와 찬양에 여러분도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게 다 아내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아내가 이 땅에서 알았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 바로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을 바라보는 지금 아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기뻐할지를 생각하며 나도 함께 기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이 부족한 종이 그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 유족의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상실감 대신에 그녀가 가져다준 축복으로 가득 차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뮬러의 힘 있는 설교2월 11일에는 약 1,200명의 고아와 수천 명의 슬픔에 잠긴 친구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했다. 뮬러는 고질적인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날 장례식 설교를 했다. 본문은 시편 119:68이었다. “선하신 주님, 당신은 선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는 설교에서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인 세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주님은 선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1. “내게 아내를 주셨다….” 2.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내 곁에 있게 하셨다….” 3. “그녀를 데리고 가셨다.” 아내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은 평안했고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가능한 이유는 …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선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당신의 삶에서 말이다. 이생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들 가운데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바로 이 순간 또는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몰라도, 당신이 고통의 어두운 날을 지날 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진실보다 더 영혼에 안식을 주는 것은 없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로마서 8:32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라고 말한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하시며 선을 행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시고 그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셨다. 도저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무런 의도 행하지 않은 우리를 살려주셨다. 영원히 우리 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적이 되셨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버림받으셨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못 주실 게 뭐가 있겠는가? 뮬러는 상실의 슬픔 중에서도 모든 것이, 심지어 고통까지도 인도하시는 주권적이고 선한 손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뮬러에게 주신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도 허락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출처: God Is Good and Does Good-Even in Our Pain
확신의 범주
시편 73편 묵상
by 고명환
2024-04-25
1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왜 그 사람들이 대화 중에 내게 화를 냈었는지. “고 선생님과 얘기하기가 힘들어요. 자기 주장으로 끝까지 설득하려 해요.” 30대 때 한 학우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여러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고 주로 반박하던 내게 격앙되어 분을 표출했다. 40대 때에도 비슷한 말을 들어야 했다. “전도사님하고 말 못하겠어요. 왜 내가 하는 말마다 아니라고 해요?”평소 친하던 나이 어린 신학도와 커피를 마시며 한가하게 이야기하던 중 들은 말이다. 그가 던진 말들은 가볍게 지나칠 만한 이야기였는데 꼬치꼬치 ‘아니요’로 응수했고 참다 못한 그가 화를 내며 한마디 했던 것이다. 50대에 들어서 아니나 다를 까 또 분노 섞인 말을 맞이해야 했다. “목사님은 언제나 아니라고 말해요. 내게 잘했다고 하는 법이 없어요.”주변에서 알게 된 동년배 목사님이 대화 중 얼굴을 붉히며 충청도 억양으로 퍼부은 말이다. 본인 딴 에는 열심히 많은 일을 벌이고 뛰어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앞에 앉은 화상은 사사건건 칭찬은 커녕 태클 걸기에 바빴으니 충분히 화가 날 법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사람이 내 안에 숨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경청하고 공감해 주지 못했다. 내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사수하려 했지 상대의 생각을 꼼꼼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벼이 여기고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가르치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버릴 수 없었지 않았는가. 자연히, 우호적인 만남에서 조차 긴장의 순간들을 조성하고 뒤끝을 개운치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나이 들어, 그때와 달라진 점을 찾자면 내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정도이다. 지난날의 나는 검증되지 않은 여러 분야의 설익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지나치게 강한 확신을 만들어 냈고, 그것으로 자주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려 했다. 물론, 알량한 지식 안에는 많은 거짓이나 편견이 섞여 있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막히지 않은 이슈를 막힌 것으로, 다양한 의견을 하나라고 주장하며 가까운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근래, 대화를 발전적으로 이어 나가기 힘든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아 ~ 그거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이 말 뒤에 앞뒤 문맥이 없어진 성경의 몇 구절이 나열되고 단순하지 않은 문제는 깔끔하게 결론에 이른다. 느지막한 나이에 복음을 알게 되어 교수라는 본업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말 그대로 불철주야 뛰어 다니는 분이 복잡한 신학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작용하고 있어요.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중에 아멘을 많이 강요하는 목사님들이 현 시대에 떠오른 여러 이슈들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법이다. 이 해석과 대처 방법의 프레임은 유연성이 뛰어나서 어떤 문제에 씌워도 들어맞는 것 같다. 이 가설 앞에 모든 이성적인 논의는 설 곳이 없게 되고 합리적인 접근 방법들은 영적이지 못한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이성적 논리를 펴는 사람은 기독교 진리를 허물 가능성을 가진 경계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류의 사람들과 언쟁할 에너지도 없고 승산도 없는 것을 알고 나면 다음부터는 반가운 인사 가벼운 대화 이상으로 진행하지 않지만, 그 막힌 현실이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다. 너무도 확고한 철학과 지식으로 모든 의제를 가볍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느끼는 좌절감 또한 한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한편, 그들 속에서 지나간 나를 본다. 나로 인해 좌절하며 화를 삭였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올라온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세상의 모든 일과 현상에 대한 명쾌한 답이 주어졌는가?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확신과 단정의 태도를 보이기 원하시는가? 또, 그분은 우리에게 언제나 한 가지 길만을 제시하고 그것만을 선택하기 기대하시는가? 2시편 73편 아삽의 노래1하나님은,마음이 정직한 사람과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2나는 그 확신을 잃고넘어질 뻔했구나.그 믿음을 버리고미끄러질 뻔했구나.3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부러워했기 때문이다.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5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그런 고통이그들에게는 없으며,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그들에게는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6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7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8언제나 남을 비웃으며,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거만한 모습으로폭언하기를 즐긴다.9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10하나님의 백성마저도그들에게 홀려서,물을 들이키듯,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11덩달아 말한다.“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가장 높으신 분이라고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하고 말한다.12그런데 놀랍게도,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신세가 언제나 편하고,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13이렇다면,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깨끗하게 살아온 것이허사라는 말인가?14하나님,주님께서는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15“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하고 말했다면,나는 주님의 자녀들을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16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깊이 생각해 보았으나,그것은 내가 풀기에는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17그러나 마침내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악한 자들의 종말이어떻게 되리라는 것을깨닫게 되었습니다.18주님께서 그들을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거기에서 넘어져서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19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20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그들은 한낱 꿈처럼,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21나의 가슴이 쓰리고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22나는 우둔하여아무것도 몰랐습니다.나는 다만,주님 앞에 있는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이후 구절 생략, 새번역)시인은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복을 받아 잘되고 악인들은 응당 벌을 받고 망한다는 단순한 믿음과 기대로 살았다. 헌데, 현실은 그의 믿음을 비웃듯 악인들의 편이다. 악한 일만을 일삼는 자들이 벌을 받는 건 고사하고 평화롭게 자기들 세상인양 버젓이 활개치며 다닌다. 헛된 상상만 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함부로 말하고, 하늘을 비방하며, 남을 비웃고, 폭력을 행사한다(4-9절). 그런데도 악인들의 신세는 편하고 재산은 계속 늘어간다. 기막힌 일은 이들의 번성함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마저 ‘하나님인들 이런 일을 알고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하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모습이다(11절). 이런 왜곡된 현실은 시인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다. 믿음을 버리고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한다(1-2절). 거만한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과 가진 재산은 시샘거리로 바뀌었고, 옳다고 믿고 걸어온 정직하고 진실한 길은 의문스러워진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13절)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은 온종일 그를 괴롭혔다(14절). 마침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해답을 얻는다(17절). 그것은 악인이 세상에서 번성하고 평안을 누리나 결국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인생들이라는 가르침이었다. ‘한낱 꿈처럼 그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이었다(18-27절). 스스로 풀 수 없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난 뒤,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시인한다.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다”고. 다만 자신은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 이었다”고(22절).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개인이 보유한 신앙 지식과 관점을 가지고 다양한 현상을 모두 해석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잘못하면 믿음마저 좌초될 수도 있다. 많은 세상의 현상은 전통과 신앙 지식으로 설명해 낼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거나 모호한 것들이다. 아니면 시인이 씨름해야 했던 기대를 꺾어 버리는 역 현상들이다. 물론, 이러한 도전적인 현상이 이미 계시된 말씀과 전통으로 형성된 신앙의 체계를 허물지는 못한다. 시인이 일찍이 간직해 왔던 신앙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모순되는 현상을 바라보고 믿음을 저버릴 뻔했던 것은 그가 가진 일반적인 신앙의 법칙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 만으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난제를 만났을 뿐이다. 이때, 취할 방책은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의문을 품었던 생각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그 자리가 뒤로 미끄러지지 않을 자리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자리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자리이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자리인 것이다. 참고) 생략한 구절에서는 시인의 완전한 회복과 다짐을 기록했다. 3흔히들 욥기는 한 개인의 영웅적 믿음을 보여주는 책 정도로 가벼이 여기고 신중한 탐색을 내려 놓는다. 물론 그에 관한 절대적인 믿음의 기록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돋보인다. 그럼에도, 진지한 독자라면 놓치지 않을 책 안에 담긴 흥미로운 지식과 진리가 간과되는 점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사실, 욥과 관련된 에피소드만을 기록한다면 요나서 정도의 분량이면 족할 텐데 성경이 방대한 양을 할애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독자를 지치게 할지 모를 욥과 그의 친구들의 지난한 담화 안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식과 교훈을 찾아야 하고, 긴 침묵을 깨신 후 인간의 논쟁을 종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그분의 섭리와 가르침을 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갑작스런 고난 중에도 변함없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의 적은 지식으로 크신 하나님을 담아내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설명한 결과는 무모하고 무의미한 시도로 끝나 버린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나름대로 자기 주장을 펴는 방문객들(친구들) 앞에서 그가 가진 지식과 지혜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반박하고 그려냈지만 하나님은 이런 욥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욥은 스스로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시인했다[욥기42:5]). 크신 하나님을 정의하고 규정하려 했던 그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아무리 많은 말과 적절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다. 아니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형상화 하려는 의도가 금송아지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모욕적인 결과를 낳고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들은 욥은 시인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욥기42:3) 그가 인정했듯이 욥은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많은 설명이나 묘사는 원점에서 작은 각으로 출발한 두 선의 간격이 갈수록 점점 벌어지듯, 더욱 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차라리 원점에 머물러 나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욥의 경우처럼 많은 말을 하는 쪽을 택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 현상에 대해서. 모호한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자르고 다듬어서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전체를 드러내시지 않은 것에 대해 주어진 부분을 전체로 확대묘사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열린 여러 가능성을 한 가지 가능성으로 좁히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분은 사람들이 물어오는 의문에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다. 과거와 미래는 물론 하늘의 비밀까지 알려 주셨다. 듣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자주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시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신 것은 아니다. 어떤 화제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하시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두셨다. 어려운 질문을 피하시기 위해서나 물의를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 그러신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시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나가도록 맡겨 두신 것이다. 예수님의 행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골칫거리를 넘어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종교 전통을 무너뜨리는 반동으로, 그동안 향유해 왔던 권위를 약화시키는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특히,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성전에서 벌이신 소동이나 여러 혁명적인 가르침은 그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마가복음11:18). 두려움의 증폭은 분노와 적대감의 수위를 높였고 급기야 조직적인 행동으로 발전한다. 유대교 교직을 대표하는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이 대거 성전에 머무시던 예수님께 몰려왔다. 이들은 유대교의 경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교직 제도로 따지자면 목사들, 신학자들, 장로들에 해당하는 무리가 연대해서 나사렛 예수에게 권력시위 하듯 찾아왔던 것이다(마가복음11:33). 그들은 묻는다.“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종교적인 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이런 일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사람이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소란을 피우는 거요?’라는 뜻으로 묻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찾아온 이유는 듣고 알아보고 토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질문 역시 답을 듣기 위해서나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하려고 건넨 것이 아니다. 이에, 예수님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질문으로 응수하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내게 대답해 보아라.”(마가복음11:29-30) 마가의 설명이 보여주듯( 마가복음31-32)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예수님 질문은 몰려온 종교지도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어느 선택도 좋은 결과로 돌아 올 게 없는 선택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정답을 말할 수 없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손해보지 않을 선택을 한다.“모르겠습니다.”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하자 이들은 의논 끝에 회피성 답변으로 궁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대답을 들으신 후, 그들이 앞서 던진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시겠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고 맡기셨다.‘사사건건 해명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모든 말과 행적이 내가 어떤 권위를 가졌는지 말해 주지 않느냐’고. ‘성경의 예언과 내가 행사한 능력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설명과 설득을 통해 당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답을 찾아 가도록 그들의 몫으로 넘기셨던 것이다. 4우리 안에, 당면한 문제와 보이는 현상에 대한 모든 성경적 해답이 주어졌다고 믿고 확신에 찬 해명을 생산해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나치게 강한 확신에 사로잡혀 본인 생각 외에 어떤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기독교 신앙을 콤팩트하고 단순하게 다듬는 재주가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구체화하고, 열어 놓은 것을 닫는 능력도 보여 준다. 그것에 따라 다진 신념과 지식은 절대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돌판이 된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자식이 빗나가는 일은 없습니다.’‘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백신을 맞으면 영혼을 사탄에게 빼앗깁니다.’‘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선교와 전도입니다.’‘우리의 세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겁니다.’‘그곳에서 벌어진 전쟁은 종말의 마지막 징조입니다.’‘이 번역의 말씀만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기름 부으신 성경입니다.’‘목사 직분은 오로지 남성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다 손꼽기 힘든 용감한 기독교 전위대들이 생산해 낸 확신과 단정은 어느새 진리가 되어 면역력이 약한 성도들을 감염시키고 있다. 반대로, 교회 바깥 이방인들에게는 더욱 복음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안팎으로 그 폐해가 보이지만 그들은 진리에 따르는 가벼운 부작용 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니다.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해서 확신을 만들고 유포해서도 안되고, 그 부작용을 경시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과 사고의 능력으로 사람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한 모든 속성과 현상을 밝혀 내고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를 해낼 수 있다는 태도는 마치 몇가지의 연장만 가지고 복잡한 기계의 모든 부품을 분리해 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사람은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지식 외에 스스로 창조하고 발견할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모호한 것을 뚜렷한 것으로 제시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놔두어야 하며, 밝혀질 것은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한 가지의 가능성으로 억지로 욱여넣어서도 안된다. 열어 두어야 할 것은 열어 두어야 한다. 그것이 이전에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이다. 과거에 많은 사람이 오늘날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 때문에 핍박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들이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가르친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 시대에, 성경은 교육받은 성직자들만 읽고 해석해야 했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기 중 금기였다. 노예를 소유하고 부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경적인 제도라고 정당화하며 하늘 아래 반인륜적인 행위가 성행하던 때가 우리와 먼 과거의 시대가 아니다.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확신과 단정을 유보해야 할 다른 또 이유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즉 소통하기 위해서다. 확신과 단정으로 단단히 무장할수록 고립을 면하기는 어렵다. 들으려 하지 않고 신앙으로 석화한 생각을 놓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를 즐거워할 상대자는 없을 것이다. 헌데, 이 시대에 그런 불통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기독교란 인식이 크게 번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상과의 벽은 점점 두터워졌고 돌아온 것은 냉대와 따돌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리 수호의 훈장으로 착각하고 내부적으로 한층 그들만의 도그마로 단단히 무장하며 결속을 다져 나갈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지금의 생태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소음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아야 한다. 행여, 기독교 전체를 향한 적대감이 고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5우리는 확신과 단정의 범주를 좁혀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또 복음의 길을 막지 않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와 유보가 따라야 한다. 내가 확신하고 단정했던 것을 내려놓을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들어 보려 하고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끝까지 고수해야 할 진리의 영역까지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등과 같은 타협할 수 없는 핵심 진리를 가감없이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 공고히 하고 전파해야 한다. 다만, 명확하지 않는 것을 확신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전체로, 밝혀지지 않은 것을 단정하지 말자는 뜻이다. 그러려면 나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는 아니,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다른 사람과 삶의 방식이 다르거나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아픔을 겪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편향된 종교적 잣대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대해 더 개방적이고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에게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 보고 싶다고, 내 생각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나의 것을 잠시 포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아량을 갖기 바란다.“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16절) 현실은 시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풀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만으로 문제의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복잡한 이슈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안에도 여러 문제와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면 갈등과 분열이 뒤따르고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우리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보다, 시인처럼 ‘풀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는 자세가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러면, 섣부른 결론이 만들어낸 확신과 단정으로 타인이나 집단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고 배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 외에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세우신 불변의 진리의 기둥과 터와는 달리, 사람이 세워 나간 전통, 사상, 제도는 오류의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산물이라는 가정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교회, 어떻게 미래를 대비할 것인가?
by Steve McAlpine
2024-04-24
어느 일요일 아침, 당신은 교회 밖에 서 있다. 이른 봄의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고, 당신은 지금 새 신자와 특히 감동적이었던 찬양 시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들리는 끼익 하고 거친 타이어 소리와 딱딱거리는 전기음에, 당신은 무슨 일이지 하며 고개를 돌린다. 새로 만든 현관에서 멀지 않은 관목 숲에서 회색 스포츠카 한 대가 요란하게 연기와 김을 피우며 멈춰 섰다. 당신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스포츠카의 문이 위로 열리더니 경찰차가 왔는지를 두리번거리며 어떤 한 사람이 내린다. 그러고는 당신에게 달려오더니 소리친다.“빨리요!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요!”맙소사. 그 사람은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어, 진짜라고? 그런데 얼굴이 지금보다 훨씬 늙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어 당신은 예배당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거기에 장로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담임목사가 있지 않은가?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팍삭 늙어버린 목사가 당신의 팔을 붙잡는다. “빨리 가자고요! 몸을 묶어요! 괜찮아요. 나 당신이 아는 그 목사 맞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2054년, 미래에서 돌아왔어요. 30년 후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앞으로 서구에서 만날 목회의 현실을 보게 될 겁니다. 깜짝 놀랄 준비를 하세요.”당신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당신은 벌써 시속 88마일 속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스포츠카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얼핏 어깨 너머로 주차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스포츠카 때문에 엉망이 된 관목을 보고 괴로워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드는 권사 한 명을 보는 순간 펑 하고 당신은 사라진다. 지금으로부터 30년 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당신은 미래로 떠났다. 무서운 현실, 불확실한 미래물론, 이건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재미있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이데올로기 노선에 따라 분열되는 문화의 폭풍 구름이 모이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를 단순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악마로 간주하는 세상에서 지역 사회 전체에 걸쳐서 증가하는 양극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국회의사당에 매달리는 노인들의 도움은 기대할 수도 없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속도로 교회 출석률이 감소하고 있다. 우리는 강경함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탈기독교 세계주의에 맞서는 반동적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해서 우려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성경적 인간학에 적대적인 법안의 지원을 받아 교육 시스템을 감염시키고 어린이에게 전혀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강요하는 급진적인 젠더 이론에 우리는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외부 힘으로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 증가가 있다. 이건 콘텐츠와 형식 모두가 중요하다는 뿌리 깊은 믿음에 반대되는 현상이다. 젊은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소셜 미디어에 의해서 불안과 중독 증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쟁이 있다. 어디에나. 이건 뭐 두더지 때려잡기와 비슷하다. 갈등 하나를 누르면 바로 새로운 갈등이 튀어 오른다. 일상생활 속에서 학살, 비난, 유혈이 낭자한 이미지가 우리 주머니 속 스마트폰에서 쉬지 않고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직장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가치를 더욱 침해한다. 인사 부서는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신념에 대해서 충성과 동맹을 요구한다. 승진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데, 목사님이 전도하라고 했다고 회사 휴게실에서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누가 백 투 더 퓨처의 경험을 원하지 않을까? 2054년으로 달려가서 폭넓게 메모하고 아이폰으로 비디오를 캡처한 다음 돌아와서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비하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가오는 폭풍에 맞서 모든 공격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아는가?) 놀랍게도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가 장밋빛이기에 얼마든지 긴장을 풀 수도 있다.초조한 교회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해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삶을 지킬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을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까? 교회는 긴장하고 있다. 성에 관한 진보적 사상에 굴복한 신학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한다. 십자가에 성조기를 두르는, 점점 더 강해지는 민족주의의 포용에서도 그 점을 본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예 공립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이 늘어간다. 내가 아는 한 가족은 아예 보수적인 폴란드로 이주하는 쪽을 택했다. 복음주의자 신자인 그 부모는 확고한 로마가톨릭 국가이지만 폴란드가 아이들에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폴란드가 미국처럼 되기 전까지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조만간 폴란드도 미국처럼 될 텐데, 그때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하나님 백성에게 초조함은 새로운 게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에 폭풍이 닥쳤을 때,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당시의 백 투더 퓨쳐를 활용했다. 영매, 강령술사, 그리고 거짓 신을 의지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말해 주었다(사 8:19). 물론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런 거짓 희망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앞으로 멸망할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여주는, 미래로 가는 스포츠카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갈 때 함께 하실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계신다. 거짓 신, 거짓 희망, 이방 국가, 역사와 결과를 조작하려는 혼합주의, 이스라엘은 이 모두를 거부해야만 했다.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셨다.미래가 보장된 교회블랙스완 사건(팬데믹 2.0, 혹시 아는 사람 있을까?)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욱 양극화되고, 더욱 고립되고, 더욱 무의미해져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우리를 기다리는 게 행복한 미래는 아닌 것 같다.그러나 교회에는 큰 무기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복음을 통해 교회는 환멸에 빠진 많은 이웃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는 문화를 더 확장하고, 더 목적성을 부여하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다. 이미 기독교의 종말이 왔어야 한다고 자신 있게 예측했던 사람들은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존재한 예수라는 인물에 기초를 둔 복음의 초월적 메시지는 뿌리가 없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도록 하는 강력한 배경이다.The Atlantic에 기고한 팀 켈러의 마지막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미국 교회는 (그리고 서구 세계 전역의 교화가) 부흥을 맞을 것이다.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심각하게 분열되고 불확실해진 상태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한때 “물었다가 멈췄거나” 또는 “처음부터 아예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국 작가 저스틴 브라이어리의 신간 The Surprising Rebirth of Belief in God: Why New Atheists and Secular Thinkers Are Considering Christianity Again(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놀라운 재탄생: 왜 신무신론자와 세속 사상가들이 기독교를 다시 바라보는가)는 이런 켈러의 견해를 확증한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의 눈에 나타난 종교의 미래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눈에 그런 주장은 아직 단언할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백 투더 퓨쳐이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생태학적 위협, 기술적 변화, (때때로 모순되는) 의미의 새로운 원천을 찾는 탈기독교 사회의 양극화 효과 등 다양한 압력 지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용감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지금까지 우리에게 유익했던 삶의 방식을 두 배로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 궤적이 계속된다는 가정하에, 우리는 2054년에 필요한 공동체적, 도덕적, 신학적, 관계적, 그리고 지적 신용을 미리미리 은행에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취소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용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혼자 살아갈수록 더 깊은 공동체를 실천하려는 교회, 자기 관리를 숭배하는 시대에 값비싼 관대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섹스와 몸에서라면 테크닉과 기술에 굴복해 버린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겠다고 결심하자. 바로 그때 믿음에 집중하고, 모든 희망과 관심을 “잘 꾸민 집”(학 1:4)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다. 더 깊고 더 강한 기독교가 답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다시 미래로직관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그 차에 뛰어들어 2054년으로 향한다면, 충실하고 번성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랄 것이다. 현재의 우려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그 일에 동참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직 대학에 다니면서 여전히 당신의 믿음에 적대적인 젊은 비그리스도인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에 적대적인 그들이 2054년에는 장로가 되고 예배 인도자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신다. 출처: How to Futureproof Your Church
벌레 같은, 그리고 소중한
by Trevin Wax
2024-04-23
2011년, 오랫동안 사랑받던 토크쇼 ‘오프라’의 마지막 편을 보면서 나는 오프라 윈프리라는 진행자의 존재와 그녀가 미국 생활에 끼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목격했다. 그날 가장 강하게 내 인상에 남은 장면은 그녀가 시청자와 팬에게 남긴 권고였다. 당신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청중을 향해 계속해서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이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이며, 인스타그램 현장, TV, 영화, 비공개 및 공개된 대화에 쉬지 않고 등장하며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더 강한 자존감의 추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뿐 아니라, 정신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초점을 맞춘 치료 문화의 일부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말을 반복해서 또 충분하게 들을 때면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받는 축복이 과분하다고 느끼는 부적절함을, 또는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까지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소중하거나 아니면 벌레이거나?신학적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예배와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선언하는 수많은 찬양에 익숙한 신자라면 쉬지 않고 서로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은혜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자에게 과분한 사랑을 베푸신다는 게 아닌가? 탕자 비유의 핵심은 자신이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눅 15:21)는 탕자의 고백이다. 또 다른 비유는 충실한 사람들을 “자격 없는 종들”로 묘사한다(눅 7:7-10).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전 15:9)고 주장했다. 공동기도서가 드러내는 우리의 역할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님의 식탁에 다가갈 수 있는, “합당치 않은 죄인”이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많은 찬송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 사이의 깊은 협곡을 강조한다. 존 뉴턴은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감미로운 소리”(sweet sound)라 생각했는데, 그건 은혜가 비참한 자기(a wretch)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이삭 와츠(Isaac Watts)도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라며 감격했다. 그리고 찰스 웨슬리의 위대한 삼위일체 찬송인 “아버지, 아들, 성령”은 신자의 고백 (“나 같이 불쌍한 벌레”)과 거룩함의 영광스러운 부르심(“당신의 큰 영광이 살아나기를 원하나이다”)을 병치시킨다. 이 찬송은 시편 기자의 절망(시 22:6)과 빌닷이 욥에게 한 연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인간의 죽음과 유한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벌레와 구더기를 사용했다(욥기 25장).인간 죄성의 파라독스 말씀과 찬양에서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려는 유혹에 대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가치”에 대한 지나친 강조의 수정이 단지 “벌레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반대편에 원죄라는 역설 속에서 힘을 잃도록 만드는, 인류를 타락시키는 또 하나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성경은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가르친다. (1) 우리는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엄청나게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이다. (2) 우리는 비천한 죄인이고 따라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인간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은혜는 당연한 결과가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가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면 회개가 불필요하다. 당신처럼 가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면에 인간의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은혜가 무력해진다. 벌레에 불과한 나는 결코 결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으로 가면 회개가 불가능하다. 나 같은 놈한테 굳이 하나님이 왜 관심을 가지시겠는가? 그러나 성경이 드러내는 인간의 초상화는 훨씬 더 설득력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인류의 완전한 죄성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까지 모두 다 발견한다. 본문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진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함과 가치, 그리고 우리를 아예 구원받을 자격이 없도록 만드는 죄의 만연함을 같이 강조해야 한다. 저주받은 그리고 위대한오프라 윈프리 버전의 미국 민속 종교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죄를 조금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거의 신성한 존재, 우주의 중심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런 실수에 대한 더 극단적인 반응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을 단지 절망적으로 타락한 존재, 그래서 한동안 이 땅에서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성경이 그리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착각하는, 스스로 신격화한 상태에 빠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를 항상 가치 없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타락한 상태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둘 다이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동시에 위대하다. 우리는 미녀와 야수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함이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위대한 영주의 비참함, 쫓겨난 왕의 비참함이다.”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더 나은 존재지만, 도덕적으로는 더 나쁘다.”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한다.나 ‘자신’은 선과 악, 영광과 수치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 인간이라는 존재(우리 자아 또는 개인의 정체성)는 부분적으로는 창조의 결과(하나님의 형상)이고, 부분적으로는 타락의 결과(훼손된 형상)이다. …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엄하지만, 타락했고 반항하기에 천성적 죄성을 가진 지킬이요 하이드, 선과 악이 마구 뒤섞인 악동이다. 나는 고귀하면서도 천하고, 아름답지만 추하며, 선하면서도 악하고, 정직하면서도 비뚤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자 마귀의 종이다. 나의 진정한 자아는 창조의 형상,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려고 오신 모습이다. 나의 죄악된 자아는 타락으로 인한, 그리스도께서 멸하러 오신 바로 그 모습이다. 두 가지 경이로움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첫째, 인간의 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인류에 대한 지나친 긍정으로 모두에게 자기사랑의 세례를 주는 오프라 윈프리의 자기애와 자기 가치에 대한 관점을 기독교 용어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진술과 말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 문화가 드러내는 자존감에 대한 집착을 기독교식 포장으로 위장하는 위험이 있다. 둘째, 첫 번째 거짓에 맞서는 방법이 단지 “벌레 신학”의 지나친 강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가치와 소중함을 망각시키는 과잉 반응도 함께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 않게 조용히 우리 속에서 고귀함을 향한 열망을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죄악된 사슬이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걸맞은 더 높은 소명을 향해서 우리 모두 나아갈 수 있다. 키스와 크리스티 케티(Keith and Kristyn Getty)가 페르난도 오르테가(Fernando Ortega)와 함께 찬양했듯이 말이다. 내가 고백하는 두 놀라움나의 가치와 나의 무가치함내 가치는 고정됐고, 내 몸값은 지불됐어바로 십자가에서.출처: Both Worm and Worthy
모세의 놋뱀
by 전재훈
2024-04-22
성경에 뱀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와를 꼬드겨 선악과를 따 먹게 한 짐승이 뱀이고,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물게 하셨고, 심판의 때에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날랜 뱀,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사 27:1)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속에서도 지혜를 상징할 때 뱀이 나오기도 하지요. 뱀은 12간지 60갑자를 논할 때도 나옵니다. 12지는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입니다. 이 중에 뱀은 여섯 번째에 등장하지요. 뱀이란 짐승은 겨울에 땅 밑에서 겨울잠을 자고, 성장하면서 허물을 벗기도 하는데요. 이런 뱀의 특징을 보고 무속신앙에서 뱀은 부활의 상징이고 치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뱀이 치료의 상징으로도 쓰이고, 전령의 상징으로도 등장합니다. 의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는 자기 딸들에게 몸 단장할 때 뱀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군의 의무병들은 지팡이에 한 마리 뱀이 감겨있는 상징을 사용했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뱀이 전령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뱀이 땅 아래와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신과 인간의 사이, 혹은 생명과 죽음의 사이를 왕래하는 것으로 여겨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상징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지요.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두 마리가 휘감겨 올라가는 모습이고, 좀 더 빨리 다니라고, 지팡이 끝에 날개를 달아놓았지요.그런데 미군 의무병은 영국군 의무병이 쓰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착각을 하는 바람에 자신들 상징으로 뱀 두 마리가 달려 있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영국보다 미국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누르고 전 세계 의술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한국에 와서는 뜬금없이 그 출처가 모세의 놋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올렸는데 이것을 본 백성들이 살아났다고 해서, 마치 놋뱀이 불뱀병을 치료한 것인 양 여겨진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모세의 놋뱀을 알고 앰뷸런스 마크를 딱 보는 순간 그냥 확신해 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구슬을 잘못 끼웠지요. 이스라엘에서도 모세의 놋뱀을 분향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히스기야 시대에 부숴버리고 느후스단(놋조각)이라고 명명했지요. 놋뱀은 그냥 놋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 특별한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놋뱀이 한국에서 상징으로 부활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뱀은 4단계로 진화를 합니다. 그냥 뱀이 커서 구렁이가 되고, 구렁이가 이무기로 자랐다가, 여의주를 입에 무는 순간 용으로 변신하지요. 이런 탓에 뱀은 신성시되기가 쉬웠고, 팔레스타인에서도 하늘을 나는 뱀의 신화 비슷한 것이 있었던 탓에 놋뱀이 마치 그런 하늘을 나는 용 취급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뱀은 정력에 참 좋은 짐승이라고들 하지요.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선악과 대신 뱀을 먹었을 거라는 농담이 있던데, 그만큼 한국에서는 뱀이 살기 참 퍽퍽한 곳입니다. 뱀의 허물도 한국에서는 귀한 약재로 쓰인다고 하니, 뱀이 치유의 상징이 되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친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 땅을 지나갈 때 우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에돔 땅에서 맛있는 음식을 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졌던 것이지요.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불뱀들을 보내어 물게 하셨지요. 그들은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놋뱀을 만들게 하셨고 그 놋뱀을 보는 자마다 다 살게 하셨습니다. (보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도, 고열에 시달려 누워있는 자도 다 살리셨을 테니까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표현입니다.)이스라엘은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불뱀이 물러가게 해 달라는 거였지요. 이런 기도는 기도하는 순간조차 불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뱀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시는 방법으로 놋뱀을 사용하셨습니다. 에돔 땅의 음식에 빼앗긴 시선을 다시 하늘로 돌리시는 사건이 바로 놋뱀 사건이었지요.예수님은 이 놋뱀 사건을 비유로 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요 3:16)라고 하셨지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불뱀 주고 놋뱀 준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광야 길을 가게 하시려는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나중에는 그 불뱀에 물려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 친히 그 불뱀에 물려 죽을 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의 크기가 어떠했을지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줄 것을 바라보며 놋뱀을 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헤아리기 힘든 엄청나게 큰 사랑이었습니다. 놋뱀이 앰블런스의 상징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모세의 놋뱀으로 대체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뀌기 전까지는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모세의 놋뱀은 구분되어야 하고, 놋뱀마저도 치료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체외수정 배아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by Joe Carter
2024-04-19
지난달 앨라배마 대법원은 체외수정(IVF) 클리닉에서 생성되거나 보관된 냉동 배아는 주법에 따라 아이로 간주한다고 판결했다. 이 뉴스는 낙태 반대 운동의 확실한 승리이자 미국 전역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충분히 기뻐할 가치가 있는 소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앨라배마와 다른 주에 있는 수많은 낙태 반대 입법자들은 이 결과에 열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판결이 IVF 산업에 미칠 영향 때문에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산부인과 의사이기도 한 공화당 주 상원의원 래리 스터츠는 IVF가 가져다준 “도덕적 진퇴양난”을 인정하는 한편, 폐기된 배아는 사용되었거나 보관되는 배아에 비해서는 “매우 작은 비율”이라고 말했다. 스터츠의 말이다. “한 주기에 수정될 수 있는 난자 숫자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입법화의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도덕성 여부가 아니라 의료 행위에 대한 것이다.” 특정한 낙태 절차의 보호를 위해 낙태 찬성 의원이 사용하는 IVF 관행을 낙태 반대 의원이 낙태를 반대하기 위해서 똑같은 논점으로 말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식 기술에 대한 수용은 IVF가 가져다준 깊은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와 씨름하는 대중의 능력보다 이미 한참 더 앞서가고 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냉동 배아 상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더더욱 그렇다. IVF라는 복잡하고 감정적인 주제를 제대로 고려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갖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해야만 하는 당사자가 경험하는 깊은 고통과 서러움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임과의 싸움은 가슴 아프고 고립된 경험이며, IVF에 대한 결정은 종종 많은 토론과 기도 후에 내려진다. IVF에 내포된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주제에 자비로운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공감하는 마음은 신중한 윤리적 숙고의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고통과 희망이라는 현실에 기초를 둔 상태에서 우리가 만나는 문제에 대한 이해와 대응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IVF로 생성된 배아의 특성 이해우리가 다루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과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질문이다. IVF를 통해 만들어진 냉동 배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생명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꼭 학문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삶과 존엄성, 그리고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먼저, 필수 용어부터 명확하게 하자. 낙태 반대자 또는 생명 옹호자(pro-life)는 임신부터 자연사까지 인간의 생명이 법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기에 속하며, 이 입장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설득하고 싶어 한다. 이제 IVF를 통해 생성된 냉동 배아의 특성을 살펴보자. 생명 옹호 그리스도인에게 나는 냉동 배아라는 존재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는 발달의 가장 초기 단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생명이다. 이 생명은 지금 자궁 밖에서 가사 상태(suspended animation)에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도덕적 고려와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겠다.IVF로 생성된 냉동 배아는…1. 인간 생명이다불행하게도, 내가 주장하는 정의에서 가장 분명한 진술 부분이 가장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WORLD는 최근 앨라배마에서 근무하는 불임 의사 브렛 데이븐포트를 인터뷰했다. 그는 낙태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아 성장 7일째부터 생명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믿지 않으며, 여성의 자궁 밖에서 시작된 생명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낙태를 반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해 수많은 미국인이 데이븐포트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생물학자들이다.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는 특정 유형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 연관된 질문이 서로 뒤엉켜 있다. 특정 존재는 언제 “인간”이 되는가? 그리고 그 존재(being)의 존재함(existence)은 언제부터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정자가 인간의 난자와 수정함으로 성장과 기능적 활동 및 죽음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변화가 가능한 독특한 인간으로 창조되는 순간에 인간의 삶은 시작한다. 이것을 “수정 관점”이라고 한다. 수정은 흔히 임신이라고도 불리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임신 순간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생물학 분야에서 이러한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Issues in Law & Medicine에 발표된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058개 학술 기관의 생물학자들에게 인간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 질문했을 때, 96퍼센트(5,577명 중 5,337명)가 수정 견해를 긍정했다. 경험적 관점에서 볼 때, 데이븐포트의 견해와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해 그와 동의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보고서의 내용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조사한 두 연구에 따르면 수정 관점은 공중 보건 및 IVF 전문가가 보유한 가장 대중적인 관점이었다.”수정 관점은 단지 상식적인 견해가 아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한 선도적인 과학적, 그리고 경험적 관점이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세기 1:27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의미인지 이 구절이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신학자가 매우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 왔다. 오늘 내용과 관련해서, 굳이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이 용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동의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과연 이 용어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지에 관해서는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는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확인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배제하는 근거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일관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인간 그룹에도 같은 배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오늘날 낙태 반대 그리스도인은 이 위험한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3. 발달의 가장 초기 단계에 있다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 발달은 인간의 수명에 걸쳐서 발생하는 연대순 과정을 설명한다. 이 과정은 인간이 존재하게 될 때(수정)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방해를 받지만 않는다면 발달 단계는 일반적으로 태아기(출생 전 단계), 유아기(신생아부터 1세까지), 유아기(1-5세), 아동기(3-11세), 청소년기(12-18세), 성인기(18세 이상) 등 광범위한 범주를 거쳐 진행된다. 모든 배아는 태아기 단계에 있다. 이 배아 단계는 수정 시점부터 임신 8주 말까지 이어지며, 이때 발달 상태가 태아 단계로 전환된다. 한때 배아로 묘사되었던 생명이 태아로 바뀐다. 항상 인식되어온 발달이 내포하는 광범위한 단계에 비해서 각 단계가 내포하는 도덕적 가치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았기에 그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와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나서야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더 넓은 범위의 인간 발전에까지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대부분의 이교 문화에서는 모든 성인이 똑같은 삶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아이들의 생명은 별로 가치가 없었으며,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일 권리가 있었다. 기형을 갖고 태어난 신생아는 아예 인간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버려졌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이교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서 그러한 견해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AD 313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생아 보호법을 시행했고, AD 374년 발렌티니아누스는 영아살해를 금지했다.안타깝게도 태아기 인간을 보호하는 법률은 뒤처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임신 후기에 태아를 죽인다는 생각은 근거를 잃고 있으며, 미국 성인의 대다수(56%)가 낙태의 합법화 여부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임신 기간을 꼽는다. 물론 생명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은 발달의 모든 단계에 걸친 생명의 신성함을 믿는다.4. 자궁 밖 가사 상태에서 살아 있다가사는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대부분의 중요한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 배아의 경우에 이 상태는 배아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극도로 낮은 온도의 냉동 보존 과정을 유지함으로 이뤄진다. 이 상태에서 배아는 인간 발달의 정상적인 단계를 계속할 수 없다. 단지 이 과정 덕분에 정상적인 거주지인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도 배아 단계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냉동 보존 이전까지 자궁 밖에서 존재하는 배아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IVF를 통해 배아를 생성하면 이것이 가능해졌다. 그럼 이것이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변화시키는가? 전혀 아니다. 윤리학자인 크리스토퍼 톨레프슨의 말이다. “위치는 가장 기본적인 도덕 원칙과 관련하여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단지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 배아가 자궁 내에서 시작했든, 시험관으로 세포 분열을 시작했든, 앨라배마 대법원이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보육실’이라고 부른 냉동 정체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있든 관계없이, 배아는 여전히 인간이다.” 톨레프슨의 요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임신 초기 단계의 낙태에는 반대하면서도 IVF 클리닉에서 죽는 아이들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낙태 반대”를 천명하는 많은 사람의 동기가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임신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아니, 더 가능성이 높은 건 낙태를 반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배아가 어디 있는가 하는 위치의 문제가 배아의 도덕적 지위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만큼 이 문제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다른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도덕적 고려와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진술의 일부를 바탕으로, 그것이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의 도덕적 고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자. 논쟁을 단순화하기 위해 성경에 뿌리를 둔 두 가지 전제만 사용하겠다. (1) 모든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롬 14:8; 시 100:3), (2)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창 1:27).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낙태 반대 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 진술은 다음과 같다.1. 생명이 수정 시점부터 시작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는, 심지어 압도적인 경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다. 따라서 생명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굳이 도덕적 고려나 법적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특정한 생물학적 인간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수정 순간부터 생명이 시작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증거부터 제시되어야 한다. 2.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3. 성경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속하며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발달 단계에 따른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이신 예수님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겪은 발달 단계 중 하나님이 유독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떤 특정한 단계의 생명이 있다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이상, 우리는 배아 단계를 도덕적 고려나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는 시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4. 청소년이나 성인의 물리적 위치가 그의 도덕적 지위를 바꾸지 않는 것처럼, 배아 단계의 인간이 있는 위치도 그 인간이 도덕적 고려나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네 가지 주장을 바탕으로 우리는 IVF로 만든 냉동 배아가 다른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도덕적 고려 사항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지위에 따라, 그들에게도 의심할 여지 없는 두 가지 자연권, 즉 계속 살아갈 권리와 방해받지 않고 생물학적 발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첫 번째 자연권에 대해서는 일부 예외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의적인 살인과 같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러 생명을 상실하지 않는 한 사람은 생명권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배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두 번째 권리에 대한 예외는 드물고 매우 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나아가는 아이와 같이, 누구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자연적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의사가 사춘기 차단제 등을 사용하여 그러한 변화를 완전히 억제할 수 있다면, 아무리 부모의 동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극도의 부도덕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아가 다음 발달 단계 (태아, 출산, 유년기 등)로 진행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도 극도의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권리를 가장 많이 침해하는 사람들은 정작 인간의 복지에 가장 관심이 있거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 즉 친부모와 불임 의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권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까지 취약한 인간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법적 보호는 도덕적 의무만큼 명확하고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낙태를 반대하는 생명 옹호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 주장에 동의해야 한다고 믿는다.1. 보호 대상으로서 인간의 지위는 절대적이거나 또는 재정의될 수 있다. 2. 절대적이라면, 생물학적 나이, 성별, 민족, 능력에 관계 없이 모든 개인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3. 재정의 대상이라면, 정의를 통제하는 누군가가 필연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생사 통제권을 갖게 된다. 다른 말로, 강자가 약자를 통제하고 노예화할 수 있다.4. 따라서 그러한 권한을 강자에게 부여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임신부터 자연사까지 인간 보호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채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자신을 “생명 옹호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연 생식을 통해 생성되었든 IVF를 통해 생성되었든 관계없이 모든 배아에까지 법적 보호를 확대해야 한다. 새롭고 또 오래된 문제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를 둘러싼 논의는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과 인간 생명에 대한 문제를 직면하도록 도전한다. 그것은 사실 아주 오래된 문제의 새로운 형태이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이전에 미국의 많은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낙태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거나 또는 특정 조건에서는 합법적 낙태를 받아들였다. 남침례교 총회는 나중에 Roe v. Wade 판결로 성문화된 특정 조건을 들먹이며, 거기에 부합할 때는 심지어 낙태를 합법화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낙태의 끔찍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생명의 신성함에 헌신한 신자들이 태아를 옹호하면서부터였다.오늘날 IVF로 만들어진 수십만 개의 냉동 배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비슷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지금 지혜를 구하는 마음, 진리에 참여하는 마음, 그리고 모든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정신을 가지고 냉동 배아라는 복잡한 문제를 헤쳐 나가려는 진정한 생명 옹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수정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순종할 용기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절실하다. 그렇게 할 때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경외롭고 경이로운 존재로 만드신 창조주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ow Christians Should Think About IVF-Created Embryos
예수님이 지옥에서 설교하셨다?
베드로전서 3:19 이해하기
by Guy Waters
2024-04-18
베드로는 바울 서신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벧후 3:16). 그럼 베드로 서신서는 쉬울까? 아니다, 베드로 서신서도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신자들을 당황하게 했던 구절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20)18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예수님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즉, 그는 인간으로서는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런데 여기서 “영”이 무엇일까? 일부 해석자들은 그 말이 예수님의 인간 영혼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현재 살아계신 장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영”을 연결함으로 베드로는 성령을 언급하고 있다(롬 8:4-11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심베드로가 18절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는 19절 시작 부분에서 “성령으로 지옥에 가신 예수님이 거기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해석자는 베드로의 말을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또는 부활 이후에 일련의 전도 활동을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도한 대상자는 누굴까? “전에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 즉 “옥에 있는 영들”이다. 그러면 이 “영들”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이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천국으로 데려가신 구약 시대 신자들의 영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소식,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들에게도 좋은 소식이다. 한편으로 이 “영들”을 수천 년 전에 노아를 거부함으로 정죄받은 영혼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들을 포함한 모든 적들에 대한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의 정죄받음을 확증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위한 사후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자들도 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이 모든 해석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그러니까 승천하셔서 아예 하늘에서 자리 잡기 전에, 꼭 육체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지역적으로라도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신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예수님의 활동을 확증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더 명확한 성경적 증거가 없는 이상, 우리는 그런 주장을 전개하는 데에 신중해야 한다. 이런 해석이 내포하는 또 다른 문제는 바로 베드로가 이 “영들”을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 전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20절)로 묘사한 데서 비롯한다. 왜 예수님은 구약의 일부 성도들만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키셨을까? (그리고 왜 베드로는 구약의 성도들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을까?) 예수님은 왜 지옥에 있는 특정 세대의 영혼들에게만 정죄를 선포하고 다른 세대에게는 같은 선포를 하지 않았을까? 각각의 해석에는 나름의 문제점이 있다. 구약의 신자들이 죽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조상들의 고성소(limbus partum, “조상들의 림보”)에 갇혀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히려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 신자들의 영혼은 죽는 즉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눅 16:22). 그리스도께서 정죄받은 인간 영혼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려고 왜 굳이 지옥까지 갔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안한다는 성경적 보증도 없다. 결국 최후 심판에는 개인이 이생에서 행한 것만 고려될 것이고, 내세의 활동은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벧전 1:17; 고후 5:10; 히 9:27).또한 이 “영들”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정복한 악한 천사들로 보는 해석자도 있다. 예수님은 지옥의 포로로 잡혀 있는 영적 세력과 권세에 대한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견해는 보통 지옥에서 이뤄진 승리의 선포와 관련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영적, 마귀적 원수들에 대한 승리이 선언인 것은 사실이지만(22절 참조), 과연 베드로가 19절에서 그러한 승리를 염두에 두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19절의 “영들”과 관련해서 “노아 시대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20절) 불순종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베드로는 그들을 인간으로 본 거 같다. 더 나은 해석어려움을 피하는 동시에 베드로의 전반적인 주장 내에서 이 구절의 맥락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19절의 선포를 행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다. 확실히 설교자가 예수님이라는 건 맞다. 그러나 그는 성령 안에서 설교하신다. 그리고 이 선포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천 사이의 기간이 아니다. 그것은 노아의 생애 동안이다.그러면 지금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방주를 짓는 과정에서 노아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에서 말했듯이 그는 “의의 선포자”였다(벧후 2:5). 노아는 베드로가 일찍이 “그리스도의 영”(벧전 1:10)이라고 불렀던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했다. 그러나 노아 세대의 모든 사람은 심판을 미루는 “하나님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선언을 일축했다. 그들은 “이전의” 불순종 때문에 현재 “지옥에” 있다. 즉, 그들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기 위해 지옥에 던져졌다.답변할 준비를 하라이 말씀은 베드로 서신서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엄청난 목회적 격려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들 중 다수는 무가치하고 악한 삶에서 구원받은 이방인이었다(벧전 1:18, 비교 4:3-4; 참조, 엡 2:12). 이들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베드로전서 3:8-17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현실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그들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야 했다(벧전 3:15-16).당시 신자들은 어떻게 이 힘든 일을 감당했을까? 베드로전서 3:18-20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번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지적한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옛날 노아처럼 우리를 불신앙으로 조롱하고 멸시하는 세상 앞에서 복음의 소망을 증언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즉 노아의 선포 사역에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 안에서 진리를 선포한다. 우리의 임무는 헛되지 않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리를 거두셨다(벧전 3:21-22). 우리는 결코 두려워해서도 또 절망해서도 안 된다(벧전 3:14). 오히려 불신자에게 그에 대해 담대하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해야 한다(벧전 3:15).우리의 구주가 승리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달콤한가? 베드로는 감각이 말하는 대로 살지 말라고 한다. 대신에 믿음으로 참됨을 깨닫고 그 진리에 따라서 살라고 상기시킨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며 그를 섬기자. 출처: Does 1 Peter 3:19 Teach That Jesus Preached in Hell?
그리스도인에게 권리는 무엇인가
by 이춘성
2024-04-17
지난 3월 4일, 프랑스 의회는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에 담는 헌법 수정안을 의결하였다. 프랑스 국민의 85퍼센트가 이를 찬성하였고, 우파의 지도자조차도 반대하지 않았다. 낙태권을 명시한 수정 헌법의 전문은 간단하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률로 정한다”(프랑스 헌법 34조). 이는 낙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조건을 하위 법률로 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낙태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는 범위에서만 가능한, 명실상부한 낙태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가 낙태를 권리로 정하게 된 것은 현대인의 권리에 대한 강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 이유는 현대인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장받고자 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체주의의 지배 아래에서 개인의 철저한 파멸이라는 양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양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권리는 일종의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를 보호하는 윤리적 가치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시작이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개인주의는 일종의 개인과 개인, 권리와 권리의 투쟁이 되어 버렸다. 그 중간 지대로, 대화와 타협, 보류 등과 같은 어색한 영역과 지루한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자신이 손해 볼 것이고, 현대인에게 손해란 자신이 부정당하는 살인(인격 살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렇듯 권리 충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대화보다는 권리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영역 표시의 동물적인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권리는 확대되고 있지만, 권리의 의미와 명예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프랑스 의회의 낙태권 수정 헌법 통과를 반대한 프랑스 상원 의장인 제라르 라르셰는 프랑스의 헌법이 “사회권의 카탈로그”가 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헌법은 개인의 권리를 전시하고 항목을 선전하는 카탈로그라는 것이다. 이렇듯 권리의 전시장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권리를 주장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는 과연 세상에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까?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바다가 인접한 산골짜기의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인생을 살 것이라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도와 독서로 시작하는 하루와 노동이 어우러진 삶은 이상적으로 보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되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 주었다.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찾아왔고, 우리의 터전은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었다. 공동체 사람들은 재난을 피해 도망쳤고, 전기는 끊겼으며, 차길 위에는 어느 산에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바위가 피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새벽 6시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노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서야 마당의 흙과 바위를 치우고, 집을 수리했다.그런데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한 오토바이를 탄 한 사람이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돈을 달라고 했다. 그는 마당에서 일을 도와준 고용된 일꾼이었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가 고작 하루치 돈을 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40만 원도 되지 않는 사례금을 몇 달 동안 받지 못하고 밥만 먹으면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소리치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당신은 이렇게 권리만 주장하느냐고 화를 냈다. 나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문득 그때의 일이 20년이 지난 지금 떠올랐다. 그때의 공기와 온도, 분위기가 모두 생각났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난 주일, 내가 어느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이 아직도 내 안에 메아리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토요일 오후 갑자기 어떤 목사님이 문자를 보내서, 자신이 코로나에 걸려 주일 설교가 어려우니 주일 1, 2부 설교를 부탁한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으면 나에게까지 연락했을까 하여,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고 주일 설교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이 설교는 그 교회 성도들이 아닌 나에게 하는 설교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 설교의 내용이 아직도 내 안에 메아리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20년 전 그날 밤의 일이 후회된다. 나는 낮아지려고 그 산속으로 온 것인데, 그곳에서 나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내가 당신의 고용자라고 소리 높여 나의 높음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모두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는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내 이름을 포길 할 때만 스스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이름 없는 자의 정체성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없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빌려 쓰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이름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여전히 나는 나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권리의 전쟁터에 참전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권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넓힐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난 할 말이 없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권리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권리 아래 폭력에 희생당할 때, 그래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보여주신 복음의 역설이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현대 세대주의를 보여주는 네 장의 스냅숏
by Daniel G. Hummel
2024-04-16
최근에 세대주의가 뉴스에 등장했다. 휴거, 다가오는 적그리스도, 여러 종말의 징조 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과의 거짓 평화 조약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2023년 10월 7일에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담긴 예언적 의미를 저울질했다는 소식이다. 동시에 Robert Jeffress와 Greg Laurie 같은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대형교회 목사들과 그보다 덜 유명한 수백 명의 설교자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동에 쏠린 관심이 고조되는 시점에, 복음주의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적지 않은 복음주의자에게도) 지정학에 근거한 대중적인 세대주의 관점이 마치 전반적으로는 복음주의 관점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춘 세대주의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세대주의 신학이 미국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의 범위와 한계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최근에 The Rise and Fall of Dispensationalism(세대주의의 발흥과 쇠락)을 출판했고,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해서 할 말이 적지 않다. 특히 책 제목에 있는 “쇠락”이 언뜻 보기에는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세대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강단에서 자주 들리는 메시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주요한 정의를 내리고 구분하는 작업은 안 그래도 가뜩이나 유동적이고 복잡한 복음주의 환경이 내포한 혼란스러운 신학적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정의와 구분첫째, 세대주의는 단지 하나의 종말 시나리오가 아니다. 물론 세대주의 신학에서 종말에 관한 부분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세대주의는 교회 생활과 사회의 많은 문제와 관련해서 그 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의 접근 방식을 형성하는 특정한 성경 해석에 기초한 강력한 신학 체계이다. 그 특유의 종말론이 폭넓은 지지자를 만든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별,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 등 성경 해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 다른 핵심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둘째, 오늘날의 맥락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는 적어도 두 가지 주요 세대주의 전통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별개이다. 먼저 일부 신학교, 기독교 대학, 교회에서 논의되고 가르치는 학문적 세대주의가 있다. 하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서 지금은 상대적으로 복음주의와의 연속성 및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많이 축소되었다. 다른 하나가 책, 텔레비전, 영화, 음악 및 기타 미디어에 영감을 주는 대중적 세대주의이다. 대형교회를 포함하여 몇몇 교회에서 여전히 가르치고 있으며, 그 목소리는 일부 복음주의 정치계 안에도 존재한다. “팝 세대주의”(pop-dispensationalism)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미국인이 아는 세대주의이다. 소설과 영화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에 등장하고 할리우드 코미디 This is the End에서 패러디된 내용이 다 이 세대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학문적 세대주의와 대중적 세대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도 있지만, 스타일, 접근 방식, 신뢰성, 내용 면에서 서로 많이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교리가 미국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Charles Ryrie가 쓴 Dispensationalism Today(오늘날의 세대주의, 1965)는 1960년대 학문적 세대주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 책이 제시한 시대 정의의 모델을 바탕으로 나는 간략하게 오늘날의 세대주의를 학문적 차원과 대중적 차원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 변화가 1965년에는 훨씬 덜 두드러졌다.1. 대중적 세대주의 미디어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다.대중적 세대주의는 다양한 환경과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수백만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영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 책 출판을 예로 들면, (아마존의 경우) “기독교 종말론” 하위 장르의 베스트셀러 차트는 현대 정치에 대한 세대주의적 영감을 받은 책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David Jeremiah, Amir Tsarfati, Jonathan Cahn의 책이 일상적으로 상위권에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의 책은 Thomas Nelson, Baker, Tyndale 같은 대규모 출판사에서 발행된다. 다른 매체에서도 대중적 세대주의자가 여전히 눈에 잘 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설교(Jeffress와 최근 사망한 Charles Stanley)와 라디오(John MacArthur, Chuck Swindoll) 등을 꼽을 수 있다. Left Behind 시리즈는 2023년에도 Kevin Sorbo가 감독한 또 한 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이런 식의 결과물이 이룬 양과 대중적 영향력은 대단하지만, 문제는 질이다. 질적인 면에서 상황은 그저 그렇다. 베스트셀러 가운데 다수는 끝없이 분석과 예측을 쏟아낸다. 그 결과는 잠재적으로 소비자에게 미치는 기형적인 영적 영향이다. 1970년대의 전임자들(Hal Lindsey의 The Late Great Planet Earth 같은 책과 A Thief in the Night 같은 영화)처럼, 오늘날의 미디어도 종말론을 그 운동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 가르침들과 아예 단절된 방식으로 제시한다. 생각이 깊은 세대주의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이를 한탄해 왔지만, 그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의 대중적 세대주의는 이전 세대와 달리 복음주의 문화와 호소력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1970년대 세대주의 선배들은 복음을 비그리스도인에게 전한다고 주장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은 (비록 그들이 전도 도구로 인기에 영합하는 종말론이 가진 대중적 매력을 사용했다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적 세대주의는 불신자를 향해서 그런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마케팅을 펼치며 겨냥한 표적은 기존의 복음주의자들이다. 2. 학문적 세대주의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쇠퇴했다.상업적이고 소비자의 비위를 맞추며 성장한 대중적 세대주의는 점점 더 약점을 드러내며 학문적 신학 전통에서 더욱더 멀어졌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학문적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에 이 두 전통은 피차 긴장을 겪었지만, 그 뒤로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세대주의 교리가 복음주의 신학과 성경 연구를 주축으로 철저하게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게서 더욱 정밀한 조사를 받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한때 안정을 누리던 세대주의 기관이 아예 그 신학을 버렸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근본주의자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신학적 전통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무천년 칼뱅주의나 George Eldon Ladd의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보라), 그럼에도 1950년대에는 지배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였다. 여기에는 대규모 성경 연구소와 대학이 있었고 또한 (미국의 세 개의 지리적, 문화적 지역에 소재한) Dallas, Talbot, Grace로 대표되는 신학교를 중심으로 점점 관련 신학교가 늘어났다. 더불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인상적인 리스트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40년대의 Oswald T. Allis와 1950년대의 Ladd 같은 비판자들을 시작으로 이 교리를 반대하는 보수적 신학자들은 지속해서 신학적, 성경적, 지적 비평을 평준화하고 확장했다. 여기에 John Stott부터 N. T. Wright에 이르는 영국 비평가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발생한 오순절 학계와 남침례교 계열의 세대주의 이탈을 추가하면, 세대주의는 지난 세기에 비해서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신학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미약해졌다. 동시에, 한때 안정적이었던 세대주의 신학의 거점이 역사적 영향력에서 멀어졌다. Biola University 사례는 기독교 대학 및 대학계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한 사례이다. 1908년 Reuben A. Torrey와 William E. Blackstone 같은 세대주의자들이 설립한 Biola University는 현재 세대주의의 가르침에 있어서 분야에 따라서 고작해서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대부분 아예 침묵한다. 한마디로 이 학교는 오늘날 세대주의의 현실을 보여준다. 최근에 드러난 또 다른 피해 사례는 Multnomah University이다. 이 대학은 한때 성경 연구소였으며 장수 총장이었던 Willard Aldrich 밑에서 충실하게 세대주의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위성 학교로 전락해서 Jessup University 산하로 들어갔다. 게다가 일부 교단도 같은 경향을 보인다. (1950년에 확고한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교단으로 합병되었던) Evangelical Free Church of America는 2019년 신앙 선언문에서 “전천년설”을 아예 삭제했다.어쨌든 세대주의 교리의 “쇠락”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하다. Michael Vlach, Michael J. Svigel, Cory Marsh를 포함한 전문 세대주의 학자들은 신학, 성경 연구, 역사 분야의 학술 작품을 계속해서 출판하고 있다. 그리고 Paternoster Press 및 SCS Press 같은 중소 출판사는 계속해서 세대주의 관점을 옹호하는 책을 내고 있다. 학문적으로 세대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복음주의 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소규모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3. 이 두 경향이 복음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혼합되어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발전, 즉 빈약하고 전혀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대중적 세대주의의 확산과 학문적 세대주의의 쇠퇴가 내가 지난 반세기 동안의 이 교리를 “쇠락”이라고 표현한 이유이다. 그러나 쇠락은 죽음도 또 부재도 아니다. 오늘날 영향력에서 혼재한 세대주의는 여전히 우리와 관련이 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이 신학을 고수하는 신학교와 학교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목회자를 훈련하는 가장 큰 초교파 기관인 Dallas Theological Seminary와 Liberty University가 포함된다. Southern California Seminary, Master's Seminary, 그리고 Shepherd's Theological Seminary 같이 세대주의 특징을 중요시하는 소규모 신학교도 있다. Moody Bible Institute 같은 학부도 여전히 세대주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학교이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경우에 학생들이 가르치고 받아들인 세대주의의 생생한 현실은 적어도 개개인의 수준에서 볼 때 명확한 확신에서부터 대충 얼기설기 고작해야 “명목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더욱이 세대주의 신학에 몰입한 사람들은 주류 학술 출판사와 저널의 관심을 끄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고등 교육 안팎에서 학문적 세대주의의 영향력을 더욱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널리 알려졌던 복음주의 사역의 조직과 확장을 일으킨 운동 속에 세대주의 리더십이 전무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이 그냥 없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많은 이들은 아예 세대주의를 적대시했다. 이러한 운동이 역사적 복음주의의 신학적 가르침들과의 연속성에서 항상 다양했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운동이며 복음주의 세계의 조직적 에너지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이머징 교회, “젊고, 불안하고, 개혁된”(Young, Restless, and Reformed) 교회, “제3의 길”의 지지자, 기독교 민족주의자, 붉은 글씨의 그리스도인(Red Letter Christians) 등은 하나같이 자신들만의 이유로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들을 70년 전과 비교해 보라. 세계 선교 운동, 청년 및 대학 사역 운동, 그리고 (20년 후 일어난) Jesus People 운동과 메시아 유대교(Messianic Judaism) 등은 모두 다 예외 없이 핵심 주장에 있어서 세대주의자와 그 신학의 영향을 받아 활력을 얻었다.더 넓은 복음주의 분야에서 볼 때 세대주의자가 그나마 여전히 리더십을 대표하는 분야 중 하나가 성령의 은사 중지론과 관련해서이다. 대표적인 두 사람, MacArthur와 Justin Peters가 이 전선에서 대중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서 오순절 그리스도인과 비오순절 그리스도인 모두로부터 점점 더 큰 압력을 받고 있다.종합적으로 볼 때, 복잡하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세대주의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4. 대중적 세대주의는 예전만큼 국가 정치와 관련이 없다.상업 및 소비자 분야에서 대중적 세대주의가 여전히 누리는 행운은 놀랍지만, 과거에 그들이 영향을 미쳤던 핵심 영역 중 하나, 교회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리더십은 시들어 가고 있다. 1920년대에 William Bell Riley와 J. Frank Norris 같은 인물은 진화론과 술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1950년대에 John R. Rice, Billy James Hargis, J. Vernon McGee는 미국에서 공산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큰 발판을 제공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Jerry Falwell과 Tim LaHaye가 세속적 인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들은 모두 다 세대주의 교리를 믿었거나, 최소한 그 교리에 매우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정치를 중시하는 저명한 세대주의 목사들의 사례가 남아 있지만 (Jeffress와 John Hagee, 그리고 John MacArthur는 코로나 정책에 대해서 그렇다), 보수 복음주의 정치의 무게 중심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세대주의 교리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판 세력 중 하나가 오늘날 성장하는 후천년설 민족주의에서 목소리를 찾는, 소위 말하는 후천년설 “재건주의”(reconstructionism)이다. 이 운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Doug Wilson은 생애 초기만 해도 세대주의자였다. 세대주의 신학으로부터 “탈개종”(deconversion)한 그의 이력은 별로 독특한 것이 아니며, 사실상 태평양 북서부와 다른 지역에서 보수적 개혁주의 후천년설이라는 브랜드로 성장 중인 그는 좀 더 대중성 있는 신학 트렌드를 반영했을 뿐이다. 개혁주의 후천년설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미국에서 기독교 정치 활동이 보다 더 오순절화되었다는 점이다. Paula White와 몇몇은 트럼프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하기는 미국 최대의 친이스라엘 옹호 단체인 Christian United for Israel을 운영하고 있다.Hagee는변형된 세대주의 종말론(그는 이미 수많은 대중적 세대주의 책을 출판했다)과 오순절 신학 및 번영 복음을 적절하게 결합한 다양한 지지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도록 강력한 호소력을 만들어 낸다. 그런 영향력 덕분에 하기는 압도적 오순절주의이자 (특히 창세기 12:3에 초점을 두어) 번영 지향적이며 더불어서 신학의 핵심 부분에서 반세대주의인 글로벌 기독교 시온주의 네트워크와 미국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오늘날 국제 기독교 시온주의의 대부분은 미국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실질적으로나 또 수사적으로나 세대주의와 정반대이다. 그에 반해서 White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와 문화에서 권위를 갖도록 요구하는 주권주의 입장에 더 가깝다. 정치계에서 이러한 유리한 위치는,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해서 글로벌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네트워크” 기독교가 점유한 유리한 위치는 세대주의보다는 보수적 개혁주의 후천년설에 더 부합하며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공급한다. 세대주의의 미래지금까지 살펴본 네 장의 스냅숏은 오늘날 학문, 문화, 정치 분야를 아우르는 세대주의의 복잡한 그림을 보여준다. 이 교리가 향후 50년 동안 정확하게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행여라도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세대주의의 영향력이 되살아나거나 Z세대 복음주의자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현재 추세를 반영할 때 매우 주목할 만한 반전이 될 것이다. 동시에 대중적 세대주의가 아예 상업적 매력을 잃게 되면, 그 자체로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복음주의 문화에 더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해서, 1970년대 이후 복음주의 문화를 지배하던 하나의 세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출처: 4 Snapshots of Dispensationalism Today
진짜 기독교 문화일까?
기독교 문화 점검을 위한 세 가지 질문
by 서나영
2024-04-15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뮤지컬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려던 열심당의 역사적 스토리를 배경으로 하는데, 기마전차를 타고 대결하는 화려한 장면, 카타콤에 숨어 작은 촛불을 들고 조용히 소망을 노래하는 강력한 음향 효과, 노예에서 장군의 양아들이 되는 드라마틱한 순간 등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모습에서 오열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가장 의아했던 순간은 빌라도가 남창들의 화려한 춤을 즐기는 장면인데, 관중석에서 가장 크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 일이다. 두 시간 반가량 이어졌던 수많은 곡 가운데 압도적으로 가장 큰 환호와 박수 소리였다. 관중에게는 예수님의 골고다 길보다, 빌라도의 은밀한 파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놀랐던 경험이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기독교 소설로 큰 성공을 거뒀다. 사탄의 계급사회에서 선배 마귀가 신참 마귀에게 멘토링을 하는 이야기인데,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민 상담을 통해 “믿는 자를 어떻게 쓰러트리는지” 전략을 제시하는 서른한 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에필로그에 루이스는 이 소설에 대해 시대에 맞게 확대 개정을 하자는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개정판을 쓰지 않은 이유와 함께, 소설 속 편지를 서른한 편밖에 작성하지 못한 이유를 밝힌다. 그가 실제로 마귀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다 보니 영적으로 거의 녹다운이 되어 더 쓸 수 없었으며, 다시는 그런 영적 시련을 겪을 수 없어 개정판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루이스는 마귀 입장에서 썼듯이 천사들의 입장도 써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만약 마귀 ‘스크루테이프’가 아니라 천사장 ‘미가엘’의 편지로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련하게도 본성이 죄인인 인간은 선보다는 악이 더 매력적으로 끌리는 마음의 자석을 장착하고 있다. 동시에 영적 거장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마귀 입장의 편지 소설을 쓰며 마음과 삶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복음 사역 중에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 고백하며, 이에 대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3)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전통을 따라 세상과 소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많은 문화적 노력이 있어 왔다. 그들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 이질감을 없애고 복음을 전할 틈새와 기회를 엿보는 노력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삶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고칠 권능의 사역을 꿈꾼다(마 9:10-13).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민요 가락을 빌려 힘찬 찬송가를 만들었을 당시, 그가 받았을 종교적 공격은 상상하기 힘들다. 웨슬리 형제가 서정적 찬송을 만들고 개혁을 꾀했을 당시, 그들은 매일 달걀을 맞아 멀쩡한 양복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일컫는 찬송들은 문화전쟁을 이기고 마침내 울려 퍼지는 승리의 나팔과도 같다. 그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타락한 매개체인 줄로만 알았던 추상화, 영상예술, 판타지 소설 등의 장르는 오늘날 복음을 나르는 중요한 수단이 된 듯하다. 문화와의 동행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었음을 쉽게 부인할 수 없다.최근 한국의 유명한 워십팀의 ‘게임방 시리즈’ 편곡을 들었다. 게임 슈퍼마리오와 카트라이더의 음원 또는 BTS의 다이너마이트의 음원 등을 전통 찬송의 간주에 넣어, “장로님들 뒷목 잡고 쓰러지는 편곡”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려 수준 높은 공연 실력을 보였다. 또 다른 잘 알려진 CCM 그룹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편곡이 화제다. 기존 찬송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재즈 화성의 반주에, 악기팀과 보컬 전원 선글라스를 끼고, 메인보컬은 미니스커트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다리를 흔들며 부르는 영상이 ‘세상 힙한 찬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 감독이 만들고 그리스도인 배우들이 참여했다는 흥행 가도에 진입한 무당 주제 영화도 있다. 큰 이슈가 된 워십팀들의 담당 목사의 간증들, 감독과 배우들이 매번 기도하고 시작했다는 오컬트 영화의 뒷이야기들이 기사와 영상으로 그들의 작품의 ‘선교적 마인드’를 뒷받침한다. 복음을 위한 세상과의 소통, 복음을 위한 젊은 세대의 문화와의 소통, 아름다운 표현이다. 소통의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고,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기독교와 세상과의 소통이 막히지 않고 오해가 없으며 뜻이 서로 통한다’는 명제는 참으로 이상하다. 세상 문화가 기독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가고 있다면, 세상과 소통이 너무 잘 되는 것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을 보고 육성으로 말씀하셔도 종교주의에 물든 세상은 듣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설교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귀가 없었다. 복음은 소통이 아니라 선포해야 하는 엄청난 소식이다. 이 세대는 문화 점검을 위한 모든 처방을 혐오한다. 윤리, 사랑, 선, 진실, 질서, 희생 등의 의미들로 기준을 세우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성과 생명의 자기 선택권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는 논리로는 이길 수 없다. 예술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s for Arts’ Sake) 사조는 종교와 정권과 윤리도덕의 참견을 막아낼 기가 막힌 방어막이다. 이 세대와 닮은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 속에, 그들이 가진 생각의 틀을 닮겠다는 결심만은 하지 않아야 한다.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변화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듣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문화에 대한 모든 종류의 태도에 깊게 머물러봤던 학자의 양심으로, 소란스럽지 않더라도 강력한 에너지를 들여 점검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그 첫걸음으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 함께 변하는 기독교 문화를 점검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1. 복음 전파인가, 종교적 구걸인가?최근 중고등학생 학습과 세례 문답 교육에서 한 학생이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세례와 입교를 위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억지로 앉아 있고, 담당 교역자 목사님이 이제 대답해야 한다고 구걸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가장 큰 기쁨과 은혜의 순간,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한 응답을 구걸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 같아 듣는 순간 함께 참담함을 느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바보 취급을 당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을 할 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차라리 바보로 불릴 때가 좋았다. 바보라는 말이 듣기 싫은 현대인들은 언제부턴가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자처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시며 “그 지아비 대신에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겔 16:32)로 비유했다. 창기는 오히려 선물을 받고 값을 받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행음하고,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겔 15:33) 한탄하셨다. 차라리 값을 받는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생명과 같은 귀한 것을 내준다는 의미다. 최근 유행하는 “힙하다”라는 표현은 유행을 따르면서도 개성이 돋보이는 모습에 대한 칭찬이다. 힙한 퍼포먼스와 함께 펼쳐지는 찬송가는 선교적 도구인가, 아니면 귀한 것을 포기하며 내어주고 세상 문화의 관심을 구걸하는 행위인가,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한 번 들어달라고 사정하며 대중의 인기를 위해 포기한 것이, 그리고 얻은 문화와의 소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대중의 안목이 두려워 장착한 ‘힙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함보다 앞서지는 않았는지, 진지하게 주님께 물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루터와 웨슬리는 아니며 바울과 루이스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지만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든 노력이 최고로 귀하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위상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지를 않기를, 정말 소중한 것을 자존심 없이 내어주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2. 기쁨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성경에서 최고의 기쁨 표현은 ‘할렐루야’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할렐루야는 시편에 23번, 계시록에 4번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보여준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외쳤던 ‘할렐루야’는 그 편지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외칠 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고난과 핍박과 환란 속 매일 죽음의 위협을 받는 자들이었다. 바울이 호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쇠고랑을 차고 찬양했듯이(행 16:25), 할렐루야의 기쁨은 그런 것이다. 상황에 관계 없는 영원한 구주와의 연합으로 인한 기쁨이다. 반면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성 기쁨은 다른 종의 기쁨이다. 물론 오락성 놀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핵심 신학이 담긴 그의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을 읽어보라. 즐거움과 희락은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할 귀중한 가치다. 다만 좋고 신날 때 춤추며 노래하는 단면적인 기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게임 음원을 넣어 신나게 놀며 찬양하는 모습에 오락성이 보인다고 비판하는 경우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고난 속 피어나는 기쁨을 아는 자들의 우려일 것이다. 할렐루야를 가장 진지하게 외쳤던 다윗과 요한의 상황적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진정성을 점검하기에 적합하다. 기쁠 때 찬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한다. 기독교의 참된 기쁨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최고의 감정 상태다. 우리가 대하고 만드는 기독교 문화 콘텐츠가 요한이 말했던 할렐루야의 기쁨인지, 아니면 이방인이 단순히 춤추게 하려는 오락성 도구인지 점검하자. 3. 사랑과 인내로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보통은 두 가지의 태도 중 하나를 택한다. 첫 번째 태도는 부정하고 보지 않는 것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잃어버리려고 애써 무시한다. 두 번째 태도는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화를 쏟아낸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 그렇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땅도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이 땅에 무균실은 있어도 죄 없는 땅은 없다. 우리가 성화를 이뤄야 할 곳은 먼지가 쌓인 땅 위며, 아무리 더러워도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땅이다. 한 그리스도인이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엡 4:13)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하고 인내하기 위해서다(살후 3:5). 참고 기도하며 기다리며 지혜롭게 성령 안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무시와 비판이 아닌, 사랑으로 단호함과 겸손함을 지키는 것은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드는 일이다.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1:31) 호소했다. 한국의 교회는 비판이 아니라 바울처럼 인내함으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가르칠 그리스도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문화를 꿈꾸며,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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