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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7) : 정의와 자비 사역
by 고상섭
2023-07-05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의 소천에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참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이 다양한 찬사를 그에게 보냈다. 팀 켈러가 자신이 속한 교단을 넘어 범교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사역이 큰 몫을 했다. 복음주의권 교회들은 구원에 집중하면서 사회참여에 소홀한 경향이 있는데, 팀 켈러는 복음은 반드시 사회참여와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또 그 말대로 스스로 실천했기에, 다양한 교단의 사람들에게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구호 활동은 흔히 부차적인 의무로 여긴다. 교육과 전도사역 등을 충분히 한 후에, 게다가 시간과 예산과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그러나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1]복음과 정의 사역 팀 켈러는 복음주의 교회의 약점인 사회참여에 대해 강조했지만, 이것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보완이 아니라 복음을 분명히 알면 자연스럽게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교회 리더십과 사역자들은 복음을 단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적 내용쯤으로 여길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많은 설교자와 지도자들이 더 심오한 교리, 더 깊은 영성, 더 깊은 공동체나, 더 심오한 제자도, 심리적 치유, 또는 사회 정의나 문화 사역에 열정을 쏟기 쉽다. … 그러나 이런 경향 속에서 전체 그림을 놓칠 수가 있다. 비록 우리가 집중하는 사역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모든 형태의 사역은 복음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고,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또한 복음의 결과이어야 한다.[2]팀 켈러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분리되는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개의 사역을 합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파생된 사역들을 하게 된다. 리디머 교회 홈페이지 처음에 등장하는 화면이 ‘리디머 교회의 비전과 가치’를 설명한 그림인데, 복음과 사역의 관계들을 잘 설명해준다. 그림을 보면 예배와 전도, 공동체 형성, 교회개척 운동, 신앙과 직업, 자비와 정의 사역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다섯 가지 영역의 일들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특히 정의와 자비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역이 아니라 복음을 알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역이라 말한다. 참된 복음이 선포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은혜를 경험한 개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모든 세상일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힘쓰게 된다.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정서이고 복음은 사회의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3]왜 정의 사역인가팀 켈러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을 ‘구제 사역’이라고 하지 않고 ‘정의 사역’이라고 부른다. 왜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미가서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행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무차별적인 은혜와 동정을 의미하는 말이고, ‘공의’와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구약성경에 200번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말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이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22)여기서 ‘그 법’에 해당하는 단어가 ‘미쉬파트’이다. 인종이나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옳고 그름에 따라 유무죄를 가려 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으면 똑같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미쉬파트는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라는 뜻이다.[4]구약에서 이 단어가 등장할 때는 주로 ‘4대 취약계층’인 과부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거듭 사용된다. 즉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한 사회의 미쉬파트 곧 정의와 공의를 평가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취약계층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비와 자선의 부족의 차원을 넘어 정의 곧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공의’ 곧 ‘정의를 행하는 일’이다.[5]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도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한다.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여야 한다.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6]팀 켈러가 이 사역의 이름을 ‘정의와 자비 사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구제’라고 하면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이지만 하면 더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정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성품을 열방에 드러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을 외면한다면, 세상이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셈이 되므로 입으로 그 어떤 신앙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7]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외면한다면 팀 켈러의 표현대로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 정의 사역의 동기 정의 사역은 복음에서 흘러나온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나와야 한다.”[8]“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실 때 언급한 내용이지만, 정의 사역의 동기와 근거도 동일하다. 단순히 그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반응으로 정의가 흘러나와야 한다.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 또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로 이어진다. 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구제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확인해야 한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돈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다 살만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태도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야 도움을 주려고 하는가?”[9]내가 도와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도움을 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은 나보다 못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생각일 수도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에서도 싱글맘을 도왔는데, 그녀가 교회가 제공한 돈으로 번듯한 식당에 다니고 새로운 자전거를 아이들에게 사주는 데 돈을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그러자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에드워즈는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받았는데 돈을 술먹는 데 쓰거나 규모 있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에게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가 이웃을 돕는 의무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똑같은 상태에 빠진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재정지원을 끊어버리면) 그럼 나머지 식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부모가 무책임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녀들을 생각해서 그 가정을 꾸준히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리미더 교회가 지원했던 싱글맘도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라면서 동네에서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 자전거 하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주면 정상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더미 교회는 재정지원 이상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실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기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11]정의 사역의 실천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권면한다. 교회가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에서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서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거나 비공식적인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또 이웃이나 공동체를 섬겨야 한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을 찾고,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정의 사역의 첫 번째 실천은 바로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이 단순히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장기적인 사역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런 장기적 계획에 대해 세 단계로 나누어서 소개한다. 1) 원조 원조(Relief)란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부터 해주고 회복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원조행위를 한다. 노숙자에게 임시로 숙소를 마련해 준다거나, 궁핍한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 준다거나, 최소 비용을 받거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고 상담해 주는 식의 서비스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조 사역이다.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는 법률, 주거, 다양한 형태의 가정 폭력 따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다. 2) 개발개발(Development)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원조에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해 줄 때는 새로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경제적 자원들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여기에는 식량과 생업에 드는 각종 도구가 모두 포함된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법은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보장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기회라면 재정적인 자원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교육이나 법률 지원, 일자리 창출 따위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요소들은 쓰고 남은 걸 넘겨주거나 선심 쓰듯 베푸는 차원을 넘어 권리의 문제이다.” 개발은 단순히 지원을 받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 자립할 수 있는 교육과 일자리 창출 등이 포함된다. 물론 개발은 원조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모되고 복잡하며 비용 부담이 크다.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12] 개인의 위한 개발에는 교육, 직장 창출, 훈련 등이 포함된다. 이웃이나 지역에 대한 개발은 사회적, 재정적 자본을 사회 시스템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택 개발, 주택 소유 그리고 여러 자본 투자를 의미한다.[13]3) 개혁개혁(Reform)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의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 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법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의 문제까지 나아가게 한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7)고 말했고, 모세는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률 체계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말했다(레 19:15). 또한 사람들의 근소한 수입을 쥐어짜는 대금업 시스템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명했다(출 22:25-27).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을 직접 바꾸는 일에 헌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회를 변화한다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교회가 외면한 채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중요한 목표임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어떻게 제도적 교회가 참여할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한 영역이다.[14]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구제하는 일이다. 또 개발의 단계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발의 단계는 한 교회가 전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지역 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세 단계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단계는 교회가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하여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지역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그래서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는 교회의 기관으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는 개발과 사회 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또한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여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 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15]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라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에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정말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있으려면 반드시 정의 사역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4:32-35)복음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문장은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행 4:34)라는 말이다.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모두 개인의 만족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관대함과 복음이 주는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 사역은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건강한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빈곤의 문제는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다. 주1. 팀 켈러, 여리고 가는 길, 45.2. 팀 켈러, 센터처치, 72.3. 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42.4. 같은 책, 34.5. 같은 책, 36.6.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42.7. 정의란 무엇인가, 41.8. 여리고 가는 길, 84.9. 정의란 무엇인가, 116. 10. 정의란 무엇인가, 12011. 정의란 무엇인가, 117. 12. 정의란 무엇인가, 171-173. 13. 센터처치, 683. 14. 같은 책, 68. 15. 정의란 무엇인가,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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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 Crabtree
2023-07-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한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면(사실 그렇다), 또 이 난장판의 책임자가 하나님이라면(사실 그렇다), 이성적인 사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로 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어떻게 그를 신뢰하고 또 그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오른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는 만족의 근원은 여러 곳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변함없는 사랑.• 그가 멀리 있는 대신 내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나의 슬픔과 아픔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다. 모든 면에서 나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 아침마다 새로운 긍휼로 심판을 이기시고 나와 같은 죄인에게 내려질 진노를 거두신다. • 모든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의지, 하등의 약속 받을 자격이 없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즐겁게 약속을 주시는 그의 마음.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라고 한다면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이유가 되겠지만, 조금 전 살펴본 첫 문장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한 문장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수년 전에 이미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보는 법을 배웠다. 즉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행복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 문장을 제대로 읽을 때까지는 말이다. 물론 삼십 년 전에도 나는 그 문장을 읽었고, 그 이후로 성경은 내게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하는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의 기쁨)이게 과연 사실일까? 내가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냥 기쁘신 게 아니라 가장 기쁘다고? 내가 막 읽은 것과 비슷한 문장은 “기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지도록 만든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어지러운 게 기쁨이 아니다. 하나님은 술에, 마약에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은 바람직한 웰빙이고 적절함에서 만족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순결함, 더럽지 않음, 흠 없음, 오염되지 않음, 바래지 않음, 제한 없음,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즐거움을 추구함으로 누리는 기쁨이다. 파이퍼의 주장처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만족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만족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함으로써 성경 읽는 방식뿐 아니라 우주를 관찰하는 방식까지도 바꿔놓았다. 우주에는 관찰할 것이 많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기쁨은 그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만족의 원동력이 된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준다. 아래에 열거한 건 단지 몇 가지 보기일 뿐이다. • 공의를 기뻐하신다(잠언 11:1).•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잠언 15:8).•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시편 147:11).• 백성을 택하기를 기뻐하신다(신명기 10:14-15).•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시편 115:9).• 자기 아들을 기뻐하신다(마태복음 17:5).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다. 하나님은 이 점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그는 또한 최고로 가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최고로 평가하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그는 항상 합리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만족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함으로써 완벽하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치가 없는 것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다. 또한 미치지도 않았다. 헨리 스쿠걸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즉 자기 자신은 가장 가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좋은 답을 알고 있다. 견고함과 변하지 않는 내구성을 가진 것, 증발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요인과 힘에 굴복하지 않고 모두를 이기는 것,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 실질적이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다른 모두를 파생시키는 것, 매우 희귀해서 어디에서도 유사품을 찾을 수 없는 것,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나 심오하고 결정적으로 유용한 것, 그리고 끝없이 스스로를 다시 채우는 것이 가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귀하고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기에 가장 기쁘시다. 자신의 영광 안에서 그는 가장 기쁘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전능한 하나님이 불평만 한다면? 유명한 기도,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가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다.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전능한 힘을 사용하여 그는 언제라도 우리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기에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의 가장 높고 깊은 기쁨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 잘못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결코 실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일을 마치고는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실 수 있다. “정말 좋다. 참 좋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행하는 나 자신으로 인해 당연한 말 같지만 참으로 행복하다.” 심지어 그의 진노조차도 결국에는 그를 기쁘시게 한다. 그 결과 그분의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공의를 이루며 그를 영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변함없으시며 항상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행하신 일을 보면서 아쉬워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믿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이상으로 감사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또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듯, 나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인해서 또 그가 행하신 일들로 인해서 기뻐한다. 그의 기쁨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이다.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기뻐신 것처럼, 나도 매일 하나님 때문에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엉망진창 속 하나님의 기쁨길고 더운 날을 끝낸 농부가 어떻게 쟁기질로 다 파헤친 잔디를 보면서 만족할 수 있을까? 그 밭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밭이지만, 농부는 앞으로 다가올 영광스러운 수확을 기대하며 쟁기질을 즐긴다.우리 부부는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냈다. 당신은 실패했다며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 우리 부부와 완전히 관계를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오산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끝내지 않았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나는 중학교 딸과 함께 도예 수업을 들었다. 작업실과 옷을 먼지투성이 진흙탕으로 만들어가면 몇 시간이나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이 모든 수고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 아직 가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의 수고가 지금 매력적이고 유용한 작품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 하나님은 아직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기뻐하신다. 경작 중인 들판, 육체의 질병, 완전히 침수된 행성, 그리고 이 부서지고 신음하는 우주는 지금도 영광스러운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선을 이루시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만족하신다. 결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법이 없으시다. 그의 기쁨과 나의 존재하나님이 하나님이기에, 또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가져다준 변화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만든 신들과 하나님을 구별시킨다. 그런 신은 인간을 닮아서 하나 같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 제우스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벼락부터 예측할 수 없는 포세이돈의 분노, 트로이 전쟁 때 인신 제물을 요구하는 아르테미스, 오늘날 유행하는 취소 문화 속에서 낙태를 조장하는 자기신격화한 도덕 경찰 닮은 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든 신들은 기뻐 만족하시는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는 영원한 즐거움을 확실하게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모든 역사에 목적의식을 불어넣었다. 기쁘신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역사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이룬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현실 이해의 방식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좋은 곳, 아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성경 읽는 방식도 바꾸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작품에 대한 그의 기쁨은 행과 행간 곳곳에 들어있다.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쁨은 후회가 없는, 일종의 깊은 기쁨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할 때(예를 들어, 창세기 6:6과 사무엘상 15:10), 그것은 축소된 영광이라는 슬픈 현실에 대한 한탄의 의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왜일까?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의 아들에게 최대의 영광을, 그의 백성에게 최대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려는 그의 깊은 계획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으로 인해서 기쁘시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원제: What If God Were Happ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하나님의기쁨
하나님의만족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by 김선일 ·신국원
2023-07-0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리디머 교회 설립자이자 전 세계에 복음적 도시교회 운동을 일으킨 팀 켈러 목사가 주님의 품으로 떠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21세기 문화에서 복음변증의 과제는 한국 교회에도 중요한 사명으로 다가온다. 이에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신학의 권위자인 신국원 교수(웨신대 초빙교수)와 복음전도와 회심 연구의 전문가인 김선일 교수(웨신대 교수)가 팀 켈러 이후 한국 기독교 변증의 과제와 방향을 주제로 대담했다. 이 대담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정인찬) 주최로 6월 26일에 경기도 성남시의 공유공간인 분당살롱에서 진행되었다. 김선일: 오늘 이 귀한 자리에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문화신학자이자 기독교세계관 학자인 신국원 교수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 교수님은 저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선교와 문화를 강의하고 계십니다. 신국원: 이 자리에 와 주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의 형제자매님들, 그리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인 오르도토매오 소속 목사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김: 오늘 주제가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입니다. 사실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인데요. 먼저 팀 켈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잠깐 살펴볼까요? 그분은 미국의 고든콘웰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셨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 Min,)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1981년에 뉴욕에서 리디머교회를 설립하였고 2017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은퇴 이후에는 복음과 도시 사역 지원 단체인 City to City에 전념하시는 줄 알았는데, 돌연 2019년 췌장암을 앓고 있음을 알리셨고, 지난 5월 19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신: 팀 켈러가 나온 대학이 버크넬(Bucknell)이라고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작은 리버럴아츠 컬리지인데, 그 학교가 고전을 섭렵하도록 철저하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팀 켈러도 이미 광범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축적하고 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 켈러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도 살펴볼까요? 고전적인 인물들로는 조나단 에드워즈, C. S. 루이스, 프란시스 쉐퍼, 레슬리 뉴비긴 등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저술이나 강연에도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대에 그와 교류하면서 영향을 준 인물들도 있는데요. 도시선교로 유명한 하비 칸, 복음주의 영성신학의 책을 쓴 리처드 러블리스, 그리스도 중심설교에 관한 책을 쓴 에드먼드 클라우니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 그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하비 칸일 것입니다. 하비 칸의 대표작 정의를 행하고 은혜를 설교하라(Evagelism: Doing Justice and Preaching Grace)는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를 통합시킨 유명한 책이지요. 오늘 주제가 하비 칸이 아니지만 참고로 하비 칸이 한국 선교를 하면서 굉장한 도전을 받은 것은 서구의 정통신학 위주 사상에서 1970년대 한국 용주골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큰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하비 칸은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한 주일 동안 열심히 사세요”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라는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의 삶을 정말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고민이 중첩되다가 결국 “I Change!” 즉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학 교수가 된 이후에 도시 선교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에게 영향을 준 하비 칸에게는 필라델피아(웨스트민스터신학교 소재지)와 뉴욕(리디머교회 소재지) 이전에 서울이 있었고, 서울 이전에는 의정부, 동두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 목회는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모인 그곳에서 어떻게 삶이 녹아있는 목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최근까지 한국 교계에서도 팀 켈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는 긍정적 평가가 많은 가운데 일부에서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지성적이고 모범적인 목회자였지만 서구의 보수적 개혁주의 한계를 못 벗어났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신: 저도 그러한 비판을 본 적이 있는데 보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 있는 곳에서 성실하게 내 눈앞에 있는 분들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켈러라고 해서 생전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카나, 미얀마 산골에서도 통하는 얘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요. 그러한 비판은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이긴 해요. 하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맨해튼의 중산층 이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향에 맞게 복음을 전한 것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에요. 자기가 뉴욕 사람이 아니면 잊어버리면 되는 거고요. 그의 책들이 범용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일리 있는 비판이긴 하지만 저는 오히려 칭찬같이 들립니다. 김: 팀 켈러의 사상 중에 또 하나 인기 있으면서 논란이 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시대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죄를 우상숭배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책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에 잘 나오는데요. ‘우상’(idols)이라는 말로 인간의 문제를 설명한 이는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의 철학자 하웃즈바르트입니다. 팀 켈러도 하웃즈바르트의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Idols of Our Time)에서 착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 교수님은 자유대학에서 공부하셨는데 하웃즈바르트는 어떤 분인가요? 신: 하웃즈바르트는 원래 경제학자이시고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심지어 제가 박사 논문 디펜스하러 들어갈 때 저에게 메모를 건네시면서 격려하셔서 제가 감동받았어요. 당시 제 논문이 자유대학교 안에서 좀 논란이 돼서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이분의 키워드가 “우상”인데 켈러가 인용한 개인적인 우상이 아니고 민족주의, 이념, 혁명, 자본주의의 번영과 같은 우상을 말합니다. 팀 켈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해야 하는 죄의 의미의 폭을 넓히기 위해 이 우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문화적 가치. 세계관. 거기에 깔린 치명적인 악과 독이 우상이라는 거지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좌우하고 결국 인간을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으로 의도적으로 쓴 표현인 것 같습니다. 맨해튼에 와 있는 사람들의 상황과 쉽게 연관 지을 수 있는 말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쓴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구약과 신약의 선교적 내러티브에서 우상숭배의 문제를 일관되게 지적하던데요. 오늘날 우리가 “우상”이라고 하면 다소 미신적인 뉘앙스여서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기 쉬운데, 굉장히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에서 중요한 선행 작업이 문화 서사(cultural narrative)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현대인의 행복을 위한 집착이나 중독이라고 한다면, 우상숭배가 세련된 형태의 공통적, 객관적 가치관이 된 것이 문화 서사가 아닐까 싶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 문화적 서사는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경처럼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는 겁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을 팀 켈러는 문화적 서사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화나 유행을 보면 그것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스타일’과 같은 노래는 강력한 쾌락주의적 문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 K-Culture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한국이 만드는 문화적 서사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김: 말씀하신 대로 K-Culture, K-Pop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그걸 교회에서 활용하는 것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없을까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쾌락주의 서사가 깔려 있다면 은근히 그러한 세속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을 텐데요. 교회에서 아무 필터 없이 대중문화를 가지고 와서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신: 제 큰딸이 전에 베트남 오지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한테 소녀시대의 영상을 보내달라는 거예요.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소녀시대를 너무 좋아해서 떼창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문화 서사를 교회 밖 사람들과 하나의 연결고리로 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복음성가나 CCM 역시 세속음악을 차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여기까지가 기독교적이고, 여기서부터는 비기독교적이라고 경계를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껍데기는 섞을 수 있는데 내용까지 섞어 버리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민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김: 자, 이제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서들을 볼까요? 대표적으로,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와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말하다를 읽으면서 C. S. 루이스가 생각났고, 답이 되는 기독교를 읽으면서는 레슬리 뉴비긴이 떠올랐습니다. 신: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는 켈러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이 정말 변증 서적인 이유가 의도적으로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어요. 이 책은 회의주의 시대에 종교적 관심은 있으나 삶의 의미를 상실해서 공허해하는, 성공한 젊은 층이 대상이었습니다. 현재 한국도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회의주의에 빠져있어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독자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고, 한때 믿었다가 지금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읽힐 수 있는 책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김: 저는 개인적으로 답이 되는 기독교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가 고전적인 변증의 주제들을 다루고,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답이 되는 기독교<답이 되는 기독교>는 가장 최근의 인식론과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켈러가 이 책에서 “의미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의미를 지어낸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후기구조주의나 사회구성이론이 현대인의 주요 가치관이 되었음을 말하거든요. 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으로 켈러는 은혜를 제안합니다. 즉, 인생의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발견할 때 진정한 의미와 만날 수 있습니다. 팀 켈러의 이러한 사상적 성실성과 순발력이 놀랍습니다. 신: 답이 되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말하다에 비해서 좀 더 적극적인 변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공격적인 변론을 한다는 점에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스타일입니다. 세속의 사상들이 왜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종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당신이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도 종교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칼뱅이 말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우상,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입니다. 그런 질문 끝에 기독교는 왜 답이 되는가를 제시합니다. 번역이 참 잘 된 책인 것 같습니다. 김: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다룰 때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정서주의’(emotivism)나 찰스 테일러의 세속시대(a secular age)와 같은 개념이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현대인의 신화에 대해서 켈러는 유한하고 제한된 조물 됨의 미덕을 해법으로 말하고, 자율적 자아와 자기용납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정체성주의에 대해서 십자가의 겸손과 진정한 자신감이라는 해법을 내놓습니다. 근거를 잃은 세속적 낙관주의에 대해서는 기독교 안에 더 깊은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 아까 말씀하신 사회구성주의, 즉 ‘진리는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사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리이고 선이고 아름다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에 이 사회는 난장판이 될 위험이 있고, 현실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객관적 질서가 없다면, 완전 무질서와 상대주의가 됩니다. 결국 회의주의가 팽배하고, 회의주의는 허무주의를 낳게 되지요. 그래서 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정서주의(emotivism)도 정서라기보다는 자기가 옳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게 살자는 것이지요.김: 예,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emotivism이 번역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 기분이나 마음에 좋은 대로 살면 된다는 풍조로 보입니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자기 진실성’(self-authenticity)도 그와 비슷한 말인 것 같습니다.신: 제가 이번 학기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의 학생들과 레슬리 뉴비긴의 The Other Side of 1984라는 책을 같이 읽었는데요. 뉴비긴이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영국 사회가 절망적이라는 것, 희망의 소멸이었습니다. 켈러가 사역하던 상황은 뉴비긴의 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목회자 입장에서 굉장히 안타깝게 설교하면서 답이 되는 기독교를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서구 기독교의 위기>를 목회자들께서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곧 성경의 메시지인 우리들의 소망은 현실을 보는 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역사에 닿아있는 시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서 소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김: 뉴비긴의 깊은 희망이라는 개념을 들으니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이사야가 앗수르의 위협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이방 종교 어디에 여호와 하나님처럼 역사를 주관하며 설명하는 신이 있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이는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사상이 이사야가 제시하는 강력한 희망의 증거였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책들 외에 기독교 변증에 도움이 되는 팀 켈러의 다른 책은 뭐가 있을까요?신: 그 외에도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도 역시 변증적 성격의 책입니다. 고통, 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철학과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무시하거나 내 삶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뉴욕의 세속적인 지성인들에게 팀 켈러의 이러한 책이나 중요한 현대 사상가들이 인용되는 그의 설교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정말 자기들의 인생에 답이 되는지를 궁금하게 하고 탐구하게 한 것입니다. 김: 지금까지 팀 켈러의 변증적 유산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눴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자들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실까요?신: 팀 켈러는 굉장히 학자적인 목회자였습니다. 대단히 광범위한 주제의 독서가 그의 설교와 변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정말로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과거처럼 적당히 목회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요즘 한국의 젊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처럼 깊고 넓은 독서를 기반으로 해서 설교를 준비하고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대충하면 이러한 경쟁자들, 아니 동역자들에게 분명히 밀릴 것 같습니다. 충실한 독서를 통해서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현장에서는 온유와 겸손으로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무례한 기독교나 소심한 기독교가 아닌 적절한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담대한 확신을 어떻게 적절하게 전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팀 켈러에게서 배울 점이기도 합니다.
김선일의 심플리 미셔널
by 김선일
2023-07-0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의 길에 들어선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1. 신에 관한 소문2.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3. 프란시스 쉐퍼와 합일적 복음제시4.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자신감 5. 팀 켈러의 깊고 단순한 복음전도Special 왜 이단에 끌리는가?: 일탈적 전도에 관하여6.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7. 자기 정체성의 시대와 ‘균열적’ 전도8. 소명을 깨우는 전도: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을 넘어서9. 우리의 전도가 너무 작다: 창조세계 돌봄으로서의 전도10. 다음세대 전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Special 팀 켈러의 질문에 답함 Special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성경적 창조의 관점‘들’ (2)
OPC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의 교훈
by 이윤석
2023-07-01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근래에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대체로 젊은지구론에 경도되어 있다. 물론 젊은지구론 자체도 주요한 관점이므로, 이 입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젊은지구론 역시 기원의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겸손한 자세가 요청된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유신진화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창조론을 공격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미국장로교회(PCA) 교단의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에 이어, 여러 기독교 교단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정통장로교회(OPC)의 관점을 알려주고 싶다. OPC 교단은 1936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이 주도하여 미국장로교(PCUSA) 교단에서 독립하여 나온 교단이다.OPC 교단은 2001년에 창조의 여러 관점을 연구하는 교단 차원의 특별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3년간 연구 활동을 수행하고 2004년 OPC 교단 총회에 ‘창조의 관점들 연구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Views of Creation)를 보고하였다.이 위원회가 창조에 대한 여러 관점을 고찰할 때 준거로 삼은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1.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이 영원 속에 홀로 계셨으며 그 옆에는 아무런 물질도 에너지도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2.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 작정에 따라서 무로부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보이든 안 보이든)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3. 우주의 어떤 부분도 또는 어떤 생물도 우연히 또는 주권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이 사람,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한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그의 몸이 그 주변 환경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다른 모든 지상의 생물들과는 다르다. 5.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이지, 이미 선재하는 어떤 생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긴 것이 아니다. 6. 전체 인류 가족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첫 번째 인간 부부로부터 내려왔으며, 이 계승은 일반적인 세대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7.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거룩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과 행위언약에 들어갔다. 언약에서 아담은 그의 후손들을 대표하며, 그가 그 요구사항을 어겼을 때 일반적 세대에 의해 계승되는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죄를 범하였고 그와 함께 죄의 상태로 떨어졌다. 8.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6일 동안에 하셨다. (우리는 ‘날’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인식하였으며, 한 해석이 여타 해석을 모두 배제하고 주장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위의 신학적 입장은 이 위원회가 건전한 신학적 기반에 서서 연구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위원회 위원들은 위 여덟 가지 확언에 모두 동의하였다. 다만 마지막 여덟 번째에 대해서는 창조의 일을 6일 동안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진술 자체에는 동의하나 ‘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해가 있었고 그런 서로 다른 이해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다. 필자가 다년간 팀 켈러의 저작들을 연구한 경험에 의하면 팀 켈러 역시 이 위원회 위원들이 동의한 위 신학적 진술들과 같은 신학적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의 관찰로는 팀 켈러는 특정한 창조의 관점을 선택하여 그것만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의견을 살짝 언급한 적은 있어도 어떤 특정한 관점의 지지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팀 켈러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격려하고 장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성과가 성경과 조화되도록 유연하게 접근한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주간의 ‘날’을 24시간 하루로 못 박고 이 해석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타협이론이라며 비성경적이라고 공격하는 그들은 건전한 기독교 교단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다. OPC 교단의 특별 연구위원회는 교단이 수용할 수 있는 창조에 대한 관점을 다섯 가지로 크게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위원회는 이 다섯 가지 관점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교리 체계의 정합성을 부정하는지 아닌지 잘 검토하였고, 주석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다섯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첫 번째 관점은 ‘일반적인 길이의 날 관점’(the days of ordinary length view)이다. 이 관점은 24시간 길이를 갖는 일반적인 날들에 걸쳐서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이해하며, 교회사에서 주된 입장을 차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 참석자들이 24시간 하루 관점을 특정하여 창조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며, OPC 교단 내에서도 이 관점만을 유일한 창조의 해석이라 하지는 않는다고 밝힌다.두 번째 관점은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 관점’(the days of unspecified length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 주간의 일곱 날이 인접해 있는 것은 맞지만 각 날의 길이는 특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린(W. H. Green), 바빙크(Herman Bavinck), 워필드(B. B. Warfield), 영(E. J. Young) 등이 이런 관점을 주장한다. 세 번째 관점은 ‘날-시대 관점’(the day-age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의 날들 하나하나가 긴 기간을 갖는 각 시대를 가리킨다는 입장이다. 핫지 부자(C. Hodge와 A. A. Hodge), 메이첸 등이 이런 관점을 주장한다. 네 번째 관점은 ‘틀 관점’(the framework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의 여섯 날을 일반적인 24시간 하루의 날로 생각하지만, 그 날들이 비유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 창조 주간의 전반부 3일과 후반부 3일을 대응시켜, 전반부 3일에는 각 공간을 만들고 후반부 3일에는 각 공간을 채울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클라인(Meredith G. Kline), 페스코(John V. Fesko), 아이언스(Lee Irons) 등이 주장하는 관점이다. 다섯 번째 관점은 ‘유비적 관점’(the analogical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 주간의 하루는 분명 역사적인 개념이지만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이루어진 기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콜린스(C. John Collins), 갓프리(W. Robert Godfrey) 등이 이 관점을 주장한다.이 다섯 가지 관점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교리 체계 정합성을 위배하지 않는다. OPC 교단은 이처럼 유신진화론은 배제하되 젊은지구론의 관점인 ‘일반적인 길이의 날 관점’ 외에도 네 가지 다른 관점들, 즉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 관점’, ‘날-시대 관점’, ‘틀 관점’, ‘유비적 관점’도 수용 가능한 창조에 대한 타당한 관점이라고 판단하였다.팀 켈러가 속한 PCA 교단뿐만 아니라 OPC 교단도 이처럼 다양한 관점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팀 켈러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지구론
유신진화론
조던 피터슨과 그의 실용적 하나님
by Dani Treweek
2023-06-30
최근에 나는 어쩌다가 조던 피터슨의 2022년 호주 투어 마지막 밤에 참석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그가 진행하는 좀 이상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한두 번 들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반영하는 기사도 몇 편 읽었다. 친척이 내게 투어 표가 한 장 남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피터슨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고, 따라서 별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피터슨의 폭넓은 사상에 대한 지식의 부족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게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물론, 그날 투어에서 나는 깨알같이 메모하며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강의 한 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내가 그의 사상에 정통하지 않다는 게 이 글을 쓰는 데에 매우 이상적인 위치를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알다시피 나는 피터슨의 열성 팬도 아니고 또 그의 ‘안티’도 아니다. 그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에 대해서 깊이 숙고한 한 여성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내 생각 중 일부를 공유하려고 한다. 먼저 피터슨의 놀라운 퍼포먼스에 그날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모 하나 없이 무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그는 달변을 쏟아냈고, 말 그대로 9천 명을 쥐락펴락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굴곡진 강의 속으로 그는 우리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이끌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해냈고, 그 현장에 참여한 것은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피터슨은 심각한 주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나는 그 점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개인에게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광범위하게 풀어냈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가진 중심 위치와 생명력을 강조했다.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그는 매료된 게 분명해 보였다. 피터슨 사상에 중심을 차지한 핵심은 인간의 열심(human endeavor)이다. 인간 이야기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보시다시피 피터슨에게 인간의 이야기는 실제로 인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는 게 분명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삶에서 각 개인이 만들어가는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근본적인 인간의 임무가 우리의 삶, 즉 우리 자신을 지속해서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라는 게 아니다. 자기 개선과 향상을 향해 올라가라는 것이다. 인생이란 오르막을 오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두 팔을 좌우 대각선으로 아래에서 위로 뻗기까지 했다. 우리 각자는 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책임져야 한다. 인간의 책임은 자신의 삶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세상은 얼마든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될 수 있다. 세상은 우리를 최적화에 전념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오히려 쇠퇴에 굴복하도록 유혹한다. 그래서 피터슨은 궁금했다.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다다른 도전의 시기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이야기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이야기에 다 있다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잡성과 고통 속에서 최적화를 촉진하게 하는 이야기(또는 패턴 내지 원형)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올바른 이야기 또는 최고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피터슨의 강의가 조만간 나올, 인류의 “영적 및 신학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그의 책 내용과 교차한다. 어떤 이야기가 가장 좋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항상 종교가 추구하는 탐구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최적화의 이면에 있는 패턴은 종교 산업의 근본적인 임무이다.” 자기 개선의 오르막 여정은 모든 종교, 모든 종교 경전, 모든 종교 선생,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종교 실천이 항상 몰두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목표는 인류에게 최적화의 패턴을 담은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 속에 담긴 잠재력을 잘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원까지 제공한다. 이런 주장은 피터슨으로 하여금 성경을 최적화된 이야기 전달을 위해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된 메타 스토리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그러나 피터슨이 제시하는 성경적 내러티브는 대체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달랐다. 그가 강의에서 소개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브라함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모험그리스도인에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이야기이다(창 12:1-3; 15:1-6). 아브라함의 후손을 큰 민족 곧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하여 온 땅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헌신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아브라함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과 목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시작하시기로 결심한 일에 관한 것이다(로마서 4장).그러나 피터슨에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험”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을 최적화하려는 한 사람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기존의 위치에 머무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터슨의 눈에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험을 통한 인간 최적화의 이야기이다. 지금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그곳을 당장 떠나서 모험하라고 당신에게 명령하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모험이라는 부름을 받는 데 꼭 필요했던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야기에 대한 피터슨의 언급이다(마 6:19-21). 그리스도인은 이 구절을 천국 시민으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수님의 긴 가르침인 산상 수훈의 맥락에서 읽는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권고로 그 구절을 이해한다. 우리의 보물과 마음은 지금도 천국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 속해 있다. 그러나 피터슨에게 예수님은 지금 단지 “생계에 대한 추상적 개념, … 인생의 고통과 불행이 닥칠 때 무엇 또는 누구와 함께하게 될까”에 관해서 고민하라는 권고일 뿐이다. 따라서 피터슨의 해석에 하나님 나라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것은 이생에서 최적화하는 삶을 사는 데에 꼭 필요한 일종의 “보물”에 투자하는 데 필요한 청사진에 불과하다. 피터슨에게 성경은 인간을 최적화하는 데 필요한 프레임워크이다. “인간에게 구현된 가장 초월적인 패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인간 최적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또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없이 우리는 자신을 성공적으로 최적화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피터슨에게 사랑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피터슨은 다른 사람의 최적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들의 최적화를 나의 최적화만큼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최적화에 투자하지 않으면 그들이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 그들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그건 궁극적으로 나의 최적화를 위협한다. 이처럼 피터슨에게 사랑은 이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에 대한 피터슨의 태도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다. 하나님이 주인공 같아도 실상은 인간 최적화라는 목표에 구조와 자극을 제공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거나 최적화에 가장 유익한 “보물”에 투자하도록 부름받을 때 꼭 필요한 매개체이다. 아담을 초조하게 만들어 인간의 조상이 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하와를 하나의 “유익한 적수”로서 창조했다고 이야기하는 데 꼭 필요한 구조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다. 인생 오르막 끝에 있는 목표를 은유하는 용어, ‘약속의 땅’을 살짝 엿보는 데 필요한 장치도 하나님이다. 피터슨의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고 의롭고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존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이야기의 근본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피터슨의 방대한 작업이 가지는 여러 측면을 중요하고 통찰력 있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게 꼭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거기에도 나름에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는 피터슨의 모든 작업을 다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지금 내가 평가하는 건 그날 밤 내 두 귀로 똑똑하게 들은 그의 강의 한 편이다. 그날 그가 가르친 내용은 내가 도무지 인식할 수 없는 성경 이야기였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서도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무엇보다 내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였다. 피터슨과 대조적으로, 성경 이야기는 철학적으로 추상화된 은유로 쓰인 것이 아니다. 실제 역사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기록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궁극적으로 성경은 창조된 인간의 지상적 “최적화”에 관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화로움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피터슨의 말은 옳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형성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원제: Jordan Peterson and His Useful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조던피터선
하나님의 본질에 충실한 제자훈련과 자연법
by 최창국
2023-06-29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관계적, 영적 상태가 달라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은 사랑이 더 많아지고, 독재자와 권위주의적인 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학대가 더 심해진다(티머시 제닝스, 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 164. 이하 제닝스의 같은 책에서 인용). 따라서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27-32, 5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권위주의적이거나 엄한 존재와 같은 신으로 믿고 예배하면 두려움의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런 신을 계속 믿고 예배하게 되면, 결국 만성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뇌와 몸이 손상된다. 수많은 뇌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달라진다. 권력으로 다스리는 신, 인간이 달래야만 용서를 베푸는 신을 믿게 되면 사랑이 파괴되고, 반항심이 싹트고, 개성이 말살된다. 전전두피질이 손상된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면 치유가 찾아온다.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전전두피질은 사랑과 공감과 이타심을 경험하는 뇌 부위다(제닝스, 99-100).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 3:5)이라고 한 대상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가 아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치고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율법적 신학, 종교 제도와 같은 실정법에 얽매인 채 쌓는 제자훈련이라면 오히려 삶을 파편화하거나 파괴하기 쉽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놓치고 권위주의적인 하나님 관을 견지하면 파멸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했다. 4개월 만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살상되었는데, 그 장소는 주로 교회였다. 당시 르완다는 인구의 56퍼센트가 천주교, 26퍼센트가 각종 개신교단으로 기독교 국가였다. 무려 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그 절망적인 시기에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들은 도피 중인 사람들을 교회 건물 안에 들인 뒤 민병대에 알렸고, 민병대가 교회에 들어와 숨어있는 사람들을 살육했다. 성직자가 자기 교인을 죽였고, 교인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 성직자를 죽였다. 대학살의 광란이 끝난 뒤 교회와 교단을 불문하고 많은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의 장로와 집사와 교인이 재판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제닝스, 111). 티머시 롱맨은 이 전쟁의 참상을 고증한 책에 이렇게 보고했다. “자기 행동이 소속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믿었기에 일부 종파의 암살단은 죽이러 나가기 전에 미사를 드렸다. … 사람들은 날마다 미사에 와서 기도한 뒤 출동해 살해했다. 민병대원이 광란의 살육을 잠시 멈추고 보란 듯이 재단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다”(Timothy Longman, Christianity and Genocide in Rwanda, 6-7). 연구진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살상에 가담했고,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교회에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했는지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요인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독재자나 권위주의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람들은 살상에 가담했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은 피난민을 보호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세례를 어떤 방법으로 베푸는지, 예배를 무슨 요일과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 죄를 사제에게 고해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직접 자백하는지, 성찬식을 어떻게 하는지, 기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였다. 기독교의 바른 교리와 바른 신념에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친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살상하는 데 가담했다(Longman, 같은 책, 7-8).넓은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영혼 돌봄과 치유와 관계된다. 물론 영적 성장과도 관계된다. 제자훈련이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보지 못하고 실정법인 교리와 율법적 신학의 지적 습득에만 몰두하게 될 때,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볼 때도 처벌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사람들에게 실정법 개념만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막힌다. 실정법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율법적 신학은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완고하게 만든다(제닝스, 114). 이러한 특성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실정법에만 치중한 공동체는 사람들을 더 이기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로 이끌 수 있다. 미국, 캐나다, 중국, 요르단, 남아공, 투르키예 등지의 어린이 1,17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더 나눠 가질 줄 모르며 남을 더 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연구의 저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연구를 보면 무신론과 무종교 가정의 아이일수록 오히려 더 너그러웠습니다. … 이런 결과를 종합해 보면 어느 나라든 다 비슷하게 종교는 아이의 이타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종교심이 친사회적 행동을 촉진한다는 견해에 반할 뿐 아니라 종교가 도덕적 발달에 꼭 필요한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도덕적 담론의 세속화가 인간의 친절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사실 그 반대입니다”(제닝스, 156-57).티머시 제닝스는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 즉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와 비밀을 무시하고, 교리와 같은 실정법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는데,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이 하나님의 법을 놓치고 율법적으로만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더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제자훈련은 조직의 교리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던 내용을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제자훈련이 인간이 만든 실정법 위에 서 있는 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연합할 수 없다. 실정법의 전염병은 항상 기독교에 비참한 분열을 초래했다. 성경의 교리나 해석이 어느 쪽에 옳으냐를 두고 경쟁하며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법이 실정법에 불과하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임에 따라 사람들은 그분의 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진다(제닝스, 182). 기독교가 수만 갈래의 분파로 갈라지고 분열한 현상과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더 이기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인간의 실정법으로 대체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이제라도 실정법에만 충실한 제자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에도 충실한 제자훈련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자연법은 하나님이 설계한 인간의 뇌, 마음, 몸, 자연 질서 등과 관계되고, 실정법은 인간이 만든 교리, 제도 등과 관계된다. 물론 교리와 같은 실정법과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인 마음과 몸 등과 같은 자연법은 나선형 관계 안에서 소통할 때 보다 더 효과적인 제자훈련을 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폴 트립의 말처럼, 교리는 삶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폴 트립, 교리와 삶은 하나입니다 참조).
제자훈련
자연법
실정법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6) : 우상숭배와 복음
by 고상섭
2023-06-28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정리하면서 ‘복음을 가장 먼저 거론했다.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복음 자체를 몰랐다기보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았기 때문이다. 팀 켈러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남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 이전에 나쁜 소식이어야 한다. 내가 죄인이며 나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나쁜 소식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 이전에 나쁜 소식으로 인도하는 팀 켈러의 복음 전달 방식은 우상숭배를 깨닫게 한다. 무엇이 우상인가?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을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뉴욕의 청중에게 기독교의 죄 개념을 가르친다는 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죄에 대한 문화적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팀 켈러는 시대에 맞는, 그러나 더 깊고 넓은 관점으로 죄를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개념으로 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죄의 설명은 인간의 행위적 죄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를 짓는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비록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아, 이들은 여러 우상을 마음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며,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게 하는 올가미를 자기들 앞에 둔 사람들인데, 내가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에스겔 14:3)대체로 사람들은 우상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린다. 유명 “아이돌” 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를 이야기한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에서 우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2]그럼 내 안에 우상이 존재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팀 켈러는 슬픔과 절망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 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3]이렇게 내 삶을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안의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 가장 의지했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자녀를 우상숭배의 위치에 올리게 된다. 자녀를 하나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부모를 실망시킬 때, 단순한 슬픔을 넘어 절망의 단계까지 나간다면 자녀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배신에 인생이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성경을 읽고 싶지도 교회 나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절망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삶의 결과이다. 거기에서 회복될 때는 “내가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더 사랑했습니다”라는 회개를 통해 회복된다.사랑의 순서결국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며, 이것은 사랑의 순서의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사랑이 대체된 것이 죄이며 곧 우상숭배이다.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삶의 순서가 세워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향유하는’ 사랑(Frui)과 ‘사용하는’ 사랑(Uti)로 설명했다. 어떤 대상을 향유 곧 즐기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말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을 사용한다는 말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하여 잠시 수단으로 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향유하는 사랑의 대상이시고, 나머지는 사용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4] 사용의 대상이 되는 사랑을 향유의 자리에 올릴 때, 우상숭배가 되고 우리는 가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죄는 순서가 바뀐 사랑이고, 죄에서의 회복은 사랑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숭배가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중요한 소재는 악의 군주 사우론이 소유한 ‘절대반지’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라도 이 반지를 끼려는 사람은 누구나 탐욕에 물들게 된다. 톨킨에 해박한 톰 피쉬 교수는 이 반지를 ‘심리적 증폭기’라고 불렀다. 마음의 가장 절실한 갈망을 우상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선한 의도를 가진 등장인물들도 반지를 끼고 나면 그 선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반지가 좋은 것을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도의나 가치관을 전복시킨다.[5]톨킨이 말하는 ‘절대반지’는 좋은 의도와 좋은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절대화될 때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우상은 대부분 좋고 선한 가치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다. 성공, 사랑, 가족, 재물 등 모든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코너스톤 교회를 개척했던 프랜시스 첸은 부부 제자도에서 “결혼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혼은 중요하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선한 결혼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가짜 하나님, 우상이 된다. 우상숭배의 위험성 우상숭배의 위험성은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숭배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속박된다. 사사기는 그 패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중 하나인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죄와 회개와 우상숭배를 반복한다.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님을 저버려, 더 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 (사사기 10:6)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신이었다. 아람과 시돈의 신들은 북쪽의 신, 암몬과 모압의 신들은 동쪽의 신, 블레셋은 남쪽의 신이다. 이스라엘이 섬겼던 신들은 모두 그들을 억압했던 민족들의 신들이었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이 아람에, 에훗이 모압과 암몬에, 삼갈이 블레셋에, 드보라가 가나안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구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의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그 나라가 결국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할 때 그 우상의 예속상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상숭배는 종살이로 이어지고, 그 종살이는 다시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이런 패턴은 사사기뿐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치와 목적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결혼 생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결혼 생활이 실패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히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 더 좋은 배우자가 필요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상을 충분히 숭배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6]또 팀 켈러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비전 또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꿈꾸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는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한 질책과 비난이 이어진다. “나는 잘 못해” “나는 개척이 맞지 않아” 같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런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이 문제야.” 또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외부 환경의 문제에 두려움을 느낀다. 교회 월세가 오르거나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문제들에 불안해진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꿈꾸고 날마다 기도하지만 목회자의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비난, 상대방을 향한 비판, 그리고 외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건강한 교회라는 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두면, 교회가 좀 건강해지지 않아도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알고, 또 교회가 건강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상숭배가 위험한 이유는 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죄가 아닌 선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돌아온 동생에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눅 15:29)라고 토로한다. ‘여러 해’는 많은 시간을 의미하고, 그는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선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도덕적 삶을 통해 아버지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게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7]이렇듯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은 가짜 신을 섬기지만, 입술의 고백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걱정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팀 켈러는 우리 안에서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8]근원적 우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늘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룰 위험이 있다. 팀 켈러는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근원적 우상의 위험성을 설명한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고 매번 여자를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나면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 옮겨진 게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참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9]문화 내러티브 속의 우상 팀 켈러는 우상이 단지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영향을 주는 문화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우상은 한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10]데이비드 폴리슨은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이라는 논문에서 우상숭배로 인간을 몰아가는 세 가지 대상이 있다고 말한다. 육신과 세상과 마귀이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죄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다. ‘허영의 시장’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것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의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온갖 욕망을 팔고 있었고, 진리를 찾다가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는 일을 겪게 된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팀 켈러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에서 기독교 상담이 가지는 약점 중 하나가 개인의 죄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 대한 폴리슨의 가르침 덕분에 문화에 내재하는 죄의 영향력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고,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11]팀 켈러가 설교와 변증에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상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다.[12]복음으로 우상을 깨뜨려라 팀 켈러는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문화 속에 있는 신념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시대 사람들의 생각 밑에 당연한 듯 깔려 있는 배후 가정도 많다. 문화가 기독교에 관해 우리에게 주입하는 이런 신념들 때문에 기독교는 점점 더 개연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런 신념은 보통 논증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연예와 소셜 미디어의 이야기와 주제 속에 녹아들어서는 우리 사상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어느새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작업은 상당히 끈질겨서, 많은 기독교 신자의 마음과 생각에서조차 신앙은 점점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다. 아마 처음에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13]결국 우리의 마음의 우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복음뿐이다. 그 예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그는 교인들이 재정 사용에 있어 서로 베푸는 관대한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억지로 후원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사도로서 명령하여 헌금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명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9)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관대한 은혜에 감동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리스도의 관대하심을 통해 어떻게 그들이 구원받았는지 생각하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 역시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교만과 염려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쓴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얻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교만이다. 또 다른 요인은 염려이다. 자기 재물을 타인을 위해서 사용하면 자기 스스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관대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문제, 즉 교만이나 염려와 같은 내면의 동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이런 내면의 정서에 반응하며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교만이 깨어지고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복음을 묵상하면 염려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의 가장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겠는가?[14]바울은 헌금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헌금을 했다면, 그것은 감정(emotion)의 변화에 불과하다.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이 크고, 자신이 힘들어지면 헌금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참된 변화인 정감(affection)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져야 한다. 그 물질주의라는 우상이 깨지고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질 때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쁘게 희생할 수 있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의지적으로 행동을 바꾸려고 하거나, 아니면 돈이라는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교만과 염려의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팀 켈러는 죄와 복음의 관계를 우상숭배를 통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 전에 나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나쁜 소식을 깨닫게 하는 좋은 방식이 바로 우상숭배의 관점으로 죄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보다 더 깊은 마음의 동기를 다루어주며, 또한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도덕의 탈을 벗게 해준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했다.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도 회개하는 사람들이다.주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22.3. 같은 책, 14.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유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사람도 향유와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향유한다고 할 때도 하나님보다 더 향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같은 책, 19. 6. 팀 켈러, 당신을 위한 사사기, 179-180.7. 팀 켈러, 탕부 하나님, 71.8. 팀 켈러, 같은 책, 116. 9. 같은 책, 175.10.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11. Tim Keller, “Tim Keller Reflects on David Powlison(1949-2019)”12. 같은 책, 15.13. 팀 켈러, 답이 되는 기독교, 16. 14. 스티브 엄 엮음,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38.
소셜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나쁜 친구가 되고 있다
by Joe Carter
2023-06-27
이야기: 미국 공중보건국장 비벡 머시는 어린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소셜 미디어의 잠재적 위험을 경고했다.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지금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다.배경: 부적절한 콘텐츠가 소셜 미디어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과 과도한 사용에 대한 조사가 증가함에 따라 보건당국의 경고가 나왔다. SNS가 젊은이에게 미치는 해로운 영향은 수면 방해에서 자살 충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머시는 정책 입안자, SNS 플랫폼, 부모에게 안전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13살이 안 된 어린이는 절대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부서 간 태스크포스팀 구성, 디지털 숙지 능력 및 습관 증진, 온라인 괴롭힘 및 아동 학대 방지 노력 등을 포함한 어린이 안전을 위한 온라인 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십대의 약 95퍼센트와 8-12세 어린이의 40퍼센트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들은 종종 극단적이고 해로운 콘텐츠에 노출된다. SNS 플랫폼에서 하루에 3시간 이상을 보내는 사람은 우울증과 불안을 경험할 가능성이 두 배 더 높다. 또한 11-15세 소녀의 1/3 이상이 특정 플랫폼에 “중독”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가정 연구원 제닛 에릭슨과 브래드포드 윌콕스의 지적이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가 바로 그 요인이다. 특히 일부 청소년과 청년은 TikTok이나 Instagram 같은 플랫폼의 영향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조사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1-13세 소녀들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지난해 내부고발자에 의해 유출된 페이스북 자체 연구에서는 십대 소녀들의 인스타그램 사용과 자살 충동 증가(13.5%), 섭식 장애(17%), 자기 신체 비화(32%)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의미: 인간의 발명품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일부이며 대부분이 우리의 번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가져다주는 잠재적 이점에만 초점을 맞출 때, 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명백한 피해와 고통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같은 통신 기술이 거기에 해당한다. 사실상 소셜 미디어의 위협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느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어린이와 십대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인간의 생각과 상호 작용에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20세기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해롤드 이니스는 미디어 기술이 인간에게 세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미디어 기술은 (1) 관심 구조, (2) 상징의 특성, 그리고 (3) 공동체의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모델을 소셜 미디어에 적용하면 중요한 관심 영역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관심 구조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가리킨다. 알고리즘 시대에 소셜 미디어는 어린이와 십대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양성애, 섭식 장애, 트랜스젠더리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십대의 수가 급증하는 현실은 이런 주제를 홍보하는 소셜 미디어가 넘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조금도 놀랍지 않다. 선한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십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길로 빠지는 건 어렵지 않다. 피트니스에 건전한 관심으로 가졌던 십대가 비현실적인 신체를 이상적이라고 홍보하는 게시물의 맹공격을 받아 신체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다음 단계는 어디일까?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거식증(“pro-ana”) 또는 폭식(probulimia) 사이트로, 그리고 나아가서는 극도로 마른 신체에 대한 열광(“thinspiration”)을 조장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상징의 특성, 즉 정보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방식도 소셜 미디어에 의해 혁신되었다. 간결함과 즉각적인 만족을 선호하는 플랫폼은 복잡한 아이디어를 이모지(emojis), 해시태그, [역주: 위험한 행동을 찍어서 온라인에 올리는] 바이럴 챌린지로 바꾼다. 이러한 변화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떨어뜨리고 성경 및 신앙과 같은 주제까지도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도록 만든다. 질문과 의심을 헤쳐 나가도록 돕는 부모와 목회자 또는 성숙한 어른 대신, 플랫폼은 십대로 하여금 점점 더 경솔하고 정보가 부족한 친구를 의지하도록 자극한다. 공동체의 본질까지도 소셜 미디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SNS 플랫폼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의미 있고 깊은 관계 대신에 얕고 덧없는 상호 작용을 촉진할 뿐이다. 따라서 SNS가 조장하는 공동체는 공감 및 갈등 해결과 같은 중요한 사회적 기술의 발달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십대는 소셜 미디어를 “실생활”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Instagram, Facebook, TikTok 같은 플랫폼에서 우리는 종종 이상적이고 종종 비현실적인 묘사로 넘치는 타인의 삶에 정기적으로 노출된다. “완벽한”(물론 포토샵으로 수정된) 몸매,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 흠잡을 데 없는 외모를 과시하는 친구와 유명인을 자신과 비교하며 왜곡된 자아상을 만들 수도 있다. 십대와 십대 초반의 아이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쉬운 나이이다. 결국에는 신체 불만족, 낮은 자존감 및 섭식 장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사이버 괴롭힘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이다. 인터넷 이전까지 괴롭힘은 대부분 학교 운동장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크린을 통해 가정에까지 침투했다. 온라인 플랫폼은 괴롭힘, 트롤링[역주: 상대를 주제에 벗어난 댓글 등으로 괴롭히는 행위] 및 학대의 온상이 되었으며, 익명성은 가해자를 더 대담하게 만든다(이 사실은 트위터를 사용해 본 모든 성인이 증명한다). 사이버 괴롭힘의 영향은 파괴적이며 불안, 우울증,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자살 충동까지 이어진다. 2022년, 퓨 리서치(Pew Research)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13-17세 미국 십대의 거의 절반(46%)이 여섯 가지 사이버 괴롭힘 행위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보고했다.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이 소셜 미디어에 대해 직접적으로 주는 말씀은 없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고려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 (잠언 13:20)아이들아, 악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 (잠언 1:10)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고린도전서 15:33)온라인에 노출되는 어린이와 십대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녀의 영혼을 돌보시며 그의 왕국으로 그들을 영접하시려는 분께 간절히 기도할 수는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 자녀의 마음과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해달라고, 그들의 발이 악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무엇보다 오로지 그분만을 기뻐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더 과감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마트폰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거나 아예 스마트폰을 없애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색스의 말이다.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나는 기본적인 사항에 주의를 기울인다.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 모든 부모가 인터넷 액세스가 가능한 모든 장치에 부모 모니터링 앱을 설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Common Sense Media는 Net Nanny와 Qustodio, Bark 또는 Circle 등의 부모 모니터링 앱을 권장한다. 자녀에게 스마트폰 사용은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설명하라. 부적절한 스마트폰 사용은 특권의 박탈로 이어진다고 말하라. 부적절한 사용은 어떤 것인가? 외설 사진을 다운로드하거나 공유하는 것이다. 사이버 괴롭힘이다. 불쾌한 댓글을 익명으로 게시하는 것이다. 부모 모니터링 앱은 이런 일의 발생 여부를 알려줄 것이다. 부모라면 자녀의 스마트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색스는 덧붙인다. “부모에게 드리는 조언: 국가가 법률로 조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건 언제가 되어야 가능할지 모른다. 부모라면 지금 바로 행동해야 한다.”원제: Social Media Is Causing Our Children to Suff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SNS
소셜미디어
중독
십대
청소년
벌레 함부로 부르지 마라.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by 필립 정
2023-06-26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은 대하기 어렵다. 마치 교회에 처음 간 사람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비난조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 변신(The Metamorphosis)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변한 자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출근을 미루다 어쩔 수 없는 책임감 (그는 생계 부양자이다)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선다. 그러나 자기의 외침은 제대로 들리지 않고 가족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를 죽이려 든다. 결국 아버지가 던진 사과의 한 조각이 몸에 꽂혀 벌레의 모습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이 이야기는 당연히 픽션이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후반 그는 어느 사회에도 소속감을 느끼기 힘든 유대인 태생으로 비교적 세속적으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성공을 강요받으며 불안한 소년기를 보낸다. 심약하고 예민한 한 소년이 그 밑에서 느꼈을 불안감, 소외감, 죄책감까지 그 글에 잘 녹아 있다. 그런데 그의 글 ‘변신’이 요즘 한국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자기들이 혐오하고 불쾌한 대상을 일컬어 각종 ‘충’이라 버젓이 부르고들 있다. 예전의 식충이, 좀 벌레, 돈벌레 따위보다 훨씬 모욕적인 표현이라 지면에 담기에도 불편한 정도다. 교회 안에서는 어떨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나도 엄격한 장로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결코 유쾌하지 못한 설교가 있다. 이 설교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을 인용하여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요지였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그리고 없어야 할 사람’이다. 난 이후에도 같은 설교를 브라질에서 선교사로 있는 분에게 들었고, 계속해서 몇몇 목회자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 얼마 전에도 잘 알려진 목회자 한 분이 설교 첫머리에 이 말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듣고 과연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분류해도 될까 싶었다. 이런 설교에 대해 오래 고민해 오다 이제 아니다 싶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이 설교를 듣는 심정으로 글로 반박하려 한다.우선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유, 세 부류의 사람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첫째, 없어야 할 사람은 “거미같이 줄만 쳐 놓고 덫을 놓아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은 “개미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쌓아 놓는 사람”이라고 했다. 셋째 꼭 있어야 할 사람은 “꿀벌같이 자기를 위해서도 일하지만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벌레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베이컨이 어떤 오류에 빠졌는지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태계 속에서 필요 없는 무익한 벌레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서도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거미는 덫을 쳐 인간에게 해로운 모기 파리 같은 온갖 벌레를 잡아먹고 자기도 참새의 먹이가 된다. 거미가 있어야 새가 살기 때문에 없어야 할 동물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한다. 개미는 생태계 최고의 공헌자다. 땅을 갈아 영양 성분을 증진하고 씨앗을 옮겨놓는 과정에서 식물 종자를 널리 퍼뜨린다. 그들이 일군 땅이 얼마나 미네랄이 풍부한 비옥한 땅인지 알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란 생각이 달라진다. 꿀벌도 겨우살이를 위해 꿀을 모으지만 곰과 사람이 와서 빼앗아 먹어 다른 동물을 이롭게 한다. 그런데 사람 눈에 당장은 꿀이 가장 큰 소득이라 꼭 있어야 할 동물이라고 정의해 버린다. 아무리 해석자가 인간이라고 해도 너무 찰나적이고 근시안적이지 않은가!베이컨은 자연의 개체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미치며 하나가 되어가는 하나님이 주신 생태계 전체의 큰 그림 안에서 한 벌레의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비유를 인용해 설교하면 꿀이 탐나는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설교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런 베이컨의 비유는 자승자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말한 ‘종족의 우상’(인간이라는 종족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음), 동굴의 우상(개인의 좁은 소견에 갇혀 비롯된 착각들) 에서 자신조차도 못 벗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비유를 인간 사회나 교회에 적용할 때 더 큰 피해가 그 공동체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기식(寄食)의 삶을 살아가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인간 공동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상호작용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 사회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안전한 망을 구축해 나간다. 이 기식의 삶이 프랜시스 베이컨 이후 삶과 문화를 얼마나 기름지고 풍성하게 했는가! 평생 그림 몇 장 못 팔며 동생의 생계비에 기대어 살던 광인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결혼해 가족 부양을 하지 못하고 근근이 살면서 작곡만 하다가 결국 아내와 딸을 잃고 비참하게 살다 죽은 스테판 포스터(Stephen C. Foster, 1826-1864), 그들 역시도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집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나라 잃고 방황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해 평생을 자기 시가 부끄럽다고 자기반성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윤동주(1917-1945), 19세기의 그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 소설가, 인상주의 화가들도 거의 당대에는 사회에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들은 주위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빚을 져가며 겨우 살아야 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철학자, 사상가, 목회자도 결코 있어야 할 사람의 범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현대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J. K. Rowling, 1965-)도 자신도 한때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최고의 실패자였다고 하버드 졸업생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물론 설교자들이 자본주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려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신앙적 관점에서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는 시도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설교가 결코 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문제가 발생한다.성경의 인간 분류를 보자. 의인과 악인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 분류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설교자의 현재 시점에서 용서받은 의인과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있다는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의인은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악인은 없어야 할 사람이라고 설교할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의 분류도 마찬가지다.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죄의 성향을 따르는 사람이다. 여기서도 현재 사람들의 영적 성향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를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으로 등치시켜버리는 잔인한 설교를 하고 싶은 목회자가 있을까 싶다.설교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이런 죄인이나 육에 속한 사람은 사실 없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으로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눅 15:1-17)에 나오는 그 양은 줄곧 목자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목자는 자기의 뜻을 잘 따르는 이미 구원받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제 갈 길로 간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찾은 후에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그 기쁨을 같이 나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죄인은 없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꼭 찾아야만 하는 있어야 할 양인 것이다. 이런 목자의 심정에서 설교가 출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에서 설교자의 말로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할 사람’이 선포되는 순간 엄청난 역효과를 불러온다.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 속에 있다. 교회도 그렇다. 형식은 비영리 단체지만 영리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헌금을 걷어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보조해야 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더 큰 교회로 이전을 하기 위해 헌금과 토지를 동산, 부동산 자본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남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게 못하면 어느 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런 사회와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라 세상에 속한 교인들도 설교를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해서 듣는다. 그래서 설교자들의 언어는 쉽게 오해된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언어들은 교회라는 조직에 필요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으로 들려 버린다. 그 설교를 하는 순간 소통의 불능 상태가 와 버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시장의 우상(단어의 정의와 대상의 불일치의 오류)을 교인들은 경험하고 만다. “여기 누군가 교회 필요 없는 사람이네. 성경에 그런 얘기 없는데….” 당연히 설교자와 듣는 자의 관계가 깨져 버리고 반박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떤 흉악한 죄인을 향해서도 “참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입니다. 주의 은혜의 손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라는 설교가 아니면 끊어진 인간의 소통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and To Be),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은 내 젊은 시절의 베스트셀러였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의 생존 양식에 있어서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이 있다고 하였다. 사랑은 그 인격과 삶, 존재에 대한 사랑이지 소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흔한 말로 “난 네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필요가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란 뜻이다. 반대급부가 없는 무조건의 사랑이 교회가 들려줘야 할 메시지다. 조건을 붙이면 반대급부가 없을 때 사람을 벌레라 부르게 되어 있다. 벌레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르고 혐오의 표현으로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벌레라 부르는 열등감의 군상들…. 혹시 설교자들도 그런 자괴감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벌레의 비유를 가져다 쓰지 않았으면 한다. 벌레!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이야 오죽하랴.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그런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람을 함부로 벌레라고 부르지 말자.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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