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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는 환자를 가두지만, 그리스도는 그 문을 여신다
by Louis Markos
2018-12-12
2010년 9월 15일, 나의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로 10여 년간의 긴 투병 끝에 병원에서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그날은 할머니의 95세 생일을 한 주 앞둔 때였다. 슬픈 소식을 접하고 난 다음날, 나는 매주 그랬듯이 대학부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그 학기에는 C. S. 루이스의 저서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를 다루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루이스가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해 묵상한 내용을 나누었다.그때 성령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타락한 인간의 독특한 상태에 관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자 했다. 그래서 루이스의 묵상과 할머니의 죽음 사이에 공통적으로 자리한 한 가지 교훈을 깨닫게 하셨다. 그 교훈은 우리의 정신이 혹 흐려지더라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겉모습은 그대로 지속된다는 것이었다.이 교훈은 서서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독한 병인 알츠하이머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알츠하이머의 제한된 도적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알츠하이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무서운 질병이 우리의 영혼을 훔쳐갈 수 있으며 더불어 인격을 말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괴로운 잠에서 깨어나도록 다시 부르실 때까지, 알츠하이머는 우리를 한동안 가두어 둘 능력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의 정신은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좀 먹거나 녹슬지 않는 심층으로 내려가 있을 뿐이다. 거기는 도적이 침입하여 내 영혼을 도둑질할 수 없는 곳이다.차 사고로 인해 몸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마라톤 선수를 생각해 보라. 그의 상한 몸은 이전에 달리기를 하면서 누리던 기쁨을 표현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을 말살시킬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다리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마라톤 선수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혹은 다운증후군이나 심한 자폐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생각해 보라. 혹 세상은 그러한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교사들은 인내와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을 다르게 보는 안목을 갖고 있다. 이 아이들은 우리와 동등하게 온전한 인격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고유한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나타나기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만 겨우 보인다.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바로 전 주에 말도 거의 하실 수 없고, 음식도 먹여 드려야 하는 상태였지만, 그 인성의 흔적은 여전히 드러났다. 간호사들이 할머니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길 때마다, 그녀는 아주 작게 목소리로 따뜻한 말을 건네곤 했다. 할머니는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으셨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나를 포함한 많은 크리스천들은 알츠하이머 뿐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훔치고 인격을 변화시키는 정신 질환을 두려워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때, 그 영접하는 활동은 정신이 담당하겠지. 그렇다면 혹시 질병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기억을 상실하게 되면, 나의 구원도 취소되는 게 아닐까? 그때 과연 나는 안전할까?’이러한 추론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두 가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다. 우선, 우리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업적)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혜)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수용해야 하지만, 구원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방적인 은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동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영접은 어떤 은혜의 교리에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주인 되심에 마음을 열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마치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마음을 열듯 하나님께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 깊은 마음은 조현병이나 간질 또는 알츠하이머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보다 더 깊은 데에 자리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위협하는 알츠하이머에 대해 분노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 그 질병이 할머니의 기억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도 슬프고 두려운 일인 동시에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하더라도, 절망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미 할머니에게는 그때가 왔지만) 몸과 마음의 모든 흠과 상함이 사라지는 때가 되면, 주님의 백성들은 온전한 사람이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질병으로 쇠약해진 자녀의 인생을 영원한 그분의 나라에서 다시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lzheimer’s Locks Up Its Victims, but Christ Holds the Key번역: 정은심
생활
건강
루이스
질병
그리스도
영접
긍휼
두려움
성경은 관용을 권장하는가, 불관용을 권장하는가?
by Josh Moody
2018-12-12
성경은 관용을 권하는가? 아니면, 금하는가?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사랑과 자비와 친절을 권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눅 10:25-37). 또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마 5:39). 그리고 “비판하지 말라”는 유명한 구절도 떠올린다(마 7:1). 이처럼 사랑, 친절, 하나님과 이웃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을 고려할 때, 과연 어떻게 성경이 관용적인 사회를 억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성경 구절들은 우리에게 단순히 관용 베푸는 수준보다 더 나아간 삶, 즉 적극적인 봉사와 사랑 및 긍휼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 확실하다.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이 관용과는 너무 거리가 먼 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엘리야가 직접 자기 손으로 바알의 선지자를 죽이는 역사도 보여 준다(왕상 18:40). 또한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지옥에 관해 자주 말씀하신다. 이런 성경 말씀들은 관용과는 거리가 멀다.그렇다면, 성경이 권하는 것은 관용(tolerance)인가? 아니면, 불관용(intolerance)인가?1. 성경은 관용과 불관용 모두를 강조한다우리는 성경을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이상적인 관용의 본보기들을 보여 주는 책으로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편향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규정하면, 해석상 중대한 실수들을 많이 범하게 된다. 성경의 균형적 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다음처럼 소리를 높일 것이다. “잠깐만 멈춰 봐요. 당신은 지금 해석을 문제 삼는데, 누가 당신처럼 해석하는 것을 옳다고 할까요?” 나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만약 우리의 모든 대화를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만 해석하는 세상 속에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또 만일 우리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영원한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단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니면, 현대인들을 위한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만을 지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혹은 공항의 체크인 설명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또 어떠할까? 분명히 심각한 혼란과 혼동이 우리 삶에 찾아올 것이다.성경의 각 권이 ‘참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각 권이 모두 다 ‘똑같은’ 말씀은 아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지만, 각 권 안에 제시된 본보기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피해야 할 본보기이고, 다른 것들은 닮아가야 할 본보기이다. 2.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용하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님이 강간, 근친상간, 살인, 혹은 학살을 너그럽게 관용하시기를 원하는가?성경은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날이 있음을 가르친다(롬 14:10; 고후 5:10).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삼상 2:2; 사 6:3),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신 6:24; 시 31:19). 또 성경은 심판하시는 권세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심판할 권한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다(마 25:46; 막 9:43). 하나님의 영원한 지옥 심판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구약성경에 나오는 정복 전쟁과 살상에 대한 기록을 마주할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인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주변 나라들의 침략, 그를 통한 고난, 그리고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야 했던 슬픔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신명기 28장은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애굽이나 이스라엘이 정복한 나라들에게 내리신 형벌과 같은 심판을 말한다. 이러한 신명기의 저주 예언은, 의로운 왕들과 선지자들이 예견했던 것처럼(왕하 22:13; 렘 25장),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로 성취되었다.3. 관용(tolerance)과 상대주의(relativism)의 차이를 기억하라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 시대에는 상대주의가 넘쳐난다. 진리는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교육 배경 그리고 성격에 의하여 다르게 정의된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주의가 사람들이 서로를 판단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편협함을 방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이 시대의 사고관이 과연 관용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관용은 상호 간의 차이를 전제한다. 예를 들면, 관용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가졌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내가 이미 동의하는 것처럼, 당신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단지 상대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이처럼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용의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4. 관용이 어디서 오는지를 기억해야 한다로마 제국이 가진 상대적인 관용의 사례가 있었다. 거기서는 황제와 그가 섬기는 신을 따르는 종교들만 선택적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주님입니다”(Caesar is Lord)라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및 백성들은 고문과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로마 제국의 상대적인 관용은 왕과 그들이 정한 우상 이외의 다른 대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관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세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 그 제국이 가진 상대적인 관용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들만의 관용 교리를 만드는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중세교회는 자신들의 교회와 문명을 보호하려고 다양한 군사력과 지도자들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이런 군사적인 개입에 크게 의존했던 중세교회의 행보는 교회의 참 모습을 훼손시키고 말았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 역시 왕들과 군주들을 의존했다. 왕들과 군주들의 도움을 얻어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존 로크(John Locke)와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현대적 관용은 그와 같은 부정적 교회 역사에 대한 개신교의 반성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관용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의 출현에 기대를 갖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종교적 관용이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을 포함한 다른 소수 종교의 성도들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런던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 갔다. 관용은 확실히 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관용의 근거는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관용은 종교적인 신념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삶을 막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의 윤리를 옹호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는다.물론 성경은 우리가 이웃에게 단순히 관용을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는 관용을 넘어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관용이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기독교 사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the Bible Promote Tolerance or Intolerance?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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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
성경
지역 교회란 무엇인가?
by Jonathan Leeman
2018-12-12
지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복음 설교와 복음 성례를 통해 서로의 공동체성을 공적으로 확증하거나, 감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기적 모임을 갖는 크리스천들의 무리이다. 다소 간단하기는 하지만, 이 정의 속에 담긴 다섯 가지 요소들에 주목해 보라.첫째, 크리스천들의 모임. 둘째, 정기적인 모임. 셋째, 확증과 감독이 회중에 의해 공적으로 행사됨. 넷째,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역할을 대변하려는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임. 다섯째, 이 목적을 위해 설교와 성례를 행함.주례 목사의 선언은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부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요소들은 단순한 크리스천들의 모임에 지역 교회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모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중요하다. 우선,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자리가 모임이기 때문이다. 모임은 우리 앞에 도래할 장래의 나라를 공표하는 전진기지 혹은 대사관과 같다. 또 모임은 우리의 왕 앞에 절하며 예배하는 곳이다. 세상의 대적들이 우리를 방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백성을 만민으로부터 이끌어 내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의 강력한 회중을 형성하신다.더 나아가, 모임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설교와 성례와 권징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행사하시는 곳이다. 복음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설명한다. 또한 우리 왕의 이름을 선언하고 그분이 왕으로서 당하신 희생에 관해 가르친다. 그 설교는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우리의 불순종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세례와 성찬을 통해, 이제 모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즉 성례는 우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세례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연합되었음을 선언한다(마 28:19; 롬 6:3-5).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리고 그의 몸인 우리의 공동체성을 선언하는 것이다(마 26:26-29; 고전 11:26-29). 이처럼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 자신의 백성이 알려지며 구별되고, 교회와 세상 간에 선이 그어지길 원하신다.결국, 지역 교회란 무엇인가? 바로 천국 복음을 선언하고, 복음 고백자들을 확증하며, 그들의 제자도를 감독할 뿐 아니라, 거짓 고백자들을 노출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만드시고 권위를 부여하신 제도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동아리에 가입하듯 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오히려 교회가 우리의 공동체성을 결정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at Is a Local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교회
교회사역
지역교회
예수그리스도
하나님나라
복음
설교
성례
크리스천
성찬
조직신학이 없으면 성취할 수 없는 네 가지
by Stephen Wellum
2018-12-11
조직신학이 필수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조직신학의 정의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조직신학에 관한 일치된 하나의 정의는 없지만, 그 핵심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조직신학은 성경을 토대로 형성된, 신학의 구조를 세우는 중요한 학문 중 하나다. 또한 조직신학은 성경에서 취합된 진리들을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을 통해 우리는 마땅히 믿어야 할 대상과 지켜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해 교리적인 구체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구체화는 성경에 의해 보증되고 역사 신학의 관점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신학은 교회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다. 또한 성경의 진리로 세속적인 가치관과 싸우도록 깊이 있는 세계관을 구성한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우리의 선, 교회의 삶과 건강, 크리스천의 핵심 가치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고후 10:1-5) 하는 것이다.조직신학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의 중요한 성취들을 이룰 수 없다.1. 하나님을 아는 것조직신학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의 신, 창조자, 언약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이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창조물들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시 19:1-6; 롬 1:18-32).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창조 세계를 연구하는 것만으로 그분을 알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그분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 또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으로(요 1:1-18; 딤후 3:16-17; 히 1:1-2; 벧후 1:20-21) 우리에게 다가오신다.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참되게 알려면 성경 전체만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바를 (신학적인 구체화를 통해) ‘결합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예를 들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삼위일체는 성경의 특정한 한 구절이나 한 장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조직신학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혹은,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관계를 떠올려 보라.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관계에 대해 제대로 된 통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따라서 조직신학이 아니라면, 이 타락한 세계에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그분에 대한 신뢰는 마땅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2. 우리 자신을 아는 것조직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자신을 알고, 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조직신학은 성경이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죄로 인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과 그분의 궁극적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성취하셨는지 반드시 물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또한 조직신학은 하나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성경을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이해 안에서 해석하지 않은 채, 성경의 부분들을 우리의 삶에 임의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에 적용되는 것과 적용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는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분의 계획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부분들이 어떻게 전체를 이루어 가는지 먼저 파악하고, 조직신학을 통해 다시 그 전체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이처럼 조직신학은 성경을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잘 정립된 신학이 없다면, 우리는 많은 실책들을 범하게 될 것이다(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않음으로 모순에 빠진 것을 기억하라).종합하자면,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우리의 삶에 성경을 올바르게 적용하도록 도움으로써, 비로소 나 자신과 삶의 방향을 알게 한다.3. 교회로서의 부르심에 부응하는 것조직신학은 우리를 교회로서 부르시는 것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그분을 올바르게 알고 구속된 형상답게 살아가는 것, 즉 성경을 가까이 하는 일에 굳게 붙들리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복음을 열방에 선포하는 것 또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마 28:18-20). 그렇다면, 이 선포의 내용은 무엇인가?첫째, 그 선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이때 그분에 대해 정의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분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이면서 완전히 인간이신 영원한 성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조직신학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하므로 참된 유일신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또 선포하도록 이끈다.둘째, 그 선포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알리는 것이다. 십자가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우리 죄를 위하여”(고전 15:1-3)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사를 보면,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이 항상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신학은 그리스도를 열방에 올바르게 선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더 많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로서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일에는 조직신학이 필요하다. 4. 믿음을 변호하는 것마지막으로, 조직신학은 성도에게 주신 믿음을 변호하는 데 필수적이다(유 3절).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조직신학적인 해석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믿음을 변호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부정과 맞설 진리의 세계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의 변호,’ 즉 변증학 역시 조직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변증학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복음의 은혜를 사수하라는 그 부르심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딛 1:9; 벧전 3:15-16).조직신학은 크리스천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조직신학적 사고관이 이미 있다. 이는 좋든 나쁘든 그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따라서 문제는 조직신학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조직신학적 사고가 성경의 진리에 매일 더 가까워짐으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고 또 복음의 진리를 세상 앞에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Things You Can’t Do without Systematic Theology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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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고통이 알려 주는 최고의 가치
by Ray Ortlund
2018-12-11
오늘날 젊은 목회자들 중에는 멋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대중적 인기가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지난 수 세기 동안 영원한 삶을 위해 애써 온 앞선 목회자들의 사역은,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깊이가 있고, 웅장했으며, 그 생명력이 뛰어났다고 말하고 싶다. 그 예로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골1:24)라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목회 사역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거룩한 힘인 ‘고통’과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겪는 고통은 아마 바울의 고난만큼 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보면서 자기 연민, 분노, 불평 없이 고난을 통과해야 함을 배워야 한다. 더불어 바울을 통해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고통(혹은 고난)에 반응하는 자세가 어떠한지에 따라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는 단계로 뛰어오르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힘은 바로 우리가 성취하게 될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참으신 그리스도(히12:2)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는 젊은 목사로서 고통이 아닌 기쁨을 꿈꾸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혼동들과 서러움이 찾아왔을 때, 특히 거부당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이 사역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아마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낙심이 비록 타당할지라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면 할수록,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아래의 구절이 나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주님이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실 때 결코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의 고난은 은혜이고, 특권이며, 곧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명류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값비싼 피로 물든 고난의 길을 걸으며 그분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또 다른 진리를 알게 될 준비가 된 것이다. 그 진리란 내가 이 고난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진실이며, 우리를 고난 중에도 기쁨으로 이끄는 힘이다. 목회 사역의 특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즉,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존재하며, 그분을 대리하고, 그분을 위하여 나의 삶을 내려놓는 모든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특권이다. 내가 본 최고의 목사인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날 이렇게 당부하셨다. “목회가 전부가 아니란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임을 기억하거라.” '열두 명의 신실한 제자들: 용기와 인내의 목회 사역'(In 12 Faithful Men: Portraits of Courageous Endurance in Pastoral Ministry)이라는 책에서, 콜린 한센(Collin Hansen)과 제프 로빈슨(Jeff Robinson)은 목양의 고통과 열매가 주는 영원한 기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불평하지 말자.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목회자들은 지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이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붙드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기쁨으로 충만케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 Wasn’t Ready for in Pastoral Ministry번역: 고갑균
목회
리더십
고난
은혜
특권
영광의면류관
가치
콜린한센
제프로빈슨
그리스도
가상의 우정
by John Muether
2018-12-11
여러분은 아마 이 글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글이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어떤 독자에게는 지루함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예견은 사람의 집중 시간이 얼마나 짧은 가에 대한 믿을 만한 통계에 근거한다.구글이 미국인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애틀랜틱 먼슬리'(The Atlantic Monthly)의 도발적 주장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대 검색 엔진인 구글 및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분명 우리의 심리를 더 불안하고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 안에서 이전만큼 집중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멀티태스킹 작업은 우리의 사고를 단편화하고, 문자 메시지의 끊임없는 도착은 조용히 반성할 시간을 방해한다. 불과 글 몇 문단을 읽기도 전에 집중력은 금새 사라지고 만다. 오늘날의 우리는 심오하고 사려 깊은 독서 습관을 잃어버렸다.핸드폰,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더 새로운 것까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전자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들이 삶을 장악하도록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독서 습관을 빼앗긴 것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를 더 잃었다. 첫째는 우정 관념이 하찮은 것으로 변했고, 둘째는 공동체 의식이 감소했다.1,035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친구를 가진 동료가 있다. 페이스북 기준에 따르면, 그 정도 수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일부는 거짓 관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페이스북의 목적은 넘쳐나는 나의 일상적 정보를 과시하는 정도다. 예를 들면, 오늘 당신이 받은 내시경 검사 결과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어김없이 페이스북 게시를 통해 내게 알려진다. 반면, 여러분과 진짜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당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왜 트위터를 통해 알아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아무리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페이스북 친구들을 모았는데, 약 4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그 중의 4분의 1은 만나 본 적도 없는 관계들이다(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나누었던 적도 두 번 정도 된다). 이러한 교제는 사실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나는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 “곧 만나기를 바란다”라는 문구로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온라인 친구들에게 이 말은 결국 상투적인 문구가 되고 말았고, 더이상 그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 경험은 진짜 우정이란 실제 만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전자 문화는 정신을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인간관계를 멀리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설은, 전자 문화는 우리를 가까운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한편, 먼 사람들과는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거리를 극복하고 “다시 연결되었다”라고 헛된 자랑을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이런 과학 기술의 피상성은 전자-갈등(e-conflict)의 확산으로도 증명된다. SNS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의 상당수는, 심지어는 오랜 친구와도 심각한 불통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소소한 온라인 유머라고 생각한 컨텐츠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장난이 심하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내가 보낸 유머에는 단지 컨텐츠만 있을 뿐 그것을 전달하는 나의 표정이나 태도, 언어, 혹은 억양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대면해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또한 소셜 네트워크는 우정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보이기 위한 욕망으로 친구들을 모집한다. 또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주목을 끌게 될 때, 독자적인 온라인 인격이 조심스럽게 형성된다(심지어는 다중 정체성과 젠더 벤딩[성 역할 파괴]까지 생긴다). 크리스틴 로젠(Christine Rosen)은 “네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네 자신을 나타내라”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문화 속에서 수치심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에 거침이 없는 이유는 새롭게 공유되는 엄청난 양의 무의미한 글들 속으로 나의 어제는 곧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로젠은 페이스북을 “단조로운 독특성, 판에 박힌 개인성, 특이한 동일성을 가진 매우 둔한 곳”으로 묘사한다.우리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된 친구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깊게 교제할 시간을 빼앗아 간다. 클릭 한번으로 수십 명의 친구들을 ‘참견할’ 수 있는데, 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전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겠는가? 게다가 꽃이나 선물을 보내려 해도 사이버 꽃은 실물보다 훨씬 싸거나 값이 아예 없다. 이 모든 특성이 결국 우정을 경쟁으로 둔갑시킨다. 나는 언제 내 친구의 계정에서 ‘좋아하는 소수 그룹’ 안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이상의 모든 사례에서 보듯 우정은 실리적인 목적으로 변할 때 값어치를 잃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참된 우정을 성취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가족, 또는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도록 명령받은 이웃과 달리, 우정은 독특한 근거에 따라 전개된다. 우정은 선택을 필요로 하고(가족은 선택하지 않는다), 또 높은 수준의 신뢰, 존중, 그리고 일정 부분 사생활의 공유까지 요구한다. 요약하면,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지난주에 일 때문에 한 젊은 여성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녀가 옛 친구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연락한 것을 삼촌에게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우리가 한 것이 연락인가? ‘연락하다’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우리가 지금 친구인가? 여기서 잠시 페이스북으로 돌아가자면,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얄팍한 친근함을 기초로 친구와 친구(또는 친구의 친구)를 서로 맺어 준다. 그것은 관계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흐르는 물과 같다. 다시 돌아와, 어쨌든 그 친구가 20년 넘게 당신과 연락이 끊겼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각자가 서로에게 우선적으로 연락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소셜 네트워크의 몇몇 긍정적 측면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내게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테이블톡'(Tabletalk)의 편집자이자 나를 오래 참아 준 크리스 도네이토(Chris Donato)가 건강한 둘째의 아빠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흠, 아마 그것 때문에 그는 내가 기고문의 기한을 넘긴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이미 확립된 관계를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온라인으로 맺은 친구 관계는 과연 어느 만큼의 지속성을 갖게 될 것인가? 여기서 두 가지 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페이스북을 통한 연락이 진정 필수적이고, 더 중요하게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오프라인에서 교제하는 친구들과 견줄만한가?소셜 네트워크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 매체들이 거듭 강조하는 약속을 굳게 믿는다. 그 약속이란 SNS가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게 해 주고,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생긴 관계적 균열들을 매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을 확고하게 지키는 곳은 교회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교회가 교인들을 향해 갖고 있는 열망은 개인이 진정한 친구들에 대하여 품는 열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교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지 알게 되면 실로 놀랄 것이다.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목사들’은 종종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데 열심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건강한 교회들은 성도 간의 직접 교제를 온라인 모임으로 대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정확히 교회가 할 일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터넷을 통한 관계의 활성은 현실 세계의 관계를 희생시켜야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셰인 힙스(Shane Hipps)는 ‘깜박이는 픽셀’(Flickering Pixels)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 소셜 네트워크—교회나 어떤 가정에서의 식사 혹은 친구들과의 점심 같은 모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잠재우는 알약과도 같다. 당신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로그인을 할 때, 종종 진정한 소통에 대한 혼란이나 욕구가 찾아오지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잠잠해지고, 결국 공동체가 아닌 혼자만의 교회에 남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이라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사이버 교회를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 가운데 하나다. 온라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정말로 다양하다. 하지만 가상 공간에서의 동질성은 사실상 사이버 문화 특유의 격리성이 단지 공동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퍼트남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사회 자본인 공동체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을 (인터넷으로는) 절대 되돌려 놓을” 수 없다.실제의 공동체가 불편함이나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가상의 공동체는 참여만큼이나 탈퇴도 무척 쉬운 이점을 갖고 있다. 마치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는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온라인 공간에서 사라질 수 있다. 또 조금이라도 불편한 온라인 친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친구 목록’에서 삭제시킬 수도 있다. 이런 퇴출 전략을 가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생활 방식 집단(life-style enclave, 역주—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처음 사용한 말로 일부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외모, 소비, 레저와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 자기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집단을 가리킨다)보다 공동체적 연대감이 훨씬 약하다. 한 사회학자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로 매우 적절하게 묘사했다. 물론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는 인터넷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극대화시키고, 이 사상들의 부정적 단면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장악하도록 만든다.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멀티태스킹, 분할 화면, 신호음 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문화에 강력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대학의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ze)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장단점"을 잘 구분하라고 권면한다. 당신을 실제로부터 격리시키는 과학의 진보를 경계하라. 이것이 당신의 영혼, 지성, 그리고 교회에 유익하다. 우리는 관심 분야를 확대시키고 친구들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기 위해 지금의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여러분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작은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럼 이제 다른 글들도 여유를 가지고 한 번 읽어 보라. 그리고 연필을 들어 친구에게 편지도 써 보라. 문자 메시지나 블로그에 쓰는 것은 반칙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Virtual Friendship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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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복음을 어떻게 설교했을까?
by Tim Keller
2018-12-10
구약성경에는 의도적으로 해결시키지 않은 ‘이야기적 긴장’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긴장으로부터 복음의 토대가 마련된다. 이야기적 긴장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고, 줄거리의 흐름과는 상반되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해 본다면,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할머니의 간식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단지 기록일 뿐이다.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할머니의 간식을 가져가는데, 나쁜 늑대가 그녀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긴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신명기 전체를 끌고 가는 이야기적 긴장은 성경 전체가 십자가로 나아가며 드러내는 기승전결의 이야기적 긴장과 동일하다.‘내가 보기에 신명기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성경이 아름다운 까닭은 성경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놀라운 전조들 때문이다. 신명기 30장에는 바로 그 전조가 나타난다.신명기 30장은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는데, 심지어 모세가 현재에 대해 말하는 듯한 내용조차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모세가 궁극적으로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신명기 30장에서 모세는 미래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1. 너희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모세가 첫째로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명기 30장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만일 이를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을 잘못 해석하게 될 것이다. 1절을 보라.“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모세는 이스라엘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유배와 흩어짐은 가장 큰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절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실패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예언한 모든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언약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끔찍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신명기를 읽는 현대인들은 오늘날의 문화가 동기부여에 능한 강연자를 얼마나 선호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명기 전체는 그러한 인물의 강연과 같다. 또 다른 표현으로 신명기는 놀라운 윤리 서적이다. 신명기는 온전함, 정의, 그리고 고결한 삶을 향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신명기를 묘사한 바에 따르면, 모세는 역사상 첫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자기계발 강사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반면, 모세의 이 연설은 어떻게 끝을 맺는가? 모세는 1장부터 29장까지 이스라엘인들이 따라야 할 윤리적 기준들을 이야기한 후,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껏 말한 것들을 단 한가지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참한 실패를 맛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만 놓고 보자면, 내가 지금껏 쓸모 없는 말을 한 것과 같습니다!”아마도 이런 강연은 자기계발용으로는 썩 좋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는 매우 훌륭한 복음 설교이다.모세는 처음부터 “너희는 실패할 것이다”라고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복음 설교자들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 줘야 한다. “여러분은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것을 행하며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2. 하나님이 너희의 마음을 고치실 수 있다또한 신명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셔서 온전케 하려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신명기 30장 2-5절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6절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모세는 지금 성경의 이후 부분에서 나올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9절에서 우리의 마음이 할례를 받았다는 표현을, 또 빌립보서 3장 3절에서는 참된 할례라는 표현을 쓴다. 마음의 할례는 곧 복음을 의미하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메시지이다.'할례 받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소 끔찍한 상상 아닌가? 피터 크레이기(Peter Craigie)에 의하면, 신명기가 말하는 우리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우리 마음을 수술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다. 할례가 외적인 순종과 언약 공동체로의 진입 및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을 보여주는 표시라면, 마음의 할례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출발점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결혼을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결혼도 많다. 그런데 나는 내 아내 캐시(Kathy)와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내가 바뀌기를 바랐는데, 그런 캐시의 바람은 내게 곧 명령과 같았다.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캐시의 말에 따르는 것이 그녀의 의지에 대한 복종이라거나 굴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사랑으로 인해 나는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즉,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동일해진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의무가 동일한 것, 그것이 바로 할례 받은 마음이다.골로새서 2장 11절은 다소 이상하지만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크리스천]는 그리스도의 할례로 인하여 할례를 받았다.” 바울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거듭날 때, 단순히 새로운 마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가 선행되었기에 그분께서 주시는 할례 받은 마음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언약의 저주, 즉 내쳐짐을 겪으셨다. 누군가가 거짓을 말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에 회중으로부터 내쳐지는 일은 신명기가 끊임없이 제시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형벌은 ‘그분으로부터’ 내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내쳐지는 것은 곧 생명, 빛, 모든 선한 것들로부터 내쳐지는 것과 같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 형벌을 감내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으셨다.에덴동산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쫓겨났으며(곧 내쳐졌으며),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은 검을 든 천사로 인해 막혔다. 생명 나무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그 검을 통과하는 길뿐이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검을 통과하셨다. 그가 할례 받았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인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우리를 위해 그 할례를 겪으셨기에, 우리는 오로지 믿음만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될 자격을 얻었다. 또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짊어진 그분의 형상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짐으로써, 주님의 자녀는 비로소 순종에 대한 의무가 곧 기쁨이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만약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행하신 일, 즉 우리를 위해 전 우주적 '내쳐짐'을 겪으신 일을 바라보며 “내쳐져야 하는 자는 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저를 대신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할례를 받은 것이다.3.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이 일을 하셨다위의 두 가지 내용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신명기 30장이 말하는 미래에 대한 세 번째 내용은 두드러질 정도로 현재에 관한 언급처럼 보인다. 사실상 신명기 30장의 1-6절은 “먼저 너희들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저주들이 임하게 될 것이고, 결국 너희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를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미래의 시간을 내다 보고 있다. 이는 새 언약과 거듭남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신명기 30장의 뒷부분인 11-15절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이 부분에서 ‘오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모세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이제 현재에 대한 주제로 돌아온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모세는 이 말씀의 앞부분인 11절과 14절에서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결정지을 하나님 율법이 어렵거나 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과 마음 안에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먼저, 하나님의 율법은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 이미 찾아온 말씀이므로, 이를 지키지 않는 오늘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바다 건너 현자나 신비주의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율법을 주셨기 때문이다.반면, 톰 슈라이너(Tom Schreiner)의 분석과 같이, 바울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킬 수 없고 지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모세가 이미 말한 내용을 기억하며 이 본문을 인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석은 바울이 로마서 10장 4, 6-9절에서 말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슈라이너가 말하기를, 바울은 모세의 말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할 유일한 단어, 즉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믿기만 하면 되는), 그리고 당신이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하나님의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그 복음 말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그 복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는 곧 미래의 역사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불가능한 일을 행하셨다.바울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부정하거나, 그분을 다시 하늘에만 머무시게 하는 것과 같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세상으로 향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복음은 어려운 명령이 아니다(신 30:11). 다시 말해, 개인적인 열심과 같은 행위로써 순종을 증명해야 하는 그런 명령이 아니다. 또한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떠한 명령도 이와 같지 않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차 이 복음이 너희를 찾아올 것이다.”하나님의 은혜로, 그 복음은 지금 우리 곁에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Moses Preached the Gospel번역: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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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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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존재
하나님
예수님
신명기30장
톰슈라이너
사역이 예상보다 더 어려울 때
by Tyler St. Clair
2018-12-10
또 다시 주일 사역으로 녹초가 된 나와 아내는 거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었다. “우리에게 사역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나는 (눈물을 참으며) 아내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즈막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우리는 10년 넘게 사역하며 겪었던 승리와 시련에 대해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6년 시작한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건강하고 아름답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때때로 그 고통은 마치 출산을 했는데도 여전히 진통을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확실한 불확실성수년째 평온한 지역에서 잘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아내에게 폭탄과 같은 말을 던졌다. 주님이 안정적인 지금의 직장을 정리하고 교회 개척 사역에 전념하도록 나를 이끄시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당시 내가 벌던 수입으로는 필요한 자금의 6-70%밖에 충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디트로이트로 이사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당연히 아내의 마음은 여러 감정으로 복잡해졌다. 그녀는 당황함과 두려움으로 내게 화를 냈다. 또 분석적인 성격을 따라 내 생각이 왜 잘못된 결정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기도하고 토의하였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정했다.그날 저녁의 결정은 이후 여러 해 동안 우리가 겪게 될 험난할 시간의 출발점이었다. 예를 들면, 디트로이트의 악명 높은 우범 지역으로의 이사, 연봉의 대폭 삭감과 좋은 사보험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자금 충당을 위해 쉬지 않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일, 우리를 해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삶을 노출하는 일,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떼어놓는 일, 극심한 가난, 깨진 관계, 학대를 겪는 사람과 깊은 관계 맺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우리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삶의 ‘불’확실성이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한 지 막 2년이 된 지금도 비슷한 여정에 있다.새로운 이 공동체를 섬기다 보면, 폭풍 구름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체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국 그 폭우에 흠뻑 젖기도 한다. 이제 거의 2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다른 교회가 이즈음이면 가질 법한 인력과 재정을 여전히 채우지 못하고 있다.교회 침입과 차량 도난을 여러 번 경험했고, 건물주에게 금전을 강탈 당한 적도 있다. 혼란의 도시에서 사역하며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예측 불가능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난의 중첩이처럼 어려운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많은 힘든 일을 겪었지만, 내가 잘못 계산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 가족이 치르는 희생의 값이었다. 아무리 자주 아내와 데이트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아내와 자녀들이 치른 대가를 벌충할 수는 없을 것이다.“미안해, 우리는 그럴 돈이 없어.” 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나는 슬픔 혹은 후회와 씨름했다(그리고 여전히 종종 씨름한다).오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교회 개척에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점은 예상했다. 다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내 자녀들은 인간의 타락을 전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생활 환경으로 인해서, 어린 시절에 누려야 할 순수함을 잃었다. 아이의 친구들은 그들 가정에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또 부모가 투옥되는 바람에 그 친구들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일도 우리 자녀들은 보았다. 한 번은 내가 마약을 구매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체포된 적이 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들은 엉엉 울고 말았다.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내와 자녀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야 했다. 이처럼 우리 아이들은 보통의 어른들조차 쉽게 경험하지 못할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거기에 지난 수년간 아내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도리조차 없다. 그녀는 교회 개척으로 인해 경제적 안정과 이전에 살던 집을 포기해야 했고, 이상적인 교육과 휴가의 기회를 잃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남편 없이 보내야 했다.지금도 아내는 집안을 돌보면서 동시에 다른 자매들을 양육하느라 엄청난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게다가 우리는 이 와중에도 여러 번 이사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차례 삶의 전환점을 겪었다). 아내가 치르는 희생 때문에, 나는 여러 번 이 사역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지속하게 만드는 은혜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이 이 가족을 지켜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 큰 대가를 치러 왔는가? 바로 예수님이 그럴 가치가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수년 전, 주님은 내 마음에 이 말씀을 새겨 주셨다.“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무한히 큰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 다가올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히 12:2).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자기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고후 5:21).어려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생각했을 때, 과연 우리가 희생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언젠가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31-1873)이 말한 것처럼, “만약 이 땅의 왕에게 파송 받는 일을 영광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하늘의 왕에게 파송 받는 일을 희생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우리는 바울처럼 주님이 요구하시면 무엇이든 하리라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희생하셨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그 어떤 손실보다도 가치 있는 분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얻고(엡 3:8),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엡 1:3).내 이야기는 간단하다. 주님이 들려 주신 숨겨진 보화나 값진 진주의 비유와 같이(마 13:44-46), 아내와 나는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 모든 일을 감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을 섬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Ministry Is (Way) Harder Than You Expected번역: 하늘샘
목회
난관
확실한불확실성
고난의중첩
데이비드리빙스턴
가치
희생
자녀 양육, 이렇게 하라
by Joel R. Beeke
2018-12-10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자녀 양육: 은혜 언약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법’(Parenting By God's Promises: How to Raise Children in the Covenant of Grace)의 저자, 조엘 비키(Joel Beeke) 목사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질문: 자녀 양육이라는 주제를 연구하고 강의하신지 얼마나 되었나요? 대답: 저는 목회 현장에서 30년 동안 부모들을 상담해왔습니다. 자녀 양육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관련 글을 읽고 설교를 시작한지는 20년이 넘었어요. 또 우리 교회의 자녀 양육반에서 4년째 가르치는 사역을 하고 있죠. 질문: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다른 양육 관련 도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답: 우선 이 책은 은혜 언약 안에서 크리스천 부모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학적으로 강조합니다. 동시에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양육 방식을 제공하지요.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루는 신앙 서적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천 부모들이 그리스도의 3중직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주는 양육서는 아직 없는 형편이죠. 그리스도의 3중직이란 ‘가르치는 선지자’와 ‘중재하는 제사장’, 그리고 ‘인도하는 왕’의 역할을 말하는데, 자녀에 대한 중보자인 부모에게 이러한 역할들은 무척 중요합니다. 또한 이 책은 일상적인 양육 문제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이 역시 다른 기독교 지침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경청하는 태도, 언어의 순화 또는 형제자매간의 화목한 관계 등 대부분의 부모들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공통으로 고민하는 문제들 말이죠. 특히 10대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친구 관계에서 겪는 스트레스에 대응하며, 분노와 같은 감정을 조절하도록 돕는 실질적인 기독교 양육서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차별점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질문: 왜 대부분의 양육 서적들이 부모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기 보다는 죄책감을 가져다 주는가요?대답: 그 서적들이 부모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제공하는 양육의 기본 원리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의무나 요구 사항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양육의 기본 원리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 성령의 권능과 인도하심에 대한 약속, 은혜 언약의 축복 등이 있습니다.질문: 그렇다면 복음의 메시지는 부모의 삶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요? 대답: 수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세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부모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따라 자녀들에게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둘째, 자녀들이 죄를 범할 때 부모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범죄한 자녀에게 등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셋째, 부모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하려면, 복음 안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장을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들 중 하나는 우리 자녀를 주님의 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주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는 것, 그것이 곧 부모 자신에게는 영적 훈련의 과정인 것이죠.질문: 목사님은 자녀 양육의 세 측면을 가정과 교회 및 학교의 삼각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자녀 양육에서 이 세 측면은 어떻게 서로를 뒷받침하는가요?대답: 자녀 양육의 주요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교회와 학교는 성경적인 믿음을 기초로 양육을 지원하는 기관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가정에서 배운 성경의 진리들을 교회와 학교에서도 반복적으로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 깊이 각인될 수 있습니다. 누적의 힘이죠. 그리고 그 결과로 잠언 22장 6절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질문: 목사님의 복음 지식이 세 자녀를 양육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대답: 첫째, 자녀들이 불순종하여 화를 내고 싶을 때, 제 자신이 그리스도를 실망시켜드린 데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변함없이 저를 사랑하시듯이 저 역시 제 자녀들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복음이 다양한 약속과 부르심과 격려로 하나님의 자녀인 저를 붙들어 주듯이, 저도 자녀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위로하고 격려해주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늘 “사랑해”라고 제게 말씀하시듯이, 저도 자녀들에게 늘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가 저를 그분의 뜻에 더 부합하도록 제 삶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듯이, 저도 기도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고, 꾸짖고, 때로는 야단도 치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일을 끈기 있게 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임을 기억하며 자녀들 앞에서 믿음의 본이 되고자 힘썼습니다. 질문: 곁길로 빠져 경건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녀들을 둔 부모가 있다면, 어떻게 격려해 주시겠습니까? 대답: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신뢰하고, 그분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믿으며, 또한 그 자녀를 위해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또한 당황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이들은, 특히 10대 중반까지는 반항하는 단계를 거칠 수도 있습니다. 한두 해 동안 깊이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길을 더 깊이 확신한 후에 돌아오는 자녀들도 있어요.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인내할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위해, 그리고 자녀의 회심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In Awe of God’s Glory: An Interview with Joel Beeke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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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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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인도하심
언약의축복
무조건사랑
죄인
위로와격려
기도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전이 필요한 이유
by Jaquelle Crowe
2018-12-07
나의 아버지는 오랜 역사와 근사한 건축물을 자랑하는 신학교에 다니셨다. 내가 아홉 살 때인가,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 신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유독 한 건물이 다른 건물들보다 더 눈에 띄었는데, 바로 총장실이 있는 건물이었다.그 건물이 가장 크거나 화려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 건물 안의 가장 눈에 띄는 어떤 방 때문이었는데 바로 총장의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개인용 도서관이었다.나는 조용히 그곳을 둘러보았다. 책이 정말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오래된 고전들도 많았다. 수천 권의 낡은 책들과 빛 바랜 표지들이 보였다.그 신학교 총장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반드시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래된 책, 즉 고전이었다.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로운 것만이 필요할까?때때로 교회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젊은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새로운 앱(app), 새로운 성경 번역, 새로운 스타일, 또는 현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가르침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래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신실한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더 새롭고, 쿨하고, 빠르고, 예리한 것을 대신하여 역사적이고, 아름답고, 단순한 것이 필요하다.성장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통솔하며,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성숙한 선배 신앙인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인해 그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이 수 백명의 영적 부모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존 뉴턴, 패니 크로스비), 존 라일, 에이미 카마이클, 그리고 코리 텐 붐 같은 저자들이 여전히 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죄악을 깨우치고, 격려하고 있다.우리가 과거의 지혜로부터 배움을 얻지 않는다면, 그 손실은 막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문헌들은 어떤 적시성을 가지고 현대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과거의 다른 경험과 어휘를 가진 신앙 선배들이 오늘날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오래된 고전들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주는 세 가지 유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1. 문화 속에서 진리를 지키는 법우리는 독특한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현재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과거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로 똑같은 죄와 고통을 겪어 왔다. 또한 이 근본적인 문제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늘은 과거에 살던 신앙 선배들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이유로 존 라일의 책, ‘청년에게 전하는 글’(Thoughts for Young Men)은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진리를 위해 살고 싶어하는 젊은 남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예나 지금이나 삶을 대하는 유쾌하고도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다.2. 로맨스를 다루는 법우리의 고정 관념과 달리,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숭고하고 영적인 주제들만 다루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성적 순결, 로맨스, 결혼과 사랑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썼다.너무나 당연하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스펄전도 한때는 모두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들도 당신이 겪는 고민, 충동, 정서와 씨름하는 시기를 지나 왔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글은 당신의 경험에서 동떨어진 게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인생을 통해 경험한 지혜, 특별히 로맨스와 성적 순결에 관해 이야기하길 좋아했다.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그가 어떻게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로부터 (가혹한 이별을 견뎌내는 과정을 포함하여) 거룩한 순결을 지향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고찰로 가득하다.3. 유혹과 싸우는 법우리는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유혹을 다루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글들을 남겼다.죄와 싸우는 일에서부터 거룩을 추구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그런 문제들을 놓고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로 나이든 신앙의 멘토만이 줄 수 있는 지혜를 오늘날의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예를 들어, 에이미 카마이클의 ‘만약에’(If)라는 책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함으로써 유혹과 싸우도록 돕는 강력하고 실제적인 묵상집이다.가장 오래된 책그런데 인간이 저술한 경건 서적을 다 읽고 배울지라도, 최고의 고전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바로 성경이다.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책들이 잠시 방문하는 멋진 장소라면, 성경은 당신이 살아가야 하는 집이다"(Visit many good books, but live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모든 책들보다 귀중히 여겨야 하는 단 하나의 완벽한 문헌이다.이는 다른 고전들을 가볍게 여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위대한 책인 성경을 한결같이 사랑했던 신앙 선배들의 생각을 읽음으로써 우리도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경을 위해 고전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젊은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전으로부터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 기회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거부하지도 말고, 낭비하지 말라.원제: Why Young Christians Need Old Book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고갑균
영성
영적성장
고전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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