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 여전한 유혹

시편 49편 묵상

by 고명환2024-01-25

1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을 바란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에, 성공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의 아들이 의사가 되었다.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뒤, 험한 일을 해가며 자식 뒷바라지를 했으니 나름 성공한 것이다. 


일전에, 그분에게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려는 동기를 물은 적이 있었다. 들려온 답은 간단했다. 아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의대에 가려 한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적성에 맞아서’나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아니면 ‘보람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서’ 정도의 상투적인 선택 동기를 기대했는데, 정제되지 않은 솔직한 대답에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돈을 좇는 것에 냉소를 보내고 싶지 않다.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들에게 돈은 안정과 안락함을 보장해 주는 수호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돈은 갖고 싶은 것 갖게 해주고,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주고, 병들었을 때 치료받게 해주고, 고민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해주며, 편안히 쉴 공간을 제공해 준다. 물신의 통치 아래 사는 시민에게 돈은 쾌락이요, 안정이요, 권력인 것이다.


허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 편승해서 성공과 돈을 좇는 대열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풍조는 그들이 진정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이생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의대 보낸 이웃을 부러워하고, 안되면 치대라도 보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녀를 일찍이 학원으로 몰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를 대할 때면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투기를 목적으로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불필요한 땅을 사둔 사람들도 교회의 요직에 배치되어 있다. 백세가 보장된 것처럼 ‘백세시대’를 노래하며 그때까지 누리고 즐길 넉넉한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장로님 목사님들 앞에 하루하루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빈자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진다. 예배 시간에 백억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는 당회장 목사를, 거부가 교회에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장로님을 마주할 때면 이곳이 교회인가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8). 과거에 그리스도인들 입에 제법 회자되던 성구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겸손한 기도와 가르침을 듣기는 쉽지 않다. 물질의 어려움 없게 해 달라는 기도나 사업이 잘되어 주님을 위해 멋지게 쓰게 해달라는 기도를 더 듣게 된다. 겨우 의식주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디모데전서 6:8)고 가끔이라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주변에 있는가? 


의식주만 해결되면 자식 교육, 문화생활,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가르치면 교회 건축, 선교 등의 교회 사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런 시대적 필요 앞에 자족과 절제 같은 성경의 미덕은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 속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2

시편 49편


1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2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

3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한다.

4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

5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7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비싼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다.

9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

10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

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

11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12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13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

14그들은 양처럼 스올로 끌려가고,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아침이 오면 정직한 사람은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시들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

15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셀라)

16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

17그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그의 재산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18비록 사람이 이 세상에서 흡족하게 살고 성공하여 칭송을 받는다 하여도,

19그도 마침내 자기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20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새번역)

“들어라(Hear)” “귀를 기울여라(Listen)(1절)

시인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며 시작한다. 그가 하려는 말을 흘려 버리거나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혜(wisdom)가 있고, 명철(understanding)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련한 짐승처럼 근시안적 삶을 사느냐(12, 20절), 미래를 내다보고 영원을 사느냐 하는(14, 15절) 중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2절), 들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1절)은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저주 받은 이방인이든 가릴 것 없이, 삶을 부여받은 피조물들은 지혜를 말하고 명철을 주며 인생의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시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3, 4절).


시인은 단지 부자들을 경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만을 향해 교훈하려고 그들을 첫머리에 부르지 않는다. 만백성(all people)을 부른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all who live in this world)에게 외친다. 누구도 예외 없이 들어야 할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호소하듯 “들으라”고 외친 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경고한다. ‘죽음의 목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높은 자, 낮은 자, 부자, 가난한 자, 우매 자 혹은 지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라고 소리를 높인다(10절)


이 죽음 앞에 사람은 조금도 저항할 수 없다. 양처럼 지각이 없는 존재인 사람은 목자인 죽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14절). 다만, 보이는 물질세계의 위력에 눈이 멀어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없는 것뿐이다. 


‘죽음의 목자’를 따르는 선두에는 가진 자들이 도열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놓고 의지하는 부와 권력이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며(18절), 영원히 기거할 집(11절)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어두움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무덤이 영주할 주인인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11절)


‘죽음의 목자’가 이끄는 대열의 선두 뒤에는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며 그 대열에 진입하고자 애쓰는 무리가 있다(13절). 그들은 가진 자들의 교훈과 철학을 기뻐하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충고를 반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기회를 제공하는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가진 자들만이 보이지, 가진 자들 앞을 인도하는 ‘죽음의 목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영원한 거처,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19절)으로 향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밝힌다. 반면, 거기에 따르는 구체적인 훈계나 교훈은 절제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시인의 외침만으로도 청자나 독자들이 각자의 인생의 좌표를 점검하게 만든다. 더하여, 시 안에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


부언) 부한 자들을 경고하고 부를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를 전체를 수렴하는 주제로 내세우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따라서, 새번역 성경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부유함을 의지 하지 말아라”는 제목은 적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재물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바꾸거나 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일깨워 주고(6-8절), 소멸하지 않는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의 자신감은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확신에서 나온다(15절).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시인이 부자를 두려워하거나(6절), 그들로 인해 초라해질 리 없음은 당연하다(16절).   


3

소유욕은 정말 질긴 욕망이다. 만족할 줄 모르며 중단할 줄도 모른다. 한 사람을 주관할 수도 있고 집단을 조종할 능력도 있다. 영특해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때도 있고, 숨어 정체를 숨길 때도 있다. 다스림 받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뛰쳐나가 일을 벌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통 채로 삼켜 버리기까지 한다. 


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범죄 기록을 거론할 때 간음죄를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면 살인죄를 붙여 풀어 나간다. 물론 이 둘로 해석하고 교훈을 얻는다 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면 사건의 온전한 실체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간음과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은 원인이 빚어낸 결과임을 찾아 낼 수 있다. 그 사건의 이면에는 엄청난 일을 벌이도록 작용한 배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범죄 당시, 다윗의 인생은 절정기에 있었다. 불안했던 왕위가 확고하게 안정되었고 왕국을 위협할 만한 주변의 큰 이방 민족들은 모두 평정되어 직접 전쟁에 나가도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에 해당하는 영토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었고, 이에 앞장섰던 다윗왕을 향한 백성의 신망은 매우 두터웠다. 아내로 삼은 여섯 여인에게서 여러 왕자가 태어나 왕가 역시 크게 번성했다(사무엘하 3:2-5). 왕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부를 누리는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내면에 도사린 탐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통제를 벗어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밧세바를 소유했고, 이를 덮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다윗이 일시적인 성적인 유혹을 못 이긴 간음죄 정도로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다. 나단 예언자의 입을 빌어 예를 든 비유 중, 많은 양과 소를 가졌는데도 손님이 오자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대접한 부자의 탐욕이 다윗 안에 숨어 있음을 먼저 들추어내신다. 그런 뒤, 직접적으로 그의 근본적인 잘못이 무엇인지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또 내가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하여 주었다.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 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하였다.” (사무엘하 12:7-9)


주님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고 상전의 아내들을 그의 품에 안겨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다. 나라와 백성을 맡기셨고, 그것으로도 부족하게 여기었다면 그 이상 무엇이든 더 주실 마음이셨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의 소유를 부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악한 일의 원인이 만족함이 없는 그의 소유욕에 있었음을 집어 내시고 그것을 간음과 살인보다 더 악한 것으로 판단하셨음을 들려준다. 


마가복음 10장에 전도유망한 한 청년이 등장한다(누가복음 18장, 마태복음 19장). 공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관리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부자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성공한 엘리트 젊은이였다. 거기에 신앙심도 깊어 하나님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켜온 믿음 좋은 청년이었다. 아마도, 믿음 좋은 딸을 둔 부모들이라면 사윗감으로 삼고 싶은 보기 드문 젊은이였다. 


돈과 지위를 이미 거머쥔 이 부자 청년은 무엇이 부족했던지 예수님을 찾았다. 그가 한 질문이 이유를 말해 준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자 청년은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나사렛 청년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부자이고 지위가 있는 젊은이가 예를 갖춰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질문한 것을 볼 때, 이미 주님에 대한 상당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얻고자 하는 바, 영생의 길을 예수님은 알려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겸손하게 다가와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계명들을 나열하시며 “생명의 길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랍비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할 만한 평범한 대답을 먼저 하신 것이다. 


이에 부자 청년은 말한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참으로 비범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다. 세 복음서 기자들이나 예수님께서 청년의 대답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은 진실했던 것 같다. 


마가는 이즈음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삽입한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마가복음 10:21). 기자는 한 개인에게 예수님께서 따뜻한 시선을 보이셨다는 흔치 않은 설명을 덧붙인다. 마가의 관찰대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아버지가 자랑스런 아들을 사랑하듯, 여러 면에서 칭찬할 만한 청년을 주님은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헌데, 주님은 이 부자 청년을 그것으로 놓아주시지 않는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쉬운 해답을 들려주시지 않았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다시 구축해야 할 혁명적인 길을 제시해 주신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 10:21)


시간이 흐르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을 버리고 영원히 남을 것을 대신 소유하라고 도전하신다. 영원한 보물 저장고에 그의 소유를 옮기고,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유로 삼았던 돈, 명예, 도덕성의 추구, 종교적 업적이 줄 수 없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린 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추구해 오던 인생의 업적을 모두 해체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산과 같은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꾸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섞어질 것을 썩지 않을 ‘하늘의 보화’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만 임시적인 세상의 보화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하늘의 보화로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이 트레이드를 보장해 주시는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 청년에게는 그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예수님을 다른 랍비들과 다른 정도의 수준이 아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시는 메시아로 믿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이 트레이드에 실패했다. 그를 사랑했던 예수님과, 갈구하던 영생의 길을 뒤로하고 근심하며 떠나가고야 말았다. 많은 소유가 그를 붙들었고, 청년은 이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마가는 청년이 결단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


초대형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젊은 목사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제자화 전략을 통해 소규모 교회를 거대 교회로 일구는 데 성공했다. 물론 교회 주변에 신도시들이 생겨서 교회가 커지는 데 일조한 면도 있었다. 교회의 몸집을 더 이상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시점부터는 꾸준히 분립개척을 여러 번 해왔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가 커지면 한국 교회가 손대는 대안학교, 복지시설 등도 운영해서 교회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6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일년 후에 조기 은퇴할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이젠 “번아웃(burnout)” 되어 더 이상 목회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 목회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조그만 목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목회다운 목회를 하려면 교회가 200명 이상이 되면 어렵다는 소견을 가졌던 나는 그분의 결정을 반기며 잘 생각하셨다고 맞장구를 치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분의 장래 계획은 나의 기대를 금방 깨고야 말았다. 조그만 교회를 일구어 큰 교회에서 못한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심정으로 섬기고 돕겠다는 소박한 꿈이 아니었다. 목회자들을 컨설팅하는 사무실을 열어서 자신의 목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컨설팅 자격증을 땄고 교회에서는 그 일에 이미 지원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교회에서 마련해 준 공간에서 자신의 목회 성공(?) 노하우(교회를 크게 만드는 비결)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목회자들의 멘토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성공한 목회자가 성공을 위해 몸부림 치지만 어떤 이유에서 건 고전하고 있는 후배를 위해 나선다는데 박수치고 기대감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길은 더 높은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본인의 또 다른 욕망 성취를 위한 시작은 아닌지.’ ‘목회라는 책임감과 정신적 압박의 자리에서 비켜나, 힘들이지 않고 여전히 존재감을 잃지 않을 자리로 옮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스쳐 가는 의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한편, 그분이 젊은 시절 부목사로 시무했을 당시의 담임목사님의 은퇴에 대해 언급했다. 개척해서 견실한 중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기까지 고생하신 목사님에게 교회가 은퇴 처우를 섭섭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흔히 있는 불미스러운 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멈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 교회에 함께 다녔던 장로님을 만나는 기회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은퇴하시는 목사님에게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섬겨 드렸다고 했다. 원로 목사님으로 추대해서 담임목사님이 받는 80퍼센트의 사례비를 매월 지급하고 있고, 퇴임 후 퇴직금은 물론, 편안하게 사실 아파트까지 마련해 드렸다고 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내가 판단하기에도, 기본적으로 개인 재산이 있으시고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뒷바라지가 끝난 노년에 그 정도면 사모님과 큰 불편 없이 살아갈 만한 충분한 지원이었다. 그런데도, 그 성공한 목사님은 자신이 모시던 담임 목사님이 섭섭한 대접을 받고 은퇴했다고 전해주었다. 


궁금하다. 작은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키운 그 목사님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 어떤 퇴직이 보장될지. 분명한 건, 섭섭하게 보냈다던 그 목사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퇴직금과 생활보장이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존재감을 보여주며, ‘성역’을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재물이 주는 편리함을 향유하고, 그것이 가진 힘을 행사하며 넉넉한 노년을 보낼 것 같다. 


4

얼마나 가져야 하는가? 

성경은 그 한계를 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 소유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이 가져야 할 분량의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얼마나 소유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각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에 실패를 가져오는 어떤 소유도 정당화될 수 없다. 소유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관계에 틈을 만든다면 소유는 악이고 적인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 정도의 양이 각자가 가져야 하는 분량이다. 미련 없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가치에 눈을 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와도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린 부자였다. 단지, 가축과 재산만 소유한 부자가 아니라 주변의 왕들과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는 훈련된 사병을 보유한 강력한 족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진 것을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낮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그의 소유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 롯에게 좋은 곳을 선택할 기회를 먼저 줄 수 있었고, 자식들에게도 공평하고 적정하게 재산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에게 많은 소유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수중에 있었어도 그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욥 역시 가진 자였으나 가지지 않은 자처럼 살았다. 그의 거대한 재산이나 많은 자식이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재산도 자식도 축복으로 생각했으나 소유로 여기지 않았다. 잠시 자신에게 맡겨진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했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기 1:21, 새번역)


그의 곁에 있다가 사라진 많은 것들, 재산, 자녀, 건강, 신뢰 같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일시에 잃었을 때, 욥은 권리를 가지신 주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보통 욥의 믿음을 강조하는 선에서 관찰을 멈추고 끝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행동도 간과하지 말고 주목하기를 바란다. 


욥은 잃은 것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주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찬양을 통해 영광을 돌린다.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하셨기에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합당하며 선한 뜻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차원 높은 믿음의 표현까지 실천했던 것이다. 


보았듯, 많은 소유가 욥과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소유주로 착각하지 않고 만유의 하나님을 소유주로 바르게 인식했던 믿음의 사람을 상실이 침몰시키지 못했다.


5

인류의 타락 이후 소유욕은 사람들 마음의 빈자리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에덴 동산에 머물 때는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소유하지 않더라도 불안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등진 이후 사람들은 소유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힘과 만족으로 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서로를 소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소유는 영혼의 불안과 공백을 채우는 양식이 되었고,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아 갔다. 그런 뒤,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마저 그것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부유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소유가 영혼에 밀착되어 사고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성경의 여러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많이 거둔 소출에 취해 영혼마저 부유해진 나머지 커다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가 소유와 영혼의 주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혼에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누가복음 12:19, 새번역)


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소출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앞으로 즐기며 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영혼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그날 밤 영혼을 회수할 수 있는 절대자가 권리를 행사하면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는 영혼을 소유에 빼앗긴 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계획을 세웠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유로 인해 전 인생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를 마음에서 분리해 내야 한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마음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내게 주어졌으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넘어 외유와 관광이 잦고, 사치와 호식을 축복으로 자랑하며 고민 없이 즐기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선교지를 방문한다는데 골프 장비를 가지고 가야 할지 테니스 채를 가져가야 할지 저울질하는 목사들의 들뜬 고민이 들려 오기도 한다. 과연 이분들 영혼 속에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사도 바울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여러 자격에 대해 열거할 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디모데전서 3:3)라는 항목을 포함시킨다. 바로 이어서 언급하는 집사의 자격보다 감독(overseers)의 자격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아, 감독이 중요한 직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해야 한다’(not a lover of money)는 요구조건은 집사가 될 사람들에게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아니해야 한다’(not pursuing dishonest gain)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수준 높은 자격요건인 듯하다. 그만큼, 영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일꾼들은 소유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소유에 의해 잠식당하기 쉬운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점검하는 엄격한 표지의 하나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던 젊은 시절에 사방을 빽빽하게 책으로 장식한 목사님들의 사무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많은 책은 그분의 영적인 내공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그 무게 앞에서 나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심리적 위축감이 들었다. 교회는 담임 목사님의 도서 구입비로 상당액을 사례비 외에 지원해 주었고, 어쩌다 지나치는 당회장실 문 옆에는 배달된 큼직한 책 박스가 눈에 띄었다. 어느 날, 당회장실 소파에 앉아 목사님을 마주할 때,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할 겸 객쩍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이 참 많으시네요.”


“아! 내가 책 욕심이 많아요.”


목사님이 반색하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


“새 기독교 서적이 나오면 무조건 알아서 내게 배달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고 보니, 구석에는 아직 끈도 풀지 않은 큰 박스 두어 개가 눈에 띄었다. 


‘책 욕심’

욕심이 책과 결부되면 미덕으로 둔갑하는가 보다. 


그럴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개인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책 읽기에 욕심을 부린다면. 


하지만, 공간을 꾸미기 위해 수집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도 미덕이 될까. 

미덕은커녕 허세가 되지는 않을지. 


유학을 결심하고 짐을 부쳐야 할 때가 되었다. 거기 가서도 필요하리라 선택된 물건들이 박스에 쌓였다. 그중에는 생활비를 아껴 구입한 주석서, 성경 사전 등의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이 박스들의 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공부하러 가니 충분히 그곳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일반적인 신앙 서적들은 어느 교회에 기증한 터였고, 신중하게 챙긴 알짜들은 그 나라까지 기어코 나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석, 사전류 등을 없는 살림에 열심히 구입했고,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서 그 덩치가 점점 커졌다. 이렇게 모은 책들은 빈번한 이사 때마다 싸고 풀고 정리하는 일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그때마다,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어디에 정착한 후 번듯한 공간이 생기면, 더 이상 박스에 담을 일도, 풀어 책꽂이에 반듯하게 정리할 일도 없을 거라는 작은 소망을 위안 삼아 며칠 간의 정리 작업을 해내곤 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그런 날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또다시 박스에 싸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번엔 달랐다. 이제 많은 책 박스들은 귀국하는 짐이 되어야 했다. 


‘그동안 애착을 가지고 구입하고, 끌고 다녔던 것들인데. 또, 한국에 가면 구할 수 없는 원서들인데. 앞으로 주의 일을 하려면 필요한 재산일 텐데.’ 


두 번 생각할 이유 없이  당연히 함께 가야 할 짐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준비하면서 책들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곳에서도 저 많은 책을 풀고, 정리하고. 또, 다시 옮겨 할 텐데, 같은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가?’ 


앞으로는 새로운 것을 살림으로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미 의복 외에 정들었던 세간을 처분해 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책들은 끝까지 곁에 있어 주어야 할 것 같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과 생각은 그것들도 이젠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계속 사인을 보내왔다. 


마침내, 모든 책을 처분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들춰 볼까 말까 하는 두꺼운 책들이 상당수였고, 어떤 책들은 구입한 후 나중에 읽어 보리라 마음먹고 표지도 열어보지 않은 채 몇 년을 끌고 다닌 묵은 것들도 있었다. 이미 읽었지만, 나중에 또 한 번 보겠다고 보관하고는 다시 꺼내지 않은 책들도 제법 되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늘 가까이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힘들여 소유할 만한 이유보다 보내고 나서 오래도록 아쉬워할 만한 이유가 덜한 것들이었다.


책을 떠나보내도 정 필요하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기본적인 기독교 서적 정도는 구비한 목회자를 찾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아니면, 전자도서를 사거나 빌려 이용하면 짐스런 책들을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아도 필요를 채우는 데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애착을 가졌던 값나가는 책들을 팔고, 주고, 버리는 일은, 결코, 쓰지 않는 생활용품을 처분하는 것처럼 즐겁게 할 일이 아니었다. 마치 폐업정리 하는 주인과 같이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분은 목회자인데 책이 별로 없어.”


오래전, 한 집사님이 어떤 목사님 방을 들여다본 후 하던 소리가 생각났다. 


더불어, “책 욕심”이 많다던 그 목사님의 소리도 겹쳐 들려왔다. 


다행히, 단권 주석 두 권, 성경 두 권, 신학 사전 두 권을 빼고는 모든 책이 순조롭게 정리되었다. 남긴 여섯 권의 책은 급할 때 가까이 두고 쓸 의향으로 떠나보내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도 처분한 책들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없는 아쉬움보다 자유로움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마음 한켠에는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거기에 두려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 책이라는 조그만 소유로 영혼이 부요한 적이 있었음을 후회하는 마음 또한 지우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풍족하게 주시는 이유는 명백하다.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다. 사치와 향락에 쓰기보다 돕고 사랑하는 데 쓰라고 주신다.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소진하라고 주신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여러 목회적 충고 가운데, 부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내용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넉넉한 형편을 주시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에게 ‘명하라(command)’는 강한 어휘를 사용한다. 오늘날, 사도의 명령 그대로 교회 안의 부자들에게 명하여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다면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17-19, 새번역)


하나님은 부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부를 맡기셨다(18절). 한낱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게 하는(17절) 사적 소유물로 간직하라고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맡기신 부를 “아낌없이” “즐겨” 베풀고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허락하신 것이다(18절)


주님의 뜻대로 소유를 흘려보내는 일은 결코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늘의 계좌로 이체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정성스럽게 보내 준 쓸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섬김이 사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마음에 새겨지는 선물이 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장부(account)에 기록되는 열매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빌립보서 4:17).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늘에 계좌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사랑으로 베풀고 나눈 소유는 자신의 하늘 계좌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쌓이게 됨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누가복음 12: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지 않는 적절한 설명이다. 소유를 떠나보낼 때, 나의 장부의 잔고가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기보다 보상이 반드시 따르는 안전한 계좌에 입고되었다고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성경 원리를 따라 맡겨진 부를 적절하게 내보내는 일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최상의 투자이며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7

이제, 긴 전개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소유가 끄는 힘은 너무도 강하다. 타락한 본성 안에 도사린 소유욕을 부추겨 어떤 사람이라도 수하에 거느릴 수 있다. 수십 년의 선한 업적과 명성을 쌓은 지도자라고 말년에 소유의 희생양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탐하다 오명을 남기고 떠난 교계 거성들이 근자에도 제법 되지 않은가? 


시인이 말한 부와 성공이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는 진리와,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재산이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흘려듣지 말기를 바란다.


소유를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분리해 내고 객체화하는 작업을 통해 소유의 지배를 끊어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유는 서서히 그 편리함과 위력에 나를 취하게 하고 마비시켜, 도저히 분리해 낼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에게는 성공한 자로 칭송과 명예를 얻게 할지 몰라도 생명의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성에는 실패한 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소유에 대한 집착을 이길 적극적인 방법은, 가지셨으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속에서 그 어떤 소유보다 귀중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면, 또 그분이 약속한 하나님 나라가 실상으로 다가온다면, 소유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단순한 원리이지만 최선의 해법이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혹은 목회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성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임을. 

예수님께 나와 영생의 길을 물었던 성공한 부자 청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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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