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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개미가 지혜를 지고 나른다
by 필립 정2023-12-30

올해 4월경,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베스트 셀러를 진열해 놓은 곳에 자기 계발, 인간 관계론, 주식 투자, 토익, 경제 서적들이 뒤덮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인문학 책 진열대에 갔더니 ‘니체의 말’ 번역본과 니체의 다른 책들이 압도적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냥 서점을 나와 벚꽃이 휘날리는 경복궁을 걸으며 한참 생각해 보았다. 자기 계발, 돈과 니체의 책들의 조화가 수상해 이들의 접점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얼마 안 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한국 청년들의 마음이 현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실 내가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계속 꼬리를 물고 나를 붙잡고 늘어져 과거까지 끌고 간다. 한번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면 현재의 삶이 뒤틀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경험된 지식이 충분히 쌓여야만 현재의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판단력, 통찰력, 결정 능력을 성경도 세상도 지혜라 부른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지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출발점이 다르니 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시작된다고 한다(잠언 1:7). 경외란 하나님을 알아 가며 그의 능력에 탄복하여 존경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쌓인 놀라운 경험이 지식이고 이에서 생긴 통찰력으로 현안을 해결하며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판단력을 지혜라 부른다. 오늘 소개할 개미 선생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어떤 것인지 좋은 예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개미가 인간의 스승이란다. 흥미롭지 않은가!


게으른 자는 누구일까?


잠언 기자는 잠언 6:6에서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며 나무란다. 그런데 저자는 게으른 자를 지혜가 없는 자라고 단정해 버린다. 왜 그런지 이유가 다음에 나와 있다. 이 게으른 자가 지혜 없는 자의 전형인 인격적 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두령도, 감독도 통치자가 없어도 일하는데…(잠언 6:7)” “너는 언제까지 눕고 언제 일어나서 일하러 가겠느냐”(잠언 6:9)라고 한다. 이에 게으른 자의 반응이 매우 반항적이다. “나는 좀 더 자겠다. 졸겠다. 좀 더 누워 있겠다”(잠언 6:10)며 무시해 버린다. 저항, 반항, 분노의 모습이 여실히 그려진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는 말씀이 여기서 떠오른다.


굳이 멀리서 이런 게으른 자의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철없던 어린 시절이 그려지지 않는가! “내 인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외치며 이불을 뒤집어  쓰는 철없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후회를 할 모습이 여실히 그려지는 지혜 없는 자 즉 게으른 자의 전형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다.


개미의 지혜


개미는 게으른 자가 배워야 할 지혜로운 대상으로 묘사된다. 잠언 6장의 개미의 지혜에 묘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해서 두려울 정도다. 하나님을 알면 그에 대한 탄성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왜 개미가 지혜롭다고 할까? 잠언 저자는 개미가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이도 먹을 것을 위해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잠언 6:7, 8)며 개미의 자발적인 미래 대비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개미의 이 대비 능력은 그냥 말 한마디하고 지나갈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한마디 뒤에 첩첩이 쌓인 무수한 개미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개미들에게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다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사실 이 말씀은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아 보인다. 분명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가 최정점에 있고 이들의 페르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페르몬을 뿌려 다른 암컷들인 일개미들의 생식 활동을 통제하고 혼자 자손 번식 활동을 도맡아 한다. 수명도 여타 개미들보다 10배 정도 길고 몸집도 거대해 생산 활동에 적합하다. 그래서 여왕개미가 사라지면 생산이 멈춰진 개미 사회는 급격히 무너져 버린다. 개미들의 생과 사가 여왕개미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니 여왕개미를 최고 권력자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여왕개미를 인간 사회의 왕이나 통치자로 보면 개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왕개미는 생산 활동 이외 어떤 힘도 없고 통치할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암컷 일개미들이 콜로니를 벗어나 몰래 알을 낳으려는 것을 저지할 수도 없고 알을 못 낳을 정도로 병이 들거나 노쇠하면 일개미들에게 끌려가 굴 밖으로 버림을 받는 신세로 무력하니 여왕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95퍼센트가 넘는 일개미들이 여왕개미가 낳은 알을 돌보고 새끼들을 먹이고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우기도 한다. 혼내거나 책망해도 일하지 않는 고집 세고 저항적인 게으른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잠언 6장의 기자인 솔로몬은 이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자신이 비록 왕이지만 자신의 힘이나 권력이 게으른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자들이 개미 조직의 일 개미들처럼 스스로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개미의 자발적 분업 사회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반에 들어서야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미들의 사회적 분업의 발달에 관심을 갖고 생식 계급과 비생식 계급으로 나누고 어떻게 이들이 서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진화해 왔는지 연구하였다. 개미가 만 이천 종이 넘어 어떤 보편적이고 일관된 질서를 찾기가 어렵지만 개미 사회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서로 돕는 역할로 진화해 왔다고 연구 결과를 내었다. 이 진화론적 관점의 연구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것을 이미 3천년 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왕이지만 권력 없는 여왕 개미처럼 힘으로 눌러 억지로 일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고 개미의 자발성에 눈을 뜨도록 게으른 자들에게 책망과 동기 부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종적인 지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돕는 개미 같은 횡적 조직 체계에 솔로몬이 이미 눈뜨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솔로몬이 여왕개미의 존재나 특성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미물의 조직이라도 통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데, 솔로몬이 개미의 두령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개미의 자발적 협력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분명하다. 솔로몬은 개미의 자발성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에 감탄하여 인간 사회도 개미 사회 같아야 한다고 보고 좋은 예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왕정 시대에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유기적 체제를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일개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알아볼 차례다. 단지 성경대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일까? 그 이상의 지혜가 숨어 있다. 왜 개미들은 자기의 자식도 아닌 여왕과 그 후손들을 위해 일하고 협력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찰스 다윈도 이 점을 매우 궁금해했다. 대부분 개미의 병사 계급은 나이 많은 일개미이다. 평생 생산 활동에 참여해 보지 못한 늙은 처녀개미가 자기 자식이 아닌 여왕개미와 그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 다른 일개미들도 역할만 다를 뿐 여왕과 그 자손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다니거나 건축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몸 바쳐 한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타적인 동물이 소멸하지 않고 매우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로몬이 하필이면 다른 동물이 아닌 개미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이런 개미들의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헌신 때문으로 보인다. 개미는 이 이타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개미의 이타성의 비밀은 유전자 연구가 활성화 된 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인간은 남녀 모두 염색체 한 쌍을 갖고 있는 이배체의 동물이다. 개미의 암컷 역시 이배체이다. 그러나 개미의 수컷은 염색체 한 벌만 갖고 있는 반수체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형제자매간 유전자의 1/2을 갖고 있지만 개미는 형제자매 간에 유전자의 3/4을 공유한다. 그러니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형제자매의 번성을 위해 자기들의 생산 활동을 포기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여왕과 여왕의 자식이자 일개미들의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보다 훨씬 이타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조직 사회를 유지해 나간다. 그래서 동물 학자들은 모두 개미를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솔로몬의 개미에게 가서 그의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은 이런 개미의 공동체적 특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눕자”고 저항하며 솔로몬을 무시해 버린다. 이 게으른 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 결과는 무섭게 나타난다.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11).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강도와 적군같이 예고 없이 찾아온 궁핍에 무너져 버리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게으른 자들의 선택은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자신들을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조차도 무너뜨린다. 솔로몬의 권면의 당사자인 르호보암이 그 좋은 예이다. 솔로몬의 사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참모들은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저 세제를 더 강화하고 부역의 짐을 백성에게 가중시켜 집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반란으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하며 섬기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북쪽의 10지파를 르호보암에게서 빼앗아 가셨다. 솔로몬의 경고가 그의 게으른 자식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선택하라


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통치와 솜씨에 놀라고 경탄하며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이를 우리의 삶에 하나둘 적용하면 통찰력과 판단력, 실천하는 능력, 즉 지혜가 자라나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두려움에 싸이면 맘몬 신앙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 대형 서점에 수없이 진열된 자기 계발 서적, 주식, 코인 투자 안내서, 니체의 책들은 여실히 미래에 대해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지 내가 사는 이 미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엄청난 부담감과 염려와 공포에 눌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지나치면 그것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해버린다. 이는 신앙과 같다. 마태복음 6:24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말씀하며, 주님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지혜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재물에 대한 두려움과 지나친 염려는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는 불신앙이니 여기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현대인들이 니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의 부재에 공포를 느끼며 그 부재를 극복하려고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고 스스로에 열광하는 광적인 태도가 아니면 이 불안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허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초인적 자기 극복이 현대의 뉴 노멀 시대를 겪는 공포와 많이 닮았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그 공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압도되면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느끼는 내 존재의 무익함은 니체의 공허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식으로 채워지면 거기에서 오는 통찰력과 판단력의 지혜가 나를 인도하여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들은 풀기가 어렵고 답이 없다.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삶의 고통이 내 능력 위에 있다고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그를 경험하여 얻은 지식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일개미들처럼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지혜로 실현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결단하고 선택을 해야 미래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번에 건너 뛰려 하지 말고 말씀 한 구절을, 삶의 한 찰나에 적용하면 언젠가 이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을 기대하며 꿈꾸기를 원한다.


나는 이 글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앞길이 안 보여 절망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오해되어 읽히거나 그들에게 잔소리 조의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인용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주를 깊이 의지하고 경험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목회자들의 손에 들려 지치고 힘든 한국의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혜의 왕으로 오신 주가 탄생하신 날을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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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필립 정

필립 정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BA),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MDiv), 미국 Talbot School of Theology(MA, 목회 상담)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청소년 영어 담당 사역자와 이민 1세대 교회의 목회자로 섬겼다. 현재 Go Eco Pest Control 회사 대표이며,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야생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여 달라스 DKNET 방송국 고정 게스트와 달라스 부동산 라이프 기고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과 벌레의 교감을 다룬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