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과 우상숭배
by 박혜영2024-04-08

고난주간 수요일 저녁에 모이는 성찬식(주의 만찬) 참석을 위해 매번 성도들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시간을 내는 일도, 가장 붐비는 퇴근 시간에 모임 시간에 맞추어 안양에 도착하는 일도, 동네를 돌고 돌면서 차 댈 데를 찾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수요일 저녁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찬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을 얻고자 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귀한 것을 얻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살펴보니 제가 성찬식에 대한 글을 다섯 편이나 썼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셈입니다. 20년 전 분립개척을 시작하면서 성찬식에 대한 저의 질문은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면, 신자들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는가? 애조 띤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음이 좀 짠해지는 그런 순간 말고, 진정 믿음이 견고해지고,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용기를 얻고,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 심지어 몸과 마음에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은혜의 경험이 있는가? 성찬식이 진정 은혜의 방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그렇다면 교회의 성도라면 질문해야 합니다. 성찬식에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반면교사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 11:20).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먹은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니”(ESV). 그들은 주의 만찬이라고 하여 먹었습니다. 그런데 참된 주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원하는 신자들끼리 모여 먹고 마신 일에 불과했습니다. 성찬 신학이 빠져 있고, 성찬 신앙이 빠져 있는 주의 만찬은 그냥 음식을 먹고 마신 시간에 불과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우상숭배 문제, 곧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고전 10:21)하는 것인데, 저들은 겸하여 참여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고, 차별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22).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성찬식은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찬의 말씀으로 그 첫 번째 문제,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거나,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문제를 살짝 다루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식을 자랑하며 강한 척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 8:1). 그러면서 이방신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친목 모임에 참석하여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친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로 모여서는 주의 잔을 마시고 주의 상에서 받아먹었습니다. ‘뭐, 어때!’ 하면서…. 오늘날 교회 신자들 가운데 다른 신전에 가서 절하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취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월급을 받고,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만나주는 거래처가 주는 돈으로 먹고산다면, 그 신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우상숭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직접 규명했습니다.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나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마음과 관심은 어느 것 하나를 중히 여기거나 경히 여기기 마련이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소득이 많아지면 생활 규모를 늘리고, 생활 규모를 늘리면 유지하거나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더 바쁘게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그러면서 신앙은 점점 경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우리가 그런 상승기류에 사로잡혀 있다면,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은 아마 경험하기 힘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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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혜영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말씀을 듣고 그 길로 행하자’ 외치는, 안양시 관양동에 있는 산오름교회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