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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더 깊이 들어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우리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

by 김선일2024-01-1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종교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우선 한국의 3대 종교인 개신교, 불교, 천주교 모두에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가장 높다. 이는 우리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202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을 신앙생활의 이유로 꼽은 개신교인들은 42퍼센트로 나왔는데, 이전 조사들(2017년, 2012년)의 37-38퍼센트에 비해서 유의미하게 높아진 수치이다. 반면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개신교인들은 42.5퍼센트에서 35.9퍼센트로 많이 떨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신도들과의 친교를 위해서’라는 응답이 종전의 1퍼센트대에서 2023년 조사에서는 6.5퍼센트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교제를 위해서 종교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조짐이지만, 이는 그만큼 현대인의 외로움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과 영생이라는 신앙의 핵심적 목표보다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더욱 높아진 것은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더욱 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을 갖는다는 응답이 천주교의 경우에는 73.4퍼센트, 그리고 불교에서는 68.9퍼센트가 나왔으니 개신교(42%)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라는 답을 택한 이들도 개신교 35.9퍼센트인데 반해, 불교는 2.7퍼센트, 천주교는 7.2퍼센트로 현저히 낮다. 구원과 영생이 불교도에게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에 선택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건강, 재물, 성공 등의 ‘현실적 복을 받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12.2퍼센트로 나와서 개신교(6.1%), 가톨릭(5.9%)보다 두 배 이상 높다(한목협,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67).


같은 뿌리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 간 비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드러난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인은 66.9퍼센트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천주교인은 47.7퍼센트로 큰 차이를 보여줬다. 이는 지난 2017년 조사에서 천주교인들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8.8퍼센트였던 것에 비해서 대폭 낮아진 것이다. 그전에도 천주교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0퍼센트 중반대였으나 이번 조사에서 크게 하락한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그동안 천주교인들과 비슷한 비율로 구원의 확신 여부에 대해 긍정응답을 해오다가 이번에는 큰 차이로 앞서 것이다(한목협, 75).


자기 신앙의 정도를 묻는 질문에서도 네 가지 신앙단계, 즉 기독교 입문층, 그리스도 인지층, 그리스도 친밀층, 그리스도 중심층의 네 단계 중에서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서 초보 단계인 기독교 입문층(50.1% 대 31.8%)과 그리스도 인지층(35.7% 대 27.5%)에 더 많은 신도가 분포하는 반면,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에 비해 더욱 성숙된 단계인 그리스도 친밀층(28% 대 12.6%)과 그리스도 중심층(12.6% 대 1.6%)에서 더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한목협, 79). 이는 개신교인들이 유사 종교인 천주교인들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에서 더욱 적극적임을 시사한다.


종교의 교리에 대한 인식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주요 교리에 대한 입장을 보면, 개신교인들은 종말론에 대해 50퍼센트만 믿고, 종교다원론을 믿는 사람이 31.8퍼센트, 유일신 신앙을 믿는 이들은 62.9퍼센트로 나왔다. 이러한 수치는 일단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적 신앙이 점점 약화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인의 경우에는 가장 대표적인 교리로 알려진 윤회설을 믿는 이들이 21.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다소 충격적이게도, 개신교인들 중에서 12.5퍼센트, 천주교인 중에서 15.8퍼센트가 윤회설을 믿는다고 대답해서 불교인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내세와 영생의 신앙이 혼합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신교인들의 66.2퍼센트가 믿는데, 2017년 대비 8.9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한목협, 82-83) 


이러한 결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한국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우선, 기독교가 여전히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신앙의 목적, 교리에 대한 믿음, 신앙의 활동성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라는 점은 청신호다. 한국 교회가 아무리 대외적 신뢰도와 이미지가 낮다고 하지만, 교인들이 무기력하거나 퇴조된 신앙생활에 빠져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설령 습관적이라 할지라도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인생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의 자산이다. 타종교와 비교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교회가 위축될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의 잠재적 활동성을 담아내고 분발시킬 신앙의 방향과 공동체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상대적으로 견고한 신앙 정체성과 귀속성이라는 자산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까? 최근 선교적 교회 운동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고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기독교의 쇠퇴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신앙의 역사성과 공공성을 잊어버리고 복음에 대한 고유한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 힌두교 친구가 기독교에 대해서 지적한 바를 회고한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


뉴비긴은 이교도의 이러한 지적을 상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인류 역사의 실마리를 푸는 거대한 이야기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도 진리임을 확신하고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도 기독교 신앙의 효력이 내면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용도로, 또는 개인의 문제 해결, 혹은 기껏해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에 정신 승리를 제공하는 내세주의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개인적인 효용성에 머무는 복음은 온전한 변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세대에서 세대로 지속가능할 수 없음은 서구 기독교의 쇠퇴가 보여줬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상대적으로 강한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그 자체로 선교한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산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성격이 더욱 역사적이고, 공공적이어야 하며, 특정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패러다임에 끌려다니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지녀야 한다. 유한한 인간은 더 큰 세계와 이야기 안에서 비로소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 큰 이야기는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 신앙의 지경을 넓히는 과제는 선교한국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오랜 경험의 한 산악구조 전문가는 왜 등산객들이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깊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등산객들이 산속으로 너무 깊이 갔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야 길이나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기들의 불안함과 짧은 생각으로 중간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과 회복은 대외적 이미지를 재고하고 외형적 신뢰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하드코어로 더 깊이 들어가서 전인격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복음적 갱신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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