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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영적 게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by 최창국2023-07-28

그리스도인은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을 종교적 차원에만 제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경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하셨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팀 켈러, 일과 영성, 22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 의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성은 교회 공동체나 종교 기관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상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 덕분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적 게토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지기 쉽다. 영적 게토주의는 기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만을 통해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의 개념이 없으면 “스스로 문화적인 게토에 들어앉아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아야 하고, 크리스천 변호사에게만 일을 맡기고, 크리스천 상담가의 말만 듣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팀 켈러, 일과 영성, 23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만 종속되는 것도 아니다.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 또는 영적 장소와 세속적 장소로 구분하거나 범주화하는 데서 영적 경험의 장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잘못된 구분이나 왜곡된 범주화는 영적 경험을 교회나 종교기관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할 수 있다고 여기게 하였다. 일상의 영역인 정치 사회 교육의 영역에서는 영적 경험을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신념을 갖게 하였다. 신학적 관점에서 영적 경험은 분명히 특별은총의 영역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경험과 생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 차원, 윤리적 차원, 사회적 차원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만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여 일상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차원들을 영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길 때 영적 게토주의를 낳을 수 있다. 영적 게토주의는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의 장을 교회나 종교적 기관으로만 한정하거나 영적 또는 신령한 직분(spiritual estate)을 종교적 일이나 소명으로만 여길 때 심화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고린도전서의 ‘부르심’(고전 7:24)이란 단어를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해서 신령한 소명을 종교적 소명으로만 여긴 중세 교회를 비판하였다. 중세 교회는 신부와 수도사 또는 수녀만을 신령한 직분이라고 여겼다. 신령한 직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관점은 일상의 노동이나 직업은 영적인 일과는 무관하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신령한 직분이 아니라 천박하지만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교황, 주교, 주부,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정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은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지어낸 허구이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Martin Luther, Three Treatises, 12). 루터에게 직업이나 일을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은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도 교회나 종교적 기관이나 종교적 활동에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층 짜리 집에 비유했다. 아래층은 평범하게 지속되는 잘 정돈된 일상적인 삶을 가리키고, 위층은 기도하며 가꾸어 나가는 영적 삶을 가리킨다. 온전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적, 정서적 세계와 영적 세계 모두를 가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영적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전화하는 일에서 거룩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일기를 쓰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설거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들을 거룩한 삶 또는 영적인 삶과 일체화시킴이 없으면,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는 인간의 상황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타당성을 잃게 된다. 일상을 떠난 영적 추구는 거룩한 것을 이상화시키거나 고귀하게 만들려는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룩한 것에 대하여 순전하게 느낄 감수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적인 삶은 작은 일상의 활동 속에서 싹이 나고, 햇순이 돋고, 꽃이 피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은혜의 통로가 된다. 그것을 세속에 맡기는 것은 이원론에 굴복하고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실체를 인정하는 사람은 삶의 부차적인 것과 본질을 더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또한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삶에서 영적인 렌즈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넓게 충만하게 누리는 방법을 놓쳐서는 안 된다. 프란시스 휴댁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 생활이 건조해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기도나 교회생활 외에도 폭넓은 경험을 통해 역동적인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통 ‘쉼, 자연, 관계’ 같은 것을 통해 발견된다. … 기도가 갑자기 안 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 새로운 감격과 행복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Francis Houdek, Guided by the Spirit, 88-9).


하나님의 은혜는 기도를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고, 노동하고,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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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