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
by 양혜원2023-09-01

여전히 높은 온도와 습도로 연신 땀을 닦으며 걸어야 했던 8월 중순 막바지 주말, 마지막으로 내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충무로역에 내려서 문학의 집 서울로 향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문학기행 강연 시리즈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작품을 소개하는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작품을 골랐고, 강의 제목은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로 정했다.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30명 인원 제한이 있는 강의였는데, 좌석은 거의 다 찼고,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 노부부 커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으러 왔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박완서의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박완서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걸 ‘낚글’이라고 해야 하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하튼 정원을 채웠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가족’에 대한 고민이 많구나, 싶었다. 


하긴, 출생의 비밀에 얽히고설킨 가족 관계가 여전히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을 보면, 혼인율과 출생률이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가운데도 가족이 여전한 항간의 화두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누가 엄마고 아빠고 아들이고 딸이고 하는 이런 관계들이 ‘진실’로서 밝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에서부터 ‘바른’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아저씨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친아빠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나’라는 개인의 서사는 달라진다. 내 탄생의 근원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써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 서사의 핵심을 구성하는 부모 자식 관계의 서사, 그리고 부부 관계의 서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관계가 개인의 서사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날 가족에 대한 고민이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다가온다면, 아마도 이 변화의 폭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족 서사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강의 내용의 핵심이었다. 가족의 힘과 굴레를 직접 논한 것은 아니니, 결국 제목이 ‘낚(는) 글’이 되고 말았다고 해야 할까.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여성 한 분이 같이 내려가면서 질문을 좀 해도 되겠냐고 하시길래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은 힘이 되는 건가요? 굴레가 되는 건가요” 하며 운을 떼시는 것을 보니, 역시나 제목에 끌려 강의에 오신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나의 귀를 청하셨다. 자신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술 문화가 곧 직장 문화였던 옛날 옛적에, 좀 더 가정적인 문화를 찾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아들이 자신은 다시 한국 가서 살겠노라고 하는 바람에, 캐나다와 한국을 오고 가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남편의 동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였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아들이 아직도 장가를 가지 않고 있다며 은근한 우려도 내비치셨다. 두서없이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 안에는 오늘날 한국 가족의 복합적인 서사가 다 들어가 있다.


우선 이민 이야기부터 보자면, 아주 오래된 농담을 포함하여 박완서의 소설에서 미국 이민은, 한국 가족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아들은 아들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의무와 도리의 부담에서 벗어나,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이 가능한 곳이 미국이다. 캐나다 이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에서 특히 여성에게 중요한 부분은 남편과 대등한 관계이다. 굳이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까지 내세우지 않더라도, 순종적인 아내라는 고전적 미덕이 아닌, 남편과 친구 같은 관계, 파트너 같은 관계를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기대한다. 물론 이처럼 변화하는 의식에 여성운동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여성운동은 여성을 가족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 개인으로 내세우고자 했는데, 요약하자면 여성이 (그리고 남성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상대와 가족을 이루거나 해체할 수 있는 권리가 여성운동이 내세우는 가족의 새로운 규범이다. 그리고 이 규범을 틀로 하는 서사의 핵심 주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과 그 개인들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셨다는 그 여성분도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여성 단체에서 일하셨다정작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 것을 보면, 독립적 개인과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아직 이념일 뿐, 우리의 피는 여전히 전통과 끈끈히 얽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홀로 헤쳐 나가기에 세상은 너무 팍팍하며, 그러한 팍팍한 세상에서 그래도 의지가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야기가 여전히 운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유인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은 정말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이상 난 누군가의 자식이고, 그 사실을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우리의 유전자는 마치 낙인처럼 우리 존재의 중심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발가락이라도 닮아버리는 그 유전자 말이다. 그리고 이 유전자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가족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화목한 가정의 서사든, 아니면 그보다 더 현실적인 콩가루 집안의 서사든,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이 가족의 서사는 빠질 수가 없다. 


그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원초적인 가족 서사는 아마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일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의 자식인가 하는 소속은 아버지에 따라 정해지고, 양육은 어머니가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유교 사회의 가족 이야기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되어서, 아버지가 없는 집안, 어머니가 자식을 양육하지 않은 집안은, 문제 있는 집안이 되고, 역으로 모든 문제는 이것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 집안에 아버지가 없어서 혹은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유교 가족의 서사에서는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가족 서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가족이라며 혈육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킨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그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기독교 서사보다는 여전히 유교 서사가 더 강하다. (어느 영화 대사처럼)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는 아직도 우리에게 따라붙는 트라우마 같은 질문인 것이다. 물론 가끔, 나의 백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 든든하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허풍에 가까울 때가 많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금, 은, 동수저의 아버지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기 일쑤다. 


그래도 기독교의 가족 서사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지지난번 글에서도 썼지만, 기독교 서사에서 가족은 똘똘 뭉치기보다는 떠나고 흩어져야 하는 관계다.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고, 죽은 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맡기고 떠나야 한다. 가족을 뭉치는 관계가 아닌 떠나는 관계로 설정한 것은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가 공통으로 가지는 전통적 서사와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의 중요한,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 서사에서 떠남은 더 큰 자를 따르기 위한 떠남이고, 여성주의 서사에서 떠남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떠남이라는 것이다. 


이 후자의 서사는 떠나는 행위 자체에는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할 때 더 큰 반작용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가족이 굴레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저항의 서사는 큰 힘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누군가와의 애정 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벗어난 후에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 하는 단계에서 이 후자의 서사는 맥을 잃는다. 그래서 한국의 엄마들은 남편과의 투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아들과의 투쟁에서는 전통 서사의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깨끗이 치운 집에 더 강력한 적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처럼, 속박의 관계는 또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 가톨릭 여성 작가 중에 소노 아야코라고 하는, 남편을 몇 년 전에 먼저 보내고 지금은 90대의 호호 할머니가 되어 홀로 사는 이 노작가는, 부부가 진짜 가족이 되었다면, 상대를 위해서 그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좀 특이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은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부인을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즉 이혼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건 무슨 한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가족을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도 아니고, 자기 가족만 챙기는 이기주의적 관계도 아닌,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혼은 그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다. 서로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이도록 미워질 수도 있는 게 남녀의, 부부의 관계이기에, 격렬한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화로운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찐 가족은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며 보내줄 수 있는 관계라는 설정은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다 적용할 수 있다. (부모만 자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서사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가 가진 떠남의 서사 때문이다. 유전자의 속박과 법적 구속으로 맺어진 관계들을 떠나 더 큰 존재의 근원을 향해 길을 가는 우리의 관계는 그분의 ‘뜻’이라는 신비 안에서 이어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잘되고 또한 범사에 잘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드리며 지금의 인연들을 환영할 수 있다. 이 큰 서사 앞에서 가족에 대한 이러쿵저러쿵은 어쩐지 조금은 시시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기독교 서사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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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양혜원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 수료 후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세월 번역가로 일하면서 유진 피터슨, N. T. 라이트, 알리스터 맥스래스, C. S. 루이스, 헨리 나우웬, 미로슬라브 볼프, 일레인 스토키의 저서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하였고,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 교회 언니,여성을 말하다,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