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선교, 태동하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군산구암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10-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군산에 선교거점이 마련된 것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유대모(A. D. Drew)의 사역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는 1894년 호남지역 선교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육로여행의 어려움을 경험했다. 이듬해인 1895년 3월 군산 선교거점을 확보하는 일에 책임을 맡은 의료선교사 유대모는 같은 남장로교회 동료 선교사이자 훗날 호남선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전위렴(W. M. Junkin) 목사와 함께 인천을 떠나서 배로 군산에 도착함으로써 군산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두 선교사는 약 1개월 동안 군산을 중심으로 환자들을 치료해 주면서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인심을 얻게 됨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군산항 가까운 곳에 집 두 채를 마련해서 선교를 위한 거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완전히 군산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듬해인 1896년 2월이었고, 같은 해 4월 6일에 김봉래, 송영도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군산 선교의 시작이자 호남지역에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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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인 유대모는 자기 집 사랑방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치료를 했다. 전위렴은 그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중심으로 전도함으로 협력 선교의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그해 7월 20일 김봉래, 송영도 두 사람이 전위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고, 호남선교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군산항 일원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조선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선교부는 마련했던 처소를 처분하고, 그해 12월 21일 외각의 궁말(구암리)로 옮기게 됐다. 본격적으로 식민지 정복을 위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옴으로써 군산의 분위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산의 인구 분포를 보면 한국인이 780명에 일본인 거주자가 422명이나 되었다는 통계는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최초 군산의 공동체는 선교사들을 따라서 구암리에 가서 예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는 후에 새롭게 시작하는 공동체에 합류하여 군산 개복동교회를 형성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렇게 유대모와 전위렴 선교사가 인천에서 뱃길로 군산을 찾아와 거점을 확보한 것이 사실상 호남선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1898년에 해리슨(W. B. Harrison, 하위렴) 목사, 1899년 봄 불(W. B. Bull, 부위렴) 목사, 데이비스(L. F. Davis) 양, 알비(L. Alby) 양 등이 도착함으로써 군산 선교에 활기가 돌게 되었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제의 강점은 가시화되었다. 군산 선교는 개항보다 일찍 시작되었지만, 개항과 함께 선교사들의 활동은 오히려 어려워지면서 현재의 구암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1899년 12월 21일 옮기게 되었다. 이때 군산항 주변에서 시작한 초기 공동체의 일부 신자들이 궁말로 옮겨온 선교사들을 따라왔고,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군산 선교의 역사를 이은 것이 현재의 구암교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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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0년 봄 구암교회는 95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교회로 급성장했다. 전위렴 목사는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면서 40년간 군산과 호남지방의 선교의 선구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유대모 선교사는 의사로서 자원 전도자들을 동반하여 배를 타고 강변과 군산 앞바다의 섬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와 전도를 겸했다. 하지만 유대모는 과로로 건강이 악화하여 1901년에 귀국하였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구암교회는 미국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 선교를 하면서 최초로 거점으로 확보했던 군산 선교부(군산교회로도 불렸음)의 역사를 잇는 사실상의 호남의 모교회이다. 하지만 초기 군산지역의 선교 역사는 사료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고, 확실한 사료로서의 신빙성도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한 한계를 전제로 구암교회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우선 구암교회 스스로가 설립기념일을 1893년 1월 7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군산 선교의 시작을 1896년으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없지 않다. 다만 1896년이라는 시점은 그 어간에 있었던 조선의 정세, 즉 1894년에 있었던 동학혁명으로 인해서 선교사들이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정읍이나 김제를 중심으로 동학군이 일어났고, 그 여세는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이러한 여파로 군산지역에서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일하던 선교사들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일단 서울로 철수했다가 다시 내려와 거점 확보를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1896년인데, 이것을 군산 선교의 시작으로 설명하는 자료들이 많다고 본다.


이때 군산에 내려와서 군산 선교거점을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은 전킨(W. M. Junkin), 드류(A.D. Drew)와 한국인 조사 장인택 등이었다. 이들이 군산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군산 선교부의 시작이며, 이것이 후에 현 구암교회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그중에 조선인 장인택은 남장로교회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구성하게 된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선교회연합공의회(Council of Mission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에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었다. 따라서 장인택 조사가 군산 선교에서 수행한 역할이란 지대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구암교회의 시작은 곧 그와 함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92년 11월 3일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입국하여 선교지 확보를 위한 호남지역을 여행하게 되었다. 당시는 내륙교통이 극히 빈약했던 상태라 선교사들은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해서 군산에 도착했다. 이는 당시에 가장 효과적인 접근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도착한 선교사들이 군산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1893년 1월 27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다. 그런데 왜 구암교회가 이날을 구암교회의 설립기념일로 지키는가? 비록 동학군 때문에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역사가 단절된 것이 사실이지만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군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을 기점으로 한 역사를 잇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그 후 1899년 군산이 개항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왔고, 그로 인해서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장을 받게 되자 군산 선교부를 궁말(현 구암교회가 있는 옛 지명)로 옮겨왔다. 따라서 군산항 근처에 있던 군산 선교부(군산교회) 신자들은 궁말로 예배를 드리러 와야 했다. 반면에 궁말로 따라오지 못한 신자들이 중심이 돼서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개복교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군산지역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군산 선교부의 역사를 계승하는 또 다른 교회가 있는 셈이다. 


동학이 잠잠해진 다음인 1896년경부터 남장로교회의 초기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온 데이비스(Linnie Fulkerson Davis)라고 하는 선교사가 궁말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여자의 몸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외진 곳이 궁말에 자리를 잡고 지역민들과 접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아마 1896년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군산으로 내려올 때 같이 내려와서 데이비스는 궁말에 자리 잡고 나름의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던 차에 군산항(시내)에 있던 선교부가 옮겨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때 군산의 선교부와 궁말에서 활동하고 있던 데이비스의 공동체는 정식으로 합병되었고, 군산교회로 불렸던 군산 선교부는 궁말로 옮겨온 것이다. 자연히 군산 시내에 있던 군산교회는 구암교회로 역사를 잇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시작을 1896년이 아닌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해서 예배를 드린 1893년 1월 27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구암교회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본래 작은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섬과 육지 사이가 농지로 개간되고 육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산봉우리 하나를 뒤에 두고 그 기슭에 집들이 몇 채 있었던 곳인데,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선교사들이 주택을 지었고, 그 아래로 진료소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 그리고 맨 아래쪽으로 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작은 언덕과 같은 동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군산 선교부가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그곳엔 복원된 영명학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선교사들 주택이나 학교 건물은 이미 사라졌다. 다만 해방 이후에 벽돌로 지었던 예배당 건물은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영명학교가 복원된 후 이 학교로 기념관이 옮겨지면서 구 예배당은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 선교사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당시의 건물은 없다.


구암교회는 2003년에 호남선교100주년기념 예배당을 완공했다. 멀리서 보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건물이긴 하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서 전면에 대리석 기둥이 중압감을 줄 만큼 웅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석조기둥이 웅장한 만큼 건물의 균형감이 받쳐주어야 하는데, 뭔가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나름 웅장함과 함께 설계자가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 느낌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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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당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또 하나는 예배당 전면에 대리석 원주 기둥이 여덟 개가 강력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기둥들은 그냥 건물 구조상 필요한 것이 아니고 설계단계에서부터 일부러 만든 기둥이다. 그 의미를 알려면 기둥 밑 부분을 보면 된다. 기둥 받침 부분에는 각각 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킨, 레이놀즈, 테이트, 레이번(전킨 부인), 볼링(레이놀즈 부인), 데이비스, 매티 테이트(테이트의 여동생) 등 7명의 선교사와 한 사람의 한국인 조사 장인택을 기념하기 위한 기둥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모두 초기 군산 선교를 이끌었던 주역들이다. 


교회가 예배당을 지으면서 예산상에 어려움이 동반되는 것인데, 어려운 결정을 하여 이러한 기념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뜻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을 짓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특별한 의지가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념물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기를 기뻐한 구암교회 신자들의 의식 또한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예배당을 찾았을 때 만나게 되는 건물 양쪽 끝에 타워가 특별하다. 이 또한 의도적인 설계에 따른 건축물이다. 단순히 계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담아 설계했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 명칭은 군산 3·1운동과 선교를 기념하는 타워이다. 즉 하나는 군산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군산 선교를 기념하는 타워로 만들어진 것이다. 


멀리서 보면 건물 양쪽에 각기 조금은 다른 모양을 한 타워가 보인다. 맨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이 같으나 바로 밑 첨탑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아래 공간은 한쪽은 사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타워에 올라가면 사료들을 만날 수 있다. 반대편에 있는 타워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두 타워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한 채 군산 근대사의 두 사건, 즉 개항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과 그 사역을, 또 하나는 민족의 아픔을 높이 외쳤던 군산의 3·1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세웠다.


구암교회를 찾아가면 언덕에 우뚝 솟은 예배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오르자면 예배당보다 먼저 닿게 되는 것은 구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군산 3·1 만세운동 기념관으로 사용하다가 영명학교를 복원한 다음은 그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면 군산3.1만세운동기념관을 왜 여기에 두었을까? 구암교회는 3·1운동 당시 군산 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이 대부분 구암교회의 신자, 혹은 선교부가 운영하는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선생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군산의 3·1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서울의 만세운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군산의 경우는 3·5만세운동, 즉 3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군산에서 시작된 호남지역의 만세운동은 그 여파가 호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군산의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구암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할 때 자연스럽게 군산 시민들이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군산에서 기미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시 영명학교 졸업생 가운데 김병수라는 사람이 졸업 후 서울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녔는데, 그가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기획을 전달받았고, 그와 함께 독립선언문 200장을 받아 1919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의 은사인 박연세 선생의 집에서 서울에서 계획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알리고 군산에서의 거사를 모의하였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본래 서래 장날인 3월 6일에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그 비밀이 새어 나갔다. 멜본딘여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장과 태극기를 만들어서 학생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3월 5일 새벽에 일본 경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주동자인 박연세, 김수영, 이두열 등을 체포했다. 거사는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거사를 함께 준비하고 있었던 김윤실 선생이 학생 간부들과 회의를 갖고 당일(3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것은 일본 경찰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서 허를 찌르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영명학교 학생들과 멜본딘여학교 학생들과 선생들이 함께 나섰다. 그리고 구암교회의 신자들, 당시 교회 옆에 있던 예수병원 직원들, 그리고 일부 군산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행진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 행렬은 군산경찰서 앞에 이르렀고, 그때에는 이미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경찰서 앞에서 새벽에 끌려간 박 선생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구암교회와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가 중심이 되어서 전개한 만세운동은 군산에서 멈추지 않고 전주와 익산으로 확산하였으며, 이후 호남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이 구암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중심이 된 것은 이 지역의 유일한 근대교육을 한 곳이 이 학교들이었고, 당시 신자들의 의식이 일반 국민들보다 앞섰기 때문에 정세를 볼 때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구암교회는 구 예배당 전체를 군산3·1독립만세운동기념관으로 꾸며서 군산지역의 3·1정신을 잊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군산시가 많은 예산을 드려서 기념관으로 꾸몄지만, 교회는 사실상 건물과 토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었다.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서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쉼과 함께 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암교회 현재 예배당 좌측에는 교회가 세운 군산3·1독립운동기념비와 호남선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현재는 복원된 영명학교에 기념관이 마련되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구암교회와 함께 3.1만세운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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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