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가 만든 이상한 신세계
by 이춘성2023-09-12

중학생 딸아이가 수학여행 준비에 바쁘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미 경험했어야 할 수학여행을 이제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딸아이의 생의 첫 수학여행을 위한 가장 큰 숙제는 다이어트다. 평생 남게 될 첫 수학여행의 사진이 조금 더 예쁘게 나와야 할 것 아니냐는 게 딸아이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와 딸은 저녁 늦게 함께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기로 했다. 러닝을 시작한 두 번째 날, 늦은 저녁 시간인데도 중학생 여자아이들이 여럿 모여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욕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 입에서 나오는 욕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까?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그러니까 1990년대 중후반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충격이었다. “돼지가 우물이 빠진 날”(1996년), “강원도의 힘”(1998년)으로 이전의 연극적으로 과장된 연출과 연기가 주류였던 영화계에 힘을 뺀 연출과 연기,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의 영화는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2002년 “생활의 발견”과 이후에 나온 그의 극사실주의적 영화들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생활의 발견” 이후의 홍상수의 영화는 자연스럽다 못해, 인간 내면의 욕망을 아무런 여과 없이 찢어발겼다.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목욕탕 탈의실을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자기가 본 그 훔쳐보기와 그 살덩이가 자기 자신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며 당황해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식인들의 가식과 숨겨진 원초적 욕구에 어떤 포장이나 옷도 허락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들이 입고 있는 옷과 포장을 벗기고, 더 나아가 뼈와 장기를 덮고 있는 몸을 해부하여, 장기 속 소화하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너’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kie Elie Derrida, 1930~2004)는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해부학적 접근을 ‘해체’(deconstruction)라 불렀다. ‘해체’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가치와 윤리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것들이 당연하다고 믿게 했던 절대 기준이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해체를 통해서 결국 인간이 만들고 믿었던 가치와 종교, 사상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의 투사일 뿐, 공통되고 절대적인 기준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면, 사회를 이끄는 유일한 힘은 개인의 욕망과 욕구이며, 이를 종교나 윤리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선과 가식이 된다. 더 나아가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 노골적인 언어(욕설)와 섹스, 식욕, 탐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이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인정받게 된다. 찌꺼기는 찌꺼기답게 냄새나고 더러울 때 가장 윤리적이라는 것이 해체의 윤리가 지향하는 이상(ideal)이다.


이제 홍상수는 흘러간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시작한 해체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먹방’과 ‘SNL’이 되어 MZ세대와 현대인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인간이 먹는 욕구 그 자체, 말하는 입이 아닌 음식이 들어가는 입, 그 자체에 지금처럼 주목했던 때가 있었을까? 음식과 먹는 입은 중요한 것이지만, 이는 생명을 위한 영양소, 대화를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음식을 마구잡이로 쌓아 두고 말없이 먹는 그 입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먹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을 더 이상 예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음식과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은 순수하고 진정성(authenticity) 있는 행위이다. 이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가식과 위선에 사로잡힌 예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제는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느꼈을 불편한 감정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여전히 음식에 대한 예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는 해체 이후에 남은 일종의 흔적일 뿐이다.


또한 ‘19세 관람가’라는 도장이 찍힌 SNL**식의 코미디는 어떤가? 과거에는 술자리나 군대의 음침한 창고에서나 오갈 성행위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 사람을 향해 쏟아내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뜻의 욕설들, 그리고 이러한 표현에 ‘맛깔나다’라는 먹방식 표현과 이에 대한 찬사와 ‘슈퍼챗’ 형태의 돈으로 상을 주는 대중, 그리고 이를 따라 하면서 웃고 떠드는 사춘기 아이들의 일상의 모습,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이런 현대 세계를 “이상한 신세계”(Strange New World)라고 이름하였다.


우리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기대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세계가 해체되어 버린, 모든 가치와 윤리가 의심받으며 오직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라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신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런 이상한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와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욕구와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창조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마주한 위기요 과제이다. “초월의 위대함과 그 아름다움을 선전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한 고민을 이어질 짧은 글들로 담아내고자 한다.



**SNL: Saturday Night Live의 머리글자로 미국 NBC에서 방송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포맷을 가져와 성적인 농담과 노골적인 욕설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성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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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