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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돌아보니 여호와 이레
by 양혜원2023-06-08

얼마 전 아주아주 오랜만에 대학 동기 모임에 나갔다. 졸업하고 30여 년 동안 한 해에 한두 번은 모인다는 동기 모임에 내가 나간 횟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이번에는 코로나 기간에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던 재일교포 동기가 오랜만에 온다 해서 마련된 자리였는데, 일본에서 연구원 생활할 때 자주 교류했던 친구라 이참에 나도 한번 나가볼까 해서 참석했다. 


퇴근하고 조금 늦게 도착해보니 이미 식사들을 하고 있었고, 나는 살짝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동기들을 둘러보았다. 금방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달라진 동기도 있었고, 이십 대의 제스처가 반백의 머리와 어색하게 동거하는 동기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직장생활을 하는 남녀 동기들은 그들대로, 그리고 전업주부로 사는 동기는 그녀대로, 모두 졸업 후 한 가지의 일을 계속하면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었다. 그와 달리 나는 번역가이자 주부로 살다가 마흔이 넘어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한국에서 중년의 신진학자가 되어 비정규직부터 시작하고 있다. 언론인, 법조인, 금융인, 사업가, 공무원, 교수 등 안정된 지위와 일자리로 대변되는 그런 자리에서 예상 가능한 범주의 중년을 살아가는 동기들과 달리, 나의 중년은 청년들의 일자리처럼 불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뒤늦게 찾은 내 천직 덕분에 청년 시절 새로운 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던 그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변곡점이 많은 나의 인생을 돌아볼 때, 나는 아브라함이 떠오른다. 단 두 가지 때문이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었다는 것(창 12:1-4),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다는 것(창 22:1-19)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처럼 나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물론, 나는 한 종교의 시조가 될 족장의 대서사를 시작하는 4천여 년 전의 남성이 아니라 과학과 정보의 21세기를 사는 여성이기에, 목적지도 알았고, 할 일도 머물 곳도 정해져 있었다. 비행기표 발권에서부터 박사 과정 입학 수속에 기숙사 등록까지, 현대인의 생활 양식에 맞게 신비로울 것 하나 없이 정해진 수순대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마흔이 넘어서 내가 가진 것을 다 털어 넣고, 아브라함이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처럼 나 또한 가족을 다 두고 홀로 가서 시작한 공부로 무엇이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그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었고,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게 맞는다고, 중년을 맞이한 내 몸과 마음이 아우성치고 있었고,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신호라는 것.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때는 내 뱃속에서 죽어 태어난 내 아들을 화장하여 가루로 날려 보낸 지 5년이 되는 해였다.


아브라함은 나와 달리 자식을 죽이러 간 그 산에서 준비된 수양을 만나 아들을 살리고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지만, 나는 그가 자식을 죽일 뻔했던 그 아찔했던 기억을 평생 간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그가 통상적인 부모였다면 한 번씩 그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을 쓸었을 것 같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집에 있었는지 멀리서 뒤따랐는지 모르는 사라는 또 어땠을까. 내가 낳은 자식인데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벌어진 이 거래 아닌 거래에 아무런 발언권 없이 그냥 되어 가는 대로 바라보아야 했던 엄마의 심정이란 얼마나 참담했을까. 아니면, 그도 아브라함 못지않게 믿음이 굳셌는데 족장의 계보에 끼지 못하는 여자이기에 성경은 침묵하는 것일까. 혹, 사라가 그렇게 믿음이 굳셌다 해도 부모인 이상 사라도, 두 부자가 돌아올지 아니면 남편만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로 기다리던 그날의 착잡하고 애끓는 복잡한 심경이 한 번씩 떠오르면서 가슴을 쓸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와 달리 내게 준비된 수양은 아들을 구할 수 있는 수양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의 죽음은 내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는 믿으면 아들도 얻고 수양도 얻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직 내가 얻은 것이 수양인지 뭣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인생의 큰 상실 앞에서 얻은 어떤 추동에 따라 움직였는데, 돌이켜보니 이 또한 여호와 이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저릿저릿한 마음과 함께 느낄 뿐이다. 마음이 저릿저릿한 것은 지금 나의 삶은 아들을 잃고 나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씩 가슴을 쓸어내렸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나는 한 번씩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지난 10년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일이 참 신기하게 풀렸다. 술술 풀렸다는 게 아니라 정말 예측할 수 없게 신기하게 풀렸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는 바로 한국으로 오지 않고 연구를 더 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갔다. 일본어는 하나도 몰랐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연구소라서 지원해서 가게 되었고, 가서 일어를 배우면서 연구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6개월 예정으로 갔다가 2년까지 머물게 되었고, 한참 일어가 늘던 차라 기간을 연장하려 했지만 되지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지 불과 3개월 만에 코로나 전염병으로 모든 국경이 문을 닫았다. 일본에서 기간 연장이 안 되어 아쉬웠던 여분의 마음까지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때 돌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없던 자리가 만들어지면서 마침 귀국해 있던 내게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일자리도 이제 더는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아 여기저기 연구 지원을 하던 차에 얼마 전에 또 다른 연구소에서 좀 더 안정적인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제안해왔다. 나에게 수양은 분명한 형체로 단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이렇게 찔끔찔끔 주어지고 있지만, 이 또한 그 산에서 준비된 무엇인가가 있기에 때맞춰서 하나씩 내게 던져지는 게 아닐까. 


이처럼 찔끔찔끔 던져지는 수양을 내가 번제로 드리는 방법은 글쓰기이다. 아들을 잃고 나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아이 대신에 얻은 삶이기에 마치 사명을 안은 듯 글을 쓴다. 연구 논문으로, 책으로, 연재 글로, 그동안 쉼 없이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다. 이 글쓰기의 끝에 또 어떤 수양이 준비되어 있을지 나는 모르지만, 그 산에서 무엇인가는 준비되어 있을 것을 믿고 또 소망하며 오늘도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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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양혜원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 수료 후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세월 번역가로 일하면서 유진 피터슨, N. T. 라이트, 알리스터 맥스래스, C. S. 루이스, 헨리 나우웬, 미로슬라브 볼프, 일레인 스토키의 저서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하였고,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 교회 언니,여성을 말하다,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