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크리스마스와 진정한 선물
by Leslie Schmucker
2018-12-21
이번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준비하지 말아볼까 또다시 고민한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이며, 나는 평소 식구들에게 선물하기를 즐거워한다.그럼에도 이런 별난 생각을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는 단상과는 조금 달랐으면 한다.크리스마스, 그리고 불안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선물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는다. 예수님 이야기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나는 부모로서 못내 아쉽다. 크리스마스가 그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채 점점 더 소비를 위한 날이 되어가기 때문에, 이 문화로부터 아이들을 지켜 내고 싶다. 하지만 선물에 대한 가족의 기대와 그에 따른 나의 의무감은 생각보다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해를 거듭할 때마다, 나는 선물 목록에 전부 줄이 그어질 때까지 여러 상점에서 동분서주한다. 한정판 변신 로봇부터 예쁜 아기 인형, 그리고 꽤 비싼 어그 부츠까지, 무엇이 나을지 고민하며 애를 쓰는 것이다.줄 때의 기쁨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설레는 일이지만, 사실 만족할 만한 선물을 준비한다는 건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선물을 건네는 순간까지도 종종 죄책감이나 불안감, 때론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내 마음을 지배할 때가 있다. 색상, 크기, 브랜드, 디자인, 활용도 등등 내가 제대로 된 선물을 고른 것인지 여러 번 고민하게 된다. 이 정도면 우리 아이가 흡족해 할까? 좀 더 괜찮은 것을 사야 했던 게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부담감 때문에 내 마음은 한시도 잠잠할 수가 없다. 이러한 마음의 짐은 그 옛날 베들레헴의 별밤을 축하하려는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크리스마스 문화에서 홀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블랙 프라이데이부터 신년 감사 세일까지, 나는 선물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여러 상점을 돌며 물건을 찾아 헤맬 것이다. 더불어 한정된 예산은 나로 하여금 사고 싶은 선물 앞에서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할 것이다. 결국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죄책감과 불안감 속에 아침을 맞이할 것이고, 가족들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크리스마스, 그리고 기쁨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며, 그분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한다(마 7:11). 물론 선물을 준비하고 나눌 때마다 물질만능주의, 낭비벽, 그리고 인간의 소유욕 등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서 승리하겠다며 선물을 완전히 금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베풀려는 선한 마음은 좋은 것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사랑과 온전히 닮은 모양은 아니라 할지라도, 좋은 것을 주는 일은 필시 선한 행위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눅 6:38).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라고 외쳤다(요일3:1). 따라서 주는 행위를 통한 즐거움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며 흡족해 하시는 것과 동일한 기쁨이다. 비록 그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크리스마스, 그리고 은혜예수님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하늘 영광의 화려함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내려놓으셨다. 인간은 흠이 많고, 또 상 받을 자격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과 나를 선택하셨으며 영원하고 풍성한 은혜를 약속하셨다.그러므로 앞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때문에 고민할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억하며 붙들 것이다. 연말마다 발품을 팔아가며 좋은 선물을 준비하는 이유, 때로는 조금 과하더라도 매년 그렇게 하는 이유, 바로 그 이유는 내가 물질주의에 빠졌거나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욕심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받은 넘치는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며, 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희생을 통해 내게 주어졌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분의 본을 따라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것으로 가족과 이웃을 섬기고자 한다.아기 예수가 쓰신 가시관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왕관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주어진 진정한 의미의 선물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선물을 기다리듯, 감출 수 없는 기쁨과 환호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릴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uilt and Grace of Christmas Giving번역가: 정새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진정한선물
기쁨
은혜
베들레헴
크리스마스문화
하나님, 아이를 갖기 원해요
by Michael McAfee
2018-12-21
5년 전, 우리 부부는 나의 25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평소에는 방문이 어려웠던 근사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풍성한 음식과 함께 지난 25년 동안 내 삶에 있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두 사람 앞에 앞으로 어떤 기쁜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하며 희망에 찬 대화를 이어갔다.아내는 아이를 갖기 원한다고 말했고, 해외 입양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나이가 문제였다. 입양을 위한 최소 연령이 25세였는데 그 당시 아내는 25살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그녀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동안 우리 교회가 우간다의 고아원과 자매결연을 맺도록 이끄신 일,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우리의 열정을 성장시켜 오신 과정에 대하여 다시금 기억했다. 그리고 입양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우선 40일 동안 기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조바심을 참지 못했고, 심지어 그 이야기를 마친 바로 다음날 나는 입양 신청 서류를 준비했다.우리 부부가 그렇게 입양 절차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었다. 그런데 우간다의 입양 정책은 수시로 변했고, 여러 번의 지연을 경험해야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입양이 무산되는 결과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생각으로 절망하지 않았고, 다른 많은 부부들처럼 임신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기에 대한 기대감은 곧 임신이 되지 않는 혼란으로 변하였다. 일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임신에 실패했고, 어느 날 로렌(Lauren)은 어두운 목소리로 검사 결과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생물학적 아이를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임의 고통불임이라는 현실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끝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혹시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해결할 방법은 정말 없을까?실체가 없는 상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작년에 할머니가 주님 곁으로 가셨을 때, 나와 가족들은 그 상실감에 대해 서로 애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을 미래에 대한 상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앞날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가족에 대한 꿈과 자녀에 대한 바람은 그렇게 잡을 수 없는 소원이 되어 갔다.가깝게 지내던 이웃 부부들은 거의 다 임신에 성공했고, 우리는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아니, 고립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불임의 확률이 무려 다섯 쌍 중 한 쌍이라는 것은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아마 실제 수치는 이보다 더 높을 것이다.우리는 불임의 시기가 있었음에도 지금은 예쁜 아이를 갖게 된 여러 부부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적인 소식에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을 때에, 아무도 불임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게다가 종종 모임에서 겉도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사람들이 마치 불임이 극소수의 별난 사람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듯 우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드러내기 힘든 수치심을 느꼈고, 불임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에 두려움마저 갖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부부를 위하여 어떠한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불임의 아픔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다른 부부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희망의 방향우리의 삶을 공개한 이후, 나와 아내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다독임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만족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비단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동일한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그분이 베푸시는 능력에 희망을 둔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의 필요를 알고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기를 기다리는 많은 이들의 기대를 채워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그때에 우리도 아이를 갖거나 입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기쁨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되어야 한다. 자녀보다 나은 하나님 말이다. 창조의 목적대로 주님을 찬양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자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녀보다 나은 하나님 말이다. 로렌과 나는 “예수님이 없는 삶 보다 아이가 없는 삶이 훨씬 나을 거야”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한다. 비록 우리가 꿈꾸는 풍성한 가정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는 늘 최고의 선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반면, 우리에게 자녀보다 더 나은 소망이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 소망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며, 어떠한 상황을 겪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는 반석과 같은 확신이다. 하나님은 그 행하시는 일로 인해 선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선하시다. 시편 107편 1절 말씀대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채워지지 않는 갈망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 혹은 가족을 볼 때, 나는 이전보다 세심한 말로 기도한다. 그들의 고통이 덜어지고 그 갈망이 차고 넘치기를 바라지만, 이는 그들을 향한 내 기도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바람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겠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을 잊지 않을 것이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는 로렌과 내게 있어 아이를 안아볼 수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우리는 가족들과 출산의 기쁨을 나누거나, 분만을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을 겪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십대 자녀로 인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거나, 그들의 방황 앞에 고뇌하는 일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탄절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노년을 보낼지도 모르고, 딸을 결혼시키거나 아들에게 결혼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 자녀를 향한 우리의 바람은 마지막까지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선하다. 왜냐하면 매일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선한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이다.그분은 선하시다. 그리고 선을 행하신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이 아닐지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Why Won’t You Fulfill Our Desire for Children?번역: 주영식
가정
결혼
아이
불임의고통
희망의방향
소망
갈망
고통
하나님의계획
선하심
소셜 미디어의 위험과 약속
by Collin Hansen
2018-12-20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라는) 경쟁적인 두 가지 영역 사이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소셜 미디어는 가르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가치 있고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블로그 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증인 공동체인 지역 교회를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의 강점과 약점을 배우는 가운데, 지역 교회를 우선시하는 지혜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공존하는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형성한다. 최근에 젊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칼빈주의의 부상을 살펴보라. 과거에 일부 칼빈주의자들은 이따금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설교테이프를 바꿔 들으며 교제했다. 반면에, 이제는 활기가 넘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마음껏 활용하며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거대한 가상 네트워크를 즐긴다. 그러나 이런 네트워크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유명한 블로그 운영자들은 글 쓰는 재주와 매일 그 글을 업데이트하는 부지런함을 통해 온라인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탄탄한 교회론으로 무장하지 않고, 또한 교회 리더십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재능을 교회 밖, 세상에서 사용하게 될 것이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이미 고립된 생활을 하는 블로그 운영자들은 인터넷 상에서 여러 유혹을 받게 된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 심히 회의적이 될 수 있고, 다른 저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 될 수도 있다. 친구나 멘토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지혜로부터 단절된 활동을 하는 블로그 운영자들은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비록 직관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셜 미디어는 외톨이를 양성하고 조장한다. 개인주의는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확산되어 있다. 페이스북은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우리가 일반 대중에게 보이기 위해 프로필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만을 게시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상 세계에서는 자신에 대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진 인간은 미국 문화의 주요 산물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그의 유명한 책,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서 남북전쟁 전 미국의 중산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자신을 고립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의 운명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손에 달린 것처럼 상상하곤 한다.” 이는 오늘날 인터넷 시대의 생활상에도 일치하는 모습이 있다.소셜 미디어는 민주주의와 실력 위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혈통, 전통, 지역 등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직업 윤리와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지 달성할 수 있다. 한편으로, 소셜 미디어의 이러한 특징은 기독교의 목적에 부합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기독교 선교는 이러한 환경에서 확장될 수 있다. 온라인 공간은 크리스천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제 캠퍼스 사역자들은 페이스북 이전의 시대를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과거에 그들은 새로운 학생들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셜 미디어는 기본적인 제자도를 훼손시킬 수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 윌리몬(Will Willimon)이 이미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전에 ‘체류하는 이방인들’(Resident Aliens)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공동체와 전통을 피하는 미국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결국, ‘자기중심성, 외로움, 피상성, 그리고 과도한 소비주의’ 등으로 바뀌고 만다. 이 문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마 16:24)에 순종하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토대 위를 걸으며 ‘다문화주의’의 짙은 이슬과 함께 어우러진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오늘날에는 서로를 함께 묶어 주는 공통 분모들이 없다. 예수님을 따르도록 도와주는 크리스천 공동체인 지역 교회가 오늘날처럼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나님은 이 진정한 공동체를 우리 문화 속에서 신실하게 보존해 오셨다. 성경은 우리가 이웃들에 대해, 특히 믿음의 지체들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눅 10:29-37; 딤전 5:8). 우리는 소셜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자유를 동경하겠지만, 만약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갖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가르친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로 인해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교회는 소셜 미디어가 결코 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소셜 미디어 활동을 절제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즉각적이고 덜 제한받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원하는 청중들에게 가르침을 바로 제공하고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의 가능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장기적으로 트위터, 정보 업데이트, 블로그 게시 등의 활동이 지역 교회의 도움으로 날마다 실제로 이루어져야 하는 성결과 사랑을 추구하는 일과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드 토크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특출한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웃들의 사랑과 존경은 오래 지속되는 일련의 자그마한 섬김들, 남모르는 선행들, 지속적인 친절한 습관들, 그리고 이타심을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Perils and Promise of Social Media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문화
사회이슈
소셜미디어
개인주의
다문화주의
민주주의
크리스마스는 신비이다
by Michael Douglas
2018-12-20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익숙한 문구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크리스마스 음악, 트리와 쿠키 냄새, 그리고 장식들이 해마다 점점 더 일찍 등장하는 듯하다. 이처럼 이 기간에 대한 친숙함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 크리스마스를 일년 중 가장 멋진 시간으로 만든다.그런데 이때 우리는 행복한 시간과 더불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가족 중 한 사람의 빈자리 때문에 슬픔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상반된 정서의 갈등은 생각보다 큰 혼동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그렇다면, 진짜 크리스마스는 어떤 이야기일까? 그 자체의 신비가 여기에 있다.동정녀 탄생해마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는 주제가 동정녀 탄생이다. 누가는 한 천사가 마리아라는 처녀에게 나타나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그뿐 아니라 그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윗 왕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녀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사 7:14)이라는 약속을 분명히 기억했지만, 그것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그녀에게 있었을 혼돈스러운 마음과 기쁨, 여러 밀려오는 생각들을 상상해 보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사촌 엘리사벳도 임신을 했다고 말한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 예수님 시대에 불임은 저주받은 상태로 간주되었다. 어린 십대 소녀와 아마도 70이나 80대가 된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마리아가 방문하여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자 엘리사벳의 배에서 아기(세례 요한)가 뛰놀았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미지를 반영하며 이 장면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 이미지는 여기서 더 큰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다. 잉태한 적이 없었지만 새 생명을 잉태하는 이야기, 그처럼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다.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3개월을 지낸 후에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또 그녀 앞뒤에서 소곤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배는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녀가 임신하면 안 되는 처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그녀는 요셉과 약혼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러한 임신 소식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라. 요셉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그녀에게 부정하다는 죄책을 주기 보다는 파혼을 하려 했다. 그러나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고 알려 주었다.요셉은 다윗의 자손이며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목수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무게를 살펴보라. 한 아이가 그의 가계에서 태어나는데, 그의 아이가 아니다. 그가 곧 입양할 아이는 하나님이 장차 세상을 구원(입양)하기 위해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신 분이다. 길고도 낯선 여행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을 하라는 명을 내렸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다. 그녀의 산파는 걸어올 수 있는 거리인 나사렛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항상 이 부분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의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그들의 임산부들에게 임신 말기에 장거리 여행을 주의시키지 않는가?그러나 마리아는 돌아올 날에 대한 기약 없이 이 장거리 여행에 동의한다. 그들이 시골 마을에 있을 때, 마리아의 양수가 터진다. 그들은 집에서 먼 곳에 있고, 사람들로 붐비는 작은 마을이어서 방도 얻을 수 없다. 요셉은 여관 주인에게 그들이 그냥 따로 있을 만한 곳이 있는지 묻는다. 여관 주인은 손님들의 가축이 머무는 곳인 여관 뒤에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낮아지신 하나님아기의 몸을 입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가축 소리와 냄새나는 광경에서 자신의 등장을 알리신다. 이 장면은 정말 낯설다. 하나님의 신기한 계획으로, 목자들이 왕의 탄생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처음으로 보게 되는 영예를 갖게 된다. 그 상황은 무엇인가 어색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왕을 알현하기에 알맞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가난한 목자들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요점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가장 예측하지 못할 장소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신다. 주변 상황이 복잡하고 실망스러우며, 우리 자신이 실패를 하고 있는 그 순간에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신다.얼마 후, 헤롯은 동방박사들로부터 이 왕에 대하여 듣게 된다. 헤롯도 예수님을 찾으려고 계획을 세운다.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말이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을 피하여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을 떠나라는 말을 듣는다. 헤롯은 그의 왕권에 도전하는 자를 없애버리기 위하여 가장 끔찍한 대량 학살을 계획하고 2세 이하의 모든 어린아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10대 소녀가 임신을 한다. 천사가 모든 일에 등장하여 개입한다. 대량 유아 학살이 벌어진다.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어떤 연극 작가가 한밤중에 쓴 일종의 비극 같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또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역사적으로 이 사건들의 진정성을 따지기에는 우리의 상식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우리는 그저 정서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기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장식과 선물과 음식, 그 이상이어야 한다.아마도 올해에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 울음소리나 재잘거리는 웃음소리 대신에 당신이 마주하는 현실은 계속되는 불임이라는 무언의 침묵일 수도 있다.어쩌면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로 예년과는 다른 느낌일 수도 있다. 만일 크리스마스가 그냥 외부적인 장식과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장식이 전부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당신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읽어 보았던 다른 스토리들처럼 미스터리해서 그 이야기의 저자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요소들을 이제 어떻게 행복한 결말로 엮을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이야기에는 공통된 줄거리가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크리스마스의 신비는 믿는 자들에게는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신비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내몰린 날부터 계속해서 내려오는 한 가지 주제와 관련된다. 누가 구원자인가? 누가 메시아인가? 누가 그리스도인가?계시된 신비 크리스마스의 신비와 긴장과 계획은 말구유 안에 싸여 있다. 임마누엘 안에,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속에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거나 우리 옆에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작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힘입어 오셨다. 아기로서 배가 고파 먹을 것 때문에 울었지만, 그분은 생명의 떡이시다. 또한 낚시줄을 놓는 법을 배워야 했지만,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이시다. 감기에 걸리고 무릎이 까지고 운동장에서 발목을 다칠 수 있는 아이였지만, 그분은 위대한 의사이시다. 두려움과 유혹과 갈망을 가지고 성장한 아이였지만, 오직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왕이신 이 아이가 바로 계시된 신비이다. 그분이 크리스마스의 주인이시다. 십자가 고통 없이는 부활의 기쁨도 없다. 구유에 눕혀짐 없이는 십자가 고통도 없다. 짐승들을 먹이는 구유에 하나님의 양이 누웠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여관 뒤편에서 빌린 구유에 눕혀진 것처럼, 나중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빌린 무덤에 장사되셨다.이것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이유이다.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양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바로 신비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흰 눈처럼 하얗게 하실 것이다. 나는 당신이 이 왕을 새롭게 찾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왕은 당신을 이미 찾았기 때문이다.와서, 그 놀라운 신비를 바라보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is a Mystery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신비
동정녀탄생
낮아지신하나님
놀라운신비
임마누엘
교회와 국가의 분리
by Nicholas Needham
2018-12-20
11세기의 서유럽은 책봉 갈등으로 인해 극심하게 흔들렸다. 왕들이 교황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교황들은 왕들에 의해 쫓겨나며, 군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교회 내부에는 불화가 생겼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 의하여 결국 새로운 유럽이 탄생했다.신학적 논쟁은 갈등의 중심에서 요동쳤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봉건주의가 처음 발전하던 시기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방에서는 5세기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새로운 사회적 환경이 형성되었다. 이 환경에서는 돈이나 정치적 직위보다 땅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많은 땅을 소유해서 더 힘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에게 땅을 하사했다. 그 결과 땅을 하사받은 자들은 상관들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하사하다’(grant)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페우둠’(feudum)이며, 여기서는 ‘봉건주의’를 의미하는 영어 ‘퓨덜리즘’(feudalism)이 생겨났다. ‘땅과 충성’(land and loyalty)이라는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는 왕과 그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는 농민들이 있었다. 중간에는 중요성이 덜한 계층인 이류 귀족들과 지역 기사들이 있었다. ‘땅과 충성’이라는 이 사회적 구조는 교회에 변혁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역 땅 주인은 자신이 소유의 땅에 비용을 들여 지역 교회 또는 수도원을 지을 수 있었다. 교회의 땅과 부동산(예를 들어, 목사관)이 성직자에게 속하는 것은 오직 지역 영주의 하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영주는 지역 교회의 재산을 사제, 주교 또는 수도원장으로서 관리할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건주의는 교회 구성원들이 성직자를 선택하고, 성직자와 사람들이 함께 주교를 선택하던 고대의 전통을 종식시켰다. 봉건 영주 가운데서도 최상위의 영주이지만 동시에 평신도였던 왕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주교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거나 서임할 때, 이를 ‘평신도 서임권’이라 불렀다. 이 책봉식은 왕이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영적 직분의 상징인 자신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의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때 주교나 수도원장은 자신의 영주가 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봉건화 된 교회에 대해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11세기 중엽에, 교황권은 오랫동안의 비참한 부패와 무능의 시대 이후에 그 고결함과 권력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개혁적인 교황들은 교회 내에서 강한 세력의 지지를 받아 교황의 법정을 다시 한번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 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천재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비천하게 태어난 투스카니 지방의 사람이었다. 그는 개혁적인 교황들 아래에서 신임을 받으면서 다양한 직위를 매우 탁월하게 수행한 후에, 1073년에 대중적인 환호를 받으며 교황의 자리에 선임되었다. 힐데브란트는 그 후 그레고리 7세(Gregory VII)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배후에서 지휘한 개혁 운동은 힐데브란트의 개혁 또는 그레고리의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힐데브란트는 삶을 전투적인 견지에서 보았다. 즉, 삶을 빛과 어둠 사이의 맹렬한 싸움으로 보았다. 어둠의 주요 대리인들은 세속의 통치자인 백작들, 공작들, 왕자들, 그리고 왕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미화된 흉악범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이 땅을 불의로 가득 채운 자들에 불과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빛의 대리인들, 즉 교황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이 악한 통치자들을 통제해서 하나님의 대의를 섬기도록 만들어야 한다.왕권에 대한 힐데브란트의 부정적인 견해는 초기 중세의 전통을 깊고 철저하게 끊어 버렸다. 초기 중세의 전통에서는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크리스천 왕권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힐데브란트의 생각으로는 그런 왕권이 아닌 교황권 자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대리인이었다.힐데브란트는 교황으로서, 봉건주의가 세속 통치자들에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여한 권력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힐데브란트가 그 결심을 실행할 날짜로 선택한 시점은 평신도 서임권을 시행하는 날이었다. 그는 특히 왕이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의식을 반대했다. 이런 의식은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그들의 영적 권위를 왕에게 빚지고 있음을 의미했고, 서방의 왕들 역시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힐데브란트는 107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Henry IV, 1065-1105)가 평신도 서임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당시 헨리 4세가 서방 군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몰아붙였다(헨리 4세의 영토는 기본적으로 독일이었다). 힐데브란트는 만약 자신이 헨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다 굴복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힐데브란트가 자신의 도전을 천명했을 때, 독일의 주교들이 처음에는 황제를 지지했다. 그들은 황제를 기독교 사회의 중심으로 보는 전통을 따랐다. 이에 자신감이 생긴 헨리는 1076년에 보름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헨리의 주교들 대다수는 힐데브란트를 배격하면서 황제 편에 섰다. 헨리는 공의회를 통해 힐데브란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무서운 편지를 보냈다.“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나 헨리는 나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당신에게 고하노니, 교황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서, 만고에 저주를 받을지어다!”힐데브란트의 반응은 마치 번개와 같았다. 그는 헨리를 파문하고, 모든 백성들을 헨리에 대한 봉건적인 충성, 맹세로부터 해방시켰다. 독일의 주교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두려운 마음으로 헨리에게 더 이상의 협조를 거부했다. 헨리는 교회의 땅에서 소집된 자신의 군대 가운데 3분의 2를 단번에 상실하고 말았다. 헨리의 호전적인 독일 귀족들 역시 반역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힐데브란트를 또 다른 공의회에 초청했고, 반역에 가담한 귀족들은 그 공의회에서 새로운 황제를 선택하고자 했다. 그리고 힐데브란트가 그 선택을 주관했다.헨리는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소수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과 함께, 힐데브란트를 알현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카놋사 성으로 직접 찾아갔다. 실상 힐데브란트는 헨리가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투스카니 지방의 부유한 친구인 백작 부인의 보호를 받으면서 카놋사 성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헨리는 1077년 1월에 사흘 동안이나 성문 밖에 서서 자신이 회개했음을 힐데브란트에게 울부짖으며 말하면서 눈밭에 맨발로 서 있었다. 성 안에서는, 클루니의 수도원장인 위그(Hugh the Great)가 헨리의 회개를 받아달라고 힐데브란트에게 중재했다.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위그는 힐데브란트처럼 평신도 서임권에 반대했지만,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밀한 공조를 원하는 중도적인 인물이었다. 교황은 사흘 동안 주저했지만, 마침내 헨리를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황제는 울면서 평신도 서임권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힐데브란트는 헨리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한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보여 주는 궁극적인 사례다.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권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발아래에 엎드렸다.힐데브란트가 용서함으로 인해, 독일에서 헨리의 권세는 다시 회복되었고, 교회의 땅에서 소집된 군대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귀족들 가운데 헨리의 대적들이 슈바벤의 루돌프(Rudolf of Swabia)를 황제로 선택했다. 헨리와 루돌프는 각각 힐데브란트에게 지지를 구했다. 힐데브란트는 전쟁이 지속되는 3년 동안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두 황제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내 1080년 3월에, 헨리는 힐데브란트에게 루돌프를 파문하라고 고압적인 자세로 집요하게 요구했고, 이에 화가 난 힐데브란트는 오히려 루돌프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로 인하여 헨리는 또 다시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의 주교들이 헨리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그들은 루돌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헨리를 독일의 안정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헨리는 6월에 공의회를 소집해서 힐데브란트를 교황 직에서 폐위했다. 그는 10월에 내전에서 승리했고, 루돌프는 전투 도중 죽임을 당했다. 승리에 도취한 황제는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1084년에 로마를 점령했다. 여기에서 그는 라벤나의 대주교를 교황에 올려, 교황 클레멘트 3세(Pope Clement III)라고 칭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클레멘트는 헨리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힐데브란트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로 망명을 떠났으며, 1085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동안, 두 명의 라이벌 교황이 공존했다. 한 사람은 헨리가 세운 로마에 있던 교황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힐데브란트의 이상을 지지했던 개혁자들이 망명지에서 선택한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 1088-1099)였다. 우르반은 마침내 자신의 교회 라이벌을 내쫓았다. 서임권 갈등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르반의 후임 파스칼 2세(Pope Paschal, 1099-1118)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혼신을 다한 인물이었다. 1110년에 그는 새 황제 헨리 5세(Henry V)에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만약 헨리가 주교들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서임하는 모든 허례허식을 포기한다면, 파스칼은 독일에 있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황제에게 양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주교들은 청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주교들 대다수가 좋아하지 않았으며, 파스칼은 그것을 철회해야 했다. 그러나 서임권의 영적 측면과 세속적 측면을 나눈 파스칼의 구분은 1122년에 이루어진 논쟁의 해결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다. 그 해 보름스에서, 교황 칼릭스투스 2세(Pope Calixtus II)와 헨리 5세는 두 가지 사항에 동의했다. 1. 황제는 자신의 직위에 포함되어 있는 땅에 대한 권위로서 주교 또는 수도원장을 서임할 것이다. 2. 주교의 영적인 상관인 그의 대주교가 교회에 대한 자신의 영적인 권위로서 해당 주교를 서임할 것이며, 이때 황제는 더 이상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지 않을 것이다.이런 타협은 힐데브란트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봉건주의 아래에서 누리던 지위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교회에 보장해 주었다. 이는 또한 주교들이 그들의 영적인 직분을 왕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상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서임권 갈등은 우리에게 교회와 국가의 적절한 경계를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런 구분을 짓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동반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의 독립을 강하게 추구했던 중세시대의 교황들은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국가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며 신정의 극단으로 치우쳤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막 12:17) 바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실천하는 일에는 심오한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그 지혜를 주시기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중세교회
힐데브란트
봉건주의
교황
헨리4세
서임권
보름스공의회
의심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다섯 가지
by Emma Scrivener • Glen Scrivener
2018-12-19
신앙에 대한 의심의 문제에 있어 가장 힘든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의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도미노와 같아서 한 곳에 의심이 생기면, 전체가 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을 줄 수 있다.의심은 보통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빠른 속도로 증폭된다. 예를 들어, 종종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로부터 시작된 의구심은 곧 ‘하나님이 과연 들으실까?’ 또는 ‘하나님이 나에게 신경을 쓰실까?’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건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된다.이런 신앙적 의심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불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가슴앓이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또는 기독교 단체에 몸 담고 있다면, 이러한 의심을 어떻게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혹은 당신의 가족이 모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마음 속 불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의심은 당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존재는 마치 잡초와 같아서 모른 척 내버려 두어도, 어느새 한 뼘이나 자라나 곧 당신을 삼킬 듯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심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다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1. 모든 비기독교인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믿지 않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 마치 그들은 믿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대상인 듯 부러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장 완고한 무신론자조차도 정신적으로는 의지하는 구석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존재를 자신이 눈으로 보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우주의 지속성, 감성과 이성의 실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진, 선, 미, 그리고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매달리기도 한다. 이들 중 그 어떤 것들도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하지만 그들이 믿는 그 대상 안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붙드는 진, 선, 미, 그리고 사랑의 뿌리에는 사실상 변치 않는 어떠한 진리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이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무신론과 비교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2. 모든 성도들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의심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때때로 나는 나의 결혼, 친구들, 합리성, 요리, 저술,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의심한다. 가끔씩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의심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라고 책망하셨다.나는 종종 죄를 짓고, 의심도 한다. 양자 모두 그 자체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놀랄 일도 아니고 예상치 못할 일도 아니다. 의심 없는 기독교인은 마치 죄 없는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죄의 모든 시작은 불신이므로 사실 의심과 죄는 함께하는 것이다(요 16:9).요한1서 1장 8-9절을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도 지나친 확대는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심]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의심]을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의심]을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3.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감정은 혈당과 함께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만일 감정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감정은 나의 직장과 결혼, 신앙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천적 기질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요르(즉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이요르는 항상 우울한 당나귀)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티거(마찬가지로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활기찬 호랑이)이다. 티거가 밝고 명랑하다는 이유로 믿음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단지 운 좋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 복권에 당첨되었을 뿐이다.정신적 건강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병적인 우울증은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아래 5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금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우울증에 걸렸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4. 믿음은 환상이 아니다우리는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설득되었기 때문에 믿는다. 믿음은 배의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어둠 속으로 대담하게 발을 내딛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이미 반짝이는 찬란한 빛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는 일에 더 가깝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 뜰 수 있을까?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말씀한다. 로마서에서 이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무려 274개의 구절이 앞서 배치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무척 중요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당신에게 읽고 들을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라.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닌, 이성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진리에 대한 응답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계속해서 들으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더라도, 복음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성경과 성경의 인물들로 당신을 둘러싸라. 그러면 당신은 계속 참된 것에 젖어 있게 될 것이다.5.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믿음은 우리가 애써서 끌어당기거나 혹은 밀어내는 무언가가 아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와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힘껏 통과해야 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문이 아니다. 이들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혼인을 ‘결혼하다’(능동적)와 ‘아내가 되다’(수동적)의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 묘사이다.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의심의 시간 속에 있다면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 성경, 성례, 기도,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갈 때,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다시 살아난다.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것보다 예수님께로 시선을 옮길 때, 의심은 줄어들고, 상대화되고, 대체되며, 심지어 새롭게 승화된다. 의심의 여정은 어쩌면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보다 깊고, 풍부하게 알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방법인지도 모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Things to Remember About Doubts번역: 주영식
영성
신앙과소명
의심
믿음
감정
환상
존재
하나님
예수님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세 가지 방법
by Tim Keller
2018-12-19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 이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자녀에게 신앙이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 세대가 신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자녀 세대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일까? 보통은 둘 다 맞는 말이다. 앞선 세대가 바른 신앙을 전달하는 일에 실패하면 종종 다음 세대에서 그 문제가 증폭되기 마련인데, 가장 큰 폐해는 우리 자녀들이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부모 세대의 신앙적 헌신이 세대를 거치면서 안주로 바뀌고, 안주는 다시 시간을 거쳐 세상과의 타협으로 변질된다.초기 뉴잉글랜드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땅의 역사 중 1620년대부터 1640년대를 대표하는 초창기 정착민들은 대부분 영적 생명력이 살아 있는 성경 중심의 크리스천이었다. 하지만 1662년 즈음, 이들은 자신들의 자녀와 손주 중 많은 수가 이름뿐인 기독교인, 즉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유아기 때 부모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으나 성인이 되어서는 입교하지 않는 많은 젊은 세대를 위해 ‘반쪽짜리 언약’(Halfway Covenant)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그들의 투표권을 인정해 주었다.우리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 그리고 6장 20절부터 25절의 말씀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이 본문은 우리가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려 준다.1. 하나님을 가슴 깊이 사랑하라우리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6). 그리고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라는 뜻은 위선자나 모순을 일삼는 사람처럼 마음과 행동을 따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아무런 감동 없이 기계적으로 섬기거나 부분적으로만 사랑해서도 안 됨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청년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에 민감하다. 이는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의 신앙으로부터 돌아서게 된 첫 번째 이유다. 예를 들어,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던 청년들은 교회가 인종차별 정책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모순적인 상황을 목격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기독교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말았다. 또한 그들은 시민권 투쟁에 반대하는 위선적인 기성 교회를 바라보며 결국 하나님을 떠나갔다.2. 진리를 삶 속에서 실천하라우리는 복음이 삶 속에서 행위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복음은 결코 학문적이거나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6장 7절은 자녀들에게 시간마다 주기적으로 말씀 강론을 진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앉았을 때에든지 [중략]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되도록 그들을 이끌라는 의미이다.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일련의 강연이나 수업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녀들이 삶 속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방향성을 놓고 고민할 때, 복음에 가치를 두며 나아가도록 그들에게 영적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한다.3. 삶을 통해 증언하라 신명기 6장 20-25절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나의 믿음의 행위가 세밀히 연결되어야 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변화, 즉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신 사실이 나의 신앙 생활을 어떻게 선하게 바꾸어 가고 있는지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 우리를 … 인도하여 내셨나니.”스스로의 신앙과 나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알려 줄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우리는 자녀들에게 본이 될 수 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겪는 성장통에 대해 그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고, 회개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아름답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을 증언할 때 반드시 격식이나 공식적인 표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요약하자면, 우리는 앞선 세대로서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현실적인 선택 앞에서 영적으로 지혜로워야 하며, 그 믿음 생활이 주님과 인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지난 역사를 살펴볼 때, 세대를 이어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제도와 공식적인 가르침에 의지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가르친다면 그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들이 교회에 참석하도록 이끌기만 하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하지만 젊은 세대는 단지 앞선 이들의 본이 되지 않는 믿음 생활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문제 앞에서 보여 주는 모순, 또 영적 변화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권위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경험하면서 믿음의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Pass on Faith to the Next Generation번역: 이주일
가정
양육
신앙전수
사랑하라
실천하라
증언하라
진리
반쪽짜리언약
Covenant
개혁의 불을 밝히다
by R. C. Sproul
2018-12-19
나는 부흥의 시작을 외치는 교회 홍보 문구를 볼 때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런 교회들은 으레 부흥의 시기를 스스로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부흥에 대한 시간표를 정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서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부흥은 성령이 마른 뼈들 속에 들어와(겔 37장), 그분의 능력을 행사함으로 새 생명을 일으키실 때 가능하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지 않으신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성격의 부흥은 그 어떤 인간의 프로그램으로도 관리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사람도 종교개혁의 스케줄을 스스로 정한 일은 없다. 웨일스의 부흥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예정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각성도 사람의 시간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교회 역사의 이런 장엄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안에서만 일어났다. 즉, 하나님이 죽어 가는 교회에게 그분의 능력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만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부흥과 개혁의 차이를 잘 파악해야 한다.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것처럼 부흥은 생명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가 교회의 핵심 목표가 될 때 선교와 전도 활동은 종종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적 생명의 부흥이 반드시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교회와 사회가 유지되는 틀이 바뀌는 것을 가리키는데, 부흥이 개혁으로 발전하려면 복음이 사회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 부흥은 다수의 새로운 크리스천을 낳을 것이나, 이 새로운 사람들이 문화의 변화를 이끌고 결국 개혁에까지 이르려면, 그들이 먼저 신앙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개혁이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이끈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겠지만, 우리는 모든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침체 상태에 있거나 진전이 없다고 느낄 때에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 변화가 진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독약을 마신다면 몸에 곧 변화가 찾아오겠지만, 그것은 더 좋은 쪽으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이처럼 방향성의 위험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많은 경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끈다. 오늘날 우리는 기존 칼빈주의 5대 교리에 집중하는 ‘신칼빈주의’의 태동을 목격하고 있다(여기서 지적하는 ‘New Calvinism’은 2006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개최된 목회자 컨퍼런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콜린 한센[Collin Hansen]이 명명한 표현으로서 19세기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에 의해 주도된 ‘신칼빈주의’ 운동과는 구별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교계는 물론 심지어 세속 매체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5대 교리에 국한시켜 이해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이 5대 교리를 개혁파 신학의 전체 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길 또는 다리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찰스 스펄전은 칼빈주의를 전체 성경신학을 표현하는 닉네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펄전을 비롯한 과거의 많은 신학 거장들은 개혁파 신학의 핵심이 이 5대 교리(곧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의 교리 체계에 반대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정립된 교리)로만 축소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개혁파 신학은 서로 분리된 여러 개념들을 그저 한데 모아 놓은 혼란스러운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개혁파 신학은 조직신학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가 곧 그분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따라서 만약 사람의 눈에 더욱 일관되어 보이도록 성경에 다른 무언가를 첨가하고 또 지나친 획일화를 추구한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방식은 신뢰할 수 있는 조직신학으로 향하는 목표가 아니다. 참된 조직신학은 성경을 거시적인 관점으로 분석하여, 전체 흐름에 내포된 신학적 구조를 밝혀낸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어떤 외부적인 생각도 덧붙이지 않으며,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일관된 방식으로 풀이하는 학문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다. 즉, 개혁파 신학은 인간에 중점을 두지 않으며, 개혁주의 전체에 걸쳐서도 하나님의 교리가 핵심을 차지한다. 사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다른 모든 교리를 알아가는 근간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선택적 구원 교리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반-가톨릭 신학이 아니다. 사실 개혁파 신학의 뿌리가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행보에 저항했던 종교개혁에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정의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는 공교회 곧 보편적인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이는 교회 역사의 초창기 1천 년 동안 정립된 에큐메니칼 신조(ecumenical creeds)를 그 본질로 삼는다. 에큐메니칼 신조는 특히 4세기의 니케아 공의회와 5세기의 칼케돈 공의회와 같은 초대교회의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에큐메니컬 신조는 삼위일체나 예수님의 속죄와 같은 정통 기독교의 모든 교파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교리를 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사상 역시 모든 크리스천이 따르는 교리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이전 것과 완전히 구별된 새로운 신학이 아니며, 기독교의 모든 교회가 따르는 공통의 신학적 기초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칭의에 대한 개혁파 신학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견해와는 다르다. 다시 말하자면 개혁파 신학은 과거의 종교개혁이 그러하였듯이 칭의의 중심에 복음이 자리한다. 개혁파 신학은 마틴 루터(Martin Luterh)나 권위 있는 종교 개혁자들의 은혜적 교리 위에 굳건히 서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은 비록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명백하게 공표되어 있지 않지만 개혁파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들이다. 이상의 모든 설명은 개혁파 신학이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훨씬 넘어서는 총체적인 세계관임을 말해 준다. 개혁파 신학은 언약적이고, 성례적이며,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개혁파 신학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종속되어 있고,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보게 하는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진정한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단순히 칼빈주의의 부활이 아니다. 참된 개혁은 우리 안에서 복음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부활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복음이 명백하고 충만하게 선포될 때, 하나님이 펼치시는 구속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세상에서 놀라운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만 구원의 능력을 행사하신다. 우리가 개혁을 원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 그만 어둠에서 복음을 끌어내어, 모든 개혁의 고백이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post tenebras lux), 즉 “어둠 후에 빛이 있다”가 되도록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루터는 “모든 입이 신약성경의 참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고 소리 높였다. 더불어 루터는 복음을 명백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갈등을 마주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또한, 본능적으로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숨기고, 복음을 희석시키며, 또 복음을 모호하게 만드는 유혹에 이끌리게도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에 내재된 세상과의 마찰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락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게 복음은 그 자체로 장애물이자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복음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개혁을 원한다면,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힘써야만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Fueling Reformati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역사
종교개혁
개혁
부흥
칼빈주의
루터
하나님의영광
시골에서 목회할 때는 천천히 진행하라
by Dayton Hartman
2018-12-18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대도시보다 느리고, 또 작다. 따라서 시골에 교회를 개척할 때는 독특한 노력이 필요하다.신학교 시절에, 나는 대도시에 필요한 교회 개척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특히 팀 켈러(Tim Keller)는 교회의 선교적 목표를 도시 중심적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렇다. 대도시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하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도시 개척에 대한 소명은, 시골에는 교회를 개척하지 말라는 소명으로 오해 받아 왔다. 켈러는 우리가 인구 증가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도시에 더 많은 교회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내용을 잘못 받아들여 시골 지역도 도시처럼 더 발전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시골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복음이 선명하게 증거되는 사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에, 우리는 도시 목회를 강조하는 와중에도 시골 지역이 안고 있는 필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도시 개척과 ‘더불어’ 시골 개척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복음중심적 교회(gospel-centered church)를 개척하려는 노력은 양쪽 상황에서 다 필요하다.수년 전에 우리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동부의 여러 시골 지역으로 둘러싸인 한 작은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개척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내용은 대도시 개척을 위한 모델과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내용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변환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작은 마을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도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그렇게 리디머교회(Redeemer Church)를 시작한 게 2013년 9월이었다. 이제는 5주년이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나는 시골에 교회를 개척하며 배운 네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1. (당신이 원치 않을 때에도) 천천히 움직여라록키 마운트(Rocky Mount)와 같은 작은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트랙터 뒤에서 속력도 못 내고 갇히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농부들은 논밭 사이를 지나기 위해 지역 도로를 이용한다.특히 내 마음이 급할 때는,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마치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해 예비된 훌륭한 기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속도를 내서 앞길을 막는 콤바인이나 수확기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그 기다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런 경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실제로 중소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이주해 간 사람인 내가, 만일 그런 경우 앞에 있는 농기구 차량을 추월하여 속력을 낸다면, 나는 분명히 외부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단순한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 있다. 작은 마을에서는 모든 일들이 천천히 진행되고,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개척도 그렇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으로 생각해야 한다.이렇듯 시골에서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좋다. 우리는 마을에 리디머교회의 비전을 제시하기에 앞서 5년 동안은 친밀한 관계와 신뢰를 쌓아야만 했다. 만일 약간이라도 더 빠르게 서둘렀다면,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2. (불편할지라도) 거주할 계획을 세우라대도시는 변화가 빠르다. 그러나 시골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시골 마을을 떠나거나 혹은 새로운 사람이 그 지역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대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개척은 종종 그 지역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활발하게 사역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소도시에서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의 한 클래스에서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이처럼 대학생들과 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유입이 없기에, 시골 지역의 성장은 느리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헌신하기를 권면한다. 만약 당신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헌신한다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헌신은 크고 작은 행동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당신의 헌신을 보여 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지역 사업이나 단체에서 자주 봉사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그 마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빨리 해결할 수 없는 지역 사회의 요구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경제 개발이나 지역 학교에 대한 투자, 또는 소외되고 학대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 등) 지역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이런 헌신은 신뢰를 낳는다. 당신이 지역 사회에 더 헌신할수록, 지역 주민들은 당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을 신뢰하게 되면, 그들이 당신이 섬기는 교회를 향해 첫걸음을 떼는 일이 더욱 수월해진다.3. (당신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그 지역의 죄악을 품어라큰 도시들은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작은 마을은 안전하고 청결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이분법이다.죄인이 있는 곳마다 죄가 있다. 우리 마을은 인종 차별, 지속적인 마약 사용, 불신, 폭력 등의 죄악과 싸우고 있다. 죄에 관해서라면, 큰 도시와 시골 마을의 차이는 규모일 뿐, 심각성은 같다. 죄는 대도시에서처럼 시골 마을에서도 심각하다.일단 당신이 신뢰를 쌓으면, 당신은 지역 공동체의 죄를 ‘우리의 죄’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외부인과 같이 지역 사회의 죄악을 지적하기보다는 그 문제에 대해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4.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더라도) 구원자에 대해 말하라결국, 당신이 그 마을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복음의 비전을 제시하라. 그래서 그 마을을 병들게 하는 죄악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라.또한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 행하실 일이 얼마나 더 밝은 미래를 그 마을에 가져올지에 대해 이야기하라. 물론 당신이 진정으로 그 마을 주민들과 지역 사회를 위해 이런 일을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야만, 당신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궁극적으로 당신은 그 마을을 실제로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혹 이런 일에 실패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구원자가 계심을 기억하라. 시골 마을의 가장 큰 필요도 역시 그분이다.시골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괜찮다. 예수님은 빛나고 반짝이는 마을에 오신 게 아니라,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들에게 오셨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ove Slowly in Small-Town Ministry번역: 고갑균
선교전략
시골목회
복음중심적
성화
헌신
친밀한곤계
신뢰
우리의죄
구원자
완전히 망가진 이 세상에서의 소망
by Paul Tripp
2018-12-18
내가 조앤(Joan)을 만나기 수년 전에, 그녀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공해서 부유한 크리스천 사업가인 헨리(Henry)를 만나 결혼했다. 그들은 교외에 여유롭게 맨션을 짓고, 훌륭한 크리스천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몇몇 흥미진진한 사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수년이 훌쩍 지나, 조앤은 건강한 자녀를 셋이나 낳았다. 전반적으로 조앤에게 부족한 것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조앤은 헨리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아니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더욱이 그는 항상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기질이 있어 보였다. 조앤은 헨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일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급속하게 확장되는 그의 사업 때문에 그가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조앤이 옳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둘의 부부 관계가 불편하고 느슨해졌다. 그들은 단지 스케줄이나 재정적인 문제가 생길 때에만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의 부재감이 점점 더해 갔다. 조앤은 둘 사이의 소원한 관계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항상 대화를 회피했다. 절박감을 느낀 조앤은 결혼 생활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헨리에게 다시 접근하기 전에 제대로 된 조언을 받기를 원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를 만났다. 조앤은 상처 입고, 좌절하고, 완전히 지쳐서, 주말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 두 명과 함께 멀리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18개월 동안, 헨리도 빠져나갈 출구를 철저히 계획하고 있었다. 모든 자산을 그의 동업자의 이름으로 전환하면서, 회사에서 손을 뗐다. 그는 빠져나가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조앤을 정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궁지에 빠뜨리기를 원했다. 조앤이 운전해서 나간 지 30분도 되지 않아, 트럭들이 집에 도착했다. 조앤이 일요일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 맨 먼저 발견한 것은 집이 완전히 어둡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목까지 차 올랐다. 안에 들어가서 문 옆의 라이트 스위치를 찾았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벽과 텅 빈 거실과 커튼도 없는 창문에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히스테리 상태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집안 곳곳을 뛰어다녔지만, 모든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녀는 부엌의 차가운 대리석 조리대 위에서 한 장의 쪽지를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헨리가 절대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만약 조앤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보러 오도록 허락하겠지만, 그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앤이 월요일 오후에 나에게 처음 한 말은 “저는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렸어요”였다. 오랫동안, 조앤의 소망은 위험한 소망이었다. 그것은 한 남자에 대한 소망, 물질적인 대상들에 대한 소망, 집에 대한 소망, 가정에 대한 소망,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소망이었다. 사람들, 사회적 위치, 또는 재산 등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것들은 결코 소망의 원천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헨리는 여전히 그들 부부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조앤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여럿에게 그녀를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고, 그 아이들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법정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조앤은 이 깨어진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아픈 삶의 현실을 직면하고 있었으며, 달아날 출구가 없었다. 그녀가 매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의존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 매우 낙심되는 시기였다. 상황이 어떻게 그토록 엉망이 되어버렸는가? 조앤과 당신,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너져버린 집과 같다. 모든 방들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손상되었다. 그 가운데 어떠한 부분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순수한 영광 같은 것으로 빛나지 않는다. 죄는 이 세상을 애석하고 끔찍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당신은 매일 육체적, 정서적, 영적, 관계적인 깨어짐으로 고투하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국소 마취 상태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망가진 집이며, 이것이 우리를 온갖 종류의 문제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 손상된 시력은 대체로 세상과 관련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영적 헌신의 신비한 삶을 수록한 고차원적인 두꺼운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일상 생활의 깨어짐으로부터 분리되는 더 없이 행복한 상태를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세상에 대한 책이다. 성경은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진실한 책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세상을 실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큰 화면으로, 세밀한 내용까지 나오는 고화질의 화면으로 직면한다. 성경은 참되고 정확한 내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의 상황에 대한 성경의 솔직함은 철저하게 진단하는 관찰을 통해 나온다. 좋은 진단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해 주며, 성경은 매 페이지마다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3장 10-18절에서도 거의 같은 말씀을 한다. 이 본문들 각각은 원래 의도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당신과 내가 직면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성경은 그 진단적인 관찰에서 정직할 뿐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스토리를 보여 주는 데에도 정직하다. 당신은 창세기 4장에서 형제를 잔혹하게 살해한 충격적인 기사를 접할 수 있고, 열왕기와 역대기에서는 표리부동한 이스라엘의 암담한 우상숭배, 그리고 성과 권력과 돈에 얽힌 권모술수를 접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정치적인 동기로 영아들을 살해한 헤롯의 이야기와 메시아에 대한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진 비뚤어진 정의를 보여 준다. 성경의 진단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성경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우리가 자신에 대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내용 사이에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당신과 나는 각자 자신을 실제의 모습보다 더 지혜롭고 성화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지적할 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잘못 판단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세상의 가장 정확한 진단 도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본질을 본다. 이것은 나의 가장 큰 결핍이 환경적인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의 가장 큰 결핍은 타락의 깨어짐이 모든 상황, 모든 관계, 모든 환경을 파괴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내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무엇을 직면하든지 상관없이, 삶에서 내가 겪는 최대의 문제는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 존재한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인 상태에서 발견된다. 내 안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그것은 내가 갈망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이 무너진 집의 가혹한 현실을 최소화하거나 축소하거나 부인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죄인인 자신의 정체성만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다. 그 무게를 우리가 감당할 수도 없다. 그런데 당신은 죄인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신은 은혜의 자녀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정체성은 건강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는 사람만이 은혜에 대해 감격할 수 있고, 오직 은혜만이 당신의 죄와 이 세상의 깨어짐의 어마어마한 현실을 겸손하게 직면할 용기를 줄 수 있다. 성경 전체는 과분한 구속의 스토리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기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임재를 통하여, 이 타락한 세상의 쓰레기 한복판에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본 모습(곧 죄인의 모습)으로부터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새로운 모습(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깊고 철저하게 변화시키신다. 오직 은혜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깨워서 죄로 망가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성경의 사건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은혜로 인해 영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 결과, 안팎의 잔해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에 귀 기울임으로써, 지금 바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을 보기 전까지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고, 이 삶에서 직면하는 현실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또는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영원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어떤 상황에서나 기독교적인 참된 소망을 가져다 주며, 소망은 통찰과 용기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손으로 하라고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이라고 하는 분명한 실재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 이생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말한다(고전 15:25-26). 이것은 우리의 세상이 우연과 혼동의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구속주의 인격적인 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이며, 그 구속주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자애로우시고, 심지어 사망까지도 패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시다. 악은 지금 패배하는 과정에 있다. 사망은 궁극적으로 죽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소망을 품을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정의와 긍휼은 이길 것이다. 그렇다면, 조앤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니, 조앤의 남편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아이들은 부모의 결혼 파탄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조앤은 대부분의 친구들을 영원히 잃었고,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수년 동안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조앤은 예전에는 전혀 품지 못했던 소망을 가졌다. 그 소망은 그녀를 결코 수치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낙담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조앤은 영원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을 보증하는 것이 그녀의 은행 통장이나 집 크기, 친구들, 남자의 사랑, 어머니로서의 일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 그녀에게 보증하는 영원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당신도 그 영원에, 바로 당신의 참된 소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 주어진 약속들, 즉 당신의 통치자가 하신 모든 말씀들은 믿을 만하며 확실하다고 보증하는 약속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배신, 불의, 분노, 복수 등이 없는 영원한 날이 올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마음을 채우지 않고, 더 이상 눈물도 흐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조앤은, 그리고 당신과 나는, 마침내 회복된 집에 들어가며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라고 말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pe in This Broken-Down World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문화
세계관
성경
하나님의은혜
참된소망
그리스도통치
구속이야기
라이프스타일
영원
영적헌신
처음
이전
196
페이지
열린
197
페이지
198
페이지
199
페이지
20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