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가장 힘써야 할 일

시편 84편 묵상

by 고명환2024-02-26

1 

꾸준하게 기독 모임에 참여하여 조용히 여러 일로 섬기는 한 대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 친구가 기특해서 격려라도 해 주고 싶던 터에, 서로 기도해 주는 순서의 짝으로 맺어져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평소 학교생활과 기독 활동에 성실한 모습을 보아 왔기에 주님과 보내는 시간을 견실하게 지켜왔을 거라는 믿음 아래,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지는지 물어보았다. 


헌데, 형제에게서 들려온 응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당황한 듯 머뭇머뭇하며, 그 친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힘겹게 대답했다. 아마도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생활화하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에 드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열심과 성실함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주님을 알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모임의 워크숍 시간에 어떤 선교단체의 스태프들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르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헌신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그 헌신의 삶을 익히 알던 차라, 한 분 한 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지하고 순수한 열정의 증거들이 기대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기도와 경건 생활에 대한 나눔의 시간에 들려온 그분들의 힘없는 고백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구동성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져 보지만 실제로 기도 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다 보니 기도 생활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에 바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바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은 자명했다. 주님을 위한 일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러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까지 나오는 이 말을 눌러야 했다. 


2

시편 84편은 총 150편으로 편집된 시편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시이다. 수사나 기교가 뛰어나거나 짜임새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소박한 언어로 주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의 공감을 쉽게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84

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1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3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4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

5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8주 만군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

9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10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11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12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새번역)

시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4절),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5절),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12절)을 언급한다. 그들 모두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님 계신 성전에서 살며 수종 드는 선별된 사람들이나, 주님을 가까이하겠다는 열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시편 15편). 언제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사는 시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이 분명하다(1-2절)


성전에서 일하며 “영원토록 찬양하는” 레위인들은 복된 사람들이다(4절). 시인의 눈에 “만군의 주님”이 계신 곳에 살며, 섬기고, 항상 찬양하는 특권을 가진 그들이 누구보다 복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으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들이야말로 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전에 둥지를 튼 새들도 주님을 곁에서 뵙고 싶은 시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3절). 이에, 성전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주님의 제단 곁에 집을 지을 수 있고 새끼 칠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조차 흠모함으로 바라본다. 그토록 주님을 바라고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성전이 자리 잡은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시온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역시 복 있는 사람들이다(5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만군의 주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경배하고 싶을 따름이다. 주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뗀 순례자들에게 앞길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5-7절). 주님께서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샘을 내어 갈증을 해결해 주시며, 먼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힘을 주신다. 결국,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올라가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이다.” 


놀랍게도 “만군의 주님”은 그분을 찾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거절치 않는다(“만군의 주님”은 네 번 반복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빈부귀천,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올 때 그 길의 모든 장애물을 없애 주실 뿐만 아니라 힘을 주셔서 반드시 만나게 하신다(5-7절)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12절). 그는 은혜와 영예를 주님으로부터 받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얻는다(11절). 이런 사람에게 주님을 떠나 행복이란 없다. 주님과 떨어진 먼 세상에서 천 일의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주님 계신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만 못하며, 악인과 함께하는 편안한 장막의 삶이 주님 집의 말단 문지기의 생활만 못하다(10절)


제사장이 아니었던 시인이 들어가 지낼 수 있었던 성전의 장소는 지성소도 성소도 아닌 ‘주님의 궁전 뜰’(the court of the Lord)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면 어떠한가. 주님의 장중이고 동일한 영광이 머무는 곳인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는 그곳은 시인에게 지성소와 다름없는 장소이다. 주님의 성전 뜰에 머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행복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73:28).


3

주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만든 열심과 충성심으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분이 기뻐하실 거라 배우고 공부한 것을 곱씹고, 고민하며, 전력으로 성취해 내는 삶은 아닐까. 그럴듯하나, 주님을 오해한 빗나간 대답들이다. 


주님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사원들이 최대한의 실적을 올리기를 바라는 회사의 CEO가 아니다. 알아서 각자 매뉴얼 대로 움직여서 그분이 고대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큰 업적을 들고 오는 것을 반기는 세상의 경영자와는 다른 분이다.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시면 언제라도 능력으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녀가 해낸 일이나 업적보다 자녀 한 명 한 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다. 참다운 부모가 자녀의 성공이나 그들에게서 받는 혜택보다도 그들 자체에 더 관심을 갖듯이, 주님은 자녀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신다. 그들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찾은 사랑의 대상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들이 목적이고 이유인 존재로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녀들과의 교제를 기뻐하신다. 교제를 통해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알려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자녀들이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여 그분을 투영하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신비로운 사랑의 수혜자였던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무엇보다 주님께 다가가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베소서 3:18-19)


사도가 표현했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체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온전히 헤아릴 수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는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그분을 생각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 속에 모시고 살 때 그 사랑의 힘은 삶에 작용하게 되고, 비로소 그분을 나타내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를 도외시하거나 소홀히 한 채 본인의 원함과 스스로 만들어 낸 열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면 어쩌면 그날에 자취 없이 타버릴 공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린도전서 3:13-15). 그것이 십자가를 높게 들어 올린 기념비적인 예배당을 지어 봉헌했든지, 선교지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했든지, 수많은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했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냈지만 정작 주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 결과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지인 자녀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5:5).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엄청난 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떠나서 이룬 일들은 받으실 만한 “열매”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불법”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7:22-23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등장할 저주받은 사람들을 언급하신다. 그들은 주님을 거듭 부르면서(“주님, 주님”),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적법자들임을 주장한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이들은 능력을 행한 사람들이다. 예언, 축사, 여기에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그야말로 ‘능력의 종들’인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들과 방법은 칭찬받고 보상받아야 마땅한 선한 일이다. 어떤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불법”으로,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덧붙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려주신다. 


실제로, 전지의 능력이 있으신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행한 업적이 아무리 성스럽고 선한 일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심판의 날에 인정받지 못할 허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님을 떠나서 자신들의 마음을 따라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쌓은 어떤 업적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일이 아니라 어두움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음도 몰랐다. (주님이 불의한 자들의 일을 위해 조종당하실 리 없다.) 


계시록의 서두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각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책망을 받은 교회들의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데 기인한다. 그들이 사명을 잊고 일하지 아니하거나 가시적인 선교적 성과를 내지 못해 책망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간직해야 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용납하는 등,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질 때 파생하는 결과로 책망을 받은 것이다. 


4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주님의 일(ministry)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을 적당히 하라, 혹은 주님은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아니다. 삶에서 우선순위의 문제와 더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잘 대접해 드리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예수님 홀로 오신 것도 아니고 일행이 들이닥쳤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부산했을지 충분히 이해된다. 손이 열 개라도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긴급상황에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렸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중대사에 마리아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톤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마리아를 책망하고 일어서게 한다면 무례한 일일 수 있지만, 마르다의 언사는 부탁이 아닌 불평이었고 주님을 향한 원망이 묻어 있다.)


의당, 마리아를 일으켜 부엌으로 보낼 줄 알았던 마르다의 불평은 효과는커녕, 가르침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few things are needed 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41, 42절, NIV) 주님은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신 뒤(개인의 이름을 두 번 부른 예는 드물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NIV)”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안정되지 못한 영혼을 지적하셨다. 


여기서, “마리아가 ‘좋은 몫(what is better)’을 선택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의하고 싶다. 마르다가 주님을 위한 일에 최선으로 종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는 일이 더 좋은 선택(the better choice)이었다.


혹여, 강단에서 이 본문이 여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위해 인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교회에 많은 충성스런 일꾼이 필요한 것은 이해되나 다른 본문으로도 목적에 부합한 설교를 풍부하게 해낼 수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편이셨다.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마르다의 열심을 부각하는 것은 주제를 비껴간 주관적 해석 이상이 될 수 없다. 최선보다 차선이 더 좋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록은 마리아를 조명하고 있다. 명백히, 주님은 그분을 위한 일에 바쁜 사람보다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죄와 인생의 무게 아래 지친 세상의 모든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


“내게로 오너라”는 초청은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오라’고 인생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석가도. 모두 죄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주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죄인을 향한 정당한 표현은 ‘가라’가 되어야 한다. ‘가까이 오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출애굽기 3:5, 19:12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셨다. 무거운 짐을 벗고 그분을 안식처로 삼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적극적으로 손짓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지치고 마음이 병든 영혼들을 일깨우는 빅뉴스가 아니겠는가?


그분의 초청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선언을 통해 더욱 적극성을 띤다. 지친 영혼을 부르는 호스트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하고 겸손하다(humble). 어떤 형편의 사람이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고 편안한 쉼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 바로 그분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쉬러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잠시 쉬게 한 다음 목적을 위해 사용할 일꾼을 모집하는 초청이 아니다. 단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지치고 억눌린 영혼을 가엽게 여겨 쉬게 하시려는 사랑의 초대이다. 


와서 할 일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한테 배우는 것이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인생에 부과된 멍에는 구속을, 짐은 고통을 던져 줄 뿐이지만, 주님의 것은 마음의 쉼(rest)을 가져다준다. 


‘오라’는 초청에 응하여 배우고 충분히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할 일이 있다면, 함께 메어 주시는 편한 멍에를 메는 것이다. (주님의 “내게 오라”는 초청은 원어의 뉘앙스 상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실천해야 할 반복 행동이다.) 주님께 다가가서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대신 자신이 만든 멍에를 메고 짐을 지는 생활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수고한다면, 그 멍에와 짐은 또다시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종래는 탈진해 버릴 것이다. 매일 주님을 찾고, 배우고, 주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아침을 잡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복음 21:15-17).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설교자들은 ‘사랑하다’는 세 가지 유형의 헬라어를 소개하며, 베드로의 대답이 최상의 사랑한다는 표현인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대답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물으셨다는 오래된 해석을 선호한다. 이와 함께 ‘내 양을 치라(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준엄한 명령으로) 강조해서 성도들의 헌신을 촉구하기도 한다. 


왜, 주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대답했기 때문에 ‘아가파오’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베드로의 고백에 사랑의 마음으로 눈을 낮추시어 어쩔 수 없이 예수님도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물어보셨을까? (실제로 그렇게 설명하는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용어를 가지고 의미를 두는 해석은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적절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여러 고대 문서는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수님도 두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다.)


무언가를 깊이 심어 주기 위해 주님은 같은 질문으로 세 번이나 묻고 동일한 부탁을 하셨다. 그 어떤 일보다도 그분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베드로를 세 번이나 불러 확인하여 강조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다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순서에 있어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시기 위해 ‘나를 사랑하느냐’는 전제조건을 거듭 확인하셨고, 그 뒤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주님의 부탁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된다. 그분의 양을 치는 일에 앞서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 그분 안에 거하는 일, 그분께 속하는 일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제쳐 두고 맡긴 사명을 좇아 열정을 불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예들 외에도, 그 어떤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사귐에 힘써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는 성경의 근거는 많다. 이를 일일이 나열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서 충분할 듯하다. 


5

한국 교회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독교는 통계가 말해 주듯 여러 면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양한 전도 전략, 세분된 신앙 성장 프로그램, 새로운 형태의 소그룹 모임, 업그레드된 어린이 청소년 교육, 참여자를 배려한 예배, 편리한 시설 등 어느 분야 하나 빠짐없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회의 대외 이미지 또한 나빠지고 있다. 


범부의 눈에도 과거와는 확연하게 가벼워진 우리 교회의 모습이 감지된다. 교회 건물 머리에 길게 늘인 유명 연예인 초청 전도집회 광고 현수막은 눈에 띄어도 말씀 사경회를 연다는 글귀는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김장 봉사, 급식 봉사 기회를 알리는 광고문은 보여도 기도회 참석을 독려하는 광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껏 차려입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메운 무리는 보이지만, 침낭을 들고 기도처로 가기 위해 서성이는 성도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모니터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에 기웃거리는 일꾼들은 많으나, 세상의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일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의 콘서트를 방불하게 하는 수련회 집회 중 팔을 높이 들어 열창하는 청년들은 보이지만, 치열하게 주님을 찾다 예배당의 긴 나무의자에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을 밝히는 젊은이들은 사라진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소셜 네트워크를 연신 체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은 보여도, 세심하게 말씀의 장을 천천히 넘기는 손가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약해져 가는 현실에 대해, 단지, 시대의 변화로 원인을 돌리거나 내부의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들의 크거나 세밀한 분석은 제쳐 두고, 내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끄집어내라 한다면, 이 땅에 진중하게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어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말씀을 직접 읽고 연구하여 그것이 주는 감동과 교훈을 얻기보다, 수고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설교나 성경해석, 간증을 듣는 것으로 영적인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주님을 묵상하며 기도로 깊이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보다, 여러 사람 속에 섞여 급한 마음으로 대충 기도를 쏟아 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으로 기도 생활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충분한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 없이, 듣고 배운 지식 정도에 만족하며,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도들이 늘어남과 함께, 소리는 요란해졌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밝히고 선도할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진정한 내면의 힘은 지속적인 주님과의 진지한 교제를 통해서 길러진다. 끊임없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로 주님의 세계 속에 머무는 시간이 쌓여 감에 따라 그분의 능력과 형상을 드러낼 힘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는 그 분에 대해 듣는 것으로,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주목하고 그분의 세계에 몰입하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성도를 만나는 시간, 공식적인 기도회에 참석하는 시간, 같은 뜻을 가진 동역자와의 교제의 시간이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주님을 위한 일들이니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시간들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대체할 수 없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귀 기울여 듣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영적인 양식과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


목사로서 주일 맞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매번 긴장과 두려움이 따른다. 성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함께 그 시간에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로 드려져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런 긴장과 염려는 잘 된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주님에게서 오는 자신감과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가까운 관계가 준비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토요일은 온전히 주님과 개인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으로 떼어 놓았다. 그날을 사람을 만나는 일로, 행사에 참여하는 일로, 혹은 다음 날 설교문을 만드는 일로 보내지 않았다. 주일에 전할 말씀은 토요일 전에 준비했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 묵상하고 기도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예배를 드릴 장소에 들러 성도들이 앉을 자리 하나하나를 붙잡고 한 분 한 분을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해 드렸다. 모두가 다음날 주님 앞에 나와, 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얻어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했다. 


고백이 난무하고 표어들이 이곳저곳을 장식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결핍되면 개인이나 교회는 힘을 잃어버린다. 시편 기자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라고 표현했듯이 그리스도인의 힘은 주님과의 교제에서 온다. 각자에게 주어진 성도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할 만한 생명력 있는 삶의 힘은 끈질기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든든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독교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고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만을 주목했던 마리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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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