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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책이 사라지는 시대
by 박혜영2023-08-14

지난 3월 말로 제가 지금까지 30년 동안 단골로 다니던 신학 전문 서점이 폐업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라비블’이라는 곳인데, 주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출판된 신학 및 경건 서적을 판매했으며, 주문 대행도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작은 사무실 정도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강남 사거리 그럴듯한 건물에서 판매 공간도 널찍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이사도 다니고 했지만, 판매 공간만큼은 그럭저럭 유지했는데, 2-3년 전부터 다시 작은 사무실로 규모를 축소했고, 그러다 이제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한 달에 평균 일십만 원만 잡아도 삼천육백만 원, 그중 지난 10년간은 한 달에 이십만 원 넘게 구매한 적도 부지기수니 그동안 그곳에서 책을 산 액수를 다 합하면 아마 오천만 원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게 애정을 쏟은 곳이라, 문을 닫는다는 공지를 보았을 때 아쉬움은 정말 컸습니다. 이제 기분 전환하러 어디로 가야 할지….


저는 계속 이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는 서점인지 잡화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변하더니, 이제는 서점 안에 유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매장에서 책을 찾아 검색하면, 직원에게 문의하라는 안내가 뜨며, 그렇게 문의하면 직원은 한참 지나 창고에서 책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래전에 자주 찾던 ‘아이브이피’ 서점도 그랬습니다. 선배를 통해 그곳을 알게 된 후로, 한때는 미국인 문서선교사가 직수입해 놓은 영어 경건 서적을 살펴보는 데만 오후를 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영국이나 미국 복음주의자의 책을 직접 대면했으며, 신학교 입학 후부터는 신학 서적도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영어 원서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날엔 서가에서 사라지고, 모퉁이에 몇 권 있다가, 또 얼마 후에는 그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국내 기독교 서적도 대폭 줄이더니, 이제는 책꽂이를 장식용처럼 세워 둔 카페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을 한 군데 잃은 저는 라비블에 집중했는데, 이젠 그곳마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직원보다 잘 알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의 영역이 축소되는 것 같아 서글프며, 앞으로 외출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멍할 뿐입니다. 잔가지를 열심히 입에 물고 만들던 둥지를 한전 직원들에게 갑자기 빼앗긴 까치들 심정이 이럴까요?


이렇게 계속 서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책의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비블이 문을 닫는 건 기독교 쇠퇴와도 연관되지만요.) 물론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라디오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그 증거로 들겠지요. 무엇이든 과거의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 책도 그렇기야 하겠지요. 그러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책이 위태롭게 된 정도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 자체가 위태롭지 않습니까? 거짓말이 지식을 대체하고 있으며, 지식을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젠 생각조차 필요 없는 그런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생성 인공지능’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생성해 내고, 대화도 생성해 낸다니…. 이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을 통해 생각이란 걸 하게 될까요?


어떤 분들은 이제야말로 질문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문해력이 더 필요해졌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인공지능에 맡겨 버리고, 그 대답에 의존하는 형편이라면, 과연 문해력을 키울 수나 있을까요? 생각의 도구인 책이 하찮아지고 있는데, 과연 문해력은 어디서 키워야 할까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 낙관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잘 쓰는 인간의 능력을 계속 신뢰하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생각 자체를 인공지능에게 외주로 주는데, 과연 인간의 능력에 대해 낙관만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어떤 통제도 없이 너무 빨리 개발되다 보니, 태슬라 사장과 몇몇 사람은 인공지능 연구를 6개월 동안만이라도 중지시키자고 제안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선도하는 자들도 이런 변화의 속도는 두려운가 봅니다. 


이런 시대가 한 사람의 취미만 끝장내는 거라면 별문제 아니지만, 생각이 사라지는 시대의 징표라면 인간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생각이 필요 없는 인간은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요? 이제 신학 책을 검색하고 사러 다니던 저의 시간은 강제 종료를 당했으니, 그 시간에 자리에 앉아 루이스의 인간 폐지나 읽고, 열심히 사둔 책이나 읽으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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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혜영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말씀을 듣고 그 길로 행하자’ 외치는, 안양시 관양동에 있는 산오름교회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