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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나는 내 트랜스젠더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
by 익명2024-01-09

예수님은 가족의 갈등을 십자가 지는 것과 연결한다(눅 14:26-27). 나는 이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우리 큰아들과 나, 그리고 아내 및 다른 가족 사이에서 일종의 죽음이 일어나는 일이다. 


아들은 어릴 때만 해도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과도 신앙 대화를 꾸준하게 나눴다. 우리 부부는 가정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다. 


따라서 작년에 성 혐오증에 빠진 아들이 자신이 행여 트랜스젠더가 아닌가를 놓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열여덟 살 된 아들은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믿었고, 동시에 LGBT+ 정체성이 성경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왜입니까? 


우리 부부는 물밀듯 몰려오는 질문들과 싸워야 했다. 도대체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건데? 아들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도대체 뭔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옛 친구 하나가 코로나 시절에 내 아들의 삶에 스며들었고, 둘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다양한 LGBT+ 공동체를 거친 사람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가르쳤는데, 거기에는 친구를 향해서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내 아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은 몇몇 다른 사람들이 LGBT+ 생활 방식도 얼마든지 기독교와 일치할 수 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모든 LGBT+ 정체성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아들지만, 그는 현재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인정한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진정한 신자라면 그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갈 5:19-21; 고전 6:9-10). 아들이 동성애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와 순종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후로, 나는 LGBT+ 정체성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모든 잠재 요인과 원인에 대한 책을 읽었다. 정말로 내적 또는 외적 끌림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주님께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갈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에 항복함을 의미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내 아들과 내 가족을 위한 가장 좋은 대답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 고백을 삶에서 실천하는 건 어렵기만 한다. 


아들을 사랑하기


동성애를 선언하고 몇 달 동안 아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시간을 보냈고 우리조차도 적대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에 대한 확신이 커짐에 따라 조금씩 주변을 향해서 마음을 열었다. 오늘날 그는 다정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마침내 아들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호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선가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서 그는 우리가 부모로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육신의 존귀함을 무시하는 성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어느 날 대화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우리 말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할 수 없어요.” 그날 아들은 방으로 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나와 아내도 무력감을 느끼며 울었다. 물론, 그가 원하는 이름과 대명사로 부르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아들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같이 기뻐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 순간을 맞으면, 아무리 신앙을 굳건히 갖는다고 해도 아들이 요구하는 변화가 결국에는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에도 해를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쉽지 않다.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 아들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암울한 크리스마스였던 그 시간은 몇 달이 되었고, 그 기간 내내 우리는 행여라도 자살한 아들을 방에서 보는 게 아닐까 마음 졸여야만 했다.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우리는 아들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 수 없는 걸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아들은 우리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몰랐던 게 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도 그는 제대로 몰랐다. 


누가복음 14:26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녀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건 문자 그대로의 미움이 아니다. 성경에는 자녀를 기뻐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선한 명령으로 가득하다(신 4:9; 잠 17:6; 사 49:15-16; 말 4:6; 골 3:21; 엡 6:1-4).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할 때 치러야 하는 희생의 정도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가족, 심지어 당신의 자녀에게도 증오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 부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건 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들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항상 아들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죄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는 도무지 “악을 기뻐할 수” 없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아들에게는 미움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기뻐해야만” 한다(고린도전서 13장).


우리 부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죽어야만 한다. 


1.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인생을 충만하게 살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


2.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줄 수 있다.


3.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이 더 큰 삶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 이건 부모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처음부터 정해진 패턴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건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오로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이 험난한 물살을 헤쳐나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은혜밖에 없음을 쉬지 않고 확증한다. 아들의 어려움은 우리가 예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로지 우리 구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부활의 생명으로 꽃피운 유일한 죽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건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이자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며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본다면, 영적으로 장님이 된 아들로 인한 나의 계속되는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받고 싶은 것을 받으면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죽음을 낭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원제: I Love My Transgender Child. I Love Jesus Mor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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