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팀 켈러,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역사에 귀를 기울였다
by Michael Keller2024-01-22

THE KELLER CENTER  

작년 암 치료를 받고 있던 아버지(팀 켈러)에게 나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지 물었다. 구체적으로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 신칼빈주의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는 신앙을 형성하던 초기 단계에 내적 경건보다는 기독교가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신칼빈주의의 영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카이퍼와 바빙크가 체험적 경건에 관해서 남긴 저작물이 없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단지 영어로 번역된 그들의 책을 접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내적 경건에 관한 글을 더 많이 읽기 위해서 영국 작가들을 찾았다. 그 결과 개혁신학을 개인적이고 체험적 모델로 삼은 에드워즈와 존 오언, 그리고 여러 청교도의 책을 읽었다.


켈러는 우리가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믿음과 예수님으로 인해 달라진 마음의 변화는 전혀 다르다. 켈러는 신칼빈주의 자료를 통해 점점 더 탈기독교화해 가는 공간에서 체험적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개혁주의를 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오웬과 에드워즈로 인해 형성된 “경건주의적” 성향을 카이퍼, 반틸, 그리고 바빙크로 대표되는 신칼빈주의에서 비롯한 “문화주의” 성향과 독특하게 융합했다.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긴 하지만, 이 두 개혁파의 전통을 하나로 합친 사람이 팀 켈러 외에는 거의 없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켈러가 그 방법을 택한 것은 1980년대부터 2020년대에 걸쳐서 떠오르는 세속 문화에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켈러가 추구한 신칼빈주의/문화주의 형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의 경건주의적 감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그가 추구한 맥락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두 번째로, 역사적 순간에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경건주의적 가치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적용점을 살펴보겠다. 


역사적 맥락


우리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비판적이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켈러의 삶과 사역이 다루고자 했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독교가 당연하게 공공의 도덕적 권위로 여겨지던 분위기가 쇠퇴하던 1950년에 태어났다. 1700년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직면했던 계몽주의 개인주의가 서구의 중심 이야기로 성장한 시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 뉴욕에 도착했을 때, 켈러가 만난 가장 뚜렷한 미전도 그룹은 경력 압박에 압도되어 어려움을 겪는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계층 이동이 활발했다. 성적으로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외롭고 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조직화된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불신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리학적 용어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딘가에 헌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삶에서 만나는 더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왜 일을 하지? 켈러가 만난 사람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을 직업과 통합하려고 애쓰는, 도시가 개인 생활에 가하는 윤리적 압력을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은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켈러는 복음을 과연 어떻게 전했을까?


켈러 사역에서 만나는 두 가지 경건적 적응


켈러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가지 혁신 기술을 사용했다.


1.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재발견하면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대각성 운동 내내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로 다양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뚜렷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반대 경우를 흔하게 접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 악의, 비통함, 전반적인 비열함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도 (부흥을 단순한 감정주의로 일축한 찰스 천시와는 반대로),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가 단지 외적인 표현에 뿌리를 둘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고전 13:1-3). 심지어 순종의 행위도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부흥론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시종일관 오직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할 때에만 구원(eternal acceptance)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켈러는 1980년대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다 순종만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켈러의 스승인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가 지적했듯이, 많은 그리스도인은 칭의에 기초를 둔 성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성화에 기초를 두고 칭의를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영적 쇄신이 가져다준 역동성의 실천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깨우고 세속적 불신자를 개종시켰다. 켈러가 자주 말했듯이, “당신은 순종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관용구는 러브레이스가 들려주는 에드워즈 해석의 요약이기도 하다. 모든 순종은 감사하는 믿음의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순종이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종종 제자도와 전도를 분리했던 1980년대의 많은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비그리스도인의 핵심 문제인 불신앙이 사실상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문제와 하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죄를 짓는 순간에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우주의 창조주로부터 자신들이 사랑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오로지 성화만을 칭의의 증거로 여기는 한, 결코 구원을 주는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단지 “열심히 노력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라는 메시지가 아님을 깨닫도록 도움을 받았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위해 살고 죽으심으로써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칭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를 간단하게 표현할까?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거의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신학 전문 용어의 도움이 없이도 복음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이 메시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켈러가 제시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인이고 결함 투성이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꿈꾸던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이 간결한 문구는 복음의 본질을 요약한다. 죄많은 인간의 본질적인 깨어짐과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무한한 사랑과 수용 사이의 긴장을 분명히 설명함으로써, 켈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신학적 개념을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메시지로 뽑아냈다. 


이 말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교회에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들로 하여금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이는 또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나아가서 변화와 구속, 회복을 은혜 안에서 누리도록 인도하고 촉진하는 빛의 역할을 한다. 


2.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1980-1990년대에 걸쳐서,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는 그리스도인과 믿는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속성 있는 목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믿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못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에드워즈의 통찰력은 여기에 답을 준다. 즉, 정서적 (마음) 영역이 인지적 (머리) 영역과 얽혀 있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확언이다. 진정한 이해는 지식을 넘어 체험까지 포괄한다. 


에드워드는 설교 “하나님의 그리고 초자연의 빛”에서 지식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이 인지할 수 있도록 부여하신 선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단지 개념적일 뿐이다. … 다른 하나는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어떤 개념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때와 같다. …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은혜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꿀이 달콤하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꿀의 단맛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생각은 켈러의 설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설교는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플랫폼도, 그렇다고 감정적 반응만을 끌어내는 통로도 아니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성경의 진리를 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상의 목적을 이루었다. 설교를 통해서 진리가 만져지고 체험될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했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영적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에드워즈의 확신을 받아들인 켈러는 생생한 이미지와 가슴 아픈 삽화가 지닌 상상력을 통해, 설교에는 이 땅과 궁극적 실재 차이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에드워즈는 결코 “무조건 말씀을 선포하라”는 뻔한 격언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사명이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만지고 체험하는 실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켈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당신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을 녹이고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지향해야 할 변혁적 목표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서 교인들을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진리의 만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켈러는 에드워즈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관해서 개인 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는 내게 지금 만연한 20세기 강해설교가 실제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었다. 설교가 지나치게 지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단순히 … 감동을 자아내는 감성적인 이야기로 설교를 채우는 건 결코 아니다. 답은 이미지, 예화, 내러티브 등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구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 있다. 신학교 시절에 나는 에드 클라우니(Ed Clowney)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배웠다. … 그리고 러브레이스로부터는 에드워즈의 부흥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 그러나 내가 복음주의 하위문화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이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내 설교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모든 게 다 빠진 전통적 강해 설교라는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 나는 그때에도 분명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단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고 그분처럼 살라고 교인들을 다그쳤을 뿐이다.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뉴욕에서 설교하는 강렬한 경험이 필요했다. …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했을 때, 사실상 내게는 필요한 모든 신학적, 역사적 자원이 다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켈러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춰서 질문하게 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우리 속 자원을 다르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면, 그 자원이 우리의 접근 방식을 어떻게 향상시킬까? 현재 상황을 반영하는 필요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끼치는 영향을 받아들인다면, 복음을 전달하는 나의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개념, 진리, 범주 및 내용까지 보유하고 있던 켈러였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상황이 가져다주는 긴급한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고 변혁적인 변화가 성경의 진리나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재형성했다. 그는 복음이 다양한 청중의 귀에 다 들릴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야말로 효과적인 상황화를 위한 필수 프로세스이다. 


모든 세대를 위한 복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켈러의 경건주의적 가치를 분석하면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은 재창조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막 부임한 목사였을 때, 나는 교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자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로서 켈러가 말했다. “내 몸에 원래 내 것이었던 뼈는 하나도 없다. 내가 설교하는 모든 내용은 따지고 보면 다 다른 곳에서 나온 거야.” 이것은 중요하다. 재창조가 목사나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정말로 좋은 소식이고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바뀔 필요가 없다. 우리의 임무가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자. 


둘째, 복음은 불변하나 문화는 변한다는 게 켈러가 지향한 중요한 원칙이었다.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만 해도 교회에는 “죄”와 같은 용어를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경 지식을 갖춘 교인이 대부분이었고, 목사는 그런 사실을 전제로 설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 켈러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복음을 아예 새롭게 바꾼 건 아니다. 단지 접근 방식을 조정했을 뿐이다.


켈러가 활용한 공식은 인간의 마음에는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무질서한 사랑을 품고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었다. 좋은 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순간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죄 많은”(sinful)이라는 용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우상 숭배의 언어를 활용했다. 즉,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몰두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수준에까지 이른 현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특정 범주가 부족하다고 개인을 비난하는 대신, 켈러는 복음을 청중이 접근할 수 있는 용어로 바꿔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복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켈러의 접근 방식을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끊임없이 상황에 맞게 조정함으로(바꾸는 게 아니다), 나날이 더 깊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발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려는 대상에게 과연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셋째, 문화적 변화 속에서는 역사적 맥락 전반에 걸쳐서 지속해온 유사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었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라 현대에 필요한 소통을 위해서 귀중한 자원이다. 우리의 과제는 죄, 수용, 사랑에 관한 진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그 용어를 적절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불신앙과의 싸움은 보편적이며,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전달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지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은 체험적 참여와 변혁적 변화를 모두 요구한다. 복음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당장 우리부터 복음으로 인해서 움직이고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부지런히 분별하고 있는가? 그럼으로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복음 선포가 과거와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격차를 효과적으로 메우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해서 사람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쉬지 말고 새롭게 번역해 내야 한다. 단지 이론으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많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이것이다. 내가 좋은 삶을 살고 있기에,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 거야. 이러한 불일치는 만연한 초조감, 불안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당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체험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경우에 복음은 현실이 아닌 이론적인 개념으로 전락한다. 결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힘이 단지 교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깊이 느껴지고 실천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복음의 진가를 발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제야 비로소 그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를 다니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불안, 분노, 시기, 취약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만족, 감사, 평안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낫다고 느낀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단지 “순종하면 받아들여진다”는 또 하나의 수행 모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럼으로써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방식임을 깨달을 때야 그들의 삶은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원제: My Dad (Tim Keller) Listened to History to Speak the Gospel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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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Keller

마이클 켈러는 암스텔담 Vrije Universitiate(PhD)에서 공부하고 2017년 4월 아내 사라와 함께 Redeemer Lincoln Square 교회를 시작하여 보스턴과 뉴욕의 교회들을 12년 넘게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