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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주님을 위해 일할 나이

시편 92편 묵상

by 고명환2023-10-26

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광고나 강연에서 듣던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나이는 숫자 정도로 여겨지는가? ‘아니다’ 단언해도 무리가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고정관념을 깨자’는 취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는 몰라도, 현실은 그 숫자가 가지는 위력 앞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여전히 나이를 따져 효율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잣대이다. 


개척하여 섬기던 한인교회 가까이에 한참 떨어져 있던 한인교회가 이사를 왔다. 한인들이 희소한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인교회 둘이 오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개척을 결심할 때 마음으로 정한 원칙이 둘 있었다.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빼내어 시작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는 곳에 터를 잡지 않는다.’ 


한인교회가 가까이에 없는 지역에, 주님을 모르거나 낙심한 영혼들을 찾아내어 개척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기도하며 시작했다. 주님의 도움으로, 더디었지만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장소에서,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분들과 함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져 가는 중이었다. 


한데,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교회가 무슨 사정인지 지척에 들어온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체 상태였던 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도에 의욕적인 젊은 목사님을 맞아들였고, 교회 자리도 옮겨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젊은 한인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점점 바뀌었다. 그래서 연락해 오면 기꺼이 만나 인사도 나누고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 목사님과 만나 식사하는 자리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같이 식사하자고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마련한 기회였다. 만난 자리에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 분의 헌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비교하니 나의 활동은 게으른 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된 이야기 가운데, 그 열정의 젊은 목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일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주의 종’임을 듣게 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경력에 젊음과 열정마저 갖춘 그 분에 비하면 나의 것은 조촐했지만, 차례가 된 것 같아 나름 소상하게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십오 년 동안 하며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위해 전 시간을 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교에 마흔이 넘는 늦은 나이에 들어가서 겨우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개에 이어 교회 개척 동기와 진행, 현재의 모습에 이르도록 나름대로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난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그 분의 말에 짐짓 당황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갔다고 말한 사람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하다니?’ ‘그의 앞에 있는 나이배기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했었다는 말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즉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격적인 질문 대신에 상투적인 변호를 늘어놓았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팔십세가 되어 부름을 받았고, 갈렙은 팔십이 넘는 나이에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이가 많아도 주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일한 분들은 많은데요.”


이에, 그는 입술을 약간 떨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응대했다. 


“어쨌든 전 나이 든 사람들이 신학교 가는 것에 반대합니다.”


얼굴을 붉히며 내보이는 단단한 고집을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애써 불쾌한 마음을 추스른 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어설프게 마무리해야만 했다.


왜 그분은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 

왜 목사는 자신처럼 젊은 나이에만 헌신해서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믿었을까? 

자신은 제때 신학교를 거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 늦게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세상에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중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자격이 없다고 믿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이 든 사람들은 목회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듣고 싶지 않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지금도 해 본다. 



2.

시편 92편


1-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5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6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7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8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시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싶어한 주님의 사랑, 성실하심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것으로 밝히 입증된다. 곧, 악인들과 의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악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잠시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만연한다 해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심판하신다. 반면에, 의인들은 악인들로부터 온전하게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크게 번성하는 복을 누리게 하신다. 


시에서 악인은 풀(잡초)에, 의인은 나무(종려, 백향목)에 비유된다(7, 12절). 풀과 나무는 수명과 유용성에 있어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풀은 아무리 쑥쑥 자라 무성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 그 생명을 다해 쓸모없어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 생명이 길고 여러 쓰임새로 인해 큰 가치를 지닌다. 의인은 우거지고 높이 치솟는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크게 번성하고 뻗어 나간다. 수령이 오래되어도 생기를 잃지 않고 푸르며 열매를 맺는다. 


오래된 나무라도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며 풍성한 결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이 늙으나 젊음을 유지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거나 늙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활기차고 열매 맺는 의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밀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3.

나이란 하나님께는 숫자에 불과하다. 주님의 선발기준에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의 쓰임을 받는데 나이의 커트라인이란 없다. 주님은, 자원하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어리다고 돌려보내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쓰임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선택의 대상이 된다.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님께서 그 어떤 조건의 사람이라도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진 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능을 가졌든 못 가졌든, 나이가 어리든 어리지 않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 


관건은 나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다. 주님께 뿌리를 두어야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 맺을 수 있다. 홍안의 소년이라도 주님께 뿌리를 두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한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주님께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그 잎은 푸르며 열매는 풍성하다. 시편 1편의 시절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가 생명의 시냇가에 천착하였듯이, 진액이 넘치고 푸르르며 늘 열매를 맺는 나무는 생명의 근원인 주님께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인 그분께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15장)


주님 앞에 나이를 따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를 크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작게 보는 사람이다. 어렸으나 주님의 쓰임에 적합한 다윗을 무시했던 사람들의 일원이며, 사무엘이 늙었다고 강제 은퇴시키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동조하는 부류 중 하나이다. 강력한 주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초라한 사람의 능력을 크게 보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고린도전서 1:27)이시라는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다.


아직 어리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는 늙었다며 조기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 안에 뿌리를 두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도 숨이 멎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삶을 꿈꾸어야 마땅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장해 준다. 얼마나 힘이 되고 소망을 주는 말씀인가!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12-14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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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