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

시편 88편 묵상

by 고명환2023-12-26

1  

자식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그 아픔은 의식이 있는 한 따라다닌다. 재물이나 건강을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실감의 무게 역시 가벼워지지 않는다. 


다윗은 많은 자녀를 둔 복을 받은 것과 비례해서 그들로 인해 심한 고통도 겪어야 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핏덩이로부터 장성하여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던 아들에 이르기까지, 분신과도 같았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 중 아끼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은 그 어느 자식을 잃어버린 것보다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천인이 공노할 일을 벌였던 반역자 아들,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으로 한동안 슬픔의 나날을 보낸 것을 볼 때, 자식들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분명, 시간을 두고 일어난 아들들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죽는 날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음에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흔들지 못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비극 앞에 심한 자책으로 긴 세월을 소모하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숙한 성도로 살아갔다.


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졸지에 잃은 충격은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컸을 것이 뻔하다. 그 또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한 아버지였음을 성경은 들려준다. 행여나 자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나면 자식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지었을까 봐 다음 날 아침이면 그들을 생각하며 번제를 드렸다고 한다(욥기 1장). 이렇듯 섬세하게 돌보았던 자녀들이 모두 참변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낙심하고야 말았다. 


허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녀들의 죽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헐어 놓지는 못하게 했다. 마음의 고통을 표현했을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녀를 비롯한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 주었다. 상실이 그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미국의 뉴 잉글랜드로 이민 온 60대 부부를 알게 되었다. 미국식 아침식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직접 운영하여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는 부부였다. 한때 교회를 다녔지만, 오래전에 신앙생활을 중단했다는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식당을 찾아간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물론, 교회로 인도할 목적의 방문이었다. 몇차례 식당을 방문하면서 서로에 대한 경계를 낮출 수 있었고, 마침내 그분들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더 깊은 대화를 하며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호기였다. 


부부가 사는 집은 둘이 사용하기엔 큰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의 이층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부부는 집안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여러 공간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안내한 방은 칠년 전부터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방이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말끔하게 치워진 방의 한켠에는 활짝 웃는 앳된 청년의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7년 전에 죽은 아들의 방이라고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근처 바다로 서핑을 갔던 아들은 사고를 당해 영영 부모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던 부부는 그가 남긴 모든 것을 고스란히 그 방에 보존한 채 아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있으면 왜 내 아이를 죽게 해요.”

“그분이 진짜라면 아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아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항변에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언가는 말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대답은 지금 애써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의례적인 대답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궁색한 위로의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부부의 심한 실의와 불신은 교회와 하나님을 등지게 몰아갔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가족과 소유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평탄한 길 만을 걷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자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다. 


안 집사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김미선(가명) 성도의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약물 과복용이 사인이라고 했다. 남동생이 마약 중독으로 떠난 지 채 일년도 안 되었는데 형도 그 길을 가고야 만 것이다. 얼마 전 동생을 묻는 자리에서 관에 손을 얹고 잘 가라고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던 형이었는데…. 


삼십을 코 앞에 둔 펄펄한 청년 둘이 일년을 사이에 두고 마약의 희생양이 된 것도 가슴이 먹먹한 일이었지만, 남은 아들마저 잃은 김미선 성도의 심정을 생각하자 모든 우울한 기운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이젠 더 이상 해 줄 위로의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군을 만나 타국으로 시집온 그녀에게 두 아들은 삶을 지탱해 주는 한 축이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해 주어야 할 남편은 잦은 외도로 기대지 못할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며 살아왔는데, 두 아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녀를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소식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찌할 수 없어 며칠을 기다린 뒤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분은 모든 방문자를 거절하고 홀로 막막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들려온 소리는 절망 끝에서 나오는 힘 없는 절규였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지요?”

“또, 왜 꼭 하나님을 잘 믿어 보려고 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 남편의 배신 이후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주님만을 신뢰하며 살겠다고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던 중, 둘째 아들이 떠나는 시련이 닥쳐왔다.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 몸부림으로 지탱해 왔건만, 또다시 찾아온 불행은 그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 같았다. 


“저도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건넨 힘없는 응대였다. 


거듭된 시련은 김미선 성도를 주님을 영영 원망하며 멀어지게 할 것만 같았다. 헌데, 감사하게도, 두어 달 지나 김미선 성도는 교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주님 외에 그가 갈 곳은 없었다. 살아야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았던 것이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시간이 흐르면 의문도 아픔도 점차 희석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주님을 따라가기로 다짐했다고 믿고 싶다.


내가 교회를 떠난 후 들리는 소식은 희망적이다. 떠났으나 보내지 못한 두 아들의 엄마는 매일 그들이 잠든 무덤을 방문한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도 착실하게 다녀 새로운 목사님에게서 집사 직분도 받았단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두 아들도 잃고 주님도 잃어버렸다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떨치지 못할 안타까움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성도의 길을 이탈하지 않고 눈물로 가고 있는 것이다. 


2

시편 88편은 시편 중 가장 어두운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한 기운이 무겁게 드리우고 있다. 적어도 고난 가운데 구원을 호소하는 많은 비탄시의 처음, 혹은 중간, 아니면 마지막 부분이 찬양이나 감사로 장식된 것과 달리 이 시의 어느 곳에서나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도응답에 대한 기대나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도 그려져 있지 않다. 전편에 걸쳐 짙은 어두움만이 흐른다. 


시편 88편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


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인을 따라다녔던(15절) 고난은 이제 가까운 친구들마저 떼어 놓았고, 건강마저 앗아가 버렸다(8, 9절). 게다가, 주님은 그를 버렸고 얼굴을 감추셔서 더 이상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 것 같다(14절). 사실 여부를 떠나 여러 절에서 표현했듯,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었다. 주께서 그를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던지셨고, 친구와 건강을 앗아 가셨으며, 두려움과 공포를 보내어 떨게 하셨다. 주님께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극한의 벼랑에 시인을 놓으신 것이다. 


세찬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주님 앞에 자리 잡고 낮이나 밤이나 그분을 바라본다(1절). 무덤과 같은 어두움만이 지배하는 환경에서도 그의 영혼은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바꿀 수 없는 형편을 상세히 알리는 한편, 비참한 환경에서 갖는 그의 생각과 감정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부르짖어 구원을 호소한다. 


찬양과 감사의 구절로 고조된 음역을 연주하는 듯한 시편의 시들 가운데 왜 절망의 늪에 빠진 영혼이 토해내는 신음과 같은 시가 삽입되었을까? 의도를 알지 못하나, 이런 성도의 삶이 분명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의 긴 터널 속에 주님은 성도를 놓아두기도 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때, 성도가 취할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비록 낙심과 고통으로 주저앉을 수는 있으나 주님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말 것을 암시한다. 원망과 불평 속에 뒤돌아 가기보다 오히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편을 택하라고 들려주는 것 같다. 이것이 다채로운 시편 가운데 이 시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


3

성도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은 각각 다르다. 어떤 성도에게도 동일한 길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적 순탄한 길로부터 험하고 거친 길에 이르기까지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은 다양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헌데, 그중 고난이 기다리지 않는 성도의 길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육체나 정신적 질환에 시달릴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떠한 조건의 길이 주어졌건 주님은 성도들이 끝까지 완주하기를 원하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상상치 못할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텨 시련을 이겨내어, 모두 이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광에 이를 수 있을지 찾고 따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인내로 견디어 내야 한다.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는 어떻게 준비된 마음이 열매를 맺는지 들려준다. 이와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낙오하는 영혼들에게 시련이나,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련이나 유혹은 신앙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온다. 다만 이들은 고난이나 세상의 유혹이 마음에 간직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인내하며 지켜낸다. 그들이 단지 좋은 마음의 상태를 준비했다고 신앙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은 가르쳐 준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누가복음 8:15). 지키고 인내하는 생활이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건임을 알려 준다. 


시편 71편의 성도는 88편의 기자처럼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 왔고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했다고 한다(시편 71:5-6). 이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인생의 서리가 내린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되었다(9, 18절). 세월은 흘러 인생을 마감할 시기가 가까웠으나 줄곧 따라다니는 고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4, 10, 11절). 여전히 그를 해치려는 잔인한 자들은 주변을 맴돈다. 한편, 살아오는 동안 고난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면, 그는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해 왔다. 주님밖에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5, 14절)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에서 ‘견디다’라는 단어는 여러 번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환난을 예언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4:13).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딜 것을 당부한다(야고보서 5:7). 사도 바울도 여러 편지에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성도들을 격려했다. 


인생의 거친 길을 헤쳐 나갈 때 개인이 가진 능력만으로 인생의 시련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면, 절대적인 타자가 원하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삶을 실천하는 여타 종교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계시는 주님은 성도의 아픔이나 난관에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시다. 곁에서 이기도록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는 친구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주님께서 모든 형편을 아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성도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주님은 그와 함께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성도를 떠나시지 않는다. 눈앞이 깜깜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주님은 지켜보고 계신다. 혼자인 것 같으나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은 좋으신 분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녀의 불행을 결코 바라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망하기를 바라는 분이 절대 아니다. 현재의 아픔이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분의 선한 계획 안에 있고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로마서 8:28)은 분명하다. 


주님이 좋으신 분이고 귀한 분으로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내가 소유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분을 향한 신뢰에 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상실감을 갖게 될지 모르나 그분을 떠나지는 않는다. 주님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의 선하심(goodness)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심을 온전하게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편 27:13, 14).


4

고난에 굴복해서 얻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소중한 것을 잃고 상실감에 잠긴다고 같은 것을 돌려받지 못한다. 질고 중에 주님을 원망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마저 황폐해질 것이다. 성공을 향해 기도하고 노력해 왔지만 실패만을 거듭해 왔다고 실의에 빠져 주님을 떠난다면, 인생 전체를 실패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고난을 통과했을 때 얻는 유익을 바라보자. 고난은 즐겁지 않으나 고난의 경험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큰 자산이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71절). 사도 바울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 같은 큰 고난을 겪었다고 증언한다. 고난만큼이나 하나님의 위로도 넘쳤고 그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며 하나님을 찬송한다(고린도후서 1:3-8)


두 아들을 마약으로 잃은 김미선 성도는 그 뒤 같은 슬픔을 겪는 부모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서로 위로하고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에 활동한다고 들었다. 그 성도만큼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모의 심정을 잘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테고,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고난의 경험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같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쓰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는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더욱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할 경험과 지혜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잠언 24:16). 신앙은 살아내는 거라고 말들 한다. 성도의 삶은 언제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이어야 함을 들려주는 교훈들이다. 잠시 주춤할 수 있으나 또 나아가야 하고, 넘어졌으나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로마서 8:18)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어떤 어려움이라도 딛고 일어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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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